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난 또, 고라니가 나타난 줄.”
잔디 위에 누워있는 그녀의 위로 검은 그림자가 드리웠다. 하은의 시선과 일직선으로 백건하가 고개를 숙여 내려다보고 있었다. 당황한 하은이 느리게 눈을 깜박이며 그와 시선을 맞췄다.
언뜻 백건하가 웃고 있는 것 같았다.
깜짝 놀라 하은이 몸을 일으켜 앉았다.
“뭐…… 뭐야? 왜 그쪽이 여기 있어?”
숨을 깊이 들이쉬며 내쉬는 그에게서 옅은 알콜 향이 느껴졌다.
옷차림을 보니 이제 막 집에 들어온 모양이다.
“방금 그 질문은 내 쪽에서 해야 하는 것 같은데?”
건하는 무거운 신음을 내며 하은과 조금 떨어진 풀밭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하은은 건하를 힐끗 곁눈질했다. 놀고먹는 백수 대학생의 늦은 귀가 이유를 알만하다는 표정이었다.
적당한 거리를 두고 두 사람은 나란히 앉아있었다.
점점 선명하게 들려오는 풀벌레 소리, 바람이 숲을 지나가는 소리. 그리고 제법 멀리서 들려오는 이름 모를 동물의 울음소리.
건하는 두 손을 뒤로 돌려 잔디 위에 짚고는 다리를 쭉 폈다. 같은 자세를 하고 있는 하은의 다리 길이와 확연하게 차이가 났다. 163센티를 겨우 넘은 그녀와 어림잡아 190은 되어 보이는 그의 키 차이가 풀밭 위에서도 드러났다. 그가 신고 있는 하얀 운동화가 달빛을 그대로 받아 유난히 눈에 띄었다.
나란히 말도 없이 앉아있는데 왜인지 모르게 어색하다는 생각이 안 들었다.
늘 불편하게만 느껴지던 백건하였다. 어색한 생각이 안 드는 게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 하은은 다시 흘낏 건하를 쳐다보았다.
백건하는 고개를 비스듬히 젖힌 채로 눈을 반쯤 감고 있었다. 달빛에 비친 선명한 옆모습에서 좀처럼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반듯한 이마를 따라 각진 듯 내려와 꺾이며 내려가는 날카로운 콧날 아래로 완벽한 곡선을 그리는 꽉 다문 입매. 여자라면 누구라도 꿈꿔볼 만한 상대였다.
하은은 고개를 돌려 정면을 응시했다.
남자의 외모에만 정신이 팔려 쉽게 마음을 내주는 일 따위, 그녀는 애초에 발을 들이고 싶지 않았다.
“정말 궁금해서 묻는 건데, 혹시 여자들이 거부해?”
뜬금없는 하은의 물음에 건하는 미동도 없었다. 대답할 가치가 없는 듯 대답도 하지 않았다.
제법 참을성 있게 건하의 대답을 기다리던 하은은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겉은 멀쩡해 보이는데 육안으로 확인 안 되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나 싶어서. 나 같은 고등학생하고 결혼이니 뭐니 그런 말도 안 되는 얘기가 오고 가는데도 당사자인 그쪽에서 당연히 싫다는 말이 나와야 정상이 아닌가?”
고개를 젖히고 눈을 감고 있던 그가 삐딱하게 고개를 기울이며 시선을 내렸다.
술에 취한 나른한 표정, 하지만 그녀를 보는 그는 웃음이 어린 눈빛이었다.
순간 그가 비웃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 불쾌했다.
“꼭 남의 일처럼, 인생의 방관자 뭐 그런 컨셉이 삶의 모토야?”
하은의 말에 그가 피식, 소리 나게 웃었다.
그러고는 여전히 웃음을 머금은 선명한 눈으로 하은을 바라보았다.
치명적 약점? 태어나서 처음 듣는 말이었고 하필이면 이런 꼬맹이한테서 그런 말을 듣게 될 줄도 몰랐다.
허공을 향해 건하가 깊은숨을 토해냈다. 허공으로 흩어진 건하의 알콜향이 가까이 앉은 하은에게도 희미하게 닿았다.
“당장 뭘 어떻게 하라는 것도 아니고, 뭘 하든 그때 가서 해도 안 늦어. 너도 오히려 지금이 더 좋지 않나? 네 큰아버지라는 사람 너한테 그닥 편한 상대도 아닌 것 같고.”
