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화 (19/62)

18.

처음부터 하은에게는 말하지 않을 계획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당사자인 그녀 몰래 그런 일을 저지를 수가 있을까 싶었다.

말만 법적인 부모이지 큰아버지나 큰어머니가 한 번도 그녀의 부모였던 적은 없었다.

하은의 안에 있는 나쁜 기운이 전염병처럼 번질까 싶어 큰아버지도 큰어머니도 그녀와 마주치는 것을 기피했다. 부모님이 남겨주신 재산을 하나라도 더 빼앗고 싶은 욕심에 지금까지 그녀를 옆에 두었을 뿐이었다. 전부 알고 있는 일이었는데도 생각할수록 치가 떨렸다.

어떻게 한 사람의 인생을 마음대로 휘두를 생각을 했을까?

한꺼번에 부모를 잃은 아이의 상처를 감싸주기는커녕 곪아 파인 상처에 소금을 뿌리고 짓이겨 회복할 수 없게 만들었다.

분노로 얼룩진 하은의 눈이 백건하를 향했다.

법적인 부부, 서류상 그녀의 남편 백건하.

우습다.

부모님의 사고로 혼자 남겨진 그녀가 다른 사람들보다 좀 더 일찍 철이 들었을 뿐이었다.

큰아버지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성인이 될 날만을 손꼽아 기다렸는데, 그리고 성인이 된 지금 긴 기다림의 끝에 겨우 큰아버지에게서 벗어났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 남자, 백건하가 이제 그녀의 남편이라고 한다.

하은은 도무지 현실 같지 않은데 당사자인 백건하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을 한다.

몸에서 기운이 한꺼번에 빠지며 축 늘어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하은은 입에 대지 않고 있던 와인 잔을 들고 한꺼번에 입에 털어 넣었다. 쌉싸름하고 달큰한 와인이 목으로 넘어가며 미세한 열기를 남겼다.

끝이 보이지 않는 터널에 갇힌 기분이었다.

차에서 내리는데 하은의 다리가 휘청거렸다. 따라 내리던 백건하가 잡아주지 않았다면 바닥에 주저앉을 뻔했다. 몸을 바로 세우고 걷는데 옆에서 백건하가 여전히 그녀의 어깨를 끌어안은 자세를 했다. 백건하의 손을 거칠게 밀어내고 하은은 호텔 회전문을 향해 걸었다. 뒤에서 백건하가 어이없다는 듯 잠깐 멈춰 섰다. 하지만 이내 다리가 꼬이는 하은의 뒤에 바싹 붙어 만일의 일에 대비했다.

하은이 회전문을 통과하는가 싶더니 회전문 밖으로 나오지 않고 그대로 빙글빙글 돌았다.

늦은 밤이라 오가는 사람들이 많지 않아 빈 회전문 안에서 그녀 혼자 반복적으로 돌고 있었다.

건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하은이 취할 정도로 술을 마신 게 오늘이 처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너무 빨리 마시는 그녀를 그가 말린 것이 원인이었다. 건하의 말과 반대로 하기로 작정한 사람처럼 청개구리처럼 행동했다. 술을 그만 마시라는 것도 아니고 천천히 마시라는 건하의 한마디에 독주하기 시작했다. 나중에는 한 병 더 시킨 와인을 잔에 따르지도 않고 병을 통째로 들고 마셨다.

여전히 회전문을 따라 돌고 있는 하은에게 건하가 귀찮은 표정으로 나오라고 손짓을 했다.

하은이 가운뎃손가락을 세우고 욕을 하며 건하를 향해 비웃었다.

호텔 로비 안에 있던 직원이 다가오자 건하가 손바닥으로 저지를 했다. 건하를 따르던 수행원이 재빨리 옆문을 열고 들어가 호텔 직원에게 양해를 구하는 것을 지켜보며 건하는 하은을 한심하게 쳐다보았다.

가만히 지켜보던 건하는 회전문 안에서 하은이 가볍게 휘청대자 지켜보고 있다가 재빨리 회전문 안으로 들어갔다. 건하가 틈을 비집고 들어선 순간 하은의 몸이 기울며 건하에게 바싹 붙었다.

