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화 (7/62)

6.

갑작스러운 하은의 말에 큰어머니는 당황한 얼굴을 했다.

그런 큰어머니의 표정에 하은은 잠시 만족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몸에 내는 상처보다 말로 행해지는 상처가 더 아프고 오래간다는 것을 큰아버지 가족들에게 배웠기 때문에 누구보다 하은이 잘 알았다. 더 아픈 말로 큰어머니 마음에 상처를 주고 싶었지만 지금은 저주의 말을 제외하고 기억나는 것이 없었다. 큰어머니의 표정을 보니 어느 정도 성공한 모양이다.

“뭐? 어디서 그런 못돼 처먹은 말을!”

“전에 큰어머니가 그러셨죠? 사람은 상대에게 베푼 만큼 돌아온다고. 지금 갑자기 그 말이 떠오르네요. 베푼 만큼 꼭 큰어머니에게 돌아가길 진심으로 바라요, 그게 뭐든.”

“이! 미친년이!”

허공에 들린 손이 사정없이 하은의 뺨을 세차게 내리쳤다.

이유 없이 맞는 것도 오늘이 마지막일 것이다.

아무렇지도 않은 듯 담담한 얼굴로 하은은 큰어머니를 응시했다.

하은의 새하얀 얼굴에 붉은 손자국이 선명하게 남겨졌다. 순간 큰어머니는 당황한 듯 허공에 들어 올린 손을 내렸다. 잠시 이성을 잃었던 자신을 후회했다. 오늘은 하은이 한 회장의 집으로 들어가는 날이고 하은의 뺨에 난 자국이 제법 오래 남을 것임을 알았다. 바닥에 내린 손가락이 부들거리며 떨리고 있었다.

하은은 무거운 배낭 끈을 양쪽 어깨에 메고 양손에 캐리어의 핸들을 잡았다.

그리고 앞을 막고 있는 큰어머니를 비켜나 옆으로 나와 방문을 나섰다.

길고 지루했던, 어둡고 습한 방을 나서는 하은의 모습은 홀가분해 보였다. 결코 벗어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지옥을 스스로 걸어 나오며 하은은 한 번도 돌아보지 않았다.

밖을 나오자 입구에 차가 대기하고 있었다.

검은 양복을 입은 남자가 하은에게서 짐을 받아들며 잠시 머뭇거렸다.

이미 빨갛게 부어오른 선명한 손자국이 남겨진 하은의 뺨을 보며 당황한 듯 이내 시선을 돌렸다. 자동차 문을 열어 하은이 차에 오르는 것을 확인한 뒤 조심스럽게 문을 닫았다.

뒤에서 인기척을 느낀 남자가 돌아서자 뒤따라 나오는 큰어머니의 손에 들린 소금 비닐에 시선이 멈췄다.

바닥 곳곳에 흩뿌려놓은 하얀 소금이 여기저기 눈에 띄었다.

방금 차에 오르던 하은의 뺨에 선명한 손자국이 누구의 것인지 짐작이 갔다.

고개 숙여 인사를 하려던 남자는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돌려 하은의 짐을 트렁크에 실었다.

그러고는 곧장 조수석에 올랐다.

“출발하겠습니다.”

뒤에 앉은 하은에게 공손하게 말하며 옆에 앉은 운전사에게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내 차는 조용한 소음을 남기며 하은의 집을 벗어났다.

***

하은이 차에서 내리자 기다리고 있던 메이드들이 일제히 하은에게 먼저 인사를 하였다. 하은도 얼떨결에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트렁크의 짐들이 메이드의 손에 의해 옮겨지는 것을 보고 있던 하은은 눈앞의 거대한 성전처럼 보이는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집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크고 화려해서 도저히 적응하기 힘들 것 같다는 생각이 잠시 들었다.

그리고 그녀의 뒤로 넓게 펼쳐진 잔디밭과 빽빽한 숲이 자리했고 끝이 보이지 않은 화단에는 보랏빛의 라벤더가 촘촘하게 일렬로 늘어서 피어있었다. 잠시 불어오는 바람에 라벤더의 은은한 향기가 느껴졌다.

