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화 (6/62)

5.

“건하야! 2층에 준비된 하은 양 방을 좀 보여주겠느냐? 이번 기회에 두 사람 좀 친해지는 것도 좋을 듯하고, 그리고 장 사장과 둘이 할 얘기도 좀 있어서 그러는 게 좋을 듯하구나.”

무료한 시간을 견딘 것 같은 얼굴로 백건하가 큰아버지 내외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이고 일어났다.

동시에 약속이나 한 것처럼 큰아버지 내외도 의자에서 일어나 건하를 향해 인사를 했다. 하은이 백건하와 큰아버지를 번갈아 보며 마지못해 의자에서 일어났다.

정원의 유리문을 열고 나온 백건하가 하은을 위해 문을 연 채로 기다렸다.

정원과 연결된 홀 위 경계를 하은이 가볍게 넘어서자 하은의 등 뒤로 유리문 닫히는 소리가 가볍게 울렸다. 뒤에 가까이 서있던 건하는 큰 보폭으로 하은을 가볍게 앞지르며 대리석으로 치장한 거대한 홀을 가로질렀다.

백건하의 뒤를 따르던 하은은 문득 홀의 중앙에서 걸음을 멈췄다.

머리 위의 화려하고 거대한 샹들리에가 창을 통해 들어오는 햇살에 반사되어 반짝이고 있었다.

미래에 대한 기대감도 없고 과거와 현재에 대한 미련도 없어서 특별히 두려움도 없이 살았다.

하지만 문득, 무슨 이유에서인지 지금 자신이 서있는 이곳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발을 내디디려고 해도 마치 누군가 자신을 잡고 있는 것처럼 숨이 막힐 것 같은 어떤 공포가 밀려들었다.

하은은 고개를 들어 끝이 보이지 않을 것 같은 거대하게 높은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샹들리에의 화려한 빛에 눈을 제대로 뜰 수가 없다.

순간 바로 앞까지 온 백건하가 그녀를 내려다보며 서있었다.

“왜 그래?”

머릿속이 윙윙 울리듯 바로 옆에 서있는 그의 목소리도 귀에서 윙윙거리며 멀리서 들리는 듯했다. 시간이 정지한 것 같았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잔뜩 겁먹은 눈빛을 한, 찰나의 순간 단단한 껍질을 벗고 얼굴을 내민 열여덟의 평범한 장하은을 건하의 검고 깊은 눈이 응시했다.

단조로웠던 무심한 눈이 손바닥만 한 작은 얼굴에 또렷이 자리 잡은 선명한 이목구비를 재빠르게 훑었다.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올 것 같지 않던 건조한 첫인상과 다른 지금의 장하은은 작은 몸짓 하나에도 상처를 받을 것 같은 무방비한 상태였다.

이방인의 출입이 허용되지 않은 정원에서 처음 마주쳤던 하은은 성숙한 여자의 얼굴이었으나 지금 그가 마주하고 있는 장하은은 언제라도 마음먹으면 충분히 넘어뜨릴 수 있을 것 같은 열여덟의 소녀에 불과했다, 같은 사람인데도 전혀 다른 느낌, 지금처럼 타인에게 호기심을 느낀 것은 처음이었다.

“뭐 해요?”

어느 사이 반감을 드러낸 눈빛이 건하를 향하고 있었다.

혼란이 사라진 단아한 얼굴의 하은이 갑갑한 표정으로 건하를 비스듬히 응시했다.

“안 내키면 뭐, 나도 굳이.”

목소리에 빈정거림이 들어차 있었다.

방금 전 민낯을 드러낸 하은을 본 것이 착각이었나 싶을 정도로 하은은 다시 단단한 껍질 속으로 들어가 있었다.

약해 빠져서는.

건하는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마음먹고 제대로 급소를 건드리면 한 번에 무너뜨릴 수 있는, 약해빠진 부류라는 것을.

등을 돌려 2층 복도를 걷는 건하의 입가가 무심하게 비틀렸다.

쉽게 무너뜨릴 수도 있는데 왠지 그렇게 무너져내리는 얼굴을 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장하은.

