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화 (2/62)

1.

뉴욕의 번화한 거리를 벗어나 역으로 이동한 하은은 곧장 계획대로 열차에 탑승했다.

뉴욕에서 기차로 1시간쯤 달리면 보이는 롱비치가 하은의 목적지였다.

한국에서 20년을 넘게 살도록 바닷가 한번 가본 적이 없다면 누구도 믿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 하은은 서울을 벗어나본 적이 없었다.

기억조차 없는 먼 옛날, 어쩌면 한 번쯤 다녀온 적이 있는지도 모르지만 그녀가 기억하는 한 바다는 가본 적도 없었다.

다섯 살, 새벽 단잠을 깨워 칭얼대던 그녀는 부모님을 따라 이천 본가로 내려가는 길이었고 고속도로 갈림길에서 과속으로 달리는 차량과 부딪쳤다. 사고로 부모님은 병원에 도착하기도 전에 사망했고 하은은 겨우 타박상으로 그쳤다. 모두들 천운이라고 했다.

차가 형체를 알 수 없을 정도로 구겨졌는데 겨우 타박상으로 그친 것을 두고 말이 많았다. 모든 불운이 하은을 비켜간 것에 믿을 수 없어 했고 나중에는 그 불운이 그녀의 부모마저 죽게 했다고, 조부의 자랑거리였던 아버지를 마치 하은이 빼앗아간 것처럼 책임을 돌렸다. 그때부터 불행의 시작이었는지도 몰랐다.

집안 어른들의 의논 끝에 하은은 아버지의 형인 큰아버지 집에 입양되었다.

위로 이미 사촌오빠와 언니가 있었지만 나이가 15살이나 차이가 났고 둘 다 외국 유학 중이었다.

큰아버지의 호적에 올라 외형적으로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다만 부모님의 죽음으로 하은은 일찍 어른이 되었다. 겉으로 표나지 않게 주변의 눈치를 보게 되고 자신보다 타인의 감정을 의식하고 신경 쓰는 게 몸에 배어 일상이 되었다.

모든 것은 그날, 시작되었다.

그녀의 인생이 한꺼번에 바뀌기 시작한 날, 평화롭던 일상이 어느 순간 소용돌이에 휩쓸려 끝도 없이 밀려 나갔다.

큰아버지가 서일그룹의 계열사 사장으로 승진했고 임원 모임에 가족들까지 초대받아 갔던 그날,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서슴없이 그때로 돌아가고 싶다고 생각했다.

미래를 알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그날 결코 큰아버지를 따라가지 않았을 것이다.

롱비치로 향하는 기차 안, 미래를 향해 달려가는 열차 안에서 하은의 기억은 먼 과거로의 시간 속으로 달아났다.

열아홉, 교복이 평상복이었던 하은은 유년기 이후로 처음 입어보는 원피스가 익숙하지 않았다.

허리를 조이는 불편함에 차 안에서도 내내 굳은 얼굴을 했다.

백미러 너머, 뒷좌석에 앉은 큰아버지가 내내 눈치를 줬지만 하은의 굳은 얼굴은 좀처럼 펴지지 않았다.

큰아버지의 계열사 사장 승진을 축하하기 위한 파티가 서일그룹 본가에서 열릴 예정이었다.

목적지까지 가는 내내 큰아버지는 서일그룹 한정숙 회장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마치 미리 쓰여진 대본을 읽는 것처럼 반복해서 말했다.

특별히 기억나는 것은 없지만 그때 큰아버지가 말한 것을 떠올려보면 마치 독재국가의 수장처럼 한정숙 회장은 큰아버지의 우상 같다고 생각했다.

입구에서부터 삼엄한 경비로 출입하는 차량이 신분 확인을 위해 줄지어 길게 늘어서 있는 것이 어린 하은의 눈에도 신기하게만 보였다.

입구에서부터 거대한 나무들이 양옆으로 늘어선 도로를 따라 들어가야만 보였던 화려한 건물.

정면으로 보이던 넓은 잔디밭은 눈부신 조명으로 책에서나 보던 거대한 성전의 그것 같았다.

개인 정원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의 분수가 중앙에서 여러 가지 색의 물줄기를 뿜어내고 있었고 연주회에서나 볼법한 오케스트라의 연주가 끊이지 않았다.

