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화 (13/62)

12.

새해가 시작되고 한 회장의 건강에 이상이 생기면서 그룹 후계 작업이 본격화되기 시작했다.

한 회장을 대신해 백건하가 이른 아침 매일 정해진 시간에 출근을 했다.

하은의 눈에는 백건하의 출근길이 언제나 야단법석이었다. 백건하가 타고 있는 차의 앞뒤로 각각 2대의 경호 차량이 뒤를 이었고 백건하가 나오기 전까지 경호원들이 줄지어 대기했다.

누가 보면 백건하가 조폭 두목쯤 되어 보였다.

하은에게는 낯선 풍경이었지만 백건하는 익숙한 듯 보였다.

2층 창문에서 백건하가 출근하는 것을 내려다보다 백건하와 눈이 마주친 이후로는 출근 시간에 창가를 서성이는 일은 없었다.

그저 밖이 소란스러우면 백건하가 출근 중이었고 차가 멀어지고 난 다음에야 창가에 서서 지켜보았다.

3월이 되고 하은은 대학에 입학했다.

행사가 많아졌지만 하은은 교내 행사에만 참석할 수 있었다. 교외로 나가게 되거나 숙박하는 일정이 생기면 하은은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불참했다. 한 회장의 손이 미치지 않는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언제나 하은보다 한발 앞서 움직여서 그녀를 관리했다.

어떻게 보면 큰아버지 집에 있을 때보다 더 엄격한 관리를 받고 있다고 봐야 했다.

모든 것에 제약이 뒤따랐다. 수업을 마치고 나오면 입구에서부터 그녀를 뒤따르는 경호원이 있었다. 사람들 눈에 띄지 않게 움직이고 있었지만 하은의 눈에는 어디서고 보였다.

숨이 막힐 지경이었지만 곧 6월이 다가오고 있었기에 참을 수 있었다.

모처럼의 주말 아침, 하은은 기분 좋게 잠에서 깼다.

하늘은 맑았고 창을 통해 들어오는 바람도 시원했으며 요란하게 울리는 새의 지저귐도 음악 같았다.

오늘, 하은의 스무 번째 생일이었다.

똑똑.

노크 소리와 함께 얼마쯤 시간을 두고 문이 열렸다.

“식사 준비 다 되었습니다. 준비하시고 내려오세요. 회장님 기다리고 계십니다.”

하은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메이드가 문을 닫고 나갔다.

가볍게 스트레칭을 한 하은은 기분 좋게 욕실로 들어가 샤워를 했다.

오늘은 어떤 안 좋은 일이 생겨도 다 받아들이고 웃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은이 지금까지 얼마나 오늘을 기다렸는지 모른다.

아무리 힘든 일이 있어도, 포기하고 싶은 날들이 수도 없이 많았지만 참고 견딜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오늘이 있기 위함이었다.

어디든 훨훨 날아가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했다. 감시의 눈치도 없이 마음 내키는 곳 어디든 갈 수 있는 모습은 상상만 해도 벅찼다.

준비를 마치고 아래층으로 내려가니 한 회장도 이제 막 다이닝룸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한 회장과 나란히 서있는 백건하의 모습도 보였다.

식탁으로 다가온 한 회장이 의자를 꺼내 앉자 기다렸다는 듯이 건하와 하은도 자리에 앉았다.

한 회장이 흐뭇한 시선으로 건하와 하은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하은이 얼굴이 좋아 보이는구나. 듣자 하니 오늘이 생일이라고?”

한 회장의 말에 하은의 눈에 그제야 식탁 위의 음식이 들어왔다.

미역국을 시작으로 식탁 위는 생일상에 기본으로 들어가는 음식들이 있었다.

갈비찜, 잡채, 굴비구이, 오색나물, 화려한 색감의 샐러드, 각종 밑반찬들.

생일은 늘 혼자 시간을 보냈다. 한 번도 오늘처럼 생일이라고 미역국을 먹은 적도 없었다.

축하는 그녀가 자신에게 건네는 말 한마디가 전부였다.

‘장하은, 생일 축하해.’

하은이 시선을 들어 한 회장을 응시했다.

