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옆에 들러붙어 쉬지 않고 말을 거는 남자가 성가셨지만 하은은 겉으로 아무런 내색 없이 습관처럼 무표정을 유지했다. 속의 감정을 타인에게 보이지 않고 지금처럼 무표정을 유지하는 것이 편하다. 그녀에게 호기심을 보이다가 어느 시점에 가서는 결국 혼자 지치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그 이후로는 곁으로 다가오지 않고 일정한 거리를 유지해서 편했다.
하은의 옆에 친구가 몇 없는 이유였다.
“여기 사는 건 맞는 것 같고, 언제부터? 왜? 백건하하고 무슨 관계야?”
도무지 멈출 것 같지 않은 남자의 질문세례에서 벗어나고 싶어 하은은 걸음을 빨리했다.
“둘이 세트로 똑같네, 진짜. 야! 백건하! 얘 누구야? 너하고 하는 짓이 똑같아.”
하은이 걸음을 멈췄다.
하은의 옆에 들러붙어 걷던 진욱이 몇 걸음 더 나아가 멈춰 하은을 쳐다보았다.
기분 나쁜 표정, 못마땅한 눈으로 하은이 진욱을 노려보았다.
“어? 왜? 내가 뭐 잘못했어?”
냉한 눈으로 보는 하은에게 진욱이 멋쩍은 표정을 했다.
그러고는 무슨 생각이 든 건지 진욱이 별안간 소리 내어 웃었다. 배꼽을 잡고 숨이 넘어갈 것처럼 웃던 진욱이 하은에게 다가왔다.
“왜? 백건하랑 비슷하다고 해서? 그게 기분 나빠서 그래?”
하은이 대답을 하지 않고 시선을 돌렸다.
“너 진짜 건하 싫어하는구나! 왜? 저 새끼가 못되게 굴어?”
왜 사람은 중간이 없는 것일까? 백건하는 말이 너무 없고 백건하 친구는 말이 너무 많아서 정신없고.
하은이 대답할 마음이 전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을 텐데 남자는 굴하지 않고 질문을 한다.
하은은 한숨을 내쉬고 앞을 막아선 남자를 비켜 걸으며 현관문 앞으로 갔다.
지문 인식으로 현관문이 쉽게 열리는 것을 진욱이 놀란 눈으로 보고 서있었다.
하은이 들어가자 현관문이 소리 내어 닫혔다.
“와! 대박! 진짜 여기 살아?”
진욱의 놀란 눈이 곧장 걸어오는 백건하에게로 향했다.
“말 안 해줄 거야? ”
성가신 얼굴로 진욱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부적이야.”
생뚱맞은 건하의 말에 진욱이 멀뚱한 표정을 했다.
“부적? 그게 뭔데?”
그러고는 얼마쯤 아! 하는 낮은 소리를 내며 이해했다는 듯 2층을 올려다보았다.
치밀하고 냉철한 사업가로 소문난 한 회장의 유일한 아킬레스건, 백건하.
백씨 집안의 사내들이 대부분 젊은 나이에 요절한 것을 두고 한 회장은 건하의 주변에 위험이 될만한 것들은 일찌감치 멀리하게 했다. 친구도 가려서 사귀게 했고 건하가 움직이면 주변에 장막을 세우듯이 경호원이 뒤를 따르게 했다. 그것도 모자라 집안에 무속인까지 들였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물론 확인된 바는 없었지만 한 회장이라면 충분히 그럴만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살아있는 부적이라니! 듣고도 믿기지 않아 진욱은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는 건하의 뒤를 바싹 쫓았다.
“그래서 몇 살인데?”
만족할 만한 대답을 들을 때까지 진욱은 질문을 멈출 생각이 없어 보였다.
끈질기게 따라붙는 진욱의 시선을 피하며 건하는 냉장고에서 이온 음료를 꺼냈다.
“마실래?”
진욱이 대답도 하기 전에 건하가 툭, 하고 이온 음료를 던졌다.
