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곧이어 하얗게 질린 큰어머니가 차에 타고 있는 건하와 하은을 발견했다.
건하가 큰어머니를 향해 고개를 까딱하며 인사를 했다.
건하에게 가린 채로 하은이 제대로 보이지 않자 큰어머니가 자동차 손잡이를 당겼다. 하지만 잠금장치에 걸려 문은 열리지 않았다.
“하은이하고 볼일이 좀 있어서 잠깐 보러 왔어요.”
“무슨?”
짧은 건하의 말에 큰어머니는 당황한 얼굴을 했다. 차고 냉한 건하의 눈길을 받은 큰어머니의 몸이 움츠러들었다.
“뭐, 좀 할 말이 있어서요. 애 본 지도 한참 지났고 해서.”
“아.”
건하의 시선이 옆에 앉은 하은에게로 향했다, 그리고 다시 큰어머니를 향해 얼굴을 돌렸다.
“그럼, 안에서 뵙죠. 강훈아! 안으로 모셔.”
굳게 닫힌 철문이 열리고 두 사람이 탄 차가 안으로 부드럽게 들어섰다.
백미러로 정문에 우두커니 서있는 큰어머니의 모습이 보였다.
2층, 드레스룸에서 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하은은 계단을 내려오다 멈췄다.
열려있는 문틈 사이로 거실 소파에 앉아있는 큰어머니의 모습이 보였기 때문이다.
큰어머니를 마지막으로 본 것은 짐을 싸서 큰집을 나오던 날이었다.
그동안 서로 연락할 일도 없었고 무언의 약속이라도 한 듯이 서로 연락을 주고받지도 않았다.
통장으로 신탁 회사에서 생활비가 꼬박꼬박 입금되었고 아버지 명의의 건물에서 나오는 월세까지 합하면 꽤 거액의 돈이었다. 게다가 어머니 명의로 된 주식의 수익금과 돌아가신 외조부가 하은의 앞으로 남긴 재산까지 전부 신탁 회사가 관리하고 있었다.
그중 일부는 이미 큰아버지 앞으로 빼돌린 상태였다.
스무 살이 되기만을 기다렸는데 막상 성인이 되고 보니 왜 그렇게 이날을 기다렸나 싶을 만큼 아무런 감흥이 없었다.
다만 독이 잔뜩 오른 큰어머니의 모습을 오롯이 즐기자 마음먹었지만 그마저도 기대한 만큼 흥미가 생기지 않았다.
아마 이런 기분이 드는 것은 백건하 때문인지도 몰랐다.
한 번도 그런 눈으로 자신을 본 사람이 없어서, 예쁘다고 말해준 사람도 없었고 그 말을 할 때 백건하의 눈이 얼마나 따뜻했는지 이제는 알아버려서 사실 그 외의 것들은 시시했다.
큰아버지에게 뺏긴 건물을 되찾을 생각도 조금은 희미해졌다.
계단 끝에 내려서 복도를 지나 거실로 들어서자 큰어머니가 기다렸다는 듯 소파에서 일어났다.
“이 배은망덕한 년!”
옆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한 큰어머니가 다짜고짜 하은을 향해 표독스럽게 소리쳤다.
“감히 키워준 은혜도 모르고! 이런 도둑년 같으니라고! 어디서 못 배워 처먹은 짓을 하고도 그렇게 고개를 빳빳이 치켜들고!”
흥분한 큰어머니는 말을 두서없이 내뱉었다.
“앉으세요, 큰어머니. 오랜만에 시집간 딸 집에 다니러온 친정 어머니 입에서 나오는 말이 너무 거칠어서 좀 당황스럽네요.”
“재수 없는 년! 터진 입이라고 다 말인 줄 알아?”
재수 없는 년, 사악한 년, 애미 애비 잡아먹은 더러운 년.
하도 많이 들어 귀에 박힌 말이었지만 그렇다고 상처가 되지 않는 건 아니었다.
수도 없이 들은 말이지만 매번 칼날이 심장을 정확하게 겨냥하며 찔러댔다.
“왜 그렇게 흥분하셨는지 도통 모르겠어요. 혹시 제가 모르는 일이라도 있으세요?”
모르는 척 시치미를 떼는 하은을 큰어머니가 가증스럽다는 듯 흘겨보았다.
“도둑년이 도둑질하고도 너 같은 얼굴일까?”
“저는 지금 무슨 말씀을 하는지 하나도 못 알아듣겠어요.”