“저녁은 건하하고 둘이서 밖에서 먹고 오도록 해라. 늙은이가 끼면 아무래도 불편한 자리가 될 것 같기도 하고 마침 나도 저녁 약속이 있기도 해서. 선물은 뭘 사야 할지 몰라서 윤 실장 도움을 좀 받았는데. 마음에 들는지 모르겠구나. 어찌 되었든 생일 축하한다.”

한 회장과 마주한 하은의 시선이 다시 식탁 위의 화려한 음식으로 향했다.

음식은 새로울 것이 없었다. 일상이 반복되는 것처럼 식탁 위의 반찬은 언제나 풍성하고 화려했다.

몸에 좋은 음식, 구하기 힘든 귀한 음식, 값비싼 음식들로 식탁은 변함없이 늘 그랬다.

그런데 오늘은 온전히 하은을 위한 음식들이었다. 누구를 위한 것도 아닌 그녀를 위한.

목 끝이 따끔거리고 목이 타는 듯이 아팠지만 겉으로 드러내지 않으려고 마른 침을 삼켰다.

미역국을 먹고 있던 백건하와 눈이 마주쳤다.

오늘 그녀에게 어떤 불행이 있어도 모두 기쁘고 행복하게 받아들이겠다는 아침의 다짐을 상기했다. 마주친 백건하의 눈빛이 다른 날보다 고요해 보였다. 아마 기분 탓인지도 몰랐다.

긍정의 힘은 강하다고 했으니까, 그러려고 마음먹었으니 백건하의 냉한 눈길도 그래 보였을 것이다.

식탁에 둘러앉은 세 사람은 말없이 식사에 열중했다.

“6시에 내려와.”

아침 식사를 끝내고 다이닝룸을 나서는 하은을 붙잡은 것은 건하의 말이었다.

무슨 뜻인가 싶어 뒤를 돌아보았을 때 백건하가 그녀를 지나쳐 갔다.

하은은 재빨리 건하의 뒤를 따랐다.

“굳이 그럴 필요 없잖아요. 그냥 하신 말씀이니 시간 낭비할 필요 없어요.”

“우리 할머니 사전에 그냥, 대충. 그런 거 없어. 이미 레스토랑 예약 끝냈어. 아마 코스에 나오는 요리까지 전부 정했을 거야.”

건하의 말에 하은이 곤란한 표정을 했다.

“생일이라면서? 가서 맛있게 먹고 오면 땡큐 아닌가?”

“아침 먹은 걸로 충분해요.”

“그럼 가서 말하든가!”

앞서 걷던 건하가 멈춰 서서 뒤를 돌아보았다.

“아! 몸 사려야 되는 거 아닌가? 눈 밖에 나면 곤란해질 텐데?”

알 수 없는 말을 남기고 건하가 홀을 빠른 걸음으로 지나갔다.

남겨진 하은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건하의 뒷모습을 눈으로 좇았다.

뭘 알기라도 한 사람 같은 말투다.

그녀의 머릿속을 헤집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다 아는 것 같은 말투.

그게 아니라는 것을 알지만 그래도 무슨 이유인지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하지만 백건하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 괜히 한 회장의 비위를 거스를 이유가 없었다.

방으로 돌아오니 침대 위에 커다란 상자가 놓여있었다.

한 회장이 선물이라고 했던 것이 떠올라 하은은 상자의 매듭을 풀었다.

상자 안에는 원피스와 구두, 그리고 가방까지 들어있었다.

명품 로고가 선명하게 박힌 가방과 액세서리까지 전부 풀세트였다.

레스토랑과 식사 메뉴까지 전부 정해 놓았다고 하더니 오늘 입고 갈 옷까지 미리 준비한 것을 보면 한 회장의 치밀함이 그녀가 생각했던 이상이었다.

등골이 서늘해지며 한기가 들었다. 하은은 손을 교차해 올려 팔을 몇 번이고 쓰다듬었다.

만만하게 볼 상대가 아니다.

그저 막연히 이곳을 벗어나야겠다는 생각이 아닌 그녀도 한 회장만큼이나 치밀한 계획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은의 고민이 깊어졌다.

***

6시에 내려가니 백건하가 아래층 홀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긴 다리와 슈트 안의 팽팽한 근육이 셔츠 위로도 견고하게 드러나 보였다.

