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화 (14/62)

13.

하은은 평소와 다르게 잘 차려입고 마주 앉아있는 백건하와 자신이 유치하게 느껴졌다.

어쩌면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어서 쑥스러움에 그런 생각이 드는 건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생각보다 나쁘지는 않았다.

지금 같은 유난스러운 생일을 치르는 것도 어차피 오늘 한 번뿐이니 말이다.

“겨우 이런 걸로 유난 떤다는 말을 들으니 새삼 매년 치르는 내 생일에 어떤 반응일지 궁금하네.”

무슨 뜻이냐는 표정으로 하은이 건하를 쳐다보았다.

하은의 시선을 받은 건하는 어깨를 가볍게 으쓱하며 포크로 샐러드를 집었다.

“오케스트라 협연에 삼단 케이크는 기본이고, 어렸을 땐 정원을 온통 키즈카페처럼 꾸며놓고 내가 모르는 애들까지 전부 초대했어. 쌓인 선물 더미에 지쳐서 반 이상은 포장을 뜯지도 않았고.”

선물 더미에 쌓인 백건하를 상상하며 하은이 잔잔하게 웃었다.

이상하게도 조금 전까지 유난스럽고 쑥스럽게 생각했던 생일이 지금은 그렇게 느껴지지 않았다. 백건하가 그녀를 배려한 말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느낌이 묘했다.

요리가 코스로 나오는 동안 하은은 처음보다 편안한 마음으로 식사를 했다.

마지막으로 디저트와 함께 나온 케이크는 잔잔한 그녀의 가슴에 파문을 일으켰다.

나이만큼 꽂힌 두 개의 초를 보고 있으니 뭉클한 감정이 퍼져나갔다.

잊고 있던 기억 하나가 떠오르며 하은의 눈가가 젖어들기 시작했다.

‘자, 우리 공주님! 생일 축하해. 엄마아빠에게 와줘서 너무 고마워.’

고깔모자를 나눠 쓰고 이제는 얼굴마저 희미한 부모님의 모습이었다.

눈앞의 반짝이는 두 개의 초가 하은의 물기 어린 눈을 반짝이게 했다.

하은은 천천히 다가가 후, 소리를 내며 공기를 불었다.

반짝이던 두 개의 초가 꺼지고 케이크 위에 선명하게 새겨있는 문구를 발견했다.

‘행복한 순간이기를.’

그게 아무것도. 아무 의미도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저 평범한 문구에 지나지 않는 그 말이, 케이크를 주문한 이의 진심이 담긴 문구가 아닌 그 말이 하은의 가슴을 잔잔하게 울렸다.

그녀의 안에서 일어나는 복잡한 감정을 백건하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아 하은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잠깐, 화장실 좀.”

몸을 돌려 룸을 나선 하은은 화장실로 급히 뛰어갔다.

***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옆자리는 갈 때와 마찬가지로 백건하가 자리했다.

처음 어색했던 분위기도 누그러지고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하은의 긴장감도 풀어지고 있었다.

“2주 후에 뉴욕 출장 있어.”

그래서 뭘 어쩌란 말인지, 하은은 그런 표정으로 백건하를 쳐다보았다.

“준비는 윤 실장님이 알아서 할 거고, 일정이 꽤 길어질 거야.”

고개를 앞으로 돌려 정면을 본 하은은 멈칫하며 다시 백건하를 쳐다보았다.

“나도 가게 될 거라는 말인가요?”

“안 그럼, 내가 지금 너한테 보고하는 걸로 보여?”

도대체 왜? 백건하의 출장길에 그녀가 동행해야 하는지 몰랐다.

하지만 이내 목적지가 뉴욕, 이라는 백건하의 말이 떠올랐다.

지금까지 우연이라도 행운을 기대한 적은 없었다. 누구나 노력하면 가질 수 있는 것도 그녀에게는 달랐다. 하지만 한 번쯤 그런 행운이 자신에게 오지 않을까, 살면서 단 한 번쯤은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바로 지금처럼.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행운이 지금 그녀의 앞에 다가왔다.

