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그가 집요하게 하은의 젖가슴을 물고 빨았다. 온몸이 그에게 빨려 들어가는 감각에 하은은 정신이 반쯤 나가 있었다.
단단하고 넓은 어깨를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하윽.”
느리게 움직이던 그가 상체를 들어 하은을 내려다보았다. 훅 숨을 들이켜며 허리를 움직여 안을 치대자 하은이 흐느낌과 같은 한숨을 내쉬었다.
축 처지는 그녀의 몸을 받치고 건하가 천천히 페니스를 밀어 넣었다. 끝도 없이 움찔거리며 조여대는 속살이 그를 미치게 만들었다.
지친 그녀의 몸이 그를 따라 쏠려왔다. 울 것 같은 표정의 하은이 그를 응시했다.
“곧 끝나.”
배려하는 건하의 눈빛이 느껴졌을까? 하은이 그와 눈을 맞추고 약하게 호흡을 뱉어냈다.
동시에 건하가 허리를 강하게 튕겼다.
“하윽.”
질구 깊숙이 들어간 페니스가 뿌리까지 맞물리자 강한 쾌감이 건하의 전신을 강타했다. 좀처럼 통제되지 않은 강한 욕구가 그를 폭주하게 만들었다. 건하는 땀에 젖은 하은의 이마에 입술을 가져다 대고 한 번 더 깊이 파고들었다.
***
갑자기 밀려드는 한기에 건하는 몸을 웅크렸다.
숲이 움직이는 것처럼 강한 바람이 불었다. 사방이 막혀있었다.
꿈에서조차 벗어날 수 없는 암흑 천지, 어디를 봐도 출구가 보이지 않았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맨발이었다. 바닥은 울퉁불퉁한데 걸으면서도 고통은 느껴지지 않았다.
꿈이라는 것을 아는데 암흑은 늘 그에게 공포를 유발했다. 죽음의 늪이 서서히 그를 덮치며 증발하는 것처럼 몸이 녹아내리는 것을 지켜보는 것, 공포는 그런 것이었다.
자신의 눈으로 죽음을 지켜보는 것, 언제 어떻게 죽음을 맞이하는지 알 수 없게 서서히 목을 조여오는 것.
주위는 너무 고요해서 건하가 내쉬는 숨소리가 소음처럼 들렸다.
아무도 막아주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죽음의 강한 기운이 그의 전부를 빨아당기는 것 같았다. 건하는 아무런 저항 없이 몸이 녹아 없어지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하지만 순간 어딘가에서 미세한 바람 소리가 들려왔다. 숲을 가르며 거친 바람 사이로 다가오는 발걸음.
손톱만큼 작은 불빛이 멀리서 반짝이는가 싶더니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원래 건하의 꿈속은 누구도 존재하지 않는다. 바람과 숲, 기껏해야 어딘가에서 지켜보고 있는 것 같은 사나운 맹수의 눈빛을 하고 언제든 건하를 앗아갈 준비를 하고 있는 죽음의 신령.
아버지와 조부가 그랬듯이 건하도 때가 되면 죽음 앞에 굴복할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러니 지금 숲을 가르고 그에게 다가오는 것은 분명 죽음이 가까워졌다는 의미였다.
이를 악물고 공포에서 벗어나기 위해 버티고 섰다. 얼마간 눈을 감고 있던 건하는 몸이 가벼워지는 것을 느꼈다. 땅에 붙어 움직일 것 같지 않았던 몸뚱이가 허공으로 떠오르는 것 같은 기분에 감은 눈을 떴다.
더 이상 몸이 차갑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손바닥을 내밀자 검고 습하던 그의 손이 투명한 빛에 둘러싸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 도무지 믿기지 않아 건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다시 숲이었다. 빽빽한 나무에 둘러싸인 숲, 하지만 검은 숲이 아닌 나무에 초록의 색이 입혀지고 그의 앞으로 길이 보였다. 그의 몸을 감싸고 있던 불빛들이 어지럽게 흩어지며 그의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하지만 너무 흐릿해서 뚜렷한 윤곽을 볼 수 없었다. 한 발 내밀어 다가가려 했지만 몸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건하는 앞을 자세히 보기 위해 눈을 비볐다.
