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아니.”
건하가 하은을 뚫어져라 보며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그래서, 믿어보려고.”
굳어있던 그의 입가에 조소가 번졌다.
“그러다가 나한테 까이면 어쩌려고?”
“그렇게 안 할 거잖아. 그래도 만약 네 맘이 바뀌면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하려고.”
테이블에 몸을 바싹 붙였던 건하가 하은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로 천천히 물러나며 의자에 등을 기댔다.
“어쨌든 좋아. 근데 딜을 하려면 주고받는 게 있어야 하지 않아?”
탁한 숨을 뱉어낸 건하가 하은의 반응을 기다렸다. 결정적인 순간에 속을 보여주지 않는 건 하은도 마찬가지였다. 묘하게 닮아 보인다고 말했던 친구 진욱의 말이 순간 떠올랐다.
“다 가져서 부족한 게 없어 보이는데, 받고 싶은 게 있어? 그쪽만큼은 아니지만 돈은 충분히 가지고 있어. 근데 그걸 바라는 건 아니잖아.”
건하를 떠보는 것 같은 하은의 말에 건하가 싱긋 웃었다.
“아! 상속 재산? 너한테 10원짜리 하나 안 남기고 다 털린 네 큰어머니 지금쯤 알고 난리 났겠네. 뒤통수 맞은 얼굴이 어떤지 궁금하지 않았어?”
당황함을 감추기 위해 하은은 입 안의 살점을 지그시 깨물었다.
백건하가 어떻게 알았을까? 그녀만 알고 있던 비밀이 전부 까발려진 것 같아 불쾌감이 들었다.
지금까지 신탁 회사에서 하은 명의의 통장으로 지급했던 생활비와 학자금 관리를 전부 큰어머니가 도맡아서 해왔고 제법 거액의 돈이 쌓여있던 것을 확인했다.
그녀가 새로 선임한 변호사를 통해 그녀 명의로 된 통장 잔고를 새로운 계좌로 이체했고 현재 큰어머니가 가지고 있는 통장의 잔고는 ‘0‘이었다.
아마 지금쯤이면 그 사실을 알고 백건하의 말대로 난리가 났을 것이 분명했다.
“어떻게 알았냐고? 네가 보기에 내가 어떻게 알았을 것 같아?”
속의 감정을 감추기에 급급했던 하은이 건하의 마지막 말에 결국 인내심이 폭발해버렸다.
“미친 새끼!”
하은의 격한 반응에 건하가 호탕하게 웃었다.
“오호! 반응이 좋기는 한데 잘못짚었어. 내가? 뭐 하러 네 뒷조사를?”
하은의 흔들리는 눈동자가 건하를 의심스럽게 쳐다보았다.
“네 할머니라고?”
“빙고.”
한 회장이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사람이었다. 애초에 백건하를 지목한 자신이 우습기도 했다. 그가 뭣 하러 그런 일을 했겠는가 싶었다. 애초에 백건하는 그녀에게 관심조차 없었는데 굳이 그런 일을 할 이유가 없었다.
한 회장을 너무 쉽게 본 자신이 바보 같기도 했지만 순간 지금까지 알고 있던 것보다 한 회장이 더욱 두렵게 느껴졌다. 그러니 처음부터 그녀의 생각대로 지금 그녀가 의지하고 기댈 곳은 역시 백건하밖에 없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그래서 원하는 게 뭔데?”
하은의 말에 건하의 숱 많은 속눈썹이 느리게 움직였다.
“생각 좀 해보고. 대답은 나중에 해도 되지?”
건하의 대답에 어딘지 모르게 찜찜한 기분이 들었지만 하은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의 하은에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
다음 날 하은이 잠에서 깼을 때는 이미 오전 10시를 지나있었다.
시차 적응이 제대로 되지 않아 새벽까지 잠을 설친 탓에 아직도 정신이 몽롱했다.
밖은 조용했다.
뉴욕에 온 지 오늘로 이틀째, 시차 적응을 못 한 것은 백건하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럼에도 어제 백건하는 평소와 다름없이 에너지가 넘쳐 보였다.
침대에서 내려와 커튼을 젖히고 보이는 밖의 풍경을 감상했다.
