소설리스트

28화 (29/62)

28.

놀란 하은이 옆을 돌아보자 큰아버지는 정면을 응시한 채 곧장 차를 몰았다.

“시험 기간이라 시간이 별로 없어요.”

겉으로 티를 내지 않으려 해도 하은의 목소리는 겁에 질려있었다.

“너는 어째 오랜만에 봤는데 제대로 인사하는 법도 몰라? 하여간 검은 머리 짐승은 거두는 게 아니라는 옛말 틀린 거 하나 없다더니.”

“지금, 어딜 가시는 거예요?”

낯선 도로로 접어들자 하은은 초조한 표정으로 주변을 살폈다.

“네가 언제부터 백씨 집안 사람이었다고 건방지게, 널 키워준 은혜도 모르고 큰어머니를 문전 박대했다면서?”

갑자기 잊고 있던 분노가 살아나는 듯 큰아버지가 하은을 쳐다보았다.

가끔 하은을 보았던 눈빛, 독기를 품은 눈에 경멸이 들어차 있었다.

“배은망덕도 유분수지, 감히 소송까지 벌일 생각을 해? 그러고도 네가 사람 새끼야?”

큰아버지의 막말이 더는 새로울 것도 없었다. 늘 귀에 익은 익숙한 말이었지만 큰 집에서 나온 지 1년이 지나고 보니 새삼 낯설게 들렸다.

하은이 미성년자였을 때 큰아버지가 편법으로 취득한 건물에 소송을 걸었다. 문제 될 것도 없이 재판은 최근 승소해 5층 건물이 하은의 명의로 바뀌었다.

그것 말고도 다른 여러 개의 재판이 진행 중에 있었다.

“원래 제 자리로 돌려놓으려는 거예요.”

하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큰아버지가 속도를 내며 도로를 질주했다.

방향 지시등도 켜지 않고 우회전을 하는 바람에 하은의 몸이 급격히 기울며 옆으로 쏠렸다.

순간 속이 울렁거리며 두통이 일었다.

“차, 세워주세요.”

하은의 말에도 큰아버지는 아무런 대꾸가 없었다.

하은이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자 큰아버지가 재빨리 하은에게서 휴대폰을 낚아채 뒷좌석으로 던졌다.

“잠자코 있어! 죽고 싶지 않으면.”

“제시간에 들어가지 않으면 큰아버지도 곤란해지실 거예요.”

무언의 협박처럼 하은이 말했지만 큰아버지는 콧방귀를 뀌며 묵살했다.

“어쩌다 너 같은 년이 한 회장 눈에 들어서는! 감히 주제도 모르고 설치길 설쳐? 제 부모 잡아먹은 재수 없는 년인 걸 버젓이 알면서도 그 집안에 널 들인 이유도 제대로 모르지? 그러니 기고만장이지.”

알 수 없는 말을 쏟아내며 큰아버지는 낯선 도로의 끄트머리에서 좁은 골목길로 차를 몰았다.

차가 들어간 골목은 오래된 주택들이 빽빽하게 들어차 골목 한쪽은 주차해 있는 차들로 복잡했다.

오르막길 끝에 차를 세우자 맞닿은 집의 대문이 열리고 큰어머니가 나왔다.

지난번 보았을 때보다 10년은 더 나이 들어 보여 하마터면 못 알아볼 뻔했다. 하지만 독기 품은 얼굴은 변하지 않고 그대로였다. 큰아버지 내외가 금슬이 좋은 부부는 아니지만 하은을 볼 때의 눈빛은 합이 맞았다.

독기를 품고 잔뜩 날 선 눈으로 보면서 경멸에 찬 표정까지, 변하지 않고 한결같았다.

차에서 내리지 않고 하은은 큰아버지가 뒷좌석에 던져 놓은 휴대폰을 곁눈질했다. 몇 번째 끊어졌다 이어지며 벨 소리가 울렸다.

하은이 내리지 않고 버티자 다가온 큰어머니가 문을 열고 하은을 끌어 내렸다.

“여기가 어딘데요?”

하은은 겁먹은 것을 숨기려 애써 담담하게 목소리를 냈다.

혹시라도 하은이 도망갈까 싶어 하은을 잡고 있는 큰어머니의 손에 힘이 가해졌다.

“네 년 덕분에 지난달 이사한 집이야. 거리로 나앉을 판에 이 집도 겨우 얻었지만.”

