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화 (16/62)

15.

이마로 떨어지던 건하의 시선과 동시에 그의 손이 하은의 이마에 닿았다.

열을 짐작하듯 이마에 닿은 건하의 손바닥도 뜨끈하게 열기를 품고 있었다.

“열은 없는데.”

여전히 그녀의 이마에 닿은 건하의 손바닥 감촉이 예민하게 느껴졌다.

하은의 온몸이 달아오르며 열기가 한꺼번에 퍼져나갔다.

백건하의 손에서 벗어나기 위해 하은이 상체를 뒤로 물렸다. 건하의 눈이 열기를 품은 하은의 눈과 빨갛게 익은 볼을 따라 가는 목선을 향했다.

시선 끝에 하은이 입고 있던 티셔츠 틈새로 보이는 검붉은 멍 자국이 보이자 건하의 고개가 비스듬히 기울었다.

건하의 눈썹 끝이 올라갔다가 아래로 떨어지며 이내 불편한 속을 감추듯 등을 돌렸다.

“몸 안 좋으면 오늘은 호텔에서 좀 쉬어.”

건하가 몇 걸음 가기도 전에 하은이 다급하게 대답했다.

“아니, 가고 싶어. 산책.”

건하가 뒷모습을 보인 채로 멈췄다. 등을 보이고 있던 건하는 아무런 말 없이 소파로 가서 앉으며 조금 전까지 읽고 있던 책을 펼쳐 들었다.

“식사 끝나면 준비하고 나와. 기다릴게.”

포크를 내려놓고 곧장 거실을 지나 침실로 들어가는 하은의 모습을 보는 건하의 입가에 모호한 미소가 번져갔다.

***

드레스룸에서 건하가 재킷을 벗고 편안한 옷으로 갈아입고 있었다.

노크를 하고 들어온 강훈이 건하의 평상복 차림의 옷을 보고는 당황한 얼굴을 했다.

“오후에 지사 임원들과 미팅이 있고 저녁에는 호텔에서 식사 약속이 있습니다.”

강훈은 말을 이어가면서 정장을 벗은 건하를 못마땅한 시선으로 지켜보았다.

“스케줄은 전부 내일로 조정할까 하는데.”

거울을 통해 강훈과 시선을 맞춘 건하는 단호한 표정이었다.

그리고 더는 토를 달지 말라는 무언의 경고였다.

“내일 사전 미팅도 회의도 전부 진행하고, 대신 저녁 약속은 취소시켜.”

일방적인 건하의 말에 강훈이 고민하는 표정을 보였다.

“이번 뉴욕 일정은 회장님께서도 직접 챙기셔서……. 어제 일어난 일도 이미 보고가 들어간 상태고…….”

“강훈아!”

“네?”

강훈이 대답하고 얼마쯤 긴장감이 흘렀다. 건하가 테이블 위에 있던 휴대폰을 집어 주머니에 넣었다.

“오늘부터는 허락 없이 룸에 들어오지 마. 밖에 애들 세우는 거야 네 일이지만 눈치껏 해. 거슬리게 하지 말고.”

머뭇거리던 강훈이 건하의 시선을 받자 고개를 아래로 내렸다.

“네.”

강훈은 비켜서서 건하가 드레스룸을 나서는 것을 지켜보았다.

백건하가 한번 뱉은 말이나 하고자 마음먹은 일은 어떤 상황에서든 변하지 않을 것을 잘 알았다.

겉은 무심해 보이지만 계획한 일이 틀어지거나 마음대로 되지 않으면 폭주하는 백건하였다.

강훈을 통해 한 회장에게 복고가 들어간다는 사실을 알고 있던 건하가 뉴욕에 도착하고부터 그의 일상에서 강훈을 제외시켰다.

장하은이 도망칠 것이라는 것을 건하가 사전에 이미 눈치채고 있었고 장하은 뒤에 은밀하게 사람을 붙였다는 것도 어젯밤이 되어서야 알았다.

