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화 (18/62)

17.

“강훈아! 지금부터 시키는 일 외에 너는 아무것도 하지 마.”

수화기 너머 강훈의 한숨이 유독 크게 들려왔다.

“들었어?”

<네.>

“대답을 못 들은 것 같은데.”

<네, 대기하고 있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건하는 휴대폰을 자동차 내에 설치된 보조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그의 안에서 위험한 경고등이 울렸다. 서서히 목을 조이는 것 같은 불안감이 어두운 그의 눈자위를 덮쳤다. 거친 호흡으로 건하의 목에 굵은 핏대가 선명하게 불거졌다.

건하는 생각을 더듬어 장하은이 갈만한 곳을 짐작해 보았다. 어제 호텔을 나와 타임스퀘어에서 록펠러 센터를 지나는 동안 하은과 나눴던 대화를 전부 떠올렸다.

<허드슨 강 앞으로 보이는 노을이 멋져 보였어. 사진으로 봤거든.>

거칠게 흔들리던 호흡이 멈췄다.

“출발하죠, exchange place 역으로.”

건하의 한마디에 멈춰있던 차가 이내 출발했다.

***

지하철역에서 올라오자 곧바로 강변 공원이 모습을 드러냈다.

도심의 오아시스가 눈앞에 펼쳐지자 하은은 데크 위에 서서 숨이 멈출 정도로 아름다운 풍경을 눈에 담았다.

허드슨 리버 파크.

맨해튼 최고의 선셋을 감상할 수 있는 라운지 체어가 나란히 보였다.

해가 지려면 아직 시간이 충분히 남아 하은은 주변을 산책하기로 했다.

주변에 보이는 야외 카페에서 자리를 잡은 사람들이 음식을 먹는 모습이 보였다. 점심을 건너뛰고 곧장 호텔을 빠져나왔던 하은은 이내 허기가 느껴졌다.

건널목을 건너 정면으로 보이는 카페로 들어가 수제버거와 감자튀김을 주문하고 자리에 앉았다.

처음으로 갖는 혼자만의 시간이었다. 하지만 곧장 불안감이 파고들었다.

하지만 뉴욕 시내 한복판에서 그녀를 찾기는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사람은 어디에나 넘쳐났고 곧 아름다운 선셋을 보기 위한 사람들의 행렬이 이어질 것이다.

어디에도 그녀가 갈 곳은 없었다. 지금 있는 이곳이 그녀가 택한 세상 끝이었다.

카페에서 배를 채우고 파크를 걸었다. 아름다운 그림이 그려진 벽화를 지나 첼시 마켓을 구경했다. 계획 없이 무작정 걷는 즐거움이 어떤 것인지 처음 느껴보았다.

무심코 걷는 하은은 문득 쇼윈도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다. 다른 사람들과 같은 표정으로 공간을 즐기는 그녀의 모습이 낯설었다.

무작정 도망쳐 나와 낯선 곳에서 여유를 찾는 그녀가 우습기도 했다.

하지만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편안함을 느꼈다.

멀리 하늘 끝이 붉게 물들기 시작하자 하은은 무작정 노을을 향해 걸었다.

문득 죽음의 순간에 마주쳤던 어머니의 붉은 눈빛이 떠올랐다.

지금 눈에 보이는 노을빛이었던가? 물기 젖어 아프게만 보였던 그 눈빛이 떠올라 가슴이 아렸다. 온몸으로 하은을 덮치며 모든 충격을 막아주던 어머니, 하은이 지금 살아있는 이유는 오로지 그때 어머니의 희생 때문이었다. 한때 그런 어머니를 원망한 적이 있었다. 차라리 부모님과 함께 죽어버렸다면 혼자 남겨지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그 순간 어머니에게는 어린 딸을 살리는 것이 최선이었겠지만 혼자 남겨진 어린 딸이 어떻게 살아나갈지에 대해서는 몰랐을 것이다. 삶 자체가 불행의 연속이었고 그렇다고 마음대로 죽어버릴 수도 없는 현실, 어머니의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지키고자 했던 생명이었다.