이웃의 눈에 띌까 눈치를 보며 큰어머니가 하은을 대문 안으로 밀었다.

곧장 큰아버지가 들어오며 문을 걸어 잠갔다.

하은은 오래되고 낡은 2층 주택을 올려다보았다. 군데군데 페인트칠이 벗겨진 주택은 흉물스럽게 보였다.

오래된 주택은 들어서자 습한 냄새를 뿜어냈다. 마룻바닥은 걸을 때마다 삐그덕 소리를 내며 음산한 기운을 더했다.

눈에 익은 익숙한 가구들이 들어찬 거실은 햇살이 전혀 들어오지 않아 어두컴컴했다.

“재수 없는 년이 집에 들어오는 바람에 집안이 풍비박산이 났어. 애초에 들이는 게 아니었는데.”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큰어머니는 어딘가 좀 이상했다. 마치 정신이 반쯤 나간 사람 같기도 했다.

현관문의 잠금장치까지 걸고 큰아버지가 들어섰다.

“중간에서 네 년이 무슨 수를 썼는지 회사에서도 잘렸어. 여기저기 소송이 들어와 정신이 하나도 없는 와중에 가지고 있던 건물도 뺏기고.”

조금 전까지 기세등등하던 큰아버지의 어깨가 아래로 처지며 하은의 눈치를 보았다.

“줄줄이 소송이 걸려있는 것도 다 빼앗길 판이고, 그나마 제때 들어오던 건물 월세도 막혀서 외국 나가 있는 애들 생활비도 벌써 몇 달째 못 주고 있어. 보다시피 네 큰어머니 몸도 안 좋은 상태고.”

당당하던 큰아버지의 눈빛이 급격히 흔들렸다.

너무도 변한 큰아버지와 큰어머니를 하은이 불안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큰아버지가 회사에서 잘렸다는 말은 하은도 처음 듣는 소리였다.

한 번도 궁금해하지 않았고 건하도 별다른 말이 없었다. 워낙 욕심이 많은 사람들이라 욕심껏 잘 사는 줄로만 알았다.

부모님이 남긴 재산을 중간에서 가로챈 것을 제외하고서라도 큰아버지는 집안 장손으로 받은 유산이 꽤 되는 걸로 알았다.

그래서 지금 상황이 하은으로서는 보고도 믿기지 않았다.

“남아있는 소송 건은 네가 취하해 줬으면 한다. 그래봤자 크게 돈 될 것도 없어 보이지만 우리한테 남은 거라곤 그것밖에 없으니.”

큰아버지가 말한 크게 돈 될 것 없어 보이는 집, 하은은 그 집에서 부모님과 함께 살았다.

많은 기억은 없지만 기억하고 있는 부모님의 모습이 전부 그 집에서의 일이 대부분이었다.

그래서 다른 어떤 것보다 하은에게는 지키고 싶은 집이었다.

밖은 어둠이 내리기 시작했다. 볕이 들지 않는 주택 내부는 금세 어둠이 찾아들었다.

불을 켜지 않은 습한 거실은 어리고 힘없는, 갑작스럽게 부모를 잃고 고아가 된 어린 소녀를 줄곧 공포에 떨게 했던 큰아버지 내외가 세상 다 잃은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다섯 살 어린 하은을 집에 혼자 남겨두고 큰아버지 내외는 자식들을 보기 위해 열흘간 미국에 다녀온 적이 있었다.

혼자 남겨진 하은은 밤도 낮도 무섭고 두려웠다. 밖으로 나가지 못하도록 자물쇠를 걸어두고 방에 갇힌 채로 그렇게 열흘을 꼬박 갇혀 지냈다. 햇볕도 잘 들지 않는 구석진 방, 큰어머니가 던져두고 간 빵은 유통 기한이 지나 곰팡이가 피기 시작했다.

지난 시간을 돌아보니 새삼 웃음이 난다.

지금 상황이 뭐가 그리 힘들다고 징징대는지, 그녀가 겪은 것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적어도 지금 두 사람은 힘 있는 어른이고 일을 찾아서 하면 굶어 죽을 일은 없을 텐데 말이다.

게다가 미국에 있는 사촌들은 이미 대학도 졸업해서 서른 안팎의 나이에 자립하고도 남을 시기였다. 그런데도 생활비를 보내니 마니 하는 상황이 이해되지도 않았다.

힘드니 도와달라는 뜻인데 하은으로서는 아무런 공감이 되지 않았다.

