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짐승처럼 습한 호흡이 그녀의 목덜미에 닿자 하은이 광폭하게 몸을 움직여 남자에게서 벗어나려 몸부림쳤다. 아무리 소리를 질러도 입을 가로막은 남자의 손바닥 안에서 무참하게 흩어졌다.
바지 버클이 뜯기듯이 떨어져 나가고 순식간에 벗겨지며 축축한 혀가 하은의 목을 파고들었다. 흥분으로 할딱거린 더운 숨이 그녀의 몸에 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하은은 미칠 듯이 몸을 틀어 벗어나려고 했지만 남자의 단단한 몸에 눌려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녀의 얼굴이 땀과 눈물로 범벅이 되었다.
<하은아……, 엄마가……. 사랑해. 내 딸.>
지워졌다고 생각했던 그날의 기억이 하은의 앞을 가로막았다.
엄마…….
눈물이 볼을 타고 쉴 새 없이 흘렀다.
주말 이른 아침, 이천 본가에 가기 위해 엄마가 선잠을 깨우고 차에 태우는 순간부터 하은은 칭얼대기 시작했다.
운전대를 잡은 아빠가 백미러를 통해 하은을 보며 미소를 짓고 있었다.
행복한 기억의 조각이었다. 아빠가 있었고 늘 하은을 뒤따르는 엄마의 따뜻한 눈길이 끊이지 않았다.
이른 아침이라 막힘없는 도로 위로 차는 일정한 속도를 내며 달려갔다.
칭얼대던 하은에게 끔찍한 공포가 덮친 것은 그 순간이었다. 섬뜩할 정도의 커다란 굉음을 들으며 강한 충격이 덮쳤다.
눈을 떴을 때 온몸에 피가 범벅인 채로 쓰러져 있던 엄마와 눈이 마주쳤다.
죽음이 덮쳐오던 눈동자, 피가 번진 붉은 눈동자가 하은을 보며 울고 있었다.
<엄마가……, 많이 사랑해.>
엄마…….
꿈을 꾸듯 상상을 한 적이 있었다.
부모님을 따라 함께 죽었으면 좋았다고. 힘든 순간이면 그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큰어머니의 폭언과 한번 시작된 손찌검이 어느 순간 잔인한 폭행으로 변하던 순간에도.
다시 눈을 떴을 때 어둠이 덮치며 남자의 잔인한 얼굴이 바로 앞에 있었다.
다시 비명을 지르며 몸부림치는 순간 하은의 몸이 튕겨져 나갔다.
“정신 차려! 장하은!”
어디선가 그녀의 이름을 부른 것 같은데 분명하지가 않았다.
여전히 꿈속인 것처럼 느껴졌다. 백건하의 목소리가 분명한 것을 보니 여전히 꿈속이다.
“하은아!”
차가운 몸을 어루만지는 따뜻한 손길, 하은은 죽음의 순간이 자신에게 다가왔음을 느꼈다.
그렇지 않고서야 가장 잔인한 순간에 지금 같은 따스함을 느낄 리가 없었다.
하은의 동공이 하얗게 넘어가는 순간 강한 손이 그녀의 뺨을 가볍게 터치했다.
“정신 차려! 하은아!”
다시 선명하게 들려오는 목소리, 분명 백건하였다.
반쯤 넘어가는 의식을 잡고 하은이 남자를 응시했다.
“나야! 누군지 알겠어?”
하은의 몸을 부둥켜안은 백건하의 얼굴이 흐릿했다.
“괜찮아! 아무 일도 없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거야! 내 말 듣고 있지?”
백건하의 말에 하은이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건하가 그녀를 안고 일어섰다. 건하의 품에 안긴 하은의 몸이 축 늘어졌다.
하지만 건하를 잡은 손끝에는 아플 정도로 힘이 들어있었다.
억센 손이 목을 틀어쥐자 하은이 바둥거렸다. 아무리 밀어내려고 해도 점점 그녀의 목을 옥죄어왔다.
비명을 지르려고 해도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숨이 쉬어지지 않아 하은이 몸을 바둥거렸다.
