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화 (3/62)

2.

큰아버지와 악수를 하던 한 회장의 시선이 큰어머니 옆에 바싹 붙어있는 하은에게로 향했다.

“장 사장님 따님이신가?”

한 회장의 갑작스러운 관심에 짐짓 놀란 큰아버지가 하은을 이끌며 옆에 나란히 세웠다.

“막내 여식입니다. 하은아 회장님께 인사드려!”

쭈뼛거리며 서있는 하은을 못마땅한 눈으로 보며 큰아버지는 한 회장 앞에서 잔뜩 주눅이 들어 어쩔 줄 몰라했다.

한 회장의 뒤에서 여전히 하은을 뚫어지게 쳐다보는 무서운 여자의 입가에 얼핏 미소가 도는 것을 느꼈다.

“나이가?”

“하은이가 올해……, 그러니까…….”

하은에 대한 한 회장의 관심에 큰아버지도 당황한 듯 말을 더듬었다.

“열아홉입니다, 회장님.”

차갑게 보이던 한 회장의 얼굴에 인자한 미소가 번졌다.

“열아홉이라……. 곱고 예쁜 나이군그래.”

찰나의 순간이지만 한 회장의 시선이 꼼꼼하게 하은을 훑고 지나갔다.

“좋은 상이네요. 상정이 누워있기는 하나 이미 초년에 액운이 사라졌고 봉황의 눈을 가져 특별한 운을 타고 나셨습니다. 위가 좁고 아래가 넓어 인중 아래 치켜 올라간 입매가 액운까지…….”

여자는 말을 하다가 그 순간에 입을 닫았다. 마치 천기누설을 하다 들킨 사람처럼 여자의 동공이 크게 벌어졌다.

한 회장이 여자와 하은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어느 사이 여자의 당황한 빛은 사라지고 서늘했던 눈매도 속을 알 수 없을 정도로 잔잔했다.

여자는 한 회장의 옆에 바싹 붙어 귓속말을 했다. 여자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는 한 회장의 시선이 천천히 하은을 향했다. 두 사람의 밀담은 입구에 나타난 희미한 그림자로 인해 오래가지 않았다.

여자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한 회장의 뒤로 한 걸음 물러서 자리를 지켰다.

“아, 마침 저기 오는군.”

한 회장의 말에 모두의 시선이 다가오는 한 남자에게로 집중되었다.

하은도 자연스럽게 남자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 멀지 않은 거리임에도 경호원들에 둘러싸여 걸어오는 남자의 모습이 선명하게 보였다.

큰 보폭으로 성큼성큼 다가와 한 회장의 옆에 나란히 서는 짧은 순간이었지만 하은에게는 유독 긴 시간 같았다. 조금 전 정원에서 마주친 바로 그 남자였다.

짧은 시간 슈트로 갈아입은 남자는 조금 전과 또 다른 느낌이었다. 몸에 맞게 입은 슈트는 건장하고 늘씬한 몸을 더욱 돋보이게 했다. 어느 각도에서든 굴욕 없어 보이는 마스크는 신이 내린 선물 같았다. 부와 권력과 그리고 외모까지 완벽하게 모든 것을 다 갖춘 남자의 당당함과 거만함이 조금은 이해가 갈 것도 같았다. 겸손함까지 갖췄다면 더없이 완벽했을 텐데, 신은 가끔 공평한 것 같으면서도 가끔 한 사람에게만 몰빵하는 실수를 하는 것을 보면 그렇지도 않은가 보다.

“그간 학업에 열중한 것도 있고 이런저런 사정으로 이제야 공식적으로 인사 올리게 되었습니다. 유일하게 하나 남은 핏줄입니다. 건하야! 인사 올려라. 물산 신임 사장으로 승진하신 장범우 사장님이시다.”

말은 공개적인 자리라고 해도 다른 사람들을 전부 제치고 유일하게 큰아버지 앞에서 인사를 하는 모습을 주변 사람들이 전부 의아한 눈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그룹의 내로라하는 임원들마저 제외한 지금 상황이 이해되지 않는다는 표정들이었다.

“이쪽은 장 사장님 막내 따님이라고 하는구나. 우리 건하가 스물다섯이니 나이 차가.”