하은의 눈에는 모든 것이 신기하기만 했다.

몸을 조이던 원피스의 불편함도 잊은 지 오래, 무언가에 이끌리듯 하은은 연회장을 벗어나 산책로를 따라 걸었다.

아름다운 음악의 선율이 멀어질 무렵 조금 전 화려하고 웅장한 정원과 다른, 작은 연못을 따라 이어진 아름다운 풍경에 걸음을 멈췄다.

디귿 자로 담장이 둘러싸여 주변에서도 안이 잘 보이지 않게 되어있었다.

다시 왔던 길로 돌아갈까 망설이다가 조금 전 오케스트라의 선율보다 더 아름다운 새소리에 이끌려 한 발 앞으로 내디뎠다.

지상에 천국이 있다면 아마 지금과 같은 모습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코끝에 파고드는 맑은 풀냄새, 그리고 아름다운 새의 지저귐, 눈을 즐겁게 하는 이름 모를 꽃들이 가득한 정원.

매일 아침 눈을 뜨면 이런 아름다운 풍경을 볼 수 있는, 이런 곳에 사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지 궁금하기도 했다.

새장에 갇힌 작은 새가 작게 조각난 나뭇가지 위에서 소리 내어 울고 있었다.

다가간 하은이 손가락으로 새장을 건드리자 거짓말처럼 울음소리가 멈췄다. 그 모습이 신기했던 하은이 좁은 틈으로 손가락을 밀어 넣자 온순하던 새가 어느 틈에 작은 부리로 하은의 손가락을 날카롭게 찔렀다.

“아앗!”

놀라서 뒷걸음치며 하은이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그리고 그 순간 어디선가 들려온 목소리에 그녀는 또 한 번 놀랐다.

“훈련시킨 보람이 있네.”

언제부터 서있었는지 모를, 낯선 남자가 못마땅한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새의 부리만큼이나 날카롭고 서늘한 눈빛이었다. 남자의 눈과 마주치는 순간 몸에 소름이 돋았다.

얼핏 빈정대는 것 같은 말투 같았으나 하은을 향한 시선은 무심했다.

아름다운 정원의 주인임이 분명했다.

남의 것을 몰래 훔쳐본 것 같은 기분이 들어 하은은 평소보다 위축된 표정이었다.

“가끔 주인 허락도 없이 드나드는 도둑고양이 때문에 특별히 훈련을 시켰거든. 가까이 오면 사정없이 부리로 쪼아버리라고 말이야.”

표정 없는 얼굴에 잔인한 말투, 오히려 그것이 상대방을 더 두렵게 한다는 사실을 이 남자는 알고 있는 건가?

남자의 서늘한 말에 하은은 등줄기를 따라 소름이 돋는 것 같았다.

“죄송합니다, 개인 정원인 줄 몰랐어요.”

도둑고양이라는 노골적인 단어가 불쾌했지만 어찌 되었든 허락 없이 남의 영역에 침범한 것은 본인의 잘못이었다.

즉각 몸을 돌려 나가려는 하은의 뒤에 남자의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몰래 훔쳐본 대가는 지불해야 하는 거 아닌가?”

좀 어이가 없었다. 잘못한 건 잘못한 거지만, 그렇다고 이런 취급을 당할 이유도 없었다.

계단을 내려온 남자는 어느 틈에 새장 안으로 손가락을 넣어 조금 전 그녀의 손가락을 찌른 새와 장난을 치고 있었다.

가까이서 보니 평균을 훨씬 웃도는 장신이었다. 헐렁한 니트를 입었어도 군살 없는 건장하고 단단한 몸의 굴곡이 그대로 보였다. 어른 남자의 신체 굴곡을 가졌어도 얼굴은 아무리 많아야 20대 초반으로 보였다. 크고 굵직한 이목구비 때문에 하은이 서있는 곳에서 보이는 남자의 옆모습은 깎아놓은 조각상처럼 선명했다.

“훔쳐보는 것도 버릇인가?”

비스듬히 기울어 있던 고개를 돌리자 빛이 선명한 새까만 눈동자에 하은은 저도 모르게 바싹 긴장했다.

허공을 가르고 들어온 남자의 눈이 노골적으로 하은을 훑어내렸다.