“회전문에서 장난치지 말라는 경고 못 봤어?”

“봤으면?”

긴장이 풀려 느슨해진 하은이 머리 하나 정도 차이가 나는 그를 비웃으며 올려다보았다.

하은의 허리를 잡은 건하가 재빨리 회전문 밖으로 나왔다. 순간 하은의 얼굴이 눈에 띄게 구겨지며 건하를 노려보았다.

“그러다 너만 다쳐.”

“웃기시네. 언제부터 남 걱정했다고.”

허리를 잡은 건하의 팔을 쳐내며 하은이 비틀대듯 로비를 지나 승강기 앞에 멈췄다.

문이 열리자 하은의 뒤를 따라 건하도 곧장 안으로 들어갔다.

“병신, 머저리.”

승강기 벽에 기대어 고개를 숙이고 선 하은이 바닥을 향해 말을 뱉어냈다.

호텔로 오는 차 안에서도 하은은 시트 등받이에 머리를 기대고 지금 같은 말을 했다.

건하는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신경 쓰지 않았다. 한숨을 내쉬고 선 건하를 하은이 갑자기 고개를 들고 올려다보았다.

“사는 게 재밌니?”

초고속의 승강기가 오늘따라 느리게 움직이는 것 같았다. 건하는 시선을 내려 그를 올려다보고 있는 하은을 응시했다.

“이렇게 살다가 죽는 거, 너무 억울해. 나는 아직 아무것도 못 해봤는데.”

언제부터였는지, 하은이 울고 있었다는 것을 건하는 그제야 알았다.

“어떻게 사는 게 재미있는 건데?”

표정 없는 얼굴로 건하가 나직하게 물었다.

그때 승강기가 멈추고 천천히 문이 열렸다. 건하가 열림 버튼을 누른 채로 움직임 없이 하은과 마주했다.

“모르겠어서 묻는 거야. 나는……, 사는 게 재미가 없거든.”

시간이 천천히 흐르고 있었다. 마치 빠르게 움직이는 세상과는 별개로 건하와 하은을 사이에 두고 두 사람만의 시간이 따로 존재하는 것 같았다.

건하가 무게 있게 짓누르듯 시선을 내리깔았다. 하얗게 물기를 머금고 있던 하은의 눈에서 굵은 눈물이 떨어졌다, 마주친 건하의 눈이 짙어지며 깊숙이 가라앉았다.

순간 건하의 손이 그녀의 턱을 잡고 들어 올렸다.

가볍게 입술이 부딪치는가 싶더니 머금으며 깊숙이 입 안으로 혀를 밀어 넣었다.

와인 맛이 느껴지는 달큰한 하은의 혀를 잡아채듯 끈끈하게 휘감아 빨아당겼다. 바닥을 향해 떨어져 있던 하은의 손이 어찌할 바를 모르고 바들대다 겨우 그의 팔을 잡았다. 정신없이 빨려 들어가듯 두 사람의 혀가 얽혀들었다. 날카롭고 견고한 그의 콧날이 하은의 뺨을 스치며 사납고 거친 숨이 하은의 입 안으로 흩어졌다. 세차게 빨린 입술이 얼얼하다고 느껴질 때쯤 건하의 입술이 멀어졌다. 하은의 붉어진 뺨과 물기로 번진 눈가로 건하의 눈이 샅샅이 훑고 지나갔다.

승강기 문이 닫히려고 할 때 건하가 재빨리 하은을 당겨 복도로 내려섰다.

놀란 하은이 건하의 어깨를 잡으며 두 사람의 몸이 겹쳐졌다.

“그래도 사는 걸 굳이 비극으로 끝낼 필요는 없잖아.”

하은의 머릿속에 별안간 빨간 신호등이 켜지는 것 같았다. 여기서 멈추고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말라는 경고등이 머릿속에서 울렸다.

원하는 것도, 가지고 싶은 것도 없었다. 하루하루를 사는 게 너무 힘들고 버거워 억지로 틀어쥐고 있던 삶의 끈을 놓아버리고 싶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언제나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아슬아슬하게 외줄 타기를 하고 있는 기분이었다.

지금처럼 눈앞에서 백건하를 본 적은 처음이었다.

