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화 (5/62)

4.

시선이 마주치자 아무렇지도 않은 듯 백건하가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이라는 표정이다. 하은의 미간이 구겨지며 차오르는 분노로 얼굴에 홍조가 번졌다.

“죄송하지만 회장님, 지금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지금까지 어떤 상황에서든 대체로 평정심을 잃지 않았던 하은의 목소리가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희미하게 떨렸다.

도대체 지금 자신이 무슨 상상을 하는지, 착각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큰아버지의 진지한 표정도, 그리고 자신을 보는 한 회장의 당당한 시선도 전부 지금 상황이 현실인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말이 안 되잖아요, 난 아직 고등학생인데……. 미치지 않고서야 어떻게…….”

“하은아! 회장님 앞에서 말버릇이 그게 뭐야?”

한 회장의 눈치를 보며 큰아버지가 하은을 나무랐다.

하지만 이내 한 회장이 큰아버지를 향해 가볍게 저지하듯 손을 들자 뭐라고 말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장 사장 인품이야 워낙 잘 알고, 그래서 다른 것은 볼 것도 없이 하은 양을 선택한 거네. 하은 양 말대로 고등학생 신분에 지금 당장 뭘 어떻게 하라는 건 아니고 졸업할 때까지 여기서 지내다가 적당한 때를 맞춰서 식도 올리고 하는 게 좋지 않겠나 싶네.”

한 회장의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큰아버지 내외는 조용히 듣고만 있었다.

누구 한 사람도 지금의 우스운 상황을 저지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리고 그것이 하은에게는 오히려 더 충격적인 일이었다. 낳아준 친부모는 아니지만 명색이 큰아버지인데 어떻게 아무렇지도 않은 걸까?

원망하는 마음이 생겼지만 지금까지 큰아버지와의 관계를 돌이켜보면 그다지 이상할 것도 없었다.

사고로 돌아가신 부모님이 남긴 거액의 재산이 미성년자인 하은의 앞으로 상속이 되었지만 지금은 절반이 큰아버지 명의로 되어있었다.

변호사 입회하에 법정 보호자인 큰아버지에게 일부를 증여했지만 속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빼앗긴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조카인 하은을 입양한 이유도 핏줄에 대한 애정이 아닌 하은의 부모님이 남긴 재산이 목적이었다는 것을 하은은 자라면서 느낄 수 있었다.

부모님의 재산이 아니었다면 이미 어딘가에 버려졌을 것이 분명했다.

그러니 지금 상황을 이해 못 할 것도 아니었지만 충분히 알고 있었던 일임에도 상처가 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하은은 습관적으로 입 안의 살점을 지그시 깨물었다.

어차피 세상은 그녀 혼자였고 지킬 수 있는 유일한 사람도 그녀 자신이었다.

한 회장의 말에 아무런 반박이 없는 큰아버지 내외는 이미 하은을 이 집에 보내기로 결정한 것이다. 어차피 그녀의 의사 따위 철저히 무시될 것도 분명했다.

당연히 선택의 여지도 없을 것이다.

좀 우습기도 하다. 타인의 일처럼 상관없다는 표정으로 앉아있는 눈앞의 백건하도 그리고 말이 안 되는 상황인 것을 알고 있을 텐데도 너무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큰아버지 내외도.

그리고 그런 상황을 받아들여야 하는 자신도.

잠깐 동안 머릿속에 그녀가 할 수 있는 일들을 생각해 보았다.

다니는 학교를 자퇴하고 큰아버지 집을 나와 혼자 살아가는 생각들, 그동안 수도 없이 해왔던 생각들인데 여전히 답을 찾지 못했다. 아무 준비된 것도 없이 나온다면 평생 밑바닥 인생을 살 것이 뻔하다. 어차피 성인이 되어야만 부모님이 그녀에게 남긴 재산도 처분할 수 있었다.

지금까지 성인이 될 날만을 기다렸다. 그리고 지금까지 아무것도 달라진 것은 없었다.

어차피 장소만 바뀌는 것뿐이다. 큰아버지 집을 벗어나는 것이 무슨 큰일이라도 난 것처럼 생각하는 자신이 갑자기 우스워졌다. 결국 백건하의 집이든 큰아버지 집이든 무슨 상관일까 싶었다.

