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식사를 끝내고 하은은 습관처럼 밖을 나와 숲으로 향했다.
이 집에 들어온 이후로 계절이 바뀌는 중이다.
초록의 나뭇잎이 색이 바래지며 조금씩 붉은색으로 물들고 있었다.
사계절 중에서도 가을은 너무 빨리 지나가고 곧 추운 겨울이 시작될 것이다.
숲 가까이로 다가가니 젖은 풀 냄새가 한꺼번에 훅 하고 느껴졌다. 곧 비가 시작되려는 모양이다.
멀리 보이는 산등성이에 먹구름이 가득했다. 짧게 산책을 끝낼 생각으로 하은은 여유 있게 숲으로 향했다.
‘키스하면 어떻게 나올지 궁금하네.’
백건하의 목소리가 어딘가에서 울리는 것 같아 하은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무래도 어떤 강박 관념 같은 게 생기는 모양이다. 그날 이후로 계속 백건하의 목소리가 귓가에 윙윙거리며 울렸다.
그가 자신에게 어떤 영향력이 생기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그저 같은 공간에 거주하는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길 바랐다. 하지만 무시하고 지나치기에 백건하의 존재감은 독보적이다.
얼마간 걷던 하은은 잘려나간 나무 밑동을 발견하고 다가가 앉았다.
비가 오기 직전 숲의 바람은 습하게 물기를 머금었다. 동시에 맑고 시원하게 느껴졌다.
계속 잠을 설쳐서인지 고질병처럼 느껴졌던 편두통마저 사라진 기분이었다.
사람은 환경의 동물인 게 분명하다. 이곳에서 생활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도 이미 익숙해진 것을 보면. 그래봐야 여기도 그녀가 오래 머물 곳은 아니었다.
하지만 어디를 가게 되더라도 여기만큼 멋진 산책 장소를 찾기는 쉽지 않을 것 같았다.
숲은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멀어 보였다. 한 번도 끝까지 가본 적은 없지만 아마 뒤에 보이는 산과 이어져 있을 거라는 생각은 들었다.
산의 높이를 가늠하던 하은의 눈에 숲길을 따라 걸어오는 백건하를 발견했다.
무심결에 백건하와 눈이 마주쳤고 순간 하은은 오한이 들었다. 그러지 않으려 해도 자동적으로 시선이 백건하에게 쏠렸다. 한 번도 백건하와 밖에서 본 적은 없지만 어디에서든 뜨거울 정도로 사람들의 시선을 끌 것이 분명했다.
하은이 얼굴을 찌푸렸다. 애초에 이곳은 백건하의 영역이고 그 영역을 침범한 것은 그녀였다.
그럼에도 고유 영역을 침범당한 사람처럼 하은은 불쾌한 기분이 들었다.
그냥 지나칠 줄 알았던 그가 다가와 하은의 앞에서 멈췄다.
“혹시, 나 기다려?”
뜬금없는 말에 하은은 고개를 꺾으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나뭇잎 사이로 스며든 햇살 한 줌이 백건하를 비추자 올려다보는 하은은 눈이 부셔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렇게 생각하게 만들잖아. 꼭 내 눈에 띄고 싶은 사람처럼 어딜 가도 걸리적거려.”
굳은 얼굴로 하은이 피식, 조소를 머금었다.
“자기애가 강한 사람인 줄은 알겠는데 다른 사람까지 엮으려고 하지 마. 병이 심각할 정도로 깊어 보이니까.”
비웃는 하은과 다르게 백건하는 태연한 얼굴을 했다.
“너 엄청 허술해. 자신이 완벽하게 숨긴다고 생각하겠지만 다 보여, 잊고 있나 본데 너 열아홉이야. 감정적으로 휘둘리기에 충분한 나이.”
백건하의 말에 하은이 기가 막히다는 표정을 했다.
그래서 뭐가 어떻다고? 열아홉이 뭐가 어때서 나이 운운하는 건지.
지금 그는 모든 것을 다 아는 어른 남자의 눈빛을 하고 있었다.