강한 공포가 엄습하며 하은을 덮쳤다.
“눈 떠! 장하은!”
멀리서 희미한 백건하의 목소리가 들렸다.
캄캄한 암흑이 계속되었다. 도무지 끝이 보이지 않는 좁은 통로에 갇혀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장하은!”
가까이서 들리는 목소리에 하은이 눈을 떴다.
“하은아!”
백건하답지 않게 그녀를 부르는 목소리가 다정했다.
지금 꾸는 꿈이 악몽인지 구분이 가지 않았다. 흐릿했던 것들이 조금씩 선명해지며 백건하의 얼굴이 또렷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보여? 누군지 알겠어?”
잔뜩 찌푸린 이마, 걱정하는 눈빛의 백건하.
하은은 건하와 시선을 맞추며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 일도 없었어, 알아들어?”
건하가 그녀와 시선을 맞추며 강한 눈빛으로 응시했다.
하은의 눈동자가 흔들리자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건하가 그녀의 볼에 손을 가져다 댔다.
“아무것도 기억하지 마, 떠올리려고 하지도 마.”
강하게 눌리는 것 같은 건하의 목소리에 하은은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씩 이성을 찾은 하은은 뒤늦게 그녀가 누워있는 침대를 시작으로 침실 내부를 눈으로 훑었다.
“여기, 어디예요?”
건하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하은은 자신이 입고 있는 옷을 내려다보았다.
티셔츠도 입고 있던 그대로였다.
“호텔.”
깨끗한 침구, 디퓨저의 은은한 향이 느껴졌다. 하지만 여전히 건하의 말이 믿기지 않는 듯 하은이 불안한 시선으로 그를 보았다.
“내 말, 못 믿어?”
단호한 건하의 말에 하은은 신음처럼 한숨을 내쉬며 눈에 물기를 머금었다.
어둡고 습한 호흡이 금방이라도 그녀를 덮칠 것처럼 퍼붓던 기억이 여전히 그녀를 괴롭혔다.
답답한 듯 짙은 한숨을 쏟아낸 건하가 그녀를 당겨 가슴에 안았다.
“아무 생각도 하지 마. 너한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 내가…… 그렇게 안 둬.”
여전히 불안해 보이는 하은의 머리를 건하가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불안정하던 호흡이 조금씩 규칙적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무슨 이유인지 백건하의 품이 편안하고 안정감 있게 느껴졌다.
그가 어떻게 알고 그녀를 찾았는지, 가장 필요로 했던 그 순간에 그가 나타났는지 궁금했지만 지금은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았다.
백건하와 그녀 사이에 흐르고 있는 지금의 알 수 없는 감정의 흐름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
다시 눈을 떴을 때 하은은 여전히 침대 위였다.
커튼 틈 사이로 보이는 밖의 모습에 한낮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은은 무겁기만 한 몸을 일으켜 앉았다.
‘너한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
다시 생각을 떠올리니 그 말이 묘하게 마음을 안정시켰다.
지난밤 그녀를 안심시키고 다정한 손길로 쓰다듬었던 그 사람이 정말 그녀가 알던 백건하였을까?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다정한 말투, 눈빛.
섬뜩할 만치 냉정한 기운을 뿜어내던 백건하와 어울리지 않았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그의 말을 믿었다. 그녀에게 남아있는 마지막 희미한 기억도 백건하의 얼굴이었다.
몸을 일으켜 침대 아래로 발을 내렸다. 온몸이 두드려 맞은 것처럼 뻐근한 통증이 느껴져 걸을 때마다 하은이 이마를 찡그렸다.
테이블 위에 있던 물을 마시고 커튼을 젖혔다.
창밖으로 펼쳐진 믿을 수 없는 아름다운 풍경에 하은이 낮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한낮의 뉴욕 거리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와 하은은 신기한 표정으로 사방을 둘러보았다.