늦은 오후에 카페에서 먹은 빵이 소화가 안 돼 저녁은 생략했다. 덕분에 일찍 침실로 와서 지금 서있는 곳에서 뉴욕의 야경을 질리도록 볼 수 있었다.
눈이 시릴 정도로 파란 하늘에 걸린 구름이 예쁘게 퍼져있었다. 창틀에 기대어 제법 오랜 시간 아름다운 풍경에 시선을 잡혔다. 어제 저녁을 안 먹어서인지 허기가 느껴졌다.
하은이 침실 문을 열고 나가자 거실 소파에 앉아있던 남자가 일어섰다.
백건하를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며 지키던 강훈이라는 남자였다.
그렇다면 백건하도 아직 이곳에 있다는 의미였다.
“식사 준비시키겠습니다.”
사무적인 목소리로 말하며 강훈이 하은에게 목례를 했다.
“그 사람은요?”
하은의 말에 강훈이 불편한 얼굴을 했다.
“이사님께서는 일정 때문에 일찍 나가셨습니다.”
“그럼, 종일 호텔에만 있어야 하나요?”
하은이 심각한 표정을 하고 강훈을 빤히 쳐다보았다.
거실을 나가려던 강훈이 걸음을 멈췄다. 여전히 불편한 기색이 돌아서 있는 그의 뒷모습에서도 확연하게 느껴졌다.
“외출은 자유롭게 하셔도 된다고 하셨습니다. 물론 외출하시게 되시면 저희도 동행할 겁니다.”
강훈의 말에 하은이 한숨을 내쉬었다.
여전히 그녀의 주변을 감시하듯 따르는 경호원은 한국에서나 뉴욕에서나 변함없이 그대로였다.
“이사님께서는 늦어도 7시에는 호텔로 돌아오실 겁니다.”
묻지도 않은 말을 강훈이 먼저 한 것은 처음이었다. 하고 싶은 말을 끝낸 강훈이 거실을 나가는 것을 하은이 지켜보았다.
문이 닫히자 하은은 천천히 소파로 다가가 앉았다.
이곳도 감옥이기는 마찬가지다. 어디든 혼자 자유롭게 다닐 수 없었다.
하지만 여기는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어디도 혼자서는 나갈 수 없는 한 회장의 저택이 아니다. 그녀가 있는 곳은 뉴욕이고 아무리 한 회장이라고 해도 호텔까지 통제하지는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은은 소파와 가까운 협탁으로 손을 뻗어 수화기를 들었다. 호텔 프런트 버튼을 누르자 곧장 수화기 너머로 직원의 목소리가 들렸다.
혼자 먹기에 제법 많은 양의 음식을 주문한 뒤 하은은 빠르게 외출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
예정보다 이른 시간에 뉴욕 지사를 방문한 건하는 지사장실에서 출근 중이던 임원들을 기다리며 사전 보고를 받았다. 한 회장의 핏줄이라는 이유로 새파랗게 젊은 나이에 이사 직함을 단 건하에게 처음부터 못마땅한 시선이 뒤따른다는 것은 건하도 알고 있었다.
건하가 먼저 와있는 것을 본 임원들은 자리를 찾아 앉았다.
드러내놓고 상대를 무시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마케팅 업무와 판매 현황 보고를 받고 있는 건하에게 주요 부분 실적을 건너뛰고 마지막 페이지에 나타난 숫자의 결과에 집중했다.
임원 미팅이 예상했던 것보다 일찍 끝이 났다.
보고 현황이 나타난 정지된 프레젠테이션 화면을 건하가 가만히 응시했다.
건하가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자 일어서려던 임원들도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스크린을 응시하던 건하는 손에 쥐고 있던 펜으로 테이블을 두드렸다.
톡톡.
규칙적으로 들려오는 소음에 임원들은 서로 눈치를 주고받았다.
언제부터인지 아무런 의미 없이 들려오던 소음이 싸늘한 긴장감으로 바뀌며 실내를 울렸다.
톡톡.
건하의 펜이 책상에 닿은 소리가 묵직하게 실내를 울렸다.
“끝입니까?”
침묵 끝에 건하가 낮은 목소리로 내뱉자 맞은편 의자에 앉아있던 지사장이 무슨 뜻이냐는 얼굴로 건하를 응시했다.