“이런 쳐죽일 년! 애미 애비 잡아먹은 년이 이제는 우리한테까지! 사악한 년!”
비아냥거리는 하은을 보다 못한 큰어머니가 빠른 걸음으로 하은의 앞으로 다가왔다.
“통장에서 돈 빼간 년이 너잖아! 네 년이 한 짓인 줄 모르는 줄 알아?”
물러서지 않고 하은은 큰어머니 면전에 얼굴을 가져다 댔다.
“버젓이 제 이름으로 된 제 통장인데, 큰어머니가 이러시는 이유를 모르겠어요.”
“하! 그래도 이년이!”
큰어머니가 손을 허공 위로 치켜드는 순간 하은은 눈을 질끈 감았다.
하지만 이내 눈을 뜨고 앞에 보이는 상황에 하은이 당황했다.
백건하가 큰어머니의 손목을 움켜쥔 채로 하은의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건하가 움켜쥔 큰어머니의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점잖으신 분께서.”
말을 또박또박, 위협하듯 발음하던 건하가 큰어머니를 가만히 응시했다.
등골이 서늘할 정도로 싸늘한 눈빛, 냉한 기운을 뿜어내며 건하가 큰어머니의 움켜쥔 손을 풀지 않았다.
“감히 내 집에서.”
큰어머니가 건하의 손을 뿌리치려고 했지만 그럴수록 힘을 주어 움켜쥐었다.
“겁대가리 없이 이러시면 곤란하죠.”
건하의 시선을 받은 큰어머니가 부들부들 떨자 그제야 건하가 잡은 손을 놓았다.
큰어머니의 손이 바닥으로 툭, 떨어지자 한꺼번에 힘이 빠진 큰어머니도 그대로 소파에 주저앉았다.
건하는 느긋한 몸짓으로 큰어머니의 맞은편에 앉았다.
“자, 그럼. 무슨 얘기인지 제 앞에서 말씀해 보시죠. 사돈어른.”
어머님이라든지 장모님이라는 호칭은 무시하고 건하는 큰어머니를 사돈어른이라고 칭했다.
큰어머니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리며 매서운 건하의 시선을 회피했다.
“그게……, 집안일이고, 하은이하고 개인적인 일이라…….”
건하가 긴 다리를 한쪽 다리에 겹치며 등을 소파에 기댔다.
“아, 그렇군요. 집안일이라. 그런데 아시겠지만 하은이하고 제가 이미 법적인 부부라 그 집안일에 제가 끼어도 문제가 없을 듯한데요? 그럼 이제 말씀해 보시죠, 뭐가 문제인지.”
건하의 말에 큰어머니의 입술이 가늘게 떨렸다.
건하가 눈빛으로 큰어머니를 재촉했다. 무슨 말이 나올지 궁금하다는 눈으로 건하는 큰어머니를 차갑게 응시했다.
“당사자 간에 해결할 일이라……, 아무래도 다음에 다시 오든지 해야겠군요.”
“뭐, 그러시든지.”
건하의 말투에는 상대방에 대한 예의라든지 존경심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말끝 하나라도 잘못하면 그대로 삼켜질 것처럼, 가라앉아 있는 듯 보이지만 언뜻 살의마저 느껴졌다.
큰어머니가 일어서자 건하도 일어섰다.
“가시죠, 집에 오신 손님은 친히 정성껏 배웅하는 것이 도리라고 배워서요.”
큰어머니가 다시 하은을 쳐다보았다. 앞을 막아서는 건하를 어떻게 좀 해보라는 표정이었지만 하은은 모르는 척 무시했다.
“다음에 오실 때는 미리 연락하고 오셨으면 합니다. 무턱대고 찾아오시면 오늘처럼 정문에서 통제당하실 겁니다.”
사돈으로 인정해주지 않는 건하의 말에 큰어머니는 빈정이 상한 얼굴을 했다.
쫓기듯이 거실을 나간 큰어머니가 건물 밖으로 나가는 모습을 하은이 지켜보았다.
밖에 차가 대기하고 있었고 큰어머니에게 인사를 건네며 뭐라고 말하는 건하의 모습도 한눈에 들어왔다.
밖에서는 안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하은은 여전히 굳은 채로 서있었다.
큰어머니가 탄 차가 떠나고 난 뒤에도 하은은 움직이지 않았다.
***
건하와 하은이 뉴욕에서 귀국한 날 한 회장도 일본 출장에서 돌아왔다.