“다섯 살입니다, 회장님. 도련님 생일이 남아있어 꽉 채운 나이는 아니지요.”

한 회장의 옆에 서있던 여자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지만 하은에게는 또렷하게 들렸다.

한 회장의 손자인 백건하가 하은을 향해 가볍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남자가 고개를 든 순간 정면으로 시선이 마주쳤다.

윤곽이 선명한 눈매, 그리고 유난히 까만 눈동자에 들어찬 강한 이채와 마주치는 순간 하은은 심장이 바닥으로 곤두박질치는 것 같은 서늘함을 느꼈다. 바로 조금 전 정원에서 보았던 눈빛과는 다른 섬뜩함마저 느껴졌다.

하은을 향했던 찰나의 노골적인 시선을 거둔 남자는 평상시와 다름없는 무심한 눈빛으로 돌아갔다.

고개를 슬쩍 옆으로 돌리자 또렷하게 드러난 이목구비에 저절로 시선이 갔다.

칼날처럼 날카로운 콧날이 남자의 서늘한 기운을 전반적으로 지배하는 듯 보였다. 하지만 다시 얼굴을 돌려 정면으로 보았을 때 아무것에도 흥미가 없어 보이는 냉정한 눈빛과 마주했다.

남자를 구성하는 전부에서 누구도 함부로 다가서지 못할 정도의 차가움이 공존한다는 것을 그제야 깨달았다.

한 회장은 손자를 대동해 연회에 참석한 사람들에게 인사시켰다.

외부에 알려지기만 했을 뿐 백건하의 실체를 보는 것이 처음이라 참석자들 대부분의 시선이 그의 뒤를 따랐다.

하지만 큰 키와 운동으로 단련되었음이 분명한 건장하고 탄탄한 몸과 그리고 무엇보다 잘생긴 얼굴이 한 회장의 백그라운드가 아니었어도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이미 남자의 실체를 알아버린 하은은 빨리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만 간절했다.

남자의 외모에 입이 마르게 칭찬하는 사람들 틈에 그녀도 끼고 싶지 않았다.

애초에 큰아버지를 따라오지 말았어야 했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고 아름답다고 느꼈던 이 집안의 전부가 어느 순간부터 흥미가 없어졌다.

연회는 자정이 넘도록 계속되었다. 오케스트라의 연주 또한 늦은 시간까지 이어졌다.

그룹의 요직을 차지한 임원들이 모인 자리라 큰아버지는 평소보다 들떠 있었다.

참석한 사람들에게 인사를 하고 들어간 백건하는 그날 밤 더 이상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하지만 하은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자꾸만 누군가 지켜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지워지지 않았다.

섬찟한 기운에 머리끝이 쭈뼛 서는 것 같은 느낌이 연회가 끝날 때까지 계속되었다.

***

일주일 뒤, 퇴근하고 돌아온 큰아버지는 다른 때보다 들뜬 얼굴이었다.

한정숙 회장이 사적으로 임원 가족을 집으로 초대하는 것은 극히 드문 일이라고, 우상처럼 받들던 한 회장과 가까워지는 것에 큰아버지는 횡재라도 한 듯했다.

한 회장이 하은을 잘 본 것 같다며 모임에도 꼭 참석해야 한다는 말에 순간 머릿속이 하얘지는 것 같았다. 참석하고 싶지 않아 머릿속에는 이미 핑계를 만들던 중이었다.

여지없이 끌려 들어갈 판이라 어떻게 해서든 빠져나갈 궁리를 찾아야만 했다.

“곧 시험이라 학원에…….”

수능이 코앞으로 다가와 하은은 다른 데 신경을 쓸 틈이 없었다. 하지만 하은에 관한 일에 일체 관심이 없는 큰아버지 내외에게 그 변명이 통할 리가 없었다.

고등학생 신분에 뭐 대단한 핑계라도 된 마냥, 하은은 이내 큰아버지와 눈을 마주치고 입을 닫았다.

그럴 수 있다면 큰아버지는 한정숙이라는 거대한 신전에 조카, 혹은 막내딸이라도 바칠 사람이었다. 요즘 같은 세상에 관상이니 뭐니 하면서 중얼거렸던 그 여자도 우스웠다.