하은은 마른침을 삼키며 고개를 돌려 창밖을 보았다.

거리가 물 흐르듯이 눈앞을 지나쳐 갔다. 먼 곳을 향한 시선이 창에 비친 백건하에게로 향했다.

조각상처럼 견고한 얼굴, 속을 알 수 없는 표정.

충분히 겪어 보지는 않았지만 그간 하은이 본 백건하는 적어도 한 회장의 백그라운드만 믿고 설치는 철없는 응석받이는 아니었다.

어쩌면 하은이 계획하고 있는 일을 눈감아 줄지도 모른다는 희미한 기대감마저 들게 했다.

백건하라면 오히려 반길지도 몰랐다.

차갑게 얼어붙어 있던 몸의 일부가 미지근하게 데워지며 앞으로 다가올 일에 대한 기대로 들뜨기 시작했다.

***

맨하탄 야경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호텔 스위트룸.

룸서비스로 시킨 비프롤을 나이프로 먹기 좋게 조각내어 입 안으로 가져갔다.

속이 타는 강훈과 달리 건하는 와인을 곁들이며 여유로운 저녁 식사를 하는 중이었다.

혹시나 몰라 장하은의 이동 경로를 여러 개로 나누어 짐작해 분석 중이었다.

장하은이 공항을 나서는 그 시간에 정확히 목적지가 2곳인 공항버스가 움직였다. 공항버스 내부 CCTV 화면을 입수하는 데 시간이 좀 걸리는 것이 문제였다. 하지만 만일의 상황을 대비해 공항버스 최종 목적지까지 사람을 풀었다.

짧은 시간 상황을 통제하기까지 강훈의 뇌는 이미 포화 상태였다.

침착하고도 여유로운 백건하와는 상반된 모습이었다.

도대체 머릿속에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손 놓고 장하은을 놓칠 사람이 아닌 게 분명한데 무슨 꿍꿍이인지 몰랐다.

“한 가지만 말씀해 주시죠.”

초조한 강훈의 말투에 건하가 테이블 위에 포크를 내려놓았다.

“뭘?”

“장하은 씨 안전에 대한 보장이요. 여긴 뉴욕이고 밤이 되면 무법천지로 변하는 곳도 많습니다. 게다가 지금은 아시아인 혐오 범죄가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고요.”

건하가 입 안의 음식물을 삼키자 목울대가 느리게 솟으며 움직였다.

“강훈아. 네 눈에는 지금 내가 할머니와 맞서려는 것처럼 보여?”

“네? 무슨 말씀이신지.”

“너 머리 좋잖아. 무슨 뜻인지 모르지도 않을 거고. 설마 너도 할머니가 괴변처럼 늘어놓는 미신 따위 믿는 거 아니지?”

건하의 말에 강훈이 선뜻 대답을 못 했다.

“한 번쯤은 선택의 기회를 줘야 하는 게 공평하지 않아?”

건하가 비릿한 미소를 머금었다.

“다시 내 눈앞에서 사라질 생각은 못 할 테니.”

태연하게 말을 내뱉는 백건하의 얼굴에는 어떤 균열도 찾을 수 없었다.

단정하기까지 한 그의 표정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속을 알 수 없었다.

냅킨으로 입가를 가볍게 닦은 건하는 메시지 알림음에 뒤집어 놓았던 휴대폰으로 손을 뻗었다.

강훈의 시선이 건하의 휴대폰을 응시했다.

“쉬고 싶은데?”

무언가 찜찜한 생각이 들었지만 강훈은 이내 몸을 돌려 룸을 나갔다.

***

하은은 해변에서 제법 떨어진 유흥가 주변에 숙소를 구했다. 호텔은 가격이 비싸 에어비엔비를 통해 저렴한 숙소를 미리 예약해 놓았지만 숙소를 찾기까지 예상보다 시간이 오래 걸렸다.

사진으로 본 숙소 주변의 모습과 판이하게 달라 하은은 당황했다.