한 줌도 안 되는 조그마한 계집애가 자꾸 신경을 거슬리게 한다.

복도 끝에 멈춰 선 건하가 손잡이를 돌려 문을 열었다.

문을 가로막고 서있던 건하가 비켜서자 앞으로 하은이 머물게 될 침실의 구조가 한눈에 들어왔다. 침대의 모서리 기둥을 받치고 선 화려한 레이스 캐노피에 한숨이 절로 나왔다.

치렁치렁한 레이스를 보고 기겁을 하는 하은의 표정을 보며 건하가 피식 웃었다.

“확고한 취향이 느껴져.”

저음으로 울리는 건하의 목소리에 하은이 얼핏 건하를 쳐다보았다.

“그래서, 지금 상황이 재밌니?”

하은의 말투에 빈정거림이 가득했다. 건하의 검고 짙은 눈썹의 끝이 틀어졌다.

“왜 자꾸 말이 길었다 짧았다 해? 그냥 짧게 하나로 통일하든가.”

“나보다 나이 많다며? 어른스럽게 굴면 길게, 아니면 짧게. 이 정도면 일관성 있는 거 아닌가?”

참고 있던 웃음을 한꺼번에 터뜨리듯이 건하가 풋, 하고 웃었다.

짧은 웃음이었지만 석고상처럼 굳어있던 그가 단번에 풀어지던 표정을 하은이 놓치지 않았다.

남자가 이유 없이 웃고 다니는 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아 하지만 지금 보았던 백건하의 표정은 생소했으며 묘하게 신경을 자극했다.

“재밌네. 근데 특별하게 봐주는 건 없어.”

몸에 배인 오만한 말투에 하은이 정색한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잘됐네. 난 묻어가는 타입이라 특별한 그런 거 싫어해서.”

어디서고 눈에 띌 것 같은 존재감 있는 여자의 입에서 나온 말에 건하가 다시 피식, 웃었다.

건하의 비웃는 듯한 웃음에 그를 보는 하은의 눈가가 사나워졌다. 하지만 이내 감정을 조절하듯 눈가가 파르르 떨리며 입술 안쪽을 깨물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속에서 들끓던 감정이 가라앉으며 판도라의 상자가 닫히듯 하은의 눈에 드러난 감정도 자취를 감추었다.

‘재밌네, 장하은. 지루할 틈이 없겠어.’

하은을 보는 눈동자에 어떤 기대감 같은 것이 떠올랐다 이내 사라졌다. 건하는 머릿속의 생각을 감추듯이 눈매가 가늘어졌다.

정원에 있는 새장 안의 새를 치워버리고 지금 눈앞의 장하은을 새장에 가두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언제든 원할 때 볼 수 있고 툭, 건드릴 때면 반항하는 여자의 생생한 목소리까지 들을 수 있으니 지루할 틈이 없을 것 같았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개나 고양이, 새를 제외한 인간이라는 피사체에 관심을 갖기는 처음이었다.

집에 타인을, 그것도 여자를 들이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데 지금 보니 특별히 반대하고 싶은 생각도 사라졌다.

아니, 오히려 눈앞의 여자를 새장에 가둬두고 온순하게 길들이고 싶은 생각이 잠깐 들었다.

그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방향으로만 움직이는 장하은, 지금까지 어떤 것에도 관심이 없던 그의 눈빛이 돌연 반짝였다.

건하는 하은의 미세한 움직임까지 놓치지 않고 눈으로 좇았다.

같은 공간에 존재하면서도 마치 다른 시간을 사는 것처럼 하은과 건하의 머릿속은 같은 상황, 다른 생각에 빠져있었다.

***

24인치 캐리어 두 개에 18년 세월을 전부 구겨 넣었다. 꽉꽉 채워 캐리어 지퍼를 잠그는 순간 알 수 없는 설움이 복받쳤다.

가족들이 모이는 날이면 부모 잡아먹은 악귀나 되듯이 날 선 시선들이 하은의 뒤를 따랐다.