어디든 자신의 진짜 집이 아닌 건 마찬가지이다.

짧은 시간 많은 생각들이 머릿속에 반복되었다. 어디에도 해답은 없었다.

문득 시선을 들었을 때 자신을 보고 있던 백건하와 눈이 마주쳤다.

골몰하던 머릿속의 생각이 갑자기 흐트러졌다. 가늘게 일그러진 눈매가 언제부터 자신을 보고 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머릿속 생각들이 그에게 읽힌 기분이 들었다.

당황하며 흔들리는 눈빛을 숨기려 하은은 다시 눈동자를 내렸다.

독심술이 있는 것도 아닐 텐데 마치 그녀의 생각들이 그에게 다 까발려진 것 같은 느낌이다. 처음 보았을 때부터 위험한 상대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아채었다. 눈칫밥만 먹고 살아서인지 자신에게 해가 되는 것은 본능적으로 감지하고 저절로 움츠리며 자신을 보호하려는 습관이 생겼다. 바로 지금 눈앞의 상대, 백건하가 그랬다.

“전학까지 하면 하은 양이 적응하느라 힘들 테니 지금 다니는 학교는 졸업할 때까지 계속 다니는 게 어떨까 싶네. 좀 멀긴 하지만 하은 양을 위한 전용차로 이동하면 별문제도 없어 보이는데. 물론 하은 양 생각이 가장 중요하긴 하지만.”

속마음은 전혀 그렇지 않으면서 한 회장은 하은을 배려하는 듯했다.

하은은 드러내지 않고 코웃음을 쳤다. 그리고 그 순간 다시 백건하와 시선이 마주쳤다.

매 순간 백건하에게 감시당하는 기분이다. 계속 그의 시선이 그녀를 향해 있었다는 것을 그제야 깨달았다.

“회장님께서 그래 주시면 저희야 안심이죠, 이렇게까지 신경 써주셔서 감사할 뿐입니다, 회장님.”

큰아버지는 한 회장의 관심만으로 이미 만족한 얼굴이다. 지금껏 하은에게 남아있는 부모님의 재산마저 빼앗지 못해 안달이 나 있던 사람이었는데 그룹 내 계열사 사장 승진과 더불어 한 회장과의 끈끈한 인맥까지 더해져 벌어진 입가가 좀처럼 다물어지지 않았다.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이왕 말이 나온 거 내일이라도 당장 하은 양 필요한 물건만 옮기도록 하는 게 좋을 듯하네만. 방은 이미 준비되어 있고 당장 지금이라도 들어갈 수 있게 모든 것을 완벽하게 갖춰놓으라 일렀네.”

한 회장의 시선이 다시 하은을 향했다. 아직 하은이 아무런 답을 주지 않았고 한 회장은 지금 이 자리에서 어떻게 해서라도 하은의 답을 듣고 싶은 얼굴이었다.

모든 시선이 하은에게 집중되자 하은이 마른침을 꿀꺽, 소리 나게 삼켰다.

“저한테 선택권이란 게 있기는 한 건가요?”

긴장한 얼굴이었지만 말투가 비교적 또렷했고 한 회장을 보는 눈망울도 번들거리며 조금도 기죽어 보이지 않았다.

얼마간 하은을 뚫어지게 보던 한 회장의 입가에 만족한 듯한 미소가 번졌다.

“제 생각이 틀리지 않다면, 이미 두 분이 결정하신 일을 지금 저에게 통보하시는 것 같아서요.”

하은의 날카로운 시선이 큰아버지를 향하자 낮게 헛기침을 하며 큰아버지는 하은의 시선을 피했다.

“이게 다 하은이 너 잘되라고 하는 일이란다. 공부도 잘하고 머리도 좋은 하은이 네가 더 잘 알지 않겠어?”

다소곳이 앉아있던 큰어머니가 기다렸다는 듯 대화에 끼었다.

입가에는 온화한 미소로, 하지만 하은을 보는 눈빛은 싸늘했다.

“제가 공부 잘하는 줄은 어떻게 아세요?”

