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불편하고 어려운 상황일 텐데도 전혀 주눅 들지도 않았고 한 회장 앞에서 으레 그렇듯 다른 사람들처럼 비굴해지지도 않았다.
앞으로 좀 더 지켜봐야 할 일이지만 한 주사의 점괘가 아니더라도 하은의 그런 점은 마음에 들었다.
식사가 진행되는 동안은 조용했다. 우스운 얘기지만 한 회장도 백건하도 말이 많은 편이 아니었고 하은도 그랬다. 수다스럽지 않은 세 사람이 식탁 앞에 마주 앉았으니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는데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가라앉은 분위기에 눈치가 보였을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하은은 이런저런 잔소리를 듣지 않아 비교적 편안하게 식사를 끝낼 수 있었다.
식사를 끝낸 한 회장은 식사 시중을 들고 있던 메이드에게 후식을 주문했다. 그리고 거실과 이어진 테라스로 하은과 백건하를 따로 불렀다.
미리 준비했던 모양인지 테라스에 있는 테이블 위에는 차와 과일, 그리고 조각 케이크가 종류별로 놓여있었다.
테라스를 둘러싼 주변은 작은 화단을 연상시킬 정도로 꽃들이 무성했다. 단순히 블루라고 단정 짓기에는 모호한 코발트블루 느낌이 강한 꽃들에서 좀처럼 시선이 떠나지 않았다.
어느 책에선가 보았던 19세기 영국 정정원 속 티타임의 한 장면 같았다.
티 포트조차도 잔잔한 블루 꽃무늬가 새겨져 어딘가 빈티지해서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더했다.
하은의 앞에 있는 찻잔에 쪼르르 티를 담아내는 소리마저 아름다운 선율로 울리는 클래식 음악 같았다. 한 회장을 앞에 둔 어려운 자리만 아니었다면 몇 시간이라도 이 자리에 앉아있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였다.
“내 너희 둘을 따로 부른 건.”
“사이좋게 잘 지내고 있어요, 할머니. 미리 통성명도 한 사이고.”
한 회장의 말을 가로챈 건하가 시큰둥한 어조로 말하는 것을 한 회장이 못마땅한 눈으로 힐끗 보았다.
그러고는 확인하듯 하은을 쳐다보았다.
한 회장과 시선이 마주친 하은은 잠시 머뭇거렸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건하의 말에 동조했다.
“이제 내 식구가 된 마당에 따로 눈치 보고 숨길 이유도 없고 해서.”
한 회장이 잔기침을 하는 바람에 잠깐 말이 끊겼다. 미지근한 차를 몇 모금 삼킨 뒤에야 한 회장이 다시 말을 이었다.
“사고로 돌아가신 하은 양 아버님이 촉망받던 과학자라고 들었네. 물론 어머니도 그에 못지않은 명성 높은 정신과 닥터였고. 이미 돈은 넘칠 정도로 많아 정략결혼이니 뭐니 해서 사돈집 재산에 대한 욕심 따위는 애초에…….”
한 회장의 말에 건하가 가볍게 코웃음을 치자 한 회장의 날카로운 시선이 이내 뒤따랐다.
다시 하은을 보던 한 회장이 낮게 헛기침을 했다.
“내 다른 건 제쳐두고 살아생전 하은 양 부모님 인품과 학덕을 높이 샀네. 시장판에서 제일 하찮고 더러운 게 돈이라고 하지 않나. 있다가도 없는 것이 돈이라는 것이야. 하지만 사람은 다르지. 평생 시장 바닥에서 구르고 살았어도 몸에 흐르는 고귀한 피는 절대로 속일 수가 없어. 그런 건 돈을 아무리 줘도 살 수가 없는 것이니까.”
“우리 할머니 또 시작이시네. 계속 길게 하실 거면 나 먼저 일어나고.”
버릇없이 끼어드는 건하에게 한 회장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눈빛만 보낼 뿐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요약하자면 피는 못 속인다, 뭐 그런 거잖아요. 할머니 닮아 내가 제멋대로인 것처럼.”
“아니, 근데 이 녀석이 보자 보자 하니까!”
인내심이 한계에 이른 한 회장이 건하를 향해 핏대를 세웠다.
“난 바빠서 이만.”