마음에 드는 풍경이었다. 매일 아침 이렇게 아름다운 정원을 볼 수 있다니, 낯선 곳에 대한 경계심이 허물어지며 어느 순간 기대감이 자리 잡았다.

“회장님께서는 며칠 집을 비우셨습니다. 회장님 오시기 전까지는 편하신 곳에서 식사를 하시면 됩니다. 지난번 확인하셨던 2층에 침실을 준비했는데 혹시 마음에 들지 않으시면 언제든 다른 침실로 바꾸셔도 됩니다. 어차피 2층 별채는 전부 아가씨가 쓰시는 공간이라.”

집사라고 자신을 소개한 여자가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며 정중한 어조로 말했다.

“감사합니다. 하지만 지난번 방도 마음에 들어서 굳이 바꿀 이유는 없을 것 같아요.”

하은의 말에 집사가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으며 반쯤 고개 숙였다.

“짐 정리하고 있을 동안 다이닝룸에 계시겠습니까? 간단하게 다과를 준비해놓을까 합니다.”

집사의 말에 하은이 망설이듯 머뭇거렸다.

“저는 좀 걷다가 들어갈게요.”

“네, 그럼. 혹시 필요하신 게 있으시면 메이드 통해 호출해 주세요.”

하은에게 인사를 하고 등을 돌려 들어가는 집사를 보던 하은도 발길을 돌렸다.

겨우 두 번의 방문에 벌써 대저택의 정원에 익숙해진 기분이 들었다. 첫눈에 시선을 사로잡았던 라벤더 꽃밭으로 향했다.

조금 전까지 스프링클러가 작동했던 흔적이 여기저기서 보였다. 흥건하게 물기를 머금은 꽃잎에서 싱그러운 향이 올라왔다.

큰어머니로 인해 가라앉았던 기분이 어느 순간 사라진 느낌이다.

사람에게서 받은 상처가 자연을 통해 치유된다는 게 어떤 건지 알지 못했는데 지금은 그게 어떤 건지 알 것 같았다.

라벤더 꽃밭을 지나 숲으로 이어진 길로 접어들었을 때 하은이 멈춰 섰다.

길 끝에 거뭇한 인영이 조금씩 형체를 드러내며 다가오고 있었다.

백건하, 그였다.

편한 면바지에 올리브색 니트를 입은, 길게 뻗은 실루엣에 저절로 시선이 갔다.

짙은 초록이 완연한 숲길 한가운데 서있는 그의 모습이 그림 같다는 생각이 잠시 들었다.

돌아서기도 애매한 상황인 데다 하은은 마음먹었던 산책을 포기하고 싶지 않아 마주 오는 건하를 피하지 않았다.

“별로 놀랍지도 않네, 이젠.”

산책 중에 하은을 마주친 것이 달갑지 않은 말투였다. 무심하게 지나치던 건하의 시선이 부어오른 하은의 뺨에 닿았다. 눈빛이 매섭게 변하며 미간이 가볍게 뒤틀렸다.

하지만 하은이 알아차리기 전에 건하는 시선을 틀었다.

“그쪽 시간 알려주면 되도록 그 시간 피해서 다닐게요. 나 역시 방해받는 거 별로라.”

차갑게 말을 뱉어내고 하은은 건하를 비켜 걸음을 옮겼다.

이곳에서도 역시 자신은 불청객이다. 백건하의 표정에서 고스란히 알 수 있었다.

얼마쯤 걷다가 돌아보았을 때 백건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겨우 하루의 절반도 지나지 않았는데 벌써 지친 기분이다. 하은은 눈에 보이는 벤치에 다가가 앉았다.

성인이 될 때까지만 어떻게 해서든 이 집에서 버티기만 하면 된다.

오늘까지 백건하를 본 것은 세 번째다.

같이 있던 시간도 합쳐봐야 겨우 서너 시간 남짓. 지금이 어떤 시대인데 그런 남자와 결혼까지 생각한다니 말이 안 되는 얘기다.

