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화 (12/62)

11.

‘건하야! 할미 소원이다. 하은이 멀리 떼어 놓지 말고 꼭 가까이 두도록 해. 그게 뭐가 되었든 너를 살아있게 해준다고 하니 꼭 붙어있어. 알겠지?’

사람 목숨 두고 도박이라니! 우습기도 하고 밖으로 뱉어내기에도 창피한 일이었다.

하지만 할머니 소원이라니 건하도 다른 방법이 없었다. 무시하고 없는 사람 취급하면 지쳐서라도 제 발로 걸어 나가겠거니 생각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여자는 이 집에 적응해 나가고 있는 것이 보였다. 언뜻 보면 즐기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편안해 보이는 것도 같다.

건하가 식사 후에 습관처럼 숲을 산책했던 것도 하은과 겹쳤다. 그렇다고 매일 하던 것을 그만두는 것도 우스웠다.

이곳은 그가 나고 자란 그의 집이었다. 이방인은 그 여자, 장하은이다.

그런데 자꾸 하은의 눈치를 보고 있는 것은 건하 자신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어?”

진욱의 낮은 외침에 건하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창문 밖으로 향했다.

이제 막 하은이 출입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는 것이 보였다.

진욱이 수저를 내려놓고 벌떡 일어섰다.

“건하야! 많이 먹어! 형님은 작업 좀 하고 올게.”

신이 난 표정으로 진욱이 하은의 뒤를 따라 나가는 것을 건하가 지켜보았다.

그러고는 시큰둥한 표정으로 하고 있던 식사를 이어갔다.

무슨 이유인지 입 안에 들어있는 밥이 까끌거렸다. 모래알을 잔뜩 집어넣고 씹는 기분이었다.

건하의 시선이 다시 창밖으로 보이는 하은과 뒤를 따르는 진욱에게로 모였다.

***

“운동 뭐 좋아해요? 수영? 테니스? 골프? 별로 궁금해하는 것 같지는 않지만 난 수영하는 거 좋아해요. 단련된 몸은 수영 덕분이죠.”

진욱은 하은의 옆에 가까이 붙어 걸으며 거의 10분 동안 혼잣말을 했다.

처음에는 그러려니 싶다가 시간이 지나니 하은의 길어진 침묵에 점점 화가 나기 시작했다.

그래도 명색이 어디 내놔도 뒤지지 않을 정도의 외모로 여자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웬만한 여자들은 진욱이 마음만 먹으면 대부분이 그에게 넘어왔다.

가끔 건하의 절친인 이유로 건하에게 어떻게 해보려는 여자들이 진욱을 이용한 적도 있기는 했지만 그것만 제외하면 진욱도 수재 소리 들을 정도로 공부도 잘했고 잘생긴 외모까지 더해 여자들이 따랐다.

“와! 진짜 심한 거 아닌가? 아무리 그래도 옆에서 이렇게까지 하는데 한 번쯤은 뭐라도 말을 해야 하는 거 아닌가?”

가볍게 분노를 쏟아냈지만 하은은 아무런 반응이 없이 그저 제 갈 길만 가고 있었다.

“저기요!”

진욱이 멈춘 바람에 하은과의 거리가 벌어져 진욱은 다시 빠른 걸음으로 하은의 옆으로 다가섰다.

“이건 쫌 아니지…….”

말을 하려던 진욱이 무언가를 발견하고 인상을 썼다.

하은의 귀에 꽂혀있는 무선 이어폰을 그제야 눈치챘다.

진욱이 얼떨결에 하은의 팔을 강하게 잡았다.

“진짜 너무하네! 이어폰까지 끼고 사람 개무시하는 거 쫌 아니지 않나?”

진욱에게 잡힌 팔을 떼어내려고 하는 사이 진욱은 재빨리 하은의 귀에 꽂혀있던 이어폰을 뺐다.

하은의 겁먹은 눈이 진욱을 향했다. 동그랗고 맑은 눈, 언뜻 번져있는 물기가 진욱을 사로잡았다.

호수 같다고 생각했다. 하은을 잡고 있던 진욱의 손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미안, 허락도 없이 잡으려던 건 아닌데 너무 대답을 안 해줘서 나도 모르게 그만.”

진욱이 쩔쩔매며 변명처럼 말이 길어졌다.

“대답 안 하면 하기 싫은가보다, 그런 생각은 안 들어요? 굳이 여기까지 따라오는 것도 아니지 않나요?”