건하가 의자를 빼고 일어나려고 하자 한 회장의 매서운 눈이 뾰족하게 일어섰다.
“네 놈이 바쁠 게 뭐가 있어? 말끝마다 토 달지 말고 다음 주부터 회사에 나와서 일 배워!”
한 회장의 날 선 고함 소리에도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건하는 어깨만 으쓱할 뿐이었다.
누가 옆에서 뭐라고 해도 뭐든 내키면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매번 한 회장은 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타고난 비상한 두뇌로 굳이 노력하지 않아도 건하는 한국 최고의 대학에 무난하게 들어갔다. 다른 재벌 집 자식들이 너나 할 것 없이 외국 유학을 떠날 때에도 건하는 애초에 그런 생각이 없는 듯 보였다. 물론 한 회장이 건하를 물 건너 외국으로 보내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미리 알았을 이유도 있었고, 언제나 자신의 생각대로 하고 싶은 건 뭐든 하고 살았던 건하도 그것에 대해서는 이의를 달지 않았다.
다른 건 몰라도 한 회장이 귀한 아들과 그리고 한 회장 본인의 아버지마저 젊은 나이에 요절한 것을 두고 혹시나 건하에게도 일이 생길까 노심초사하는 것을 미리 알아서였는지도 몰랐다.
그런 이유로 눈앞의 낯선 여자애를 집안에 들이는 것조차 묵인하고 있었다.
그것이 세상 무서울 것도 없는 한 회장의 유일한 약점이자 아킬레스건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언제 어디서고 하나 남은 손자를 잃을 수도 있다는 두려움을 지금 눈앞의 여자가 말끔히 해소해 주고 있었다. 어쩌면 한 회장의 마지막 희망일지도 모르는.
건하가 거실을 지나 밖으로 나가는 것을 보고 있던 한 회장이 하은을 응시했다.
“언젠가는 하은 양도 알게 될 일이지만 저 녀석은 태어나기도 전에 아버지를 잃었네. 나한테는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었고.”
한 회장은 잠시 말을 멈추고 먹먹해진 눈을 했다. 주름이 선명한 목이 몇 번이고 들썩이는 것을 하은은 보고 있었다.
“내가 저 녀석한테 들인 건 돈이 전부라 사업이다 뭐다 밖으로만 돌아서 제대로 된 사랑을 준 적은 없었어. 어떻게 하는 줄도 모르고, 하은 양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네. 어차피 일이 이렇게 된 이상 하은 양도 이제 여기가 평생 집이다 생각하고 잘 지내길 바라네.”
날카롭고 매서운 눈이 차분하게 앉아 듣고 있는 하은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하은이 짐을 싸서 이 집에 들어오던 날, 하은을 데리러 갔던 박 기사에게서 그날 상황을 보고받았다.
하은의 뺨에 선명하게 남아있던 손자국으로 짐작하건대 아마도 그날이 처음은 아니었을 것이다.
이미 사전에 하은의 큰아버지 장 사장이 변호사와 짜고 하은의 유산 일부를 빼돌린 사실도 알고 있었다. 재산까지 착취한 마당에 입양한 동생의 아이를 학대한 사실은 한 회장을 분노하게 했다. 명석한 두뇌와 빠른 판단력으로 회사에서 일은 잘하지만 어린아이를 학대한 사실은 차마 그냥 넘어갈 수 없는 문제였다. 사람을 고용할 때 무엇보다 인성을 중요시하는 한 회장이기에 더욱 넘길 수 없었다.
하지만 당장은 그냥 지켜볼 생각이었다. 아직 하은이 서류상으로 한 회장 집안의 사람이 아니었고 일이 진행되려면 장 사장이 필요했다.
“하고 싶은 일이 있거나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 김 집사 통해서 말하거라. 내 아끼지 않고 지원해 줄 테니.”
차고 냉기가 흐르던 눈에 어느 사이 부드럽고 인자함이 대신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이 눈빛은 백건하를 볼 때만 나타나던 눈빛이었다.
하은은 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처음이다. 돌아가신 아버지의 가족들 누구도 따듯한 시선이라고는 한 번도 준 적이 없으니 지금 상황이 몹시 어색하고 당황스러웠다.