도로 양옆으로 늘어선 자동차의 행렬, 빌딩 숲 사이에 펼쳐진 광활한 파크의 풍경이 모여 한 장의 엽서 같았다. 어제의 기억들이 선잠을 자다 꾼 악몽처럼 생각될 정도로 뉴욕에 온 것이 이제야 실감이 났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하은이 돌아보자 침실로 들어서는 건하와 마주쳤다.
밝아 보이는 하은의 얼굴을 보고 건하의 눈썹 끝이 희미하게 위로 솟구쳤다.
“식사 준비됐어.”
단호하고 냉정한 목소리.
호텔로 데려와 그녀를 안심시키던 다정했던 백건하가 아닌 원래 그의 모습이었다.
다정한 백건하의 모습이 꿈이 아니라는 것은 알았지만 지금의 백건하가 하은에게는 더 익숙했다.
거실을 통해 느껴지는 음식 냄새에 잊고 있던 식욕이 한꺼번에 살아나는 것 같았다. 순간 밀려오는 엄청난 허기에 하은의 배도 심하게 요동쳤다.
건하가 문 옆으로 비켜서자 창가에 서있던 하은이 침실을 나섰다.
테이블 위에 차려진 갖가지 음식들이 시선을 끌었다. 하은은 곧장 의자를 빼고 앉아 건하의 눈치를 살폈다. 그가 얼른 의자에 앉기를 바라는 눈빛이었다.
“난 이미 식사했어. 거기 있는 거 다 네 거야.”
건하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포크를 집어 든 하은은 무서운 속도로 음식을 먹어치우기 시작했다.
하은이 편하게 식사를 할 수 있도록 건하는 거리가 좀 떨어진 소파에 앉았다.
보고 있던 책을 펼치고 시선을 내렸다. 하지만 얼마 가지 않아 건하의 시선은 다시 하은에게로 향했다.
작은 입 안으로 제법 많은 음식들이 한꺼번에 들어가는 게 보였다. 다시 시선을 내려 책의 페이지를 넘겼다. 활자가 눈앞에서 제멋대로 흩어져 보였다. 도무지 집중이 되지 않아 건하의 시선이 다시 하은을 향했다.
한꺼번에 삼킨 음식이 목에 걸린 하은이 심하게 기침을 하자 건하가 소파에서 재빨리 일어섰다.
테이블 위에 있는 생수병의 뚜껑을 열어 하은의 옆에 가져다 놓았다.
하은이 기다렸다는 듯이 생수병을 받아들고 마시는 것을 흡족한 눈으로 지켜보았다.
“누가 안 뺏어 먹어.”
물을 마시고 기침이 멈추자 하은은 냅킨을 찾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건하가 불쑥 냅킨을 뽑아 하은의 코앞에 내밀었다.
어색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이어진 건하의 동작에 다른 말 없이 그에게서 냅킨을 받았다.
“고마워……요.”
어색한 말끝에 요, 자가 붙은 하은의 말에 건하가 무슨 일이냐는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어느 정도 허기를 채운 하은은 포크를 느리게 움직이며 건하의 눈을 피했다.
“내일부터는 바쁠 것 같아서, 오후에 산책 나가려고 하는데……. 생각 있으면 같이 가든가.”
건하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음식을 삼키던 하은이 사레가 걸려 기침을 시작했다. 건하가 재빨리 하은의 앞으로 물병을 끌어주고는 가볍게 그녀의 어깨를 두드렸다.
“괜찮아?”
냉탕과 온탕을 오가는 백건하의 모습이 낯설어 도무지 적응이 되지 않았다.
산책하러 같이 나가자는 그의 말도 그렇고 지금처럼 사레가 걸린 그녀의 등을 두드려주는 그의 행동 또한 낯설었다.
하은이 생수를 마시고 몇 번 기침을 한 다음에야 사레가 멈췄다.
“괜찮아……요.”
하은의 다소곳한 말에 건하가 눈 끝을 가볍게 올렸다.
“하던 대로 해.”
고개를 들자 웃음이 떠오른 건하의 눈과 마주쳤다.
하은이 놀라 급히 시선을 내렸다가 다시 건하를 쳐다보았다.
“너 얼굴 빨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