하은의 대답에 진욱이 잠깐 멍한 얼굴을 했다. 뭐라고 말을 할 줄 알았던 진욱이 침묵하자 하은은 머쓱한 표정으로 진욱을 올려다보았다.

“와! 말도 하네. 하도 말이 없길래 인형인 줄.”

진욱의 말에 기가 차다는 표정으로 하은이 등을 돌려 걷기 시작했다.

숲으로 향하는 것이 아닌 집으로 돌아가는 방향이었다.

“왜요? 좀 더 걷지.”

“됐어요, 누구 때문에 기분을 망쳐서.”

“그건 진짜 미안해요. 너무 말을 안 해주니까 오기가 생겨서. 아! 그것도 진짜 미안해요.”

진욱의 거침없이 이어지는 수다에 하은이 걸음을 빨리했다.

“미안하면 안 하면 되잖아요.”

“그렇죠, 안 하면 되죠. 근데 마음에 드는 사람이 눈앞에 있으면 그게 잘 안 돼서.”

진욱의 말에 보란 듯이 하은이 한숨을 내쉬었다.

“여자 꼬시는 게 취미인 것 같은데 상대 잘못 고른 것 같군요. 나는 그쪽 관심 없고 앞으로 이런 식으로 방해받고 싶지도 않아요.”

하은에게 딱 잘라 거절당한 것 같기는 한데 진욱은 싫지가 않았다. 말 한마디 붙이기 어려운 여자한테 지금 이렇게 길게 이어진 문장식 답변을 들은 게 기분이 좋아서이기도 했다.

“뭐 어쨌든 오늘 안면 텄으니 다음에 보면 아는 척 좀 해요, 장하은 씨.”

자신의 이름이 진욱의 입을 통해 불리자 하은이 그제야 걸음을 멈췄다.

빤히 보는 하은의 눈에 여러 개의 물음표가 보였다.

잠깐 동안이었지만 시간이 꽤 오래 지나간 것 같았다. 침묵하며 진욱을 보는 하은의 얼굴에 여러 개의 표정이 스쳐 갔다.

하지만 하은이 더는 말하고 싶지 않다는 것을 진욱이 알아챘다.

진욱은 웃으며 하은에게 먼저 앞서 가라고 손짓을 하며 길을 내어주었다.

***

“자고 가도 되지?”

진욱이 건하의 침대 위에 벌렁 드러누웠다.

“방도 많은데, 그중에 하나 골라서 자고 간다?”

이미 건하의 허락은 안중에도 없어 보인 진욱이 머리 뒤로 팔베개를 하고서는 천장을 응시했다.

진욱의 입가에 전에 없이 미소가 번져있었다.

“신선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진욱은 알 수 없는 말을 했다.

휴대폰 화면을 하릴없이 보고 있던 건하가 진욱을 힐끗 쳐다보았다.

“그 애 말이야, 장하은. 가까이서 보니까 은근 매력 있던데?”

얼마간 침묵이 이어졌다.

“그래서, 어쩌려고?”

건하가 은근히 관심을 보이자 진욱은 옆으로 몸을 돌려 모로 누웠다.

“뭘 어쩌겠다는 건 아닌데, 이상하게 자꾸 생각이 나네.”

말없이 걷던 옆 모습, 바람에 헝클어진 머리, 얼떨결에 팔을 잡았던 감촉, 그리고 무엇보다 호수 같았던 그 눈.

진욱의 머릿속은 온통 장하은에 대한 생각뿐이었다.

장시간 이어지는 진욱의 침묵에 휴대폰을 보고 있던 건하가 얼굴을 들고 쳐다보았다.

미묘하지만 다른 표정, 늘 여자를 바꿔가며 장난치듯 즐기던 얼굴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그제야 시큰둥하게 반응하던 건하의 눈빛이 깊어졌다.

고개를 가볍게 뒤로 꺾고 세웠다가 진욱을 응시했다.

“진욱아.”

“어, 어.”

건하의 낮은 음성에 진욱이 성의 없이 대답했다.

“여기는 내 영역이야. 그게 뭐가 됐든 내 허락 없이 밖으로 못 나가. 그게 누구든. 너라도.”

건하의 말에 진욱이 긴장한 표정으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핏줄이 도드라지게 선 건하의 이마가 불빛 아래에 있어서인지 붉은 열기가 느껴졌다.