축축하고 가라앉은 분위기가 재수 없다며 발에 채는 하찮은 벌레 보듯 하는 눈길, 하은은 그런 시선에 익숙했다. 한 회장이 무슨 꿍꿍이로 그녀를 보는지 모르지만 하은은 받아줄 마음이 없었다. 한 번쯤 자신을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봐주기를 바란 적도 있었는데 이미 오래전 일이고 이미 굳게 닫힌 마음을 열기에 너무 늦어버렸다.
지금까지 혼자였고 그리고 지금도 혼자고 앞으로도 혼자 남을 것임을 알기에 섣불리 마음을 여는 일 따위는 없을 것이다.
하은은 무료한 시선을 들어 한 회장을 응시했다.
그녀의 생각이 한 회장에게 고스란히 전해지기를 바라며 하은의 시선은 흔들림이 없었다.
언뜻 한 회장의 입가에 미소가 번지는 것 같았다.
마치 그런 자신의 생각을 전부 읽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내가 너무 말이 길었나 보군. 먼저 일어나도 좋네.”
한 회장이 찻잔을 들어 코끝에 가져가며 은은하게 번지는 향을 들이켰다.
하은이 조심스럽게 일어나 한 회장을 향해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그러고는 곧장 테라스를 나왔다.
하은의 뒤로 한 회장의 시선이 뒤를 따랐다. 목 끝으로 부드럽게 넘어가는 차를 음미하며 하은의 뒤를 좇는 한 회장의 얼굴이 얼마간 아쉬운 빛을 띠었다.
***
2학기 모의고사 준비로 하은은 새벽까지 책상 앞에 앉아있었다.
성적은 나쁘지 않았다. 부모님의 탁월한 유전 인자 덕분에 늘 상위권에 머물렀다.
설렁설렁해왔던 공부를 지금부터라도 제대로 한다면 언제든 원하는 성적을 손에 쥘 수 있을 것 같았다. 무슨 이유인지 모르지만 그런 마음이 들었고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제대로 된 공부를 시작한 지 겨우 한 달 남짓이 지났다.
사방은 조용했다. 창문을 열자 쏟아져 들어오는 서늘하고 청명한 공기와 더불어 숲에서 들려오는 낮은 풀벌레 소리가 마음을 가라앉혔다.
처음 이 집에 들어왔을 때 여기에 사는 사람은 축복이라고 생각했었다. 좋은 집과 어딜 가서도 만날 수 없는 빽빽한 숲이 있는 넓은 정원. 하지만 살아보니 사람 사는 것이 별반 다를 것이 없는 것 같았다.
재미없게 사는 것은 돈이 많으나 적으나 다르지 않다.
정원을 비추는 가로등 불빛에 초록의 잔디가 하은에게 유혹의 손짓을 보내는 것만 같았다.
잠시 망설이던 하은은 의자에서 일어나 침대 위에 던져 두었던 카디건을 걸쳤다.
조심스럽게 계단을 내려와 곧장 문을 열고 밖을 나오니 창가를 통해 쏟아져 들어오던 공기와 다른 느낌이 들었다.
슬리퍼를 벗어 양손에 들고 걸으며 부드러운 잔디의 감촉을 즐겼다.
가라앉아 있던 기분이 어느 순간부터 들뜨기 시작하더니 어느새 하은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넓은 잔디를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있었다.
쿵쿵 발을 힘주어 굴러도 소음이 없는 푹신한 잔디 위가 마음에 들었다.
어디에 넣어 둘 수도 없어 내내 숨길 수밖에 없었던 어떤 서글픔 같은 것이 찾아 들었지만 하은은 울음을 삼키고 두 팔을 넓게 벌렸다. 들어 올려 일자로 된 팔 사이로 시원한 바람이 비켜 갔다. 이렇게 온전히 혼자일 수 있는 시간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누구의 시선에도 신경 쓰지 않고 방해받는 일 따위 없는 고요한 새벽녘이었다.
그렇게 뛰다가 지쳐서 잔디 위에 벌렁 사지를 뻗고 드러누웠다.
이곳이 서울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맑은 하늘, 검은 하늘에 오늘따라 별이 쏟아지듯 그녀의 머리 위에서 반짝이고 있었다.
하은은 가슴이 벅차오르는 것 같아 크게 숨을 내쉬었다.
부스럭.
갑자기 들려오는 소음에 하은이 긴장하며 몸이 굳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