그 순간 다시 빛이 흩어지며 그의 머리 위에서 빙빙 돌더니 조금씩 멀어져갔다.
잡기 위해 건하가 손을 뻗으며 소리쳤다.
가지 마…….
안 돼…….
흐느끼다가 건하가 눈을 떴다.
어두운 침실, 닫힌 창밖에서 들리는 희미한 경적 소리에 건하가 느리게 고개를 돌렸다.
앞을 가로막고 있는 것은 잠든 하은의 얼굴이었다.
몸을 웅크리며 얼굴의 반을 베개에 파묻은 채로 잠든 모습을 보며 건하는 조금씩 악몽에서 벗어나고 있었다.
눈을 덮은 긴 속눈썹이 어둠에서 더 선명했다. 곧게 뻗은 콧날 아래로 도톰하고 작은 입술을 따라 올라가 찡그린 이마로 향했다. 구겨진 이마를 펴고 싶어 손을 올리려다 허공에서 멈췄다. 하은을 깨우고 싶지 않았다.
건하는 조심스럽게 이불을 끌어다 하은의 벗은 어깨를 가렸다.
그러고는 숨죽여 잠든 하은을 들여다보았다.
간혹 훔쳐본 적은 있지만 지금처럼 이렇게 가까이서 잠든 모습을 보기는 처음이었다.
‘사는 게 재밌니?’
공허한 눈빛으로 묻는 하은이 문득 자신 같다고 건하는 생각했다.
사는 건 버티는 거라고 꽤나 자신 있게 말을 했지만 사실 그는 죽음으로부터 도망치고 있었다. 지금까지 그도 몰랐던 사실을 그 순간에 깨달았다.
편안하고 안정된 기분, 지금 이 순간에 왜 그런 마음이 드는지 몰랐다.
하지만 다른 것은 몰라도 한 가지 분명한 건 이제 건하에게도 지켜야 할 것이 생겼다는 것이다.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뜨거움이 그의 심장을 지나 목을 타고 넘어왔다.
건하는 천천히 잠든 하은을 당겨 품에 안았다.
꿈에서 그를 감싸고 흔들던 것과 지금 그의 품에 들어와 그의 전부를 흔드는 존재.
두 개가 하나로 모이며 그의 안을 깊숙이 파고들었다.
***
잠에서 깼을 때 하은은 혼자였다.
한 번도 깨지 않고 죽은 듯이 잠을 잤던 것 같다. 웅크린 몸을 바로 세우자 다리 사이에 뻐근한 통증이 느껴졌다.
단단하고 건장한 몸을 끌어안던 자신이 떠올랐다. 지금도 가랑이 사이를 파고들어 백건하에게 빨리는 생생한 느낌에 하은의 몸이 가볍게 떨렸다.
남자를 제 손으로 끌어들여 여자로서의 첫 경험을 고스란히 가져다 바쳤다. 그게 하필 백건하였다.
어떻게든 될 대로 돼라, 그런 심정이었다.
마지막 퇴로를 차단당한 기분, 서류상이라고 해도 백건하와의 혼인 신고는 그녀가 잡고 있던 마지막 끈마저 놓게 했다.
급하게 마신 와인에 잠시 취해 있었지만 백건하가 침실 문을 두드리던 그 순간에는 정신이 말짱했다.
백건하에게 통째로 삼켜지던 순간이 싫지 않았다. 오히려 즐기고 있었던 자신을 떠올리며 하은은 몸을 돌려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하필, 백건하에게 자신의 바닥까지 보여준 것 같아 모멸감이 들었다.
삽입의 고통이 줄어들고 난 뒤, 백건하에게 매달려 몸부림쳤던 순간들이 생생했다.
깊숙이 안을 파고들며 뜨겁게 채우던 백건하의 굵고 단단한 몸, 아랫배까지 밀고 들어와 빠져나가던 선뜩한 감각이 떠올라 아랫배가 단단하게 뭉치며 현기증이 일었다.
침대 위에서 격렬했던 정사는 또렷한데 그에게 안겨 들어간 욕실에서의 기억은 흐릿했다.
