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화 (4/62)

3.

이름은 또렷이 기억했다. 이름뿐 아니라 그 남자의 수려한 외모까지 한꺼번에 눈앞에 선명하게 그려지는 것 같았다.

일주일의 짧았던 시간, 완전히 잊고 있던 것이 신기할 정도로 기억이 또렷했다.

길 앞에서 머뭇거리던 하은은 미련 없이 발길을 돌려 반대 방향으로 향했다. 혼자 남겨진 소중한 지금을 누구에게도 방해받고 싶지 않아서였다.

이런 거대한 숲을 정원으로 가진 한 회장 일가가 문득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디든 숨고 싶을 때 커다란 나무 뒤에 숨을 수 있을 테니, 사람 하나쯤 뒤에 숨어도 충분히 가릴 수 있을 정도로 나무는 거대했다. 하은은 걸음을 멈추고 무성한 잎이 꽉 들어찬 나무 뒤를 응시했다.

주저앉고 싶은 순간, 모든 걸 놓아버리고 그만 정지해버리고 싶은 순간.

길 한가운데 서있는 기분이었다. 사방을 둘러보아도 길이 보이지 않아 멍해지는 순간.

가끔 그런 날이 있었다. 그런데 바로 지금 그 순간이 찾아왔다.

어디를 보아도 길이 보이지 않아 하은은 잠시 멍한 눈을 하고 있었다.

습한 공기가 바람을 타고 하은에게 몰려들며 휘감았다. 차분하게 눈을 감고 있던 하은의 눈가가 떨리며 천천히 눈을 뜨고 앞을 응시했다.

그 순간 바로 조금 전까지 초록으로 완연했던 시야가 가려졌다. 하은은 반듯한 셔츠 깃의 선을 따라 시선을 이동했다.

올려다본 시선 끝에서 형형한 눈빛과 마주쳤다.

압도적으로 서늘한 눈빛은 변함이 없지만 처음 마주쳤을 때의 상대에 대한 두려움은 이미 없었다. 하은의 눈이 오히려 무심할 정도로 남자를 보는 시선에 아무런 흔들림이 없었다.

소중한 시간을 방해받아 기분이 상한 하은의 미간이 가볍게 흐려졌다. 남자의 눈이 놓치지 않고 하은의 찌푸린 미간을 응시했다.

마주 보는 그의 입술이 조금 비틀렸다.

“거슬려.”

건하의 말에 아무런 표정 없던 하은이 피식, 웃었다.

이유 없이 왜 또, 자신의 상황이라든지 지금까지 그녀가 겪은 불운한 일은 하나도 모르는 이 남자 앞에서까지 이런 말을 들어야 하는 상황이 우스웠다.

도대체 자신의 이마에는 그녀만 보이지 않는 ‘재수 없다’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는 것일까?

그래서 자신만 모르고 남들은 다 아는 어떤 불운이 보이는 것일까? 문득 궁금해졌다.

“기분 나쁠 정도로.”

낮은 목소리로 내뱉는 그의 앞에서 소리 나게 웃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너네 할머니한테 말해, 다시 들이지 말라고. 지난번 보니까 네 발가락도 핥을 것같이 애지중지하시던데 그런 하찮은 말쯤은 들어주시지 않겠어?”

“뭐?”

백건하는 어이없다는 얼굴을 했다. 방금 들은 말이 환청인지 확인하듯 그의 고개가 비스듬히 기울었다.

아무것도 잃을 게 없는 눈, 그를 보는 여자의 눈이 그래 보였다.

어쩌면 처음부터 거슬렸던 건 여자의 지금 같은 눈이 아니었나 싶었다.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 눈, 그래서 두려움도 없어 보이는 눈.

“나도 별로 오고 싶지 않았다는 말이야. 그 벌레 씹은 표정 나도 거슬려.”

성가신 듯한 표정을 하고는 하은이 앞을 막고 있던 남자의 옆을 지나쳤다.

방금 전 멍한 얼굴을 하고 있던 백건하가 떠올라 하은이 입꼬리를 올리며 희미하게 웃었다.

하지만 이내 자신의 뒤를 따르는 움직임에 일순 입가가 얼어붙었다.