차량 앞 범퍼가 휴지 조각처럼 구겨져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의 대형 사고에도 하은의 부모는 그 자리에서 숨을 거뒀지만 뒤에 타고 있던 다섯 살의 하은은 경미한 타박상에 그쳤을 뿐이다.

살아남은 것이 기적이 아니라 불행처럼 느껴졌다. 다행인지 아닌지 모르지만 하은은 끔찍한 사고가 있던 그 순간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했다. 무의식중에 기억을 지운 건지 뭔지는 알지 못했지만 비교적 담담했다.

그런 하은을 가족들은 더 끔찍해했고 모든 불운을 한꺼번에 가진 것처럼 대했다.

옆에 가까이 두면 그 불운이 옮을까 봐 전염병 환자 취급하듯 가까이 오지도 않았다.

집안의 가장 어두침침한 구석진 방이 하은의 방이 되었고 가족들 모임이 있는 날에는 주로 밖을 떠돌거나 갑작스럽게 들이닥치는 날에는 어두컴컴한 방에 갇혀 지냈다.

서로가 서로를 피하는 우스꽝스러운 상황이었다.

이 집에 살았던 시간에 대한 아쉬움 같은 것도 가족이라는 것에 대한 애정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래서 지금 그녀의 안에서 차오르는 설움에 대한 정체를 알 수가 없었다.

어차피 이곳도 그리고 그녀가 앞으로 살게 될 백건하의 집도 진정한 그녀의 집이 아니었다.

그저 장소만 바뀌는 것뿐이다.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는데 이유 없이 마음이 헛헛했다.

“밖에 차 기다리고 있어. 짐은 다 싼 거야?”

하은의 방 근처에는 오지도 않던 큰어머니가 오늘은 방 문 앞을 서성이며 하은을 재촉했다.

속이 후련한 얼굴이다.

교과서로 빽빽하게 채운 배낭 안에 하은은 책상 위에 세워두었던 액자를 조심스럽게 넣었다.

그녀에게 마지막 남은 부모님 사진이었다.

“너한테는 오히려 여기보다 그 집에 들어가는 것이 더 나을지도 몰라. 그러니 그렇게 다 죽어가는 얼굴 할 필요도 없어.”

큰어머니의 말에 아무런 대꾸도 없이 하은은 속으로 웃었다.

지금 자신의 얼굴이 뭐 어떻다고, 언제나 지금처럼 죽은 얼굴을 하고 살았는데 새삼스럽게 말하는 것이 우스웠다.

한 번도 그녀의 얼굴을 지금처럼 자세하게 들여다본 적이 없어서 몰랐던 모양이다.

하은은 먹먹했던 마음을 가다듬고 의자에서 일어났다.

“좀 붙임성 있게 웃기도 하고 그래야 네 옆에 사람이 붙지. 그렇게 맨날 죽을상을 하고 있으니 재수 없다는 소리나 듣고 사는 거야. 행복도 불행도 저 하기 나름이고 하은이 너도 명심하고 살아.”

겨우 마음을 가라앉혔다고 생각했는데 큰어머니의 말이 다시 비수가 되어 그녀의 생살을 파고들며 꽂혔다.

“운이……, 나빴을 뿐이에요.”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을 정도로 하은은 낮은 목소리로 읊조렸다.

“뭐? 방금 뭐라고 했어?”

혹시라도 하은이 저주의 말이라도 퍼부은 것은 아닌지, 큰어머니는 다른 때보다 민감하게 반응했다.

“말해! 뭐라고 했는지.”

평소에는 고상하고 우아한 얼굴인 큰어머니의 숨겨진 또 다른 얼굴은 오직 하은의 앞에서 여지없이 드러났다.

지금처럼 상스러운 눈빛, 포악한 표정.

큰아버지가 출근하고 집안의 모든 사람들이 빠져나간 뒤에 큰어머니와 하은이 둘만 남겨졌을 때 큰어머니는 지금과 같은 얼굴을 했다.

“왜요? 이 집에 저주라도 걸었을까 봐요?”

바닥에 내리고 있던 시선을 들어 큰어머니를 보는 하은의 눈에 얼핏 살기가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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