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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1/62)

프롤로그

“승객 여러분, 항공기가 곧 JFK 국제공항에 도착할 예정입니다. 항공기 밖으로 나가시기 전에 승객 여러분의 짐을 모두 챙기셨는지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한국항공을 이용해 주셔서 감사드리며 목적지에서 즐거운 여행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Lady's and gentlemen, The plane will be…….”

뉴욕에 진입하면서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공항이 가까워지자 폭풍우를 동반한 이상기류와 함께 비행기가 심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인천공항에서 비행기가 이륙하기 직전부터 이미 멘탈이 나간 상태라 사실 지금은 아무런 감각이 없었다. 공항 도착 3시간 전부터 하은은 내릴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동행한 남자는 취침용 안대로 얼굴의 반을 가리고 있었다.

반듯하고 우뚝 선 콧날 위를 덮고 있는 검은 안대로 인해 남자는 공포 영화에나 나올법한 모습을 했다. 굳게 다물어진 입매 또한 어떤 움직임도 없었다. 남자를 향했던 시선을 돌리고 하은은 밖을 응시했다.

굵은 빗방울이 손바닥만 한 비행기의 유리창에 부딪히며 흩어져갔다.

비행기 아래는 여전히 검은 구름에 가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 문득 창에 비친 남자의 움직임을 느꼈다.

검은 안대를 벗은 그가 뻣뻣해진 목을 좌우로 가볍게 비틀었다.

밤바다처럼 고요한 눈에 생기가 도는 모습을 잠깐 상상했다.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우수에 젖은 눈동자, 하지만 이내 그 눈에 도는 싸늘한 냉기를 감지하고야 만다.

그러고는 몸을 움츠리며 피부에 돋아난 소름을 털어낸다. 그것이 남자와 시선을 마주친 일반 사람들의 평범한 모습이었다.

하은에게는 이미 익숙해진 서늘함, 그럼에도 매번 등골이 오싹할 정도의 냉기가 몸을 감쌌다.

무릎 위의 가방을 쥔 손에 저절로 힘이 들어갔다. 긴장한 탓에 손바닥의 습기는 좀처럼 마르지 않았다. 아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는데도 마치 대역죄를 지은 죄인처럼 사방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불규칙하게 흔들리는 눈동자, 마른 입술을 몇 번이고 젖은 혀로 축이는 모습은 누가 보아도 곧 일을 저지를 사람처럼 보일 게 분명했다. 하은은 침착해지려고 애썼다.

바로 옆, 동행한 남자.

백건하.

눈치 빠르고 촉이 좋은 저 남자만 따돌리면 아무 문제 될 것이 없었다.

심장이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빠르게 움직였다. 이 심장의 쿵쾅거림이 저 남자의 예민한 귀에도 들리지 않을까 걱정되어 하은은 숨을 죽였다. 그럼에도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손님! 어디 불편하신 데라도 있으십니까?”

스튜어디스의 친절한 미소가 하은을 향했다.

스튜어디스의 시선이 식은땀으로 번들거리는 하은의 작고 동그란 이마를 지나 얼굴의 중심을 이루는 선명하고 반듯한 콧날을 향했다.

“아니에요, 괜찮습니다.”

백건하의 눈치를 보며 하은은 애써 미소를 머금었다.

“혹시 필요한 게 있으시면 공항에 저희 직원이 상주해 있습니다.”

하은은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스튜어디스에게 고마움을 표했다.

자신을 처음 보는 사람에게마저도 들키는 긴장을 백건하가 모를 리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백건하는 고요하다.

속의 감정을 고스란히 밖으로 드러내며 숨기지 못하는 자신이 몹시도 원망스러웠다.

백건하는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일까?

왜 아무렇지도 않은 것 같지? 아무런 신경조차 쓰지 않는 것 같은 모습이 하은을 더욱 긴장하게 만든다.

비행기는 상공을 우회하며 투박한 소음과 함께 지면으로 내려앉았다.

시간이 촉박해지자 하은의 신경은 온통 백건하에게 향했다.

알고도 모르는 체 해주는 건지, 아니면 정말 그녀가 도망이라도 치길 바라는 건지 알 수 없을 정도로 그는 지금 하은에게 무관심했다.