비웃어야 할 상황인데도 그러지 못했다. 진지하지도 그렇다고 장난기 있어 보이지도 않는 그 태연한 눈빛에 하은은 반박할 말을 잊었다.
“그래서?”
하는 말이 고작, 그래서.
상황이 불리한 것을 감지하고 하은의 뾰족했던 눈 끝이 본능적으로 내려갔다.
그러고는 백건하의 눈치를 보는 중이었다.
“건방지게 기어오르는 건 좋은데 혼자 궁상떠는 건 꼴 보기 싫어서.”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무덤덤한 말투였다.
얕잡아보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동정하는 것도 아니었다.
무슨 이유인지 모르지만 하은은 편안한 마음이 들었다. 평범한 사람들을 보는 것과 다르지 않은 백건하의 눈빛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은의 상황을 아는 사람들이 하은을 보는 눈은 한결같다.
부모 앞세운 불운한 고아를 보는 측은함과 동정심, 불길하게 보는 눈빛들.
적어도 백건하에게서는 그런 눈빛이 느껴지지 않았다.
몰랐는데 백건하는 처음부터 그녀를 보는 눈빛에 어떤 편견도 없었다.
마음이 가라앉았다. 여전히 백건하에 대한 반감은 그대로였지만.
“머릿속에 무슨 생각하는지 맞혀봐?”
몰래 비밀을 캐낸 사람 같은 얼굴로 백건하가 이죽거렸다.
하지만 하은은 숨기고 싶었던 비밀을 들킨 사람 같은 표정으로 흠칫 몸을 떨었다.
“도망치려면 일단 할머니 마음에 들어야 할 거야. 모르지? 사방이 널 감시하는 눈이라는 거. 우리 할머니 웬만해서는 누구도 안 믿어. 그러니까 네가 어딜 도망가든 손쉽게 찾아낼 분이셔. 널 완벽하게 믿게 만들고 난 뒤에 도망갈 궁리를 하라는 말이야. 어디든 완벽하게 숨을 생각이라면.”
“그런 걸 왜 알려줘?”
하은이 의심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누가 던져주는 건 불쾌해서 안 받아. 내가 원하면 가지고 말지.”
그녀를 물건 취급하는 그의 말투에 다시 하은의 눈에 분노의 불꽃이 일었다.
“조언은 고마운데 그럴 필요까지는 없었어. 나도 누가 시켜서 하는 건 안 해.”
단호한 하은의 말투에 건하가 싱긋 웃었다.
그리고 돌아서 가려던 백건하가 멈추고 돌아섰다.
“아, 그리고. 나는 어린애 관심 없어.”
백건하가 멀어져가는 것을 지켜보고 있던 하은은 그제야 머릿속에 빨간 불이 켜지며 원인을 알 수 없는 분노가 일었다.
관심 없다는 그의 말에 고마워해야 할 판인데 왜인지 그 말에 밑바닥에 가라앉아있던 화가 치솟았다.
관심 없어.
나무 사이로 습한 바람이 밀려왔다. 툭, 던지고 가버린 백건하의 말이 떠밀리듯 밀려와 머릿속에 박혔다.
가슴에도 서늘한 바람이 불었다. 한동안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앉아서 백건하가 사라진 숲을 응시했다.
나뭇잎을 스치는 바람 소리, 새의 지저귐, 멀리서 들리는 이름 모를 동물의 울음소리가 전부였다.
***
수능이 끝나고 난 뒤 열흘 정도 학교에 등교를 했다.
수업은 하지 않고 대부분의 시간에 영화를 보거나 자유 시간이 주어졌다. 오전에 수업이 끝나도 특별히 갈만한 곳이 없던 하은은 곧장 집으로 돌아왔다.
메이드의 말에 의하면 한 회장은 유럽 출장 중이었고 다음 주까지 돌아오지 않는다고 했다.
한 회장이 한 달에 한 번은 장기 출장으로 집을 비우는 게 일상이라 크고 넓은 집에 백건하 혼자 남아있었던 날들이 많았을 거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보모가 있고 메이드들이 있어서 백건하 혼자 집을 지키는 일은 없었겠지만 가족과 메이드는 엄연히 달랐다.