왜, 그녀와 닮은 눈빛일까?

하은이 저도 모르게 손을 들어 건하의 눈가를 어루만졌다.

텅 빈 눈을 하고서 아프게 그녀를 보고 있었다.

착각이라고 생각했다.

상체를 숙이며 다가온 건하의 얼굴이 닿을 듯이 가까웠다.

“사는 건, 그냥 버티는 거야. 재미는 무슨.”

쓰게 웃는 건하의 목울대가 위아래로 가볍게 움직였다.

불을 켜지 않은 채로 하은은 침대에 우두커니 앉았다.

여전히 머릿속은 술기운으로 흐릿하지만 이미 취기는 사라지고 없었다.

손끝으로 가만히 입술을 쓸고 어루만졌다.

여전히 백건하의 잔상이 남아있는 입술은 뜨거웠다.

첫 키스 상대가 백건하라니, 하은의 입가에 희미한 조소가 걸렸다.

하은의 생각은 다시 조금 전 마주쳤던 백건하의 눈을 떠올렸다.

마치 가면을 벗은 백건하의 민낯을 마주한 기분이었다.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지만 문이 열리지 않았다. 하은은 여전히 침대에 앉은 채로 열리지 않은 문을 보았다.

“괜찮아?”

밖에서 들리는 음성은 백건하였다. 닫힌 문 너머로 백건하의 목소리가 멀리서 들려오는 것 같았다.

하은은 비틀거리며 일어나 문을 향해 다가갔다. 문을 사이에 두고 백건하와 딱 붙어있는 기분이 들었다. 다시금 그녀의 입술 깊숙이 들어와 혀를 물고 빨던 감촉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망설임 없이 하은이 손잡이를 돌려 문을 열었다. 비스듬히 기대 서있던 백건하가 움찔하며 뒤로 물러섰다.

“괜찮아 보이네.”

돌아서려던 건하가 하은의 신음 같은 소리에 굳어졌다.

“뭐?”

“들어올래?”

이번에는 신음 같은 소리가 아닌 분명한 발음으로 하은이 말했다.

“왜?”

시선이 마주쳤다. ‘왜?’라고 묻는 자신이 한심하다고 느꼈지만 건하는 망설이고 있었다.

이미 인내심이 한계를 넘어섰다. 하은과 단둘이 남겨지는 순간 욕구를 주체하지 못하고 어떤 행동을 벌일지 자신도 몰랐다.

“그냥.”

하은은 자신의 대답이 바보 같다고 생각했다. 어떤 뚜렷한 목적도 없이, 그렇다고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조금 전까지 입술을 맞대었던 남자를 지금 시간에 침실에 들인다는 것은 뻔한 다음 상황을 예상하기에 충분했다.

거스를 수 없이 지나치기 힘든 감정을 자신만이 아니라 하은도 함께 느끼고 있다는 것이 건하는 어렴풋이 느껴졌다.

침실로 들어선 건하가 등 뒤로 문을 닫았다.

조금 전까지의 망설임은 애초에 없었다는 듯이 건하가 곧장 하은에게로 다가왔다.

목덜미를 잡아채고 당겨 입술을 겹쳤다, 맞물린 입술 사이로 들어온 뜨거운 혀가 얽혀드는 것만으로 성에 차지 않았다.

망설임 따위 애초에 없었다는 듯이 건하의 손이 자유자재로 하은의 몸을 만졌다.

등을 지나 잘록한 허리를 따라 엉덩이를 움켜쥐고 터질 듯이 부푼 중심에 바싹 당겼다.

선명한 중심이 음부에 닿자 놀란 하은의 눈이 벌어졌다.

거칠게 하은의 입술을 빨아대던 그가 고개를 들었다. 건하의 눈이 하은의 불긋한 눈가를 지나 뺨과 입술로, 다시 눈으로 옮겨왔다.

“안 멈춰……, 멈추지 못할 거야.”

하은의 입술이 건하의 타액으로 번들거렸다. 하은은 혀를 내밀어 건하가 남긴 타액을 가볍게 핥아 삼켰다.

“알아.”

하은의 말에 건하의 안에 남아있던 마지막 자제심이 한꺼번에 끊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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