사람들 틈에 섞여 하은은 머리 위로 붉게 물들어오는 하늘을 응시했다.

순간 가슴이 벅차오르며 잔잔한 파문이 일었다.

어린 나이에 가장 가까이에서 목격했던 죽음, 생명이 꺼져가던 모습이 고스란히 생각났다.

하은은 갑자기 밀려오는 오한으로 몸을 가볍게 떨었다.

수많은 인파 속에서도 여전히 그녀는 혼자였다.

지금까지도 그랬고 앞으로도 사실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시원한 바람이 불고 있었지만 하은이 느끼는 바람은 서늘했고 뼛속까지 파고드는 한기로 다가왔다.

“흐린 날씨라 오늘 선셋은 별론데. 일기 예보에 내일 날씨가 최상이라고 했거든.”

옆에서 들리는 익숙한 음성에 하은이 당황하며 소리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붉게 물드는 선셋 아래 매끈하게 각을 세운 정장 차림의 백건하가 테크에 비스듬히 기대 서있었다.

“내일까지 기다렸으면 지금보다 멋진 선셋을 볼 수 있었을 텐데.”

하은이 힘들게 보디가드를 따돌리고 온 것이 무색하게 생각될 정도로 백건하는 태연한 얼굴을 했다.

“기다림의 미학, 이럴 때 쓰는 말이야.”

낭패감이 짙게 깃든 하은의 표정을 보며 건하의 입에서 짧은 웃음이 터져 나왔다.

“진작 말해줬다면 기다림의 미학이란 걸 실천할 수도 있었을 텐데, 그런 생각은 안 해?”

하은의 말에 건하가 눈썹을 치켜 올렸다가 내렸다.

“내가 좀 자기중심적이라.”

하은이 틈만 나면 걸었던 검은 숲, 그것과 닮은 건하의 눈에 비웃음이 번졌다. 그리고 시선을 돌려 허드슨 강 위에 붉게 번지는 노을을 향했다.

일상에서의 일탈이라니, 건하에게도 흔한 일이 아니었다.

미신 예찬론자인 할머니가 있어서 가능한 일이었다. 장하은을 옆에 두면 건하가 안전할 것이라는 대책 없는 믿음, 건하의 옆을 장벽처럼 세운 보디가드가 사라진 이유였다.

‘나 좀, 숨겨줘.’

하은이 했던 말이 떠올라 건하의 입가가 희미하게 비틀렸다.

죽음으로부터의 자유, 그리고 속박에서의 자유.

장하은과 의도는 다르지만 결론은 같았다.

장하은은 속박에서 벗어나길 원하고 건하는 자신의 옆에서 그림자처럼 드리운 죽음이라는 위협에서 벗어나길 원했다.

서로가 서로에게 맞물려 톱니바퀴처럼 움직이는 것 같아서 씁쓸했다.

점차 검붉은 색으로 변해가는 하늘을 지켜보던 건하가 무심코 고개를 돌려 옆을 보았다.

하늘만큼 붉게 물든 하은의 옆 모습이 보였다.

건하의 시선이 느리게 움직이며 하은의 이마에서 부드럽게 이어지는 콧날과 벌어진 입술을 스쳤다.

갑자기 타는 듯한 갈증에 답답함을 느낀 건하가 타이의 매듭을 느슨하게 끌어 내렸다.

선셋의 아름다움에 감탄하며 벌어진 하은의 도톰한 입술이 노을에 물들어 붉게 타고 있었다.

건하는 도망치듯 시선을 돌려 정면을 응시했다.

심장 박동이 비상식적으로 제멋대로 날뛰었다.

***

그림처럼 펼쳐진 도시의 야경, 식사를 하는 하은의 시선이 창밖을 벗어나지 않았다.

건하와 마주 보고 앉아있지만 식사 도중 대화는 거의 없었다.

문득 뭔가 떠오른 것 같은 표정으로 하은이 건하를 쳐다보았다.

“한국에는 언제 돌아가?”

두툼한 고기를 썰어 입에 넣고 씹으며 건하는 하은의 물음에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못 들었나 싶어 하은이 다시 입을 떼려 하자 건하가 손을 뻗어 와인 잔을 거머쥐었다.