날렵하게 음료를 받은 진욱이 힘들이지 않고 뚜껑을 따서 한 모금 마셨다.
그러는 사이에도 진욱은 건하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1학년? 2학년? 그 위로는 안 보이던데.”
“고3. 이번에 수능 쳤어.”
끈질긴 진욱의 물음에 지친 건하가 내뱉었다.
“대박! 고딩이라고? 진짜야?”
고등학생이라는 말에 잠시 놀랐던 진욱이 시큰둥한 얼굴을 했다.
곧 해가 바뀌면 스무 살이 될 테고 그래봐야 한 달 차이였다. 올해도 겨우 한 달밖에 남지 않았다.
“부모는 있을 거 아니야. 아무리 한 회장이라도 마음대로 집에 데려올 수 없는 거 아닌가? 고아도 아니고.”
건하가 대답이 없자 진욱이 눈치를 살폈다.
“고아라고?”
진욱의 말에 건하가 싸늘한 시선으로 대응하듯 쳐다보았다.
“나 들으라고 하는 말이야?”
“설마!”
진욱은 자신이 실수를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부모가 없다는 사실에 건하가 신경 쓰진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래도 되도록 건하의 앞에서는 말을 삼갔다.
건하의 반응을 보니 살아있는 부적이 고아라는 것이 분명했다. 그러지 않고서야 부모가 버젓이 살아있는데도 불구하고 쉽게 집에까지 들이지 못했을 것이다.
“별채 건물을 그 애 혼자 쓰는 거야?”
“그 얘기 재미없는데 이제 그만하지?”
칼끝처럼 예리하고 단호한 건하의 말투에 진욱은 입을 열려다 그대로 다물었다.
건하의 몇 안 되는 친구 중 한 명, 한 회장이 인정한 친구였다.
어려서부터 집안끼리 가까운 이유도 있지만 진욱의 아버지와 돌아가신 건하의 아버지가 죽마고우라 자연스럽게 진욱과 건하도 가까워졌다.
하지만 둘의 성격은 판이하게 달랐다.
좀처럼 속을 드러내지 않고 말이 없는 건하에 비해 진욱은 속을 감추지 않고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솔직한 편이라 두 사람은 친구라도 극과 극이었다.
“예쁘던데?”
아무 생각 없이 툭 던진 진욱의 말에 건하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건하가 천천히 마른침을 넘기자 선명한 목울대가 가볍게 흔들렸다. 진욱이 건하를 빤히 응시했다.
겉으로는 아무런 변화가 없다. 건하가 어떤 반응을 보인 것도 아니고 평소와 다름없는 시니컬한 표정도 그대로였다.
그런데 어딘지 모르게 평소와 느낌이 달랐다. 목덜미 뒤끝이 서늘해지는 기분, 어디서 비롯된 건지 알 수 없었다.
“궁금하네, 어떤 애인지.”
무슨 뜻이냐는 듯 건하가 눈짓으로 물었다.
“부적 말이야. 분위기가 묘하게 시선을 끌어.”
건하가 시큰둥하게 반응하며 창문을 열었다. 숲에서 불어오는 서늘한 바람이 방안으로 밀려 들어왔다.
진욱의 착각이 분명했다. 건하가 살아있는 부적에게 관심을 보일 이유가 없었다.
“허락 안 받아도 되지?”
“할머니한테 걸리지만 않으면.”
나른한 목소리로 건하가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눈이 시리도록 하늘이 푸르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이 눈이 부신 건하가 눈을 반쯤 감았다.
“1시간이면 충분해, 그 정도면 다들 넘어오거든.”
진욱의 자신 있는 말투에 건하가 싱긋 웃었다. 원하는 마음대로 해보라는 듯.
등을 보이고 서있는 진욱의 눈에 건하의 미소가 보일 리가 없었다.
***
하은이 저녁을 먹기 위해 식탁 의자에 앉았을 때 다이닝룸으로 들어서는 백건하의 친구와 시선이 마주쳤다.