건하가 친구이기는 했지만 친구들 사이에서도 서열은 분명하게 있었다.

그중에서 줄곧 변하지 않았던 독보적 위치, 서열 1위 백건하.

겉으로는 친한 듯 보이지만 건하의 눈치를 보는 것은 일종의 습관이 되어버렸다.

건하의 말 한마디면 세상을 쓸어버릴 정도의 권력을 가진 한 회장의 존재가 가장 위협적인 것은 맞지만 그것보다 백건하의 존재만으로 충분했다.

웃고 있든 그렇지 않든 가끔 백건하와 정면으로 시선이 마주치는 일이 있을 때면 어딘지 모르게 등골이 서늘해졌다. 눈빛만으로도 상대를 제압할 수 있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건하를 보면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 건하의 눈빛이 그랬다.

속을 알 수 없지만 말 한마디로도 충분했다.

“생각해 보니까 내일 일찍 약속이 있어서, 이만 가야겠다.”

건하의 눈치를 보며 진욱이 침대에서 일어나 외투를 챙겼다. 건하는 여전히 휴대폰 화면을 터치하며 가벼운 게임을 즐기고 있었다.

“갈게.”

건하가 휴대폰에서 시선을 떼고 진욱을 힐끗 쳐다보았다.

“그럴래?”

조금 전까지 두 사람 사이에 흐르던 긴장감은 없었던 것 같은 표정으로 건하가 진욱을 향해 가볍게 손을 들었다.

“또 보자.”

“어, 그래.”

진욱이 문을 열고 나가려다 뒤를 돌아보았을 때 건하의 시선은 손에 쥐고 있는 휴대폰을 향한 채였다.

***

하은은 해가 바뀌기 전에 명문 사립대의 합격 통지서를 받았다.

사실 대학 합격은 하은에게 큰 의미가 없었다. 대학 생활에 대한 동경도 없었다.

하은에게 대학 합격은 성인으로 인정받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의미였다.

법적으로 인정하는 성인이 되기 위해서는 6개월이 남았고 그것은 아직 한 회장의 집에서 6개월을 더 견뎌내야 한다는 의미였다.

부모님이 남겨주신 재산과 수익은 신탁 회사가 관리했고 부동산의 소유권은 하은이 성인이 되는 시점에 소유권을 취득할 수 있었다. 이제 성인이 되면 그녀 스스로 재산을 관리할 수 있는 자격이 생기는 것이다.

해가 바뀌고 스무 살이 되었지만 6월이 생일인 하은은 여전히 미성년자였다.

한 회장이 신탁 회사보다 대학 등록금을 먼저 납입했다는 것을 신탁 회사의 연락을 받고서야 알았다. 신탁 회사는 매월 일정 금액의 생활비를 통장으로 입금하고 있었지만 지금까지 큰어머니가 모든 것을 관리하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도 하은의 이름으로 된 통장 전부가 큰어머니가 보관 중이라 사실상 하은은 무일푼에 불과했다.

한 회장이 필요한 데 쓰라고 카드를 주었지만 한 번도 사용한 적이 없었다. 한 회장은 집에 손님이 오면 하은을 따로 불러 손자며느리라고 소개했다. 어쩔 수 없이 한 회장의 집에 있게 되었지만 한 회장이 주는 돈을 쓰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겉으로는 하은에게 미소를 보이며 깍듯이 예의를 차리지만 하은을 보는 눈은 대개 비슷했다.

언젠가 운이 다하면 버려질 존재, 한 회장의 마음에 달렸다는 것을 그들도 아는 눈치였다.

그녀에게 남은 6개월이라는 시간은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남겨진 시간보다 몇 배는 더 길게 느껴졌다.

성인이 되면 어디로든 가장 빨리, 가장 멀리 갈 수 있는 곳을 찾고 있었다.

그러다가 우연히 롱비치 해변을 보았다. 유명 사진작가 전시회에서 본 그곳은 주제가 ‘freedom‘이었다.

파도가 일렁이고 해변을 거니는 사람들의 표정이 행복해 보이던 곳.

그녀가 한 번도 가져보지 못했던 진정한 자유가 그 사람들의 얼굴에서 느껴졌다.

롱비치는 하은의 꿈이 되었다.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곳에 대한 동경, 낙원 같은 곳이었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과거를 버리고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곳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