“보고서 한 장으로 끝낼 미팅이면 굳이 뉴욕까지 날아올 필요가 없었는데 말입니다.”
건하는 들고 있던 레이저 펜의 버튼을 눌러 화면을 가리켰다.
“오해가 있나 본데 제가 회의에 참석한 목적 즉, 듣고 싶은 사항은 마케팅 판매 실적 결과가 아닌 지역마다 다른 판매 방식에 관한 설명, 온라인 쇼핑몰 확대 방안, 그리고 지점 구성원들 간에 자유로운 소통 방식. 주요 요점은 전부 생략되어 있는데 혹시 설명해 주실 분?”
건하가 상체를 틀어 회의실 안을 차지한 임원들을 둘러보았다. 시선이 마주칠 때마다 눈을 피하며 딴청을 부리는 임원들에게 건하의 싸늘한 시선이 뒤를 이었다.
“그럼, 대표로 지사장님께서 해주시겠습니까?”
건하의 시선이 닿은 지사장이 움찔하며 긴장한 표정을 지었다.
“회장님께서 호락호락한 분이 아니셨을 텐데, 설마 이런 식으로 보고를 올리셨습니까? 지사장님! 정말 궁금해서 묻는 건데 회장님도 가만히 보고 넘기던가요? 이런 쓰레기 같은 보고서를?”
침묵이 흐르는 실내에 건하의 나직한 목소리가 소름 끼치도록 공포를 유발시켰다.
아마도 분노를 밖으로 표출하고 목소리를 높이는 것이 나을지도 몰랐다. 백건하의 냉정한 눈빛과 싸늘한 목소리, 주변을 압도하는 아우라에 그제야 임원들이 정색을 하며 허리를 펴고 앉았다. 정확한 판단력과 사리 분별이 명확한 한 회장이 아무리 유일한 핏줄이라고 해도 무작정 후계자로 손자를 지목할 사람이 아니라는 것은 알았다. 하지만 소문으로 백건하는 천지 모르고 날뛰는 개망나니에, 회사 일에는 관심도 없이 유흥만 좇는 빈껍데기라고 들었다. 게다가 유약한 겁쟁이로 사방에 경호원으로 벽을 세우기로도 유명했다.
실제로 처음 만난 백건하의 인상도 소문과 다르지 않았다.
뉴욕에 도착하자마자 여자와 함께 호텔에 투숙했다는 보고를 받았고 여자와 노닥거리며 보내느라 어제 약속된 미팅도 제멋대로 캔슬을 했다. 그래서 적당히 무시하고 넘겨도 좋을 인물이라는 판단이었다.
하지만 눈앞에 있는 백건하는 유약한 겁쟁이도, 멍청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한 회장을 능가할 것 같은 강한 카리스마로 회의실을 장악하고 있었다.
지사장은 겹쳐있던 다리를 내리고 곧은 자세를 취했다.
“먼저 지역 간 다른 판매 방식부터 보고드리겠습니다.”
정지해있던 화면이 바뀌고 곧장 파노라마처럼 펼쳐진 여러 개의 화면이 차례로 지나갔다.
건하가 강훈의 전화를 받은 것은 미팅을 끝내고 다음 장소로 이동하는 차 안에서였다.
휴대폰에 강훈의 이름이 뜬 것을 확인한 건하의 눈썹 끝이 뾰족하게 일어섰다.
통화 버튼을 누른 건하는 전화기에서 들려오는 강훈의 긴장한 음성에 몸을 세웠다.
<장하은 씨가 보이지 않습니다. 호텔 주변을 샅샅이 찾아도…….>
“어떻게?”
<네?>
“밖에서 지키고 있었을 거 아니야?”
건하의 말에 강훈이 대답을 찾지 못하고 망설였다.
전화를 받고 있는 사이 건하는 조수석에 앉은 비서에게 손짓으로 차를 세우라고 지시했다.
<그게……, 지키던 애들 앞으로 장하은 씨가 직접 룸서비스를 주문하셔서. 애들이 착각을 했던 모양입니다.>
강훈의 말을 듣고 있던 건하가 싸늘한 미소를 머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