‘혼자 궁상떠는 건 꼴 보기 싫어서.’
숲에서 백건하가 했던 말이 다시 떠올랐다.
그에게 할머니가 계시고 그녀에게도 부모님 외에 다른 가족들이 존재한다.
그럼에도 공통점은 그도 그녀도 늘 혼자 남겨진다는 것이다.
물론 그에게는 그를 극진히 사랑하는 할머니가 존재하지만 정작 필요로 할 때 늘 곁을 지키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은은 집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크고 웅장한 집을 둘러보았다.
어디에도 온기라고는 느껴지지 않았다. 어디를 둘러보아도 번쩍번쩍 윤기 나는 대리석에 고급 샹들리에가 즐비한 내부는 마치 차가운 콘크리트 벽과 같다. 사방에서 서늘한 냉기가 느껴진다.
돈이 많든 적든 혼자 남겨졌을 때의 쓸쓸함은 누구든 마찬가지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결론을 말하면 백건하도 그녀와 다름없이 외로운 존재인 것이다.
손에 들고 있던 책을 놓고 하은은 방을 나섰다.
겨울바람이 살벌하게 볼에 닿았지만 숲으로 들어가면 촘촘하게 서있는 거대한 나무가 바람을 막아줬다. 머릿속이 복잡한 날에는 습관적으로 숲을 걸었다.
그러면 어느새 복잡한 생각들이 단순하게 정리되어 말끔해진다.
하늘에 닿은 나뭇잎은 바람에 사정없이 흔들리고 있었지만 땅을 딛고 선 굵은 나무 밑동은 아무리 세찬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고 꿋꿋하게 자리를 지켰다.
하지만 오늘따라 숲도 영하로 내려간 기온을 막아주지는 않았다. 얼마쯤 걷다가 살벌한 추위를 견디지 못하고 하은이 걸음을 돌렸다. 숲을 나와 집으로 향하던 그녀의 시야에 정문을 지나오는 차가 보였다.
화려한 은빛 색깔이 멀리서 보아도 백건하가 몰고 다니는 자동차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백건하와 부딪치고 싶지 않아 빠른 걸음으로 걸었다. 하지만 얼마 가지도 않아 그녀의 앞에 차가 멈췄다.
조수석 창문이 열리고 조수석에 앉은 낯선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뉴 페이스네? 누구?”
창문 틀에 턱을 괸 남자가 패딩 조끼를 입은 하은의 위아래를 노골적으로 훑었다.
남자의 옆으로 보이는 백건하는 못마땅한 얼굴로 정면을 보고 있었다.
“누구, 소개해 줄 사람?”
백건하만큼은 아니지만 낯선 남자도 눈에 띌 정도로 잘생겼다.
백건하도 하은도 낯선 남자의 말에 대답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친구? 애인? 친척 있다는 말은 못 들어봤고.”
백건하가 시동을 켜자 남자가 재빨리 차에서 내렸다.
못마땅한 기색이 역력한 건하의 시선이 뒤를 따랐다.
하은의 옆에 나란히 선 남자는 어림잡아 백건하와 키가 비슷했다. 하은이 걷자 옆에 바싹 붙어선 남자가 웃으며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남진욱, 내 이름이야.”
묵묵히 하은은 앞을 보고 걸었다. 진욱의 시선이 내내 하은에게 들러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백건하의 차가 두 사람을 지나쳐 쏜살같이 달려갔다. 건물 입구에 차를 세우고 곧장 차에서 내리는 백건하가 여전히 못마땅한 시선으로 하은과 진욱을 보고 서있었다.
“21살? 22살? 학생? 몇 학년? 설마 여기 사는 건 아니지?”
속사포처럼 질문을 쏟아내는 진욱의 얼굴에 점점 강한 호기심이 자리했다.
“건하 새끼가 말해줄 리 없어서 묻는데 진짜 누구야?”
백건하가 말할 생각이 없으면 하은도 그럴 생각이 없었다. 그녀 옆에서 걷고 있는 남자는 엄연히 백건하의 손님이고 자신과는 무관했다.
그러니 나서서 남자의 호기심을 충족시켜 줄 의무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