밤이 되니 지나다니는 사람도 거의 없고 거리는 조용했다. 간혹 멀리서 들리는 소음이 여러 개가 한꺼번에 섞여 위압감마저 들었다.

벌써 몇 번째 같은 골목을 돌던 하은은 숙소 주인과 몇 번의 통화 끝에 겨우 목적지에 도착했다.

하지만 도착한 숙소 또한 허술하기만 했다. 오래된 잠금장치는 녹슬어 밖에서 조금만 힘을 주면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처럼 보였다.

호텔로 옮기기도 이미 늦은 시간이었고 위험해 보이는 밤거리를 다시 헤맬 용기도 나지 않았다.

오늘 하루만 이곳에서 지내다가 내일 다른 숙소를 알아볼 생각이었다.

삐그덕 소리 나는 낡은 침대에 앉았을 때 비로소 혼자 남겨진 것에 대한 두려움이 밀려왔다.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은 오롯이 혼자였다.

하지만 기대한 만큼의 해방감이나 완벽한 자유에 대한 감흥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막연히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만 가지고 왔기 때문에 앞으로 그녀가 이곳에서 어떻게 생활할지에 대한 아무런 계획도 없었다.

하은은 의지하듯이 끌어안고 있던 배낭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문득 백건하는 지금 어떤 표정일지 생각해 보았다.

공항에서 잠깐 마주쳤던 시선, 그리고 외면하던 백건하를 떠올렸다.

그도 그녀가 사라지길 바란 것은 아닐까? 두 사람 중에 누구도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도 그녀도 똑같이 주변에 떠밀려 여기까지 온 것이었다.

많은 생각들이 한꺼번에 몰아쳤지만 어느 순간 하은의 고개가 아래로 꺾였다.

출국하기 며칠 전부터 거의 잠을 못 잔 상태였고 비행기 안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잠들지 않겠다는 의지와 상관없이 어느새 깊은 잠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쿵쿵.

희미하게 들려오는 소음이 점점 선명해졌다.

번쩍 눈을 뜬 하은은 밖의 소란에 잠시 멍한 상태였다.

아직 잠이 깨지 않아 머릿속이 흐릿했고 캄캄한 내부는 초점마저 정확하지 않았다.

밖에서 욕설처럼 내뱉는 여러 명의 목소리가 들렸다. 손잡이를 돌리고 강하게 내리치는 소리가 그녀의 룸 앞이라는 것을 깨달은 순간 요란한 소음과 함께 문이 열렸다.

어둠 속으로 들어오는 거대한 몸집이 괴물처럼 보였다.

몸의 기운이 전부 빠져나간 듯이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한 채 하은은 부들거리며 떨어댔다.

비명을 지르려는 순간 재빠른 움직임이 그녀의 입을 막아 거칠게 바닥으로 내동댕이쳤다.

“Close your mouth before I kill you!”

(죽여버리기 전에 입 다물어!)

거대한 덩치의 남자들 중 하나가 하은의 배낭을 열어 안을 뒤지기 시작했다.

현금 뭉치를 발견한 남자의 눈이 희번덕하게 빛나더니 하은을 압박하고 있는 남자에게 눈짓을 했다.

알 수 없는 말로 중얼거린 남자가 순식간에 하은의 몸을 뒤집고 위에 올라탔다.

공포로 벌어진 하은의 동공이 흔들리며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하아, 바싹 말라비틀어진 몸인 줄 알았더니 제법인데?”

남자의 커다랗고 두툼한 손이 하은의 옷을 젖히고 들어와 젖가슴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정돈되지 않은 남자의 호흡이 거칠게 움직였다.

“아, 씨발. 하기도 전에 싸겠네.”

여전히 하은의 입을 틀어막은 채로 젖가슴을 움켜쥐던 남자의 손이 다급하게 아래로 내려가 바지 지퍼를 내렸다.

하은은 거칠게 몸을 움직이며 남자를 밀어내려 저항했다.

목에 핏대를 세우고 빨갛게 변한 얼굴이 좌우로 움직이며 남자에게 강하게 저항하기 시작했다.

거대한 공포와 절망이 그녀를 덮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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