어느 곳이든 불편하기는 마찬가지이지만 백건하의 말대로 큰아버지의 집보다 오히려 이곳이 그녀에게는 더 편할지도 몰랐다.
굳이 닥치지도 않은 미래의 시간을 끌어들여 처음 맛보는 편안한 시간들을 방해받고 싶지 않은 마음도 있었다. 하지만 은근 불안하기도 했다. 정말 이렇게 가다가 어느 순간 백건하와 결혼이라는 걸 하게 될지도 모른다고.
“내가 혹시나 묻는 건데, 혹시 지금 상황을 즐기는 거야? 이리저리 끌려다니는 나를 보는 게 재밌어?”
잠시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건하의 나른한 한숨과 함께.
“어떤 대답을 원하는데?”
고개를 젖힌 건하의 눈이 반쯤 감겨져 있었다. 하은의 눈길이 건하의 얼굴에 머물렀다.
하은이 대답이 없자 건하가 피식, 웃었다.
“맞아, 재밌어. 아주.”
쓰레기에 급이 있는 건 아니지만 굳이 가치를 매기려 든다면 백건하는 생 양아치라기보다는 귀족적인 쓰레기에 가까웠다. 백건하를 그런 식으로 치켜세우는 게 우습다고 생각했지만 그렇다고 바닥까지 끌어내릴 만큼은 아니었다.
특별히 어떤 점이라고 꼬집어 말할 수는 없는데 하은을 존중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서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권모술수로 상대방을 속이려 들지 않고 솔직하게 대답한다는 것에 높은 점수를 주고 싶었다.
물론 그래봐야 쓰레기이기는 하지만.
“언제까지가 될지 모르지만 둘 중 한 사람만이라도 재밌어서 다행이네.”
하은이 혼잣말처럼 속삭였다.
고개를 젖힌 건하가 눈동자만 옆으로 돌려서 하은을 보았다. 얼굴은 태연했고 눈빛은 무심했다. 물끄러미 하은을 보던 그가 조소를 머금었다.
“겁대가리가 없네.”
싸늘해진 밤기운만큼이나 건하의 목소리도 싸늘했다.
하은의 예민한 촉이 위험을 감지하며 몸을 세웠다. 상체를 일으키려는 순간 순식간에 건하가 몸을 틀며 바싹 다가와 하은의 앞을 가로막았다.
뜨거운 호흡과 강한 술기운이 하은의 얼굴 위를 훅하고 덮쳤다.
예고 없이 마주친 눈, 바싹 다가와 하은을 보는 그는 언제든 서슴없이 짓밟을 것 같은 포식자의 눈을 하고 있었다.
“키스하면 어떻게 나올지 궁금하네.”
말은 그렇게 하지만 거침없는 육식 동물의 피라미드 꼭대기에 존재하는 제왕의 표정이었다. 앞을 막아서는 게 뭐든 전혀 두려울 것 같지 않은 그런.
너무 가까이에 건우의 얼굴이 있어 하은이 멈칫하며 몸을 뒤로 빼었다.
그러자 비틀린 미소를 띠고 있는 백건하의 얼굴이 자세하게 보였다. 바싹 긴장해있던 하은의 눈동자가 일렁이며 순식간에 분노가 덮쳤다.
“미친 또라이 새끼.”
몸을 뒤로 빼며 재빨리 일어난 하은이 씩씩거리며 내뱉었다.
뒤를 돌아 빠른 걸음으로 백건하에게서 벗어나는데 순간적으로 몰려온 수치심에 얼굴이 달아올랐다.
건물 입구에 이르러 현관 손잡이를 잡으려던 하은이 멈춰 서서 뒤를 돌아보았다.
제법 멀리 떨어져 있어 백건하의 모습이 흐릿해서 보이지 않았다. 자세히 보니 그가 잔디밭에 드러누워 있었다.
멀리서도 달빛이 백건하만 비추고 있는 것 같았다.
문을 열고 하은은 재빨리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
일주일째 백건하와 마주치지 않았다.
평일에는 학교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지만 주말에는 달랐다.
한 회장이 집에 있는 날에는 아침 식사 자리에 의무적으로 참석해야 했다.