와인이 그의 목을 타고 내려가는 모습이 선명하게 느껴질 정도로 건하의 목울대가 크게 움직였다.

부드럽게 와인 잔을 내려놓은 그가 냅킨으로 입가를 가볍게 누르며 하은을 응시했다.

“나흘쯤 뒤에.”

건하의 말에 하은이 호흡을 내쉬자 가슴이 심하게 오르락내리락했다.

“내가 말한 건 어떻게 됐어?”

“무슨 말?”

모르는 척 시치미를 떼는 건하를 보며 하은의 눈초리가 매서워졌다.

하지만 이내 기억난 듯 건하가 아! 하며 능글스러운 표정을 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좀 어려울 것 같아.”

“그게, 무슨 말이야?”

“서류상으로 좀 복잡한 문제가 있어서.”

건하의 말이 무슨 뜻인지 몰라 하은이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서류? 무슨 서류?”

백건하하고 얽힌 서류상 복잡한 문제가 있을 리가 없었다. 하은은 영문을 모르겠는 얼굴을 했다.

“설마, 몰랐던 것 같은 얼굴이네.”

점점 일그러져가는 하은의 얼굴에도 건하는 대수롭지 않게 나이프로 고기를 잘게 썰었다.

“무슨 일인지, 알아듣게 말해.”

곧이어 백건하의 입을 통해 듣게 될 말을 하은은 긴장하며 기다렸다.

“그게 말이야, 이미 너하고 내가 법적인 부부가 됐더라고.”

유독 느린 건하의 말에 하은이 잠시 멍한 얼굴을 했다, 그러고는 이내 잔잔했던 눈에 가라앉아 있던 분노가 일며 짙게 번져가는 것을 건하가 눈을 떼지 않고 지켜보았다.

“그게 가능해? 어떻게 가능해? 당사자인 내가 동의한 적도 없는데.”

그럴 리 없다는 듯, 믿어지지 않는다는 표정을 하고 하은이 가볍게 고개를 내저었다.

건하는 고기를 썰던 나이프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그러게, 본인 동의도 없이.”

아무렇지도 않게 던지는 건하의 말이 흉기로 변해 그녀를 내리치는 것 같았다.

“근데, 그게 가능하더라고. 부모 동의가 있으면.”

“하!”

분노로 하은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너무 기가 막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선뜻 떠오르지 않았다. 다만 눈앞에서 재미있다는 표정을 하고 자신을 보는 백건하를 죽이고 싶다는 살기가 일었다.

“너는, 그걸 다 알고도 가만히 있었어?”

차오르는 분노를 주체하지 못하고 벌벌 떠는 하은을 향해 건하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어깨를 가볍게 으쓱했다.

“뭘 그렇게까지 화를 내? 목까지 빨개질 정도로.”

건하의 거리낌 없는 시선이 하은의 목을 타고 내려가 다시 울긋불긋한 얼굴을 향했다.

“그게 뭐, 별거라고. 그저 서류상일 뿐인데.”

분노로 붉어진 하은의 눈에서 물기가 번지며 이내 볼 위로 떨어졌다. 흥미롭다는 표정을 하던 건하의 미간이 구겨지며 건조한 시선이 하은을 향했다.

“그깟 일로 울기까지! 근데 말야. 재밌는 사실이 뭔지 알아? 혹시라도 내가 죽으면 내가 가진 재산이 전부 법적인 아내한테 간다는 말이야. 물론 한 회장 명의 재산도 마찬가지이고. 들어보면 그렇게 화낼 일이 아닐 텐데.”

건하의 말에 하은이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

“그럴 거면 애초에 돈 좋아하는 여자를 들이지 그랬어?”

건하는 뜸을 들이듯 느리게 의자에 등을 기댔다. 그러고는 조금은 건방진 눈으로 하은을 응시했다.

“그러게, 어디서 너 같은 여자를 골랐을까?”

냉기를 품은 차가운 눈매가 가늘어지고 눈 끝이 기울어졌지만 웃고 있지는 않았다.

하은은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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