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화 (22/62)

21.

몇 걸음 앞서던 건하도 멈추고 느리게 뒤를 돌았다.

“돌아가면, 다시 갇히게 되는 거야? 여기에서처럼?”

하은의 불안한 눈동자가 흔들렸다.

몇 걸음 떨어진 건하가 가만히 서서 하은을 보다가 얼마쯤 텀을 두고 다가왔다.

“뭘 하고 싶은데?”

경계하는 듯한 하은의 눈초리가 건하를 올려다보았다.

“뭘 어떻게 하려는 건 없어. 집에서 할 일 없이 뒹굴대다 갑자기 생각나서 집 앞에 슬리퍼 끌고 나가 편의점에 갈 수 있는, 허락받지 않아도 되는 자유로움. 지금은 그게 다야. 알겠지만 내가 갈 곳은 없어.”

건하의 한숨이 하은의 머리 위에서 느껴졌다.

“그건 내가 해줄 수 있어.”

별것 아니라는 말투에 하은이 피식 웃었다.

“또 뭐 해줄 수 있는데?”

“들어보고.”

건하의 말끝에 하은이 건하를 지나 앞을 걸었다. 곧이어 건하가 그녀의 옆으로 다가왔다.

고민하고 있는 듯 하은은 말이 없었다.

오후의 파크는 한산했다. 피크닉 나온 사람들이 드문드문 보였지만 햇살이 구름에 가려 어둑했다. 하은의 시선이 멀리 파크의 어딘가를 향했다.

두 사람의 앞에 있는 커다란 나무를 지나 잔디 위를 지나고 거대한 나무가 빽빽하게 들어선 숲을 응시했다.

“세상이 공평하지 않은 거 나도 알아. 나쁜 짓 하고도, 도둑질하고도 자기가 무슨 짓을 했는지도 모르고 마음 편하게 사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끝까지 행복한 거는 너무 말이 안 되잖아.”

빛이 들지 않았던 방에 갇혀 악몽과도 같았던 시간을 보낸 날들이 떠올랐다.

부모님을 잃고 충격이 가시지 않은 그녀에게 모진 말을 퍼붓던 큰어머니의 얼굴이 악마 같다는 생각을 종종 했다. 간혹 정말 꿈에서 악마의 형상을 한 큰어머니가 나타나고는 했다.

이유를 모르고 맞아야 했고 징그러운 벌레를 보는 시선이 어떤 날은 정말 자신이 더러운 벌레처럼도 느껴졌다. 불행은 계속돼도 절대로 끝이 없을 것 같았다.

“그 정도는 이제 너도 할 수 있어.”

그의 말이 선뜻 이해가 가지 않아 하은이 그를 올려다보았다. 언제부터였는지 건하는 이미 그녀를 보고 있었다.

“너는 이제 서일그룹 안주인이야, 나 백건하 아내고.”

백건하 앞에서 하은은 자신의 뇌가 투명해지는 것 같았다. 마치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고 다음에 어떤 말을 꺼낼지 다 아는 것처럼 미리 준비한 말을 늘어놓는 것 같았다.

그녀가 원하는 게 정확하게 뭔지 아는 것 같은 말투, 눈빛.

몸을 나눈다는 것은 그 안에 들어있는 영혼조차 나눠 가지는 것일까?

하은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내 자신의 어리숙함에 속으로 조소를 머금었다.

“지금 갑자기 생각난 건데.”

하은이 무슨 말을 할지 건하의 시선에 얼마쯤 기대가 느껴졌다.

“숨바꼭질해 봤어?”

무슨 영문인지 몰라 하는 건하를 향해 하은이 장난스럽게 웃었다.

“하루쯤 저 사람들 없이 시간을 보내는 것도 꽤 재미있을 것 같은데, 보디가드 없다고 쫄아드는 거 아니지?”

건하가 힐끗 먼발치에 서서 하은과 건하에게 집중하고 있는 경호원들을 보았다.