건하의 옆에 수족처럼 붙어 지내지만 강훈의 고용주는 정확히 말하면 백건하가 아니고 한 회장이다. 백건하를 주변 위험으로부터 안전하게 지키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그의 일이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사소한 일 하나까지 백건하는 전부 강훈을 거쳤다.

백건하의 말에는 언제나 복종했고 군말 없이 시키는 일은 전부 해냈다.

한 회장에게 백건하의 일상을 전부 보고는 했지만 선을 넘은 적은 없었다.

하지만 장하은에 관련된 일에 배제시키는 것이 강훈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래봐야 고작, 효용 가치가 떨어지면 언제든 쓰고 버릴 소모품에 불과한 여자였다.

무슨 이유인지 백건하가 그의 영역에 여자를 들이는 것 같은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한밤중에 전화를 받고 강훈에게는 별다른 말 없이 호텔을 나서던 건하의 모습이 떠올랐다.

잘못 본 게 아닐까 생각했다.

어떤 일에든 냉정함을 잃지 않고 속을 드러내지 않았던 사람이었기 때문에 착각일지도 모른다 생각했다.

왜, 겁먹은 것처럼 보였을까? 절대 그럴 리가 없는데 말이다.

강훈은 낮게 한숨을 내쉬고 고개를 떨어뜨렸다.

이유가 어떻든 요즘 그가 보는 백건하는 전과 달랐다.

그게 뭐라고 꼬집어 표현할 수 없지만 강훈의 예민한 촉에서 느껴졌다.

그리고 뉴욕에서 강훈은 더 이상 자신이 할 일이 없을 것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백건하가 더 이상 자신의 일상이 한 회장에게 보고되는 것을 꺼리는 것 같은 이유였다.

***

타임스퀘어를 지나 록펠러 센터까지 걷는 동안 하은은 앞서는 백건하와 한 뼘 정도 차이를 두었다.

간혹 옆을 지나가는 사람 때문에 하은이 느리게 걸음을 멈춰 섰을 때도 앞서 걷던 백건하도 맞춰서 느리게 걸었다.

한국에서는 백건하의 옆을 장벽처럼 두르던 경호원도 지금은 멀찍이 떨어져 걸어서 방해받지 않고 느긋하게 도시의 풍경을 감상할 수 있었다.

거리의 모든 것이 살아있는 예술 작품 같았다. 빌딩과 오래된 건물이 조화를 이룬 도시를 걷는 사람들의 표정에 생기가 넘쳤다.

지난밤의 악몽은 더 이상 떠오르지 않았다.

미드에서만 보았던 방탄조끼를 입은 경찰이 근사하고 신기하게 보였고 노천 카페에 자리를 잡고 한가하게 앉아 커피를 마시는 뉴요커를 보는 것도 구경 중의 하나였다.

신기하게만 보는 하은을 건하는 간혹 멈춰 서서 기다려주었다.

“뭐 좀 마실래?”

앞서 가던 건하가 하은의 옆으로 다가와 눈짓으로 카페를 가리켰다.

베이커리 간판이 보이는 카페는 외부 인테리어만으로도 시선을 끌었다. 백건하의 마음이 바뀔까 봐 하은이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껏 갇혀있다 처음으로 세상 구경을 하는 천진난만한 아이 같은 표정이었다.

건하는 옆에서 걷고 있는 하은을 간혹 힐끔거리며 쳐다보았다.

맨홀에서 뿜어져 나오는 스팀, 노란 택시의 행렬, 건물 앞에 세워놓은 스캐폴드, 끊이지 않은 도시의 소음들.

그 모든 것들이 신기한 하은에 비해 건하의 눈에 포착된 움직이는 피사체는 하은이 전부였다.

건하가 먼저 카페로 들어가자 뒤따라 들어온 하은이 유리 진열장 안에 있는 베이커리에 시선을 집중했다.

보기에도 먹음직스러운 베이커리가 빼곡했다.

“마음대로 골라.”

정신이 팔린 하은을 건하가 재미있다는 눈으로 지켜보았다.

하은이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것을 카운터에 선 건하가 빠지지 않고 주문했다.

쟁반 위에 빼곡하게 담긴 것을 보고 하은이 난처한 얼굴을 하자.