큰 보폭으로 한걸음에 건하는 하은의 옆에 나란히 섰다.

하은은 걸음을 멈추지 않고 조금 전 차에서 내렸던 건물 입구로 향했다.

남자는 무슨 이유인지 묵묵히 하은의 옆에서 보조를 맞추며 걸었다.

“네 말대로 할머니가 내 말이면 뭐든 다 들어주거든. 근데 이번은 안 될 것 같아서.”

단어의 조합이 그리 어렵지 않은데도 하은은 선뜻 남자의 말에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하은의 걸음이 느려지더니 급기야 우뚝 멈춰 서며 옆의 남자를 곁눈질로 올려다보았다.

나무 그늘이 사라져 뜨거운 태양이 그의 뒤에서 사정없이 내리쬐고 있었다. 역광으로 서있는 그의 얼굴에 그늘이 졌다.

“할머니한테 찍혔어, 너.”

건방지게 도도한 말투는 버릇인 것 같았다. 하은은 남자의 말에 보란 듯이 피식 웃었다.

“그런 말에 내가 겁먹을 것처럼 보여?”

건조한 시선이 파고들 것처럼 하은을 응시했다.

“아니.”

그리고 눈빛만큼이나 건조한 목소리. 하지만 빈정거림이라고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마침 모시러 가려던 참이었습니다.”

관리인이 하은의 옆에 서있는 건하를 향해 허리를 굽혀 깍듯하게 인사했다.

마치 보호자인 듯 길을 안내하는 듯한 몸짓으로 건하가 하은을 앞지르며 걸어갔다.

하은은 숨을 가다듬고 앞서 걸어가는 건하의 뒤를 따랐다.

***

창밖으로 초록의 나뭇잎이 바람에 흔들리는 모습이 선연하게 들어왔다.

한 회장에게 인사를 하고 큰어머니의 옆자리에 앉자 백건하가 테이블 건너 한 회장과 자리를 띄우고 하은의 맞은편에 앉았다.

의도가 어떻든 어차피 건하의 자리는 하은의 맞은편에 이미 예정되어 있었다.

‘할머니한테 찍혔어, 너.’

흘려 넘겼던 말이 순간 생각나 하은은 대각선으로 자리한 한 회장을 힐끗 쳐다보았다.

언제부터였는지 자신을 보고 있던 한 회장과 시선이 정면으로 마주쳤다.

그저 상대방에 대한 일반적인 호기심이 아닌 어떤 강렬함 같은 것이 느껴지며 등골이 오싹했다.

“요즘 아가씨들 좋아할 만한 게 뭔지 몰라 이것저것 준비하라고 했는데 하은 양 입에 맞을는지 모르겠네.”

하은을 향해 인자한 미소를 짓고 있지만 한 회장의 눈빛만큼은 백건하를 능가할 정도로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특별히 가리는 것 없이 잘 먹습니다, 회장님. 이렇게까지 신경 써주셔서 감사할 뿐입니다.”

큰아버지의 들뜸은 아직도 가라앉지 않은 상태였다. 사내에서도 한 회장의 관심은 한곳에 향했던 적이 없었고 사사로이 정에 얽매이지 않았다. 열 번 잘해도 한 번 실수하면 곧장 나락으로 떨어뜨렸다. 그러한 이유로 사내의 인사이동이 잦았고 여간해서는 한자리에 오래 머문 사람이 없었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 모르지만 회사 내의 권력에 따른 부정부패는 찾아볼 수도 없었다.

소위 직위를 이용한 갑질조차도 없었다. 한 회장의 보이지 않는 손길이 회사 구석구석까지 미치고 있다는 증거였다. 한 회장은 무엇하나 허투루 보고 넘기는 사람이 아니다.

그러한 한 회장이 하은에게 유독 신경을 써주는 것 같아 어깨가 으쓱했다.

이유가 어찌 되었든 한 회장의 관심은 계열사 사장 취임만큼이나 그를 기분 좋게 했다.

하지만 이내 굳은 표정으로 앉아있는 하은을 보자 부아가 치밀었다.