그가 모른 체해 주든 그에게서 도망치길 바라든 결국 하은의 선택은 변하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그때 퍼스트 클래스 좌석의 승객을 위한 별도의 출구로 백건하가 먼저 움직였다. 눈치를 보던 하은이 느리게 가방을 집어 들었다.

백건하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머뭇거리던 하은이 여전히 느린 몸짓으로 일어섰다. 객실 내의 승객들이 모두 빠져나가고 남은 사람은 하은이 마지막이었다.

출구를 걸어 나오던 하은의 시선이 주변을 재빨리 훑었다. 모퉁이를 돌던 하은은 백건하와 그를 따르던 일행이 VIP 대기실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멈췄다.

심장 소리가 귀까지 들릴 정도로 빠르고 격하게 뛰었다. 하은은 몇 번이고 호흡을 가다듬고 마지막 용기를 내어 출입구로 향했다.

그 순간 대기실에 앉아있던 백건하의 시선이 하은을 향했다.

하은은 얼어붙은 듯 그 자리에 멈춰 섰다. 그간 자신이 계획했던 모든 것들이 한순간에 무너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백건하는 무심한 듯 시선을 돌렸다.

평소 백건하를 그림자처럼 따르던 최강훈은 라운지에서 커피를 준비하고 있었다.

순간 하은의 몸이 먼저 움직였다. 평범한 사람들에 비해 촉이 좋은 백건하가 모르고 있을 리 없었다. 지금 백건하는 알고도 모르는 체해주는 것이 분명했다.

어쩌면 그도 자신과 마찬가지로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은은 뛰는 듯이 빠른 걸음으로 일반인 전용 출구로 향했다.

혹시나 뒤에서 누군가 자신을 알아볼까 싶어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렀다.

옆을 보지 않고 곧장 시선을 앞으로 향한 채로 걸어갔다. 이곳만 무사히 벗어나면, 지금만 잘 넘기면 어딜 가든 자유의 몸이다.

게이트를 무사히 빠져나온 하은은 버스 역으로 향하는 인파 속으로 들어가 자연스럽게 뒤섞였다.

크고 거대한 몸집의 사람들 틈에 섞인 하은의 모습을 찾기는 힘들 것이다. 하은은 가장 먼저 도착한 버스에 재빨리 올랐다.

조금 전 그녀가 나온 게이트에서 빠르게 뛰어나오는 최강훈의 당황한 모습이 보였다. 하은은 재빨리 좌석을 찾아 앉으며 몸을 깊숙이 의자에 묻고 모자를 아래로 눌러썼다.

그녀가 탄 버스는 천천히 공항을 출발해 거리를 두며 멀어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호흡은 불규칙했다. 아직 안심할 단계가 아니다.

백건하와는 다르게 그의 조모인 한정숙 회장은 눈에 불을 켜고 하은을 찾을 것이 분명했다. 깊숙이, 더 멀리 달아날 것이다.

영원히 찾을 수 없는 곳으로.

그러니 그때까지 숨죽여 지내야 했다.

***

VIP 라운지로 들어선 강훈은 소파에 깊숙이 몸을 묻고 앉아있는 백건하를 향해 빠르게 다가갔다.

백건하의 길고 섬세한 손이 휴대폰의 화면을 터치하며 습관적으로 넘기고 있었다.

지루하고 느긋한 건하의 표정과 달리 강훈의 얼굴은 백지장처럼 창백했다.

“아무리 찾아도 안 보입니다.”

당황한 강훈과 달리 건하는 시큰둥한 얼굴을 했다.

그래서 뭘 어쩌라고? 그런 표정으로 건하가 강훈을 힐끗 쳐다보았다.

“회장님 아시면…….”

강훈은 말끝을 흐리며 앞으로 닥칠 일에 대한 두려움으로 얼굴이 더 창백하게 변했다.

“알아도 뭘 어쩌겠어? 포기해.”

느릿하게 일어난 건하가 라운지 출구로 향했다.

영문을 모른 채로 강훈이 건하의 뒤에 바싹 붙었다.

“작정하고 도망간 애를 무슨 수로 잡아?”

마치 알고 있었다는 듯이, 건하는 어떤 동요도 없이 담담했다.