삐딱한 시선이 하은의 위아래를 훑고 지나가는 동안 하은은 백건하의 눈길을 무시하려고 했다. 한 회장이 선물한 원피스와 구두, 가방에 이어링과 목걸이까지 풀로 장착한 모습은 그녀가 보아도 낯설었다.

백건하가 어떤 표정을 하든 상관없다고 생각했는데 달라붙는 시선이 신경 쓰였다.

대기하고 있던 차에 오르자 백건하도 곧장 그녀의 옆좌석을 차지하고 앉았다.

공간이 넓은 차인데도 불구하고 옆에 앉은 백건하의 존재가 온통 차지하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러지 않으려고 해도 백건하의 존재감만으로 긴장이 되었다.

긴장감이 빽빽하게 조여드는 것 같아 하은은 가만히 앉아있는데도 불구하고 숨이 찼다.

약속이나 한 것처럼 두 사람 다 말이 없었다.

한집에 살면서도 얼굴 부딪치는 일이 거의 없어 어쩌다 만나면 안녕, 이라는 인사라도 건네야 할 판이다. 애초에 백건하와는 말을 섞지 않는 편이 서로에게 편하다.

제법 긴 진입로를 벗어나 정문을 지난 차는 곧장 도로 위를 달렸다.

조수석은 평소 백건하 옆을 그림자처럼 지키는 낯익은 얼굴이 자리하고 있었다.

백건하는 남자를 강훈이라고 불렀고 나이는 두 사람 다 엇비슷해 보였다. 그러고 보니 큰아버지 집에서 짐을 싸고 나오던 날에도 앞에 앉은 남자가 그녀를 데리러 왔었다.

백미러로 보고 있는 것을 알아챈 강훈이 시선을 들자 하은과 눈이 마주쳤다. 하은은 자연스럽게 시선을 돌려 창밖을 보았다.

어둑해진 거리는 하나둘 가로등이 켜지고 네온사인 불빛들이 장식처럼 반짝였다.

도로를 벗어난 차량이 도착한 곳은 도심에 위치한 레스토랑이었다.

‘street’.

화려한 건물 외관에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간판은 소박했다. 2층 건물 전체가 레스토랑이었고 백건하를 따라 안내받은 곳은 1층 별관이었다.

지배인이 직접 백건하의 슈트를 받아 옷걸이에 걸었다.

정중하게 손을 모으고 인사를 한 뒤 곧장 룸을 나서는 것을 하은이 지켜보았다.

하얀 와이셔츠 차림의 건하가 하은의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건하가 물 컵을 들고 가볍게 목을 축였다. 두 사람 사이에 어색하게 흐르는 공기는 하은만이 느끼는 것 같았다. 백건하는 편안한 자세로 긴 다리를 겹치고 앉아 타이 매듭을 끌어당겨 느슨하게 했다.

시선을 돌려 확인하지 않아도 남자의 눈이 하은을 향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몸이 긴장하며 뻣뻣하게 굳었다.

룸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리고 곧장 사전에 예약한 음식이 나왔다.

도대체 여기서 왜 이렇게 불편한 식사를 하는지 하은은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불편한 감정이 그녀에게 국한된 일방적인 것이라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백건하는 어디서고 저 편한 대로 하는 사람 같으니 이런 자리가 그녀만큼 불편해 보이지도 않았다.

직원이 얼음 통에서 와인을 꺼내어 앞에 놓인 잔을 채웠다.

쪼르르, 와인을 따르는 소리가 조용하게 공간을 가르며 침묵을 깨뜨렸다.

직원이 나가고 다시 공간은 침묵에 휩싸였다.

“축하해.”

침묵을 깨뜨린 건하는 와인 잔을 들어 하은에게로 가까이 가져갔다.

백건하의 눈짓에 하은이 마지못해 잔을 들어 백건하의 잔에 가볍게 부딪쳤다.

“앞으로도 별 탈 없이 살길 바라.”

백건하다운 생일 덕담이다. 하은은 피식 웃으며 와인을 한 모금 삼켰다.

“생일이라고 유난 떠는 거 내 취향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내가 그러고 있는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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