평소 하은에 관한 일에는 관심도 없던 큰어머니였다. 성적이 좋든 말든 대학 진학에도 일말의 관심조차 없었던 큰어머니 입에서 성적에 관한 말이 나오자 하은은 입술 끝을 일그러뜨리며 조소를 띠었다.

“그거야 물론 네가 네 아버지를 닮아…….”

말을 하다 실수인 것을 깨달은 큰어머니의 얼굴이 붉어지며 옆에 앉아있던 큰아버지의 눈치를 살폈다. 큰아버지도 당황한 표정으로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큰아버지 내외가 하은이 학교에서 어떤 성적을 받아오는지 한 번도 궁금해하지 않아 알 리가 없었다.

당황한 두 사람의 모습을 흡족한 표정으로 하은이 쳐다보았다.

그리고 그런 하은을 맞은편에 앉아있던 백건하도 흥미롭게 지켜보고 있었다.

“딸이 아버지 닮으면 잘 산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하은 양도 장 사장 닮아 머리도 비상하니 공부도 잘할 것 같아 보이네.”

긴장되고 어색한 상황을 한 회장이 뱉은 말로 어느 정도 부드럽게 바뀌었다.

“영특한 따님을 두셨네, 장 사장. 내 이 나이 먹도록 다른 건 몰라도 사람 하나 보는 눈은 있어서 하은 양이 특별히 마음에 들어서 그러네. 하은 양도 지금이야 어른들이 마음대로 결정짓는 것 같아 불편한 기분이 드는 것이 당연한 일이겠지만 생각하는 것처럼 최악은 아닐 테니 미리부터 겁먹을 이유도 없고. 시간을 두고 보면 오히려 잃는 것보다 얻는 것이 더 많다는 생각이 들 거야.”

한 회장을 똑바로 응시하는 하은의 눈빛은 흔한 10대의 반항하는 그것이 아니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관한 혼란과 그리고 얼마쯤 상황을 직시하는 듯한 눈빛, 그리고 저울질하는 듯한 표정까지. 한 회장 앞에서도 위축되지 않는 하은의 침착한 모습이 더욱 눈에 들어왔다.

보기에는 또래의 평범한 여고생 같아 보였으나 오늘 자세하게 들여다보니 한 주사가 관상을 제대로 본 듯싶었다.

한 주사가 한 말을 한 회장은 속으로 다시 곱씹었다.

‘눈매며……, 이마 상단에서 하단까지 보기 드문 귀한 상인데. 대체로 관상에서 명줄이 보이는 경우도 드문 일입니다. 건하 도련님과 궁합을 봐야 정확하겠지만 제 눈으로 확인한 바로는 더는 볼 것도 없습니다. 젊은 나이에 명을 달리한 아가씨의 부모님 명줄이 전부 아가씨에게로 옮겨 왔습니다. 빠른 시일 내에 건하 도련님 옆에 아가씨를 두셔야 합니다. 절대로 두 사람이 떨어지는 일도 없어야 하고요, 이 일은 천기누설이라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게 조심하시는 게 좋을 듯합니다.’

한 회장은 매끈하며 동그랗게 모양 좋은 하은의 이마를 지나 곧고 반듯한 콧날과 인중과 이어진 입술을 중심으로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는 하관을 꼼꼼하게 훑었다.

한 회장 자신의 목숨과 바꿔도 전혀 아깝지 않을 귀한 손자, 이 집안의 대를 이어줄 마지막 핏줄인 건하의 명줄이 지금 눈앞의 작은 소녀에게 달렸다니 예전 같으면 믿지 않았을 말이었다.

하지만 그를 제외한 집안의 모든 남자들이 서른이 되기도 전에 죽음에 이르렀고 건하의 아버지인 한 회장의 하나뿐인 아들마저도 예기치 못한 사고로 명을 달리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사주와 관상을 보는 것에 탁월한 능력을 지녔다고 소문난 한 주사를 집에 들였다.

그의 예언이 진실이든 아니든 지금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아무리 조심한다고 해도 일어날 일은 기어코 일어나고야 만다는 것을 오랜 삶의 경험을 통해 알았다. 그러니 지금은 한 주사의 말에 의지하는 것밖에 아무런 희망이 없었다.

그의 유일한 핏줄인 건하를 지킬 수 있다면 한 회장은 무슨 짓이든 할 준비가 되어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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