하은은 조용히 시선을 내리고 수저를 집었다.
남자는 보란 듯이 하은의 맞은편 의자를 빼고 앉았다.
“배고픈데, 내 것도 좀 내줘요. 건하는 별로 생각이 없다네.”
하은의 식사 시중을 들고 있던 메이드가 진욱의 말에 주방으로 들어갔다.
곧이어 쟁반에 음식을 든 메이드가 진욱의 앞에 그릇을 놓았다. 짧은 사이 금세 진욱의 앞에 상이 차려졌다.
진욱이 하은의 눈치를 힐끗 보며 수저를 들었다.
“까먹었을까 봐 다시 말해주는데 내 이름, 남진욱이야. 보스턴대 다니고 있는데 방학이라 귀국했고, 건하하고는 어렸을 때부터 친구라 대충 여기를 내 집처럼 드나드는 정도의 친분? 또 뭐가 있지? 소개하는 건 좀 서툴러서…….”
진욱이 말을 하는 도중에 하은이 수저를 내려놓고 일어섰다. 밥그릇은 반쯤 비워진 상태였다.
“뭐지? 나 투명인간인가?”
하은이 들으라는 듯이 진욱의 큰 목소리가 실내를 울렸다.
다이닝룸을 나서는 하은의 뒷모습을 보고 있던 진욱이 손에서 수저를 내려놓았다.
“하! 이것들이 쌍으로 말을 아끼네. 와! 답답이들! 무섭게도 건하 새끼하고 똑 닮았어!”
진욱은 답답하다는 듯 주먹으로 가볍게 가슴을 몇 번 쳤다.
하은이 나가고 얼마 뒤 건하가 들어왔다.
“식사 드릴까요?”
메이드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건하가 조금 전 하은이 앉았던 의자를 빼냈다.
“가져다가 붙여 놓은 것 같아. 니네 둘.”
조롱하는 것 같은 진욱의 말에 건하의 입가게 조소가 번졌다.
“아까 못봤어? 닮았다니까 엄청 기분 나빠하던데.”
“너는? 상관없고?”
진욱의 물음에 건하가 고개를 가볍게 으쓱했다.
“별로, 관심이 없어서.”
식사 도중 건하를 빤히 쳐다보던 진욱이 이죽거렸다.
“좋겠다! 관심 없어서. 내가 너 친구로서 걱정돼서 하는 말인데 그렇게 평생 여자한테 목석처럼 굴면 정말 필요할 때 기능이 제대로 안 된다고 들었거든. 가끔 기름칠도 좀 하고 그래야지 쌩쌩 잘 달리는 법이야!”
진욱이 손가락을 튕기며 남녀 간 섹스를 하는 흉내를 냈다.
“미친 새끼!”
“오랜만에 설레는 느낌, 나쁘지 않아.”
진욱이 심장을 부여잡으며 우스개스러운 행동을 했다.
건하는 메이드가 그의 앞에 음식을 놓는 것을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하지만 머릿속은 숲에서 산책을 마치고 나오던 하은을 떠올리고 있었다.
매일 비슷한 시간에 하은은 집을 나와 숲을 걸었다. 꼭 미리 짜맞춘 것처럼 건하도 그 시간에 정문을 통과해서 숲길을 지나쳤다. 하은을 발견하고 차의 속도가 자연스럽게 느려졌다.
“야! 백건하! 무슨 생각해?”
진욱의 목소리에 건하의 생각이 멈췄다.
“그래서, 이름이 뭐라고?”
식사를 시작하기 전 건하는 물 컵을 들고 한 모금 삼켰다. 미지근한 물이 식도를 타고 넘어가자 뒤늦게 갈증이 느껴졌다. 물 한 컵을 다 비우고 난 뒤에 건하가 진욱을 바라보았다.
“장하은.”
건하의 목소리 끝에 낮은 울림이 느껴졌다.
장하은, 살아있는 부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