손바닥만 한 작은 얼굴에 들어찬 것이 신기할 정도의 오밀조밀한 이목구비를 지나 움켜쥐면 남을 것 같은 가는 목덜미, 그리고 가는 몸에도 불구하고 부피감이 느껴질 정도의 풍만한 가슴 선을 지나, 가는 발목까지.

짧은 순간이었지만 무엇 하나 놓치지 않은 강렬한 눈빛 때문에 제법 오랜 시간이 지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발끝을 지나 다시 위로 올라온 시선이 하은과 마주쳤지만 조금의 미안함도 없는 거만한 얼굴이었다.

“훔쳐볼 만큼 대단한 가치가 있어 보이지도 않아서 특별히 지불할 대가 같은 것도 없을 것 같은데요.”

하은의 대답을 예상하지 못했다는 듯 남자의 눈이 가늘어지더니 이내 흥미로운 듯 눈가가 반쯤 접혔다.

“재밌네.”

뭘 보냐는 듯, 바로 조금 전 남자가 하은에게 했던 것처럼 남자를 보는 그녀의 표정이 거만했다.

그리고 다시 돌아서 왔던 길로 향해 걸음을 옮겼다.

등 뒤로 남자의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평범하지 않은 외모, 아우라가 느껴질 정도로 인상 깊은 얼굴이었지만 하은은 시큰둥했다.

몸에 밴 듯한 거만한 표정과 말투, 제아무리 잘났어도 밥맛없는 족속들이다.

가진 것이 많다는 이유로 무시하는 덜 성숙한 인간들의 표본이 바로 조금 전 사치스러운 정원의 주인이었다.

잘생긴 건 인정, 하지만 속은 빈껍데기일 것이 분명했다. 가진 것을 타인에게는 결코 나눌 것 같지 않은 지독한 이기주의자의 표본이었다.

대충 그런 인간들은 사방에 널려있다. 지금까지 하은에게 접근해오던 동급생이나 선배들이 대부분 저 잘난 맛으로 꼬시면 대충 넘어오겠지 싶다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으면 안달을 냈다. 조금 전 보였던 남자의 반응도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하은은 희미하게 코웃음을 쳤다.

비밀의 정원을 지나 연회장으로 나오자 정면으로 큰아버지와 큰어머니가 보였다.

하은을 찾고 있었던 모양인지 이제야 눈에 들어온 하은을 향한 큰어머니의 시선이 곱지 않았다.

그럼에도 하은은 느긋한 걸음으로 다가갔다.

“어딜 갔다가 이제 와? 여긴 출입 제한된 곳이 많아서 아무 데나 마음대로 들어가면 안 되는 곳이야.”

미리 말해주었다면 더 좋았을 일이었다.

하은은 조금 전 새의 부리에 찍힌 손가락을 습관처럼 문질렀다. 쪼그만 게 부리가 제법 뾰족해서 쉽게 통증이 가시지 않았다.

애완동물을 키우면 대부분 대소변 가리는 것이나 사람에게 해를 가하지 않는 교육을 시키는 것이 정상적인데 낯선 사람을 공격하는 것을 가르치는 인간은 보지 않아도 대충 인성이 어떤지 뻔했다.

얼마간 서있지 않아도 좀이 쑤셨다. 얼른 이곳을 벗어나고 싶은 마음뿐인데 연회는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다. 지루한 얼굴로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그 순간 오늘의 주인공이 등장하며 어수선하던 주변이 일순 조용해졌다.

주인공처럼 등장한 한정숙 회장은 칠순의 나이가 믿기지 않을 만큼 훨씬 젊어 보였다.

염색하지 않은 머리가 백발이기는 했지만 멀리서 보아도 얼굴은 주름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팽팽했다.

눈에 띄는 큰 키와 군살 없는 몸은 노인이기보다 잘 관리한 중년에 가까웠다. 50대의 큰아버지와 비슷한 연령처럼 보일 정도로 한 회장은 젊어 보였다.

입구에서부터 차례로 인사를 나누던 한 회장이 마침내 큰아버지에게로 가까이 왔을 때 그림자처럼 한 회장을 따르던 여자가 하은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하은을 보는 여자의 서늘한 눈매가 일순 광채를 띠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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