“먹고 남은 건 포장하면 되잖아.”

“그래도 돼?”

“안 될 게 뭐가 있어?”

시크하게 말을 내뱉고 건하는 쟁반을 들고 가게 밖으로 나갔다.

빈 테이블에 쟁반을 내려놓은 건하는 하은이 앉기 편하게 의자를 뒤로 빼내고는 맞은편에 앉았다.

한국에서 먹던 것과 두 배쯤은 큰 머그컵에 가득 담긴 커피를 끌어다 한 모금 삼키는 하은의 표정은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았다.

겨우 커피 한 모금, 빵 몇 조각에 반응하는 하은을 보는 건하의 표정이 의미심장했다.

“뉴욕에 자주 와봤어?”

하은은 시나몬 페스트리를 한입 크게 베어 물며 시선은 눈앞의 오래된 건물을 향한 채로 물었다. 건하가 대답이 없자 눈을 돌려 앞에 앉은 건하를 응시했다.

건하가 내미는 냅킨을 받아든 하은이 입가를 가볍게 닦아냈다.

“몇 번.”

성의 없어 보이는 건하의 대답에 하은도 성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허드슨 강 앞으로 보이는 노을이 멋져 보였어. 사진으로 봤거든.”

길게 늘어져 있던 오후의 시간이 빠르게 두 사람을 지나쳐 갔다. 거리 곳곳에 조금씩 어둠이 쌓이고 있었다. 산책하기 전 호텔에서 늦은 아침과 점심까지 먹고 나온 하은은 제대로 식탐이 생겼는지 빵 하나를 다 먹어치우고 다른 것 하나를 고르고 있었다.

“그래서, 보고 싶다고?”

무심한 듯 툭 내뱉는 건하의 말에 하은이 빵을 집었다가 내려놓았다.

“내가 말하면 다 돼?”

“뭐?”

“내가 말하면 뭐든 다 해줄 것처럼 굴어서. 떠본 거야.”

건하를 흉내 내는 것 같은 하은의 말투에 오만하지만 기품있어 보이는 건하의 반듯하고 넓은 이마가 구겨졌다.

“그럴 수도.”

건하의 말이 끝나고 얼마간 침묵이 흘렀다.

“그럼, 나 좀 숨겨줘.”

진심이 담긴 하은의 말에 다시 숨 막히는 침묵이 두 사람 사이에 내려앉았다.

“돌아가고 싶지 않아.”

미간을 찡그리며 중얼거리는 하은의 말이 농담처럼 들리지 않았다.

“거기, 감옥이잖아. 사람 죽인 일도 없는데 종신형 선고받은 죄인 같아.”

하은의 말에 건하가 피식, 웃다가 다시 소리 내어 웃었다.

낯선 백건하의 호탕한 웃음에 하은이 정지한 표정을 하고 쳐다보았다.

“아, 미안. 지금 그 말 한 회장이 들으면 어떤 표정일까 싶어서.”

그의 할머니를 남 말하듯 한 회장이라 칭하는 것을 들으며 하은의 눈이 어두워졌다.

“숨으면, 못 찾아낼 것 같아?”

건하의 말에 하은의 긴장한 눈이 곧장 그를 향했다.

“그러니까 너한테 말하는 거야. 너는 가능할 것 같아서.”

“왜?”

반듯하고 흐트러짐 없는 백건하, 하지만 눈빛은 맹수 피라미드 가장 위에 위치한 포식자의 것이었다.

“회장님 위에 있는 사람, 너잖아.”

건하가 테이블 위에 바싹 몸을 들이댔다. 그러고는 흔들림 없이 분명한 하은의 눈을 정확하게 맞추었다.

“날, 뭘로 보고?”

건하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눈빛은 잔인하게 반짝였다.

“나를, 믿어?”

건하의 말에 하은은 대답이 없었다. 하은을 보는 건하의 눈이 더욱 깊어졌다.

“어제……, 믿으라고 한 말 거짓말이야?”

집어삼킬 것처럼 강하게 빛을 발하는 건하의 눈을 피하지 않으며 하은이 내뱉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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