“설마 뺏긴 게 억울하다고 생각하시는 거예요? 처음부터 큰아버지 것도 아니었잖아요. 저를 거둬 키우셨다고 하시는데 다른 건 몰라도 양육비는 신탁 회사에서 충분히 받지 않으셨어요? 물론 양육이라고 할만한 것도 없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값을 치렀다고 생각해요. 더 욕심 내는 건 양심이 없는 거죠.”

하은의 매몰찬 말에 등을 보이고 있던 큰어머니가 돌아서며 하은을 노려보았다.

“나는 애초에 너같이 재수 없는 년을 집에 들이고 싶지도 않았어. 지 애미 애비 잡아먹은 년이 결국 우리까지 잡아먹으려고!”

험한 욕설을 내뱉는 큰어머니를 큰아버지가 급히 저지했다. 하지만 큰어머니의 눈빛은 이미 정상인이 아닌 것 같았다. 눈자위가 하얗게 드러나 금방이라도 하은에게 달려들듯이 했다.

“애미 년은 시집오자마자 사람을 무시하더니 지가 잘나면 얼마나 잘났다고. 친정에 돈푼깨나 있다고 기가 살아서는. 누가 딸 하나 있는 거 남기고 죽을 줄 알았겠어? 제 딸년은 그리 애지중지하더니 면전에 대고 딸년이 어떻게 사는지 얼마나 보여주고 싶었던지. 차라리 딸년도 데려갔으면 얼마나 좋았겠어? 이 꼴 저 꼴 안 보고 다 같이 편안했을 텐데. 딸년 살리겠다고 지 목숨 지켜줄 안전벨트까지 풀고 몸까지 바쳐서 지켰는데.”

큰어머니의 혼잣말이었는데 하은의 귀에는 또렷하게 들려왔다. 몸이 절로 떨리기 시작했다는 것은 미처 알지 못했다.

“지금……, 저 말이 무슨 말이에요? 우리 엄마가 뭘 어떻게 했다는 말이에요?”

밑바닥에 가라앉아 있던 의문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큰어머니와 하은의 사이에 서있던 큰아버지가 당황한 얼굴을 하고 다가오는 하은을 가로막았다.

“네 큰어머니 지금 제정신 아니다. 너는 모르겠지만 그간 일이 많아서 충격이 이만저만한 게 아니야. 그래서 정신도 오락가락하는 상태고. 그저 하는 말이니 새겨들을 것도 없어.”

큰아버지의 옆을 비켜나며 하은이 큰어머니와 정면으로 마주 섰다.

“엄마가 뭘 어쨌다는 말이에요?”

하은을 빤히 쳐다보는 큰어머니의 눈에 경멸과 증오가 얼룩지며 입가에 조소가 번득였다.

“내가 벌써 몇 번이나 말해줘야 알아들어? 네 엄마가 너 살리려고 제 목숨까지 걸고 벨트를 풀어서 널 지켰어. 그러지 않았다면 옆에서 오던 트럭이 널 정면으로 받아 그 자리에서 가루가 되었겠지. 애미 애비 잡아먹은 년이라는 말이 괜히 나왔겠어? 그날 사고도 전부 너 때문에 벌어진 일인데. 자고 일어난 네가 하도 칭얼대니까 무리하게 갓길에 차를 세우려다 사고가 난 거야. 블랙박스에 그날 영상이 생생하게 찍혀있어서 그걸 본 네 할머니는 그날로 너를 호적에서 지우자고 어찌나 성화던지.”

그 뒤로 큰어머니는 쉬지 않고 그날의 일들을 생생하게 말했다.

하지만 그 뒤의 말은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어쩌면 지금까지 하은은 자신이 기억하고 싶은 것들만 기억하고 살았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잊고 싶은 것은 자신에게 유리하게 기억에서 지워버리고 마음 편하게, 그렇게 지금까지 살아왔는지도 몰랐다.

어느 순간 그녀의 주변을 둘러싼 모든 것이 조용해지는 것 같았다.

큰어머니는 여전히 말을 멈추지 않고 있었지만 오디오가 꺼진 것처럼 아무런 소음도 들리지 않았다. 귀가 먹먹해지며 눈앞에 큰어머니가 느린 화면처럼 움직였다.

하은은 가만히 눈을 깜박였다. 그리고 어느 순간 십 년도 더 지난, 그날로 돌아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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