그러니 하은이 아무리 신경 써서 피하려고 해도 일주일에 한 번은 백건하의 얼굴을 봐야 한다는 거다.
이른 아침인데도 백건하는 굴욕 없이 매끈했다. 아무렇게나 걸친 것 같은데도 백건하가 입으면 제대로 태가 나는 것 같았다.
정말 귀족적인 쓰레기라는 말이 가장 적합하게 어울리는 외모였다.
“하은이는 점점 갈수록 예뻐지는구나.”
한 회장이 다이닝룸으로 들어오며 하은에게 인사치레를 했다.
하은이 시선을 내리며 인사를 했다. 한 회장과도 일주일 만에 첫 대면이었다.
한 회장이 의자에 앉는 것을 확인한 건하가 의자에 앉자 하은도 따라서 앉았다.
“시험이 얼마 안 남았지?”
한 회장이 하은을 쳐다보자 수저를 들던 하은이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네, 회장님. 한 달 정도 남았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한 회장이 마주 앉은 건하와 하은을 흐뭇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아직은 익숙하지 않아 여전히 어색한 사이지만 한 회장 눈에는 그런 건하와 하은이 흐뭇하게만 보일 뿐이었다.
“음, 국물이 제대로 우러났네. 수험생한테 좋다는 음식 이것저것 챙겨주라 일렀으니 입에 안 맞아도 억지로라도 먹도록 해라. 몸이 건강해야 하는 일도 잘 되는 법이야.”
“잘 먹여서 잡아먹을 것 같은 표정이세요, 할머니. 그런 말씀 하실 때는 표정도 좀 풀고 하시든가요. 먹다가 체하겠네.”
한 회장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건하를 쳐다보았다.
“네 놈 얼굴도 다르지 않아.”
서로 으르렁거리면서도 바라보는 표정은 부드러웠다. 얼굴 부딪칠 때마다 늘 한결같은 두 사람의 대화에 하은도 조금씩 익숙해지고 있었다. 가끔은 부럽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다. 말은 거칠지만 바라보는 눈길은 한없이 다정하고 서로에 대한 애정이 느껴지는 가족, 백건하에게 부모님은 존재하지 않지만 적어도 그를 아끼고 사랑하는 할머니가 계셨다. 완벽한 가족의 모습은 아니지만 어찌 되었든 하은보다 백건하는 행복한 사람이다.
뭉클한 감정이 올라와 입에 든 음식물이 쓰게 느껴졌다.
“지내는 데 불편한 건 없고?”
“네, 잘 지내고 있습니다.”
깊이 생각하지 않은 형식적인 하은의 대답에 한 회장이 하은을 응시했다.
“언제든 의논할 일이 있으면 윤 실장 통해서 연락하고, 윤 실장이 집안일 봐주는 사람이지만 여기 오기 전 이력이 화려한 인물이야. 대학도 건하하고 같은 학교 출신이고 회계사 자격증도 있는 사람이야. 진학 문제로 의논하기에 충분한 능력이 있으니 언제든 도움 필요하면 가져다 써.”
“사람이 물건이에요? 가져다 쓰게?”
한 회장의 말 한마디에 사사건건 시비를 거는 백건하였다.
“하여간 그냥은 안 넘어가지.”
지금 보니 한 회장은 건하의 비아냥을 은근히 즐기는 것처럼 보였다. 입가에 머금은 희미한 미소를 보고서야 알았다.
길 가다 넘어져 투정 부리는 아이 같은 백건하, 지금 하은의 눈에 그래 보였다.
문득 언젠가 길 가다 겨우 넘어졌다는 이유로 옆에 있는 엄마에게 투정 부리던 아이가 떠올랐다.
그때 그것이 얼마나 부러웠는지, 고작 넘어진 것만으로 투정 부리는 그 아이가 눈물 나게 부러웠다. 다친 데 없이 옷에 묻은 먼지 한 톨을 털어내고 일어나던 아이를 한참 동안 부러운 눈으로 쳐다보았다.
이제 그녀는 넘어져도 혼자 일어설 수 있는 나이이고, 넘어져 아파도 참을 수 있을 만큼 컸다.
그럼에도 가끔은 아이처럼 투정 부리고 싶을 때가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 백건하는 덩치만 컸지 그녀보다 아이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은은 씁쓸한 표정으로 남은 식사를 마저 끝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