세상에서 가장 운 없고 재수 없는 자신에게 그런 말을 하니 면전에서 크게 웃어주지 못한 게 아쉬울 따름이었다.

“옷 얌전한 거 입히고, 아침에 큰어머니 따라 미용실에도 좀 다녀와라. 제발 그 구질구질한 표정도 좀 지우고.”

단정한 집안을 어지럽히고 있는 주범이 하은인 것처럼, 큰아버지는 늘 한결같은 얼굴로 하은을 보았다.

하은에게 있는 어떤 나쁜 기운이 함께 타고 있던 그녀의 부모님을 죽인 거라며, 큰아버지도 그렇게 믿고 있는 것 같았다.

실제로 하은도 그런 생각이 들었다. 워낙 어릴 때부터 들었던 말이라 머릿속에 인이 박힌 것처럼 하은에게는 그것이 변하지 않을 진실처럼 들렸다.

세상에 정답은 없다고 하는데 하은에게는 그 말이 정답처럼 들렸다.

큰아버지가 자신을 보는 눈빛과 마주할 때면 죄인처럼 주눅이 들었다. 그래서 늘 큰아버지의 말에는 내키지 않아도 어쩔 수 없이 끌려가는 것 같았다.

그리고 실제로 주말 아침 일찍 하은은 큰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미용실로 향했다.

***

두 번째 방문한 서일그룹 한 회장의 저택은 처음 보았을 때보다 더 웅장했다.

어둑한 밤과 달리 햇살이 오직 한 곳만 비추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세상의 모든 좋은 기운이 이 거대한 저택에 몰린 것 같은 웅장함과 어디든 반짝이며 빛을 발하는 영롱함이 저택 주변을 감싸고 있는 것 같았다.

차가 입구에 멈춰서자 처음 방문했을 때와 달리 신원 확인도 없이 저택의 문이 열렸다.

차는 곧장 거대한 숲길을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개인 사유지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울창한 숲이 바로 눈앞에 있었다.

하은은 버튼을 눌러 창문을 열었다. 웅장한 숲에서 뿜어져 나오는 향긋한 냄새에 머리가 맑아지는 것 같았다.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저택을 둘러싸고 있는 아름다운 정원을 보는 것만으로 충분히 보상받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여기 있는 이 대단한 집과 자신이 더는 엮일 이유도 없어서 오늘이 마지막 방문일 거라고 생각했다.

현관에 차가 멈추자 기다리고 있던 관리인이 문을 열어주었다.

앞에 멈춰 선 차에서 큰아버지와 큰어머니가 내리는 것을 확인하고 하은도 내렸다.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하늘 아래 펼쳐진 저택의 모습이 액자 속에 담긴 풍경화 같았다.

“회장님께서는 중요한 결재 서류가 있어서 잠깐 서재에 계십니다. 안에 드셔서 잠시 기다리셔야 할 것 같습니다.”

관리인을 따라 안으로 들어가던 큰어머니가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았다. 멈춰 선 하은을 향한 눈매가 곱지 않았다.

“밖에서 산책해도 될까 해서요.”

큰어머니와 눈을 마주치지 않은 채 하은은 태연하게 말했다.

뭐라고 말을 하려다 큰어머니가 곤란한 표정으로 관리인의 눈치를 살폈다.

큰아버지를 안내하던 관리인이 곧장 하은에게로 다가와 사람 좋은 웃음을 보였다.

“산책하기 좋은 날입니다, 이쪽은 보안 업체에서 관리하는 곳이니 마음 놓고 산책해도 좋습니다. 식사 준비되면 사람 보내드리겠습니다.”

큰어머니의 못마땅한 시선이 하은의 뒤에 꽂혔다. 불편한 시선을 모르는 체하며 하은은 입구를 지나 조금 전 차량으로 지나쳐왔던 길로 향했다.

해는 뜨거웠지만 나무를 지나온 바람이 청량하고 시원했다. 조금 전 관리인의 말대로 산책하기 더없이 좋은 날이었다.

지난번 생각 없이 들어갔던 정원의 입구에서 걸음을 멈췄다. 들어갈 생각은 애초에 없었지만 문득 그날 만났던 남자가 떠올랐다.

백건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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