애교를 떨고 온갖 여우짓을 해도 모자랄 판에 무뚝뚝한 곰 새끼처럼 앉아있는 것을 보니 답답하기만 했다.

“애가 아직 숫기가 없어서 걱정입니다. 평소 이런저런 속의 말도 잘 안 하는 애라…….”

“요즘 애들 답지 않아서 좋아 보이네.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눈치 없이 구는 것보다 낫지 않나? 말이 많으면 실수도 많아지는 법이네.”

한 회장이 범우의 말을 단칼에 자르듯 끼어들었다. 그것이 마치 하은을 두둔하는 것처럼 보여 범우는 의아한 시선으로 한 회장을 쳐다보았다.

“모자란 딸자식 좋게 봐주셔서 회장님께 감사드립니다.”

짐짓 친부인 척 구는 큰아버지를 보며 하은이 속으로 가볍게 코웃음 쳤다.

도대체 무슨 속셈으로 자신을 여기까지 데려온 것인지 사실 큰아버지의 속내가 궁금하던 참이었다. 그리고 한 회장과는 겨우 오늘이 두 번째 보는 것이고 말 한마디 제대로 섞은 적도 없는데 자신의 어디가 괜찮다는 건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게다가 지금 상황이 재미있는지 줄곧 자리에 앉아서 흥미로운 시선으로 보는 백건하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은은 지금 혼자 바보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식사를 끝내고 건물 뒤편의 정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평소 같았으면 아름답게 가꾸어진 정원의 모습을 정신없이 보았을 텐데 지금 하은의 눈에는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았다.

테이블에는 화려한 디저트 접시들로 가득했다. 식욕이 없는 하은은 손도 대지 않고 휴대폰만 만지작거렸다.

“사전에 장 사장에게 미리 양해를 구하기는 했네만, 당사자인 하은 양도 어차피 알게 될 일이니.”

무슨 말을 하려는지 한 회장이 잠깐 뜸을 들였다.

그제야 하은이 시선을 들고 한 회장과 그리고 옆에 앉은 백건하를 쳐다보았다.

앞으로 벌어질 상황을 다 알고 있는 것 같은 느낌, 백건하의 표정에서 하은은 어렴풋이 느껴졌다.

“다들 알겠지만 이제 내 나이 일흔셋, 월급쟁이로 치면 이미 은퇴하고도 남을 나이지. 당장 내일 죽어도 이상할 게 없네만, 그래도 악착같이 목숨 줄 유지하려고 하는 건 아시다시피 남은 핏줄이 건하 이놈 하나라 편하게 죽지도 못하네. 어찌 되었건 간에 사람 구실 제대로 해서 사는 것도 봐야겠고, 그러려면 좀 이르긴 하지만 내 손으로 짝을 지어주고 싶어서 욕심이지만 이렇게 자리를 만들었네.”

한 회장의 시선이 큰아버지와 큰어머니를 지나 마지막으로 하은에게 머물렀다.

사람 좋은 인자한 노인의 눈빛이 아닌 시장에 내놓은 상품의 가치를 매기는 것 같은, 교묘한 술수로 상대를 어지럽힐 것 같은 장사꾼의 눈빛이었다.

평소 머리가 나쁘다고 생각한 적은 없는데 어쩐지 지금 한 회장의 말이 제대로 알아듣기 힘든 다른 나라의 낯선 언어처럼 들려왔다.

차오르는 감정을 가라앉히고 머리를 차갑게, 이성적으로 만들려고 하은은 차분하게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다시 조금은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큰아버지를 쳐다보았다.

큰아버지는 어쩐 일인지 하은의 시선을 피하며 정면을 향했다.

대충 한 회장의 말을 요약하자면, 백건하와 짝을 지어주고 싶은데 그 상대가 하은 자신인 것처럼 들리는 것은 착각이 아닐까 싶었다.

하지만 아무리 아니라고 해도 굳이 그 말을 지금 이 자리에서, 특별히 상대를 대하는 데 어려움이 없을 것 같은 한 회장이 하은의 눈치를 살피는 것이 심상치 않았다.

일순 하은의 얼굴이 백지장처럼 창백해졌다.

설마……? 말도 안 돼!

하은의 시선이 다시 백건하에게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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