아마 반쯤 정신이 나가 있었던 것 같았다.
밖에서 들려오는 노크 소리에 하은은 이불을 끌어다 머리까지 덮어썼다.
지금은 도저히 백건하를 볼 용기가 없었다.
몇 번 울리던 노크 소리가 멈추고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한참 동안 숨죽이고 있던 하은은 이불을 들추고 고개를 내밀었다. 침대 옆에 세워둔 시계는 11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
하은이 전날 경호원들을 따돌리고 나간 탓에 앞을 지키고 있던 강훈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덕분에 출국 전까지 하은은 호텔 밖으로 나갈 수 없다는 말을 들어야 했다.
하은은 늦은 아침과 점심을 한꺼번에 해결하고 밖이 보이는 창가 소파에 앉았다.
느긋하게 거품 목욕을 하고 하릴없이 거실과 침실을 오가며 시간을 보냈지만 시계는 여전히 오후 3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이렇게 갇혀있다가는 숨이 막혀 죽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아무렇게나 던져두었던 휴대폰 벨이 울렸다.
그치지 않고 끈질기게 울리는 휴대폰을 집어 들자 화면에 백건하의 이름이 떴다.
통화 버튼을 누르자 전화기에서 소음이 한꺼번에 들렸다. 그리고 곧 백건하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계속 바빠서 전화하기 곤란했어.>
하은은 대답 없이 건하의 말을 듣고만 있었다. 그의 말에 적당한 대답을 찾기 곤란한 이유도 있었다.
<강훈이한테 말해 둘 테니까 준비해서 나와.>
다른 건 몰라도 지금 백건하의 말은 거절하기 곤란한 말이었다.
<왜 대답이 없어? 나오기 싫다는 말이야?>
“아니!”
혹시라도 건하가 전화를 끊을까 봐 하은이 빠르게 대답했다.
백건하가 비웃거나 하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언제? 지금?”
건하가 뭐라고 대답했는데 옆의 소음 때문에 잘 들리지 않았다. 곧이어 다급한 발소리가 이어지고 이내 소음이 멀어졌다.
<차 보냈어, 곧 도착할 거야.>
“뭐 할 건데?”
하은의 물음에 휴대폰 너머 건하가 잠깐 침묵했다.
<하고 싶은 거 있음 생각해 놔.>
퉁명한 건하의 음성이 다정하게 들리는 것은 착각일 거라고 생각했다.
전화를 끊고 잠시 멍한 상태로 있던 하은은 소파에서 재빨리 일어났다.
한국에서 가지고 온 옷이 몇 개 되지 않아 고를 것도 없었지만 하은은 다급히 옷장 문을 열었다.
***
달리던 차가 비상등을 켜고 멈췄다.
목적지가 어디인지 알지 못한 하은은 경호원이 조수석에서 내려 문을 열어줄 때까지 차에 그대로 앉아있었다.
도로 한가운데 내려선 하은은 앞의 표지판을 보고 나서야 지금 이곳이 센트럴파크라는 것을 알았다.
곧이어 그녀의 앞에 차가 멈추고 백건하가 내렸다.
주름 하나 없이 각이 잡힌 슈트를 입은 건하의 시선이 망설임 없이 하은을 향했다.
눈이 마주치자 당황한 하은이 급히 시선을 내렸다. 슈트가 완벽하게 그의 몸을 가리고 있었지만 무슨 이유인지 하은은 전날의 발가벗었던 백건하의 나신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고개 숙인 하은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좀 걷고 싶어 할 것 같아서.”
하은의 옆에 나란히 선 건하가 하은을 힐끗 내려다보았다.
“어디가 안 좋아?”
건하의 날카로운 눈이 하은을 꼼꼼하게 훑었다.
“아프면 들어가서 쉬고.”
“안 아파.”
속을 꿰뚫을 듯 쳐다보는 건하의 시선에 속의 생각을 들킬까 봐 하은은 고개를 떨구었다.
“뉴욕 일정은 다 끝냈어. 내일 밤에 출국해.”
건하의 말에 하은이 걸음을 멈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