“회장님께서 가만있지 않으실 겁니다.”

강훈의 말에 건하는 시큰둥한 표정을 했다.

“뭐, 거기까진 나도 어쩔 수 없는 일이고.”

건하는 입술 끝을 가볍게 늘어뜨리고 씁쓸한 얼굴을 했다.

애초에 서울에서 출발하기 전부터 여자에 대해 평소와 다른 행동에 예민한 촉이 발동하며 여지없이 직감했다.

어디에도 흥미가 없어 보이던 시큰둥한 얼굴, 옆에서 누가 뭐라고 해도 특별한 반응을 보이지 않던 여자가 공항에 도착하고부터 눈빛이 번들거리며 반짝였다.

주변을 살피기 시작하고 눈치를 보더니 급기야 비행기 안에서는 숫제 속을 드러내며 전전긍긍.

나, 도망가요.

그 빤한 행동을 어떻게 모를 수가, 건하는 보일 듯 말 듯 실소를 흘렸다.

그의 눈앞에서 쥐새끼처럼 도망가는 모습이 빤히 보였다. 지루해서 하품 날 것 같았던 그의 일상에 흥미 거리가 생겼다.

늘 건조하고 무심하던 눈에 생기가 돌았다.

한쪽 입가를 비스듬히 기울여 비웃는 것인지 분명하지 않았다. 다만 늘 무미건조하고 표정 없던 얼굴에 빗금을 그은 것 같은 미세한 변화가 생겼다.

“알고 계셨습니까?”

강훈의 물음에 건하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건하를 꼼꼼하게 살피던 강훈의 얼굴에 얼핏 안도의 기운이 스쳐 갔다.

건하가 미리 알고 있었다면 일단 최악의 상황은 피했다는 뜻이다.

창백하던 얼굴도 핏기가 돌기 시작했다.

“사람, 붙이셨습니까?”

재차 묻는 강훈을 항해 건하는 희미하게 미간을 찌푸렸다.

“얼마 못 가서 제 발로 기어들어 올 거야.”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통 짐작하기 힘들었다. 겉으로는 무심해 보이지만 백건하는 철저한 사람이다. 제 것이 아닌 것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지만 한번 제 소유인 것은 절대로 빼앗기는 법이 없다.

객관적으로 보면 장하은은 백건하의 의사와 상관없이 그의 조부가 멋대로 던져준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특별히 거부 의사를 밝히지 않은 것을 보면 백건하도 싫지 않았다는 의미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기에는 백건하가 장하은을 보는 시선이 크게 달라진 것이 없었다.

있는 듯 없는 존재, 특별히 거슬리지 않으면 옆에 붙어있어도 밀어내지는 않았다.

도무지 속을 알 수 없었다.

그런데 지금 보니 어디라고 콕 집어서 표현할 수 없지만 미묘하게 달랐다.

여전히 서늘함이 공존하는 무심한 얼굴, 가라앉은 눈빛은 변함이 없었다. 도대체 어디가 변한 건지 알 수가 없다.

자신이 뭔가를 놓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10년을 넘게 백건하 옆에 그림자처럼 붙어 그의 모든 것을 지켜봐온 그였다. 아침에 눈을 뜨는 그 순간부터 잠자리에 드는 순간까지 한시도 떨어진 적이 없었다.

강훈은 로비를 걸어 나가는 건하의 뒤에 바싹 붙어 뒤따랐다. 아무것도 달라진 것은 없었다. 그럼에도 지금까지 지켜온 어떤 규칙들이 미묘하게 틀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강훈은 날카로운 눈으로 건하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설마? 하는 생각이 들었다가 이내 자신이 생각해도 우습다는 듯 헛웃음을 지었다.

그럴 리가 없었다. 백건하에게 여자는 존재의 의미이기보다는 기본적인 성욕의 배출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언제든 쓰고 버리는 소모품일 뿐이다.

그의 조부가 그렇게 가르쳤고 누구보다 비상한 두뇌를 가진 백건하는 이상의 것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조금 전 강훈의 눈에 비친 백건하는 이미 흥미진진한 관찰자의 눈빛이었다.

장하은을 지켜보는 백건하.

강훈의 눈에 잔잔한 파문이 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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