사사건건 한 회장에게 보고를 하는 강훈은 지금 호텔에 있었고, 지금 그의 곁을 지키는 경호원은 한국에서 건하가 직접 고용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니 어떤 일도 한 회장에게 보고가 올라가는 일은 없었다. 건하의 표정 없는 얼굴이 다시 하은을 향했다.

“달리기 잘해?”

건하를 보며 말하는 하은의 눈빛이 빛나고 있었다. 지금까지 보았던 건조하고 수면 아래로 가라앉아 있는 눈이 아니었다.

건하는 무의식중에 고개를 끄덕였다.

순간 하은이 건하의 손을 잡고 이끌며 앞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얼떨결에 건하도 하은의 옆에서 뛰었다.

공원 숲을 나와 번화한 거리로 접어들자 수많은 인파 속으로 두 사람이 섞였다.

바람에 날리는 머리카락과 한 번도 본 적 없는 투명한 하은의 미소, 그녀의 옆에서 뛰고 있는 건하도 자신이 웃고 있다는 것을 알아채지 못했다.

***

거리 한복판, 광장을 둘러싼 인파 속에서 하은은 계단에 아무렇게나 걸터앉아 있었다.

음악 소리가 유난히 컸고 광장 가운데는 보드를 타거나 음악에 맞춰 춤을 추는 사람들의 모습이 자유로웠다.

리듬에 맞춰 하은도 어깨를 가볍게 움직였다. 광장을 지나 건너편 도로를 건너 아이스크림 가게 앞에 줄을 선 행렬 속에 백건하의 모습도 보였다.

주로 청바지에 스웨터나 티셔츠를 입고 있는 사람들과 달리 백건하는 완벽한 슈트 차림이었다.

그렇다고 어색하거나 튀어 보이지 않았다. 그는 언제 어디서든 당당했고 제멋대로였으며 지금도 거구의 미국인들에 섞여있어도 위축되거나 왜소해 보이지도 않았다.

어쩌면 그는 태어날 때부터 자신만만한 얼굴을 하고 나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며 하은은 웃었다. 입고 있는 옷처럼 몸에 꼭 들어맞는 것 같은 자신감이 백건하에게는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계산을 마친 그가 양손에 아이스크림을 쥐고 길을 건너는 모습이 빽빽하게 들어선 빌딩들과 조화를 이루며 잡지를 넘기면 보이는 흔한 사진의 한 페이지 같았다.

‘너는 이제 서일그룹 안주인이고, 나 백건하 아내야.’

하은은 건하의 말을 다시 떠올리며 느리게 눈을 깜박였다.

백건하가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모습이 느리게 움직이는 정지된 화면 같았다. 세상의 가장 낮고 어둡고 습한 곳에 있는 그녀를 향해 그가 손을 내미는 것 같았다. 그러고는 있는 힘을 다해 힘겹게 그녀를 끌어 올렸다.

등 뒤로 해가 지고 있었고 꺼져가는 햇살 한 줌을 등에 지고 건하가 그녀에게 아이스크림을 내밀었다.

“유치원생 견학시키는 기분이 이런 거겠지?”

툴툴대는 그에게서 하은이 아이스크림을 받아들었다.

이유를 알 수 없게 목까지 복받쳐 오르는 설움을 밀어 넣기 위해 하은은 아이스크림을 한 입 삼켰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묽게 번진 눈가의 물기가 마르기를 기다렸다.

“숨바꼭질, 원래 이렇게 재미없는 거였어? 벌칙이 아이스크림 사 오기야?”

크게 한입 베어 물며 건하가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하은이 대답이 없자 재미없다는 얼굴로 건하가 하은의 옆에 걸터앉았다.

하은은 여전히 고개를 돌리고 다른 곳을 보고 있었다.

녹아 흘러내리는 아이스크림을 건하가 한입에 먹어치웠다. 그러고는 하은의 손을 잡아 당겨 흘러내리는 아이스크림을 혀로 핥았다.

“뭐 해? 더럽게!”

하은의 타박에도 건하가 씩, 웃으며 남은 아이스크림을 그녀 앞으로 내밀었다.

“더럽기는? 할 것 못 할 것 다 한 사이에.”