그날 저녁 오랜만에 한 회장과 식사를 했다.
음식을 나르느라 주방은 분주했고 하은도 다른 날보다 일찍 다이닝룸으로 들어섰다.
“마침 올라가려던 참이었어요. 앉으세요, 곧 회장님도 오실 거예요.”
테이블 세팅을 하고 있던 윤 실장이 하은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병원에서 회장님 식단표를 따로 주셨는데 대부분이 야채 위주라, 그래도 입에 맞게 콩고기도 준비했어요. 혹시라도 안 맞으시면 내일 식사는 따로 준비해 드릴게요. 굳이 다른 사람까지도 회장님 식단에 맞출 필요는 없으니까요.”
식탁 위에 화병을 놓고 한 걸음 떨어진 거리에서 체크하던 윤 실장은 하은이 아무 대답이 없자 그제야 시선을 돌려 하은을 향했다.
“뭐, 필요하신 거라도 있으세요?”
하은이 윤 실장을 빤히 쳐다보자 뭐가 잘못된 것이 있나 싶어 윤 실장은 주변을 다시 꼼꼼히 살폈다.
“제 것까지 챙기시지 않아도 돼요, 특별히 가리는 음식 없이 잘 먹는 편이라서요.”
하은의 말에 그제야 윤 실장이 긴장을 풀었다.
“아, 네. 안 그래도 평소 식단에 맞춰 하은 씨 음식은 따로 준비하지는 않았어요.”
신경 쓰는 듯 보이면서도 묘하게 거슬리는 말이었다.
그때 입구에서 인기척을 느낀 하은과 윤 실장이 동시에 뒤를 돌아보았다.
언제부터였는지 한 회장이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었다.
“회장님 들어오시는 줄도 모르고, 식사 준비 다 되었습니다.”
낮게 헛기침을 하고 한 회장이 식탁의 상단에 앉았다.
마침 건하도 이제 막 다이닝룸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윤 실장아!”
한 회장의 부름에 주방으로 향하던 윤 실장이 돌아와 한 회장의 옆에 섰다.
“네, 회장님.”
“듣고 보니 호칭이 좀 그래서. 자네 우리 건하한테는 뭐라고 부르나?”
난데없는 호칭 문제에 윤 실장은 영문을 모른다는 표정을 했다.
“아 네, 회장님. 건하 도련님이라고 했고 요즘은 직책에 맞게 실장님이라고 합니다.”
윤 실장의 말에 한 회장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건하 고등학교 때부터 윤 실장이 우리 집에 있었으니, 내가 따로 말하지 않아도 윤 실장이 알아서 했지만 우리 집에 들어온 새 식구가 나이가 한참 어리지만 그래도 안주인이 아닌가? 자네 부르는 호칭이 안주인한테 적절치 않아서 그러네.”
순간 윤 실장이 얼굴부터 목까지 빨개졌다. 당황해하며 한 회장 앞에 고개를 숙였다.
“네, 회장님. 바로 고치겠습니다.”
그러고는 바로 하은을 향했다.
“죄송합니다, 사모님.”
오히려 인사를 받는 하은이 곤란한 표정을 했다. 더군다나 사모님이라는 호칭은 지금 하은이 더 거슬리게 들렸다.
주방에서 내온 따끈한 국이 한 회장 앞에, 그리고 차례로 건하와 하은의 앞에 놓였다.
식탁 위에 있는 반찬을 보며 한 회장이 혀를 끌끌 찼다.
“어째, 먹을 게 죄다 풀이야? 쯧쯧.”
“그러게 평소 관리 좀 하시라니까.”
건하의 말에 한 회장이 눈을 치켜떴다.
“먹는 족족 네 놈처럼 운동으로 소비할 거면 무슨 낙으로 살아?”
“내가 할머니 나이 됐을 때 적어도 병원에서 식단표 받을 일은 없을 테니까.”
즉각 뭐라고 할 것 같던 한 회장이 침묵으로 응대하자 하은이 한 회장을 쳐다보았다.
굳은 표정으로 수저를 들고 있던 한 회장이 식탁 위에 내려놓고는 입맛이 없다는 얼굴로 물을 한 모금 삼켰다.
“할미 나이까지 마르고 닳도록 건강이나 잘 지켜. 운동을 하든 뭘 하든 간에.”
갑자기 어색해진 공기의 흐름에 하은은 건하와 한 회장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두 사람 다 묵묵히 식사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며 하은도 수저를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