성인이 될 때까지 견디면 된다고, 지금까지 그런 생각으로 버티면서 살았다.

돌아가신 부모님이 자신의 앞으로 남긴 재산을 이용할 수 있는 시기였기 때문에 그것만 보고 지금까지 견딘 것이다. 다행히도 결혼은 성인이 된 뒤에 가능한 일이니 지금까지처럼 시간을 견디면 되는 것이다. 그러니 변한 것은 없었다.

하은은 고개를 들어 무성한 나무의 잎 사이로 보이는 손바닥만 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가 뜨고는 다시 가볍게 눈을 감았다.

나무를 스치는 바람 소리, 시원하고 묵직한 숲의 향이 진하게 와닿는다.

지금처럼 이렇게 고요하고 편안한 시간은 처음이었다.

이곳에서 또 어떤 일이 벌어질지 짐작조차 못 하겠지만 어쨌든 지금 같은 시간을 가질 수 있다는 것에 일단은 만족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여기가 어디든 지금까지 살았던 큰아버지 집보다 더 최악이지는 않을 것 같으니 말이다.

산책을 끝내고 하은은 곧장 침실로 들어갔다. 가져온 짐은 메이드들이 적절한 장소에 잘 정리해 놓은 뒤였다. 그녀가 가지고 있는 짐들 대부분이 낡고 오래된 것들이었다. 버릴 것이 없을 정도로 짐은 단출했다. 교복 외에 평상복은 손에 꼽을 정도였고 사촌 언니가 물려준 옷들이 많았다. 따지고 보면 물려준 게 아니라 폐기 처분할 옷들 중 쓸만한 것만 하은이 골라 입은 것이다. 화장대 위에 있는 사진첩을 넘기다 문득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하은은 당혹감에 어쩔 줄 몰랐다. 한쪽 뺨이 부은 채로 붉은 손자국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순간 백건하가 떠올랐다. 그가 어떤 표정을 보였는지 또렷하게 기억나지 않았다.

이런 얼굴로 한번 해보라는 듯이 삐딱하게 그를 보았던 자신을 떠올리자 수치심에 얼굴이 화끈거렸다.

***

월요일부터 시작된 등굣길은 큰아버지 집에서 학교로 가던 길보다 더 편안했다.

제법 먼 거리라 이른 시간부터 서둘러 나왔지만 한 회장이 그녀를 위해 준비한 전용차는 빠른 속도로 그녀를 학교까지 데려다주었다.

학교 마치는 시간에 맞춰 대기하고 있던 차는 다시 그녀를 한 회장의 집까지 안전하게 내려놓았다.

그렇게 정신없이 일주일을 보내는 동안 백건하와 마주치는 일이 없었다.

워낙 넓은 집이라 놀라울 일도 아니었다. 단지 가끔 생각이 나기는 했다.

그리고 그녀보다 다섯 살이나 많은 백건하는 그의 할머니 한 회장의 후광으로 놀고먹는 백수는 아닌지, 새삼 그가 어떤 일을 하는지도 궁금했다.

하지만 궁금증은 오래가지 않았다. 메이드들이 주고받는 대화에서 백건하가 지금 대학생이고 곧 졸업을 앞두고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백건하와 다시 마주하게 된 것은 한 회장이 제법 오랜 출장에서 돌아온 다음 날이었다.

토요일, 이른 아침 하은도 한 회장과 백건하의 식사에 자리를 함께했다.

특별한 일이 있을 때를 제외하고 매주 주말 식사는 함께하게 될 거라고 집사가 말해주었다.

“이렇게 셋이 앉아있으니 제대로 퍼즐이 맞춰진 것 같구나. 어디 불편한 것은 없고?”

한 회장의 시선이 하은을 향하자 물 컵을 쥐고 있던 하은이 살포시 내려놓았다.

“지낼만합니다.”

간결하고 짧은 대답에 하은을 보던 한 회장의 입가에 짤막하게 미소가 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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