거침없는 건하의 말에 하은이 얼굴을 붉히며 그를 매섭게 쏘아보았다.

“뭘 그렇게 죽일 듯이 꼬나봐? 틀린 말도 아닌데.”

더럽다고 말하면서도 하은은 아이스크림의 남은 부분을 베어 물었다.

하지만 곧장 하은의 입가로 건하의 입술이 부딪치듯 다가와 가볍게 베어 물었다.

하은이 기겁을 하며 몸을 뒤로 뺐다.

“뭐 하는 짓이야?”

“입가에 묻힌 거, 나 먹으라고 한 건 줄 알았지.”

온갖 추한 짓은 혼자 다 하고 있었다. 하은은 건하를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았다.

“왜 이렇게 사람이 느물거려? 원래 이런 캐릭터 아니잖아.”

낯설다는 듯, 하은이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나를 다 아는 것 같은 말투네?”

“꼭 다 알 필요 있어?”

어차피 오래 볼 사이도 아닌데.

하은은 그 말을 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왜 그런지 그 말을 하면 눈앞의 백건하보다 자신이 더 서글퍼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상대에게 어떤 기대를 하지 않는 것이 상처를 덜 받는다는 것을 하은은 이미 잘 알고 있었다.

거리에 하나둘 별이 켜졌다. 밝음이 사라진 도시는 낮보다 더 화려하게 불을 밝혔다.

멀리 하늘 끝에서 붉게 노을이 졌고 불 켜진 빽빽하게 늘어선 빌딩은 세상의 온갖 화려한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아쉽지만 게임 오버야. 술래가 우릴 찾아냈거든.”

건하의 말에 시선을 돌리니 광장 쪽에서 한 무리의 사내들이 흩어지며 하은과 건하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

호텔 레스토랑에서 저녁을 먹으면서 와인을 곁들였지만 하은은 한 모금도 입에 대지 않았다.

어제의 실수를 반복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그리고 내일 뉴욕을 떠난다는 사실에 식욕은 이미 멀찌감치 달아났다.

와인을 마시던 건하의 시선이 그녀를 향했다. 시선을 떼지 않은 채로 와인을 삼킨 건하가 잔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왜 그렇게 안 먹어? 아니 못 먹는 건가?”

무심한 말이었지만 식사하는 내내 건하는 하은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하은이 대답이 없자 건하는 포크를 접시 위에 내려놓고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그렇게 신경 쓰여?”

하릴없이 시선을 창밖에 두고 있던 하은이 건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건하는 느릿한 동작으로 냅킨을 들어 입가를 누르듯 닦아냈다.

“계속 도망치면서 살 수는 없는 거야. 그게 뭐든 결국 언젠가는 맞닥뜨려야 하는 순간이 올 테니까.”

건하의 말에 하은이 씁쓸한 미소를 머금었다.

분명 그녀에게 하는 말일 텐데 백건하 자신에게 하는 말처럼 들렸다.

하기는 백건하에게 그런 일이 있을 리가 없었다. 뭐 하나 부족한 것 없이 다 가진 그가 도망치고 싶은 일이 뭐가 있을까 싶었다.

“무슨 생각을 하든 그쪽 자유야. 마음대로 생각해. 하지만 그 사람 입장이 되어보지 않고는 함부로 말하지 마. 어찌 되었든 나한테는 그 집이 감옥처럼 느껴지니까.”

타인의 감정에 한 번도 신경 써본 일이 없던 건하는 하은의 말을 잠시 곱씹어 생각했다.

할머니와 건하의 집, 건하가 태어나서 자란 집.

그 집이 누군가에게는 감옥일 수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건하의 주변에는 늘 가드가 지키고 있었다. 숨을 쉬는 것처럼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서 특별히 불편함을 모르고 살았다.

다만, 그의 일거수일투족이 주기적으로 할머니에게 보고가 올라간다는 것을 알고 난 뒤로는 거슬리기는 했다.

“잘 먹어둬, 도망치는 데도 체력이 필요하니까.”

차갑게 말을 했지만 하은을 보는 건하의 눈은 빨갛게 달아올라 활활 타오르는 화염불 같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