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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래곤의 유산-628화 (627/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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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숙한 서재의 모습이 나타났다.

고풍스러운 이 서재는 집처럼 느껴질 정도로 편안했다. 의자에 앉자 찬미가 테이블에서 차를 만들었다.

“콘즈야.”

시황의 부름에 한 꼬마 아이가 나타났다. 10년이라는 세월이 더 지났음에도 여전히 귀여운 모습을 한 콘즈였다.

“축하드려요. 드디어 9레벨이 되셨네요.”

“고마워. 유산 리스트 보여줄래?”

“여기요!”

콘즈가 항상 그렇듯 고급스러운 종이를 건네주었다. 9레벨의 리스트는 8레벨보다 더욱 적었다.

[모든 케즈론의 유산 이용 가능]

[모든 드래곤의 권능 획득 가능]

[마나를 완벽하게 제어하는 기술 문서 획득]

[완벽한 케즈론의 칩 획득]

얼마 안 되는 리스트였지만 그 하나하나의 무게감이 엄청났다. 성에 존재하는 모든 유산을 사용할 수 있는 건 물론이고 드래곤의 권능도 전부 획득할 수 있었다. 유일하게 새로운 건 마나 제어에 관한 기술문서였다.

“마나 제어 기술 문서는 어떤 거야?”

“이 책 보시면 아실 수 있어요.”

콘즈가 책 하나를 건네주었다.

시황은 표지부터 어려워 보이는 책을 살펴봤다. 전부 이해하기는 어려웠지만 마나를 이용해 행성을 만드는 것부터 마나를 이용해 에너지자원을 만드는 방법까지 마나를 사용해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기술 문서였다.

다만 시황이 이 기술 문서를 보고 직접 행성을 만들기엔 마나를 제어할 수 있는 마력 양이 부족했다. 거의 전지전능한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기술 문서를 얻었지만 필요한 마력양은 평생을 모아도 부족할 수준이었다. 그 평생이란 100년이 아닌 1000년에 이르는 수준이니 만큼 감히 엄두도 못낼 수준인 것이다.

그나마 루나모스의 도움을 받는다면 마나를 에너지원으로 사용하는 발전소 같은 걸 만들 수 있었다. 어찌됐든 마나 제어 기술 문서만 있다면 신에 가까운 전지전능한 능력을 발휘할 수 있었지만 그만큼 잘 생각을 해보고 사용을 해야 했다.

하지만 시황은 세상을 변혁시키고 이끌고 싶은 욕구가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세상을 이롭게 발전시킬 의향은 있지만 뭔가를 바라는 건 아니었다. 그저 발전해가는 세상을 지켜보고 싶은 것뿐이었다.

“흐음...”

시황은 멍하니 9레벨의 유산 리스트를 응시다가 찬미가 가져다주는 따뜻한 차를 마시며 생각에 잠겼다.

사실 이미 유산은 뭘 얻든 상관없는 수준이 되었다. 강력한 적이 있어서 힘이 필요한 것도 아니고 돈이 부족해서 유산이 필요한 것도 아니었다. 삶을 살아가며 생기는 자잘한 문제들이야 있겠지만 자신의 능력이라면 그런 건 문제라고 할 만한 수준도 아니었다.

과거에 그토록 원했던 사회적 지위도 얻었고, 부모님들에게 세상에서 가장 자랑스러운 아들이 되었다. 고향에선 시황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고 부모님의 사촌과 친구들은 한없이 부러워하곤 했다.

그리고 모태솔로였을 때, 그토록 원하던 여자 친구도 주변에 가득했다. 그것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자신을 생각해주는 착한 연인들이 말이다.

시황은 이미 가장 중요하게 여기던 모든 것을 다 이루었다. 유산을 얻고 후회 없이 살아왔다. 그래서일까? 어쩐지 몸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듯 했다.

지금 남은 유일한 목표는 유산 레벨을 10까지 올리는 거였다. 사실 여기서 더 많은 유산을 얻어 봐야 의미도 없지만 그럼에도 10레벨까지 올리고 싶기는 했다.

“왜 그러세요?”

얌전히 테이블에 앉아 시황을 응시하던 찬미가 물었다.

“그냥 이제까지 참 바쁘게 살아왔구나 싶어서. 앞으로 뭘 하면서 살아가야 할까?”

“원하던 목표를 다 이루신 건가요?”

찬미는 테이블에서 투명한 눈으로 시황을 바라봤다.

“그렇다고 할 수 있지. 왠지 시원섭섭하네.”

“허무하신가요?”

“허무? 아니. 그렇지는 않아. 너희들이 있는데 허무할 리가 없지.”

시황은 빙긋 웃었다.

“그러면 앞으로 저희하고 더 좋은 추억을 만들어가요. 오빠 덕분에 모두 오래살 수 있게 됐잖아요. 전 오빠와 오랫동안 같이 살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요.”

“미안. 괜히 걱정 끼쳤나 보네.”

“오빠가 저의 전부인 걸요. 그런 표정을 짓고 있으면 훌쩍 떠날까 무서워요.”

“그럴 리가. 나도 너희들이 전부야.”

시황은 찬미에게 다가가서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이제 1막이 끝나갈 뿐이었다. 앞으로 사랑하는 연인들과 수백 년의 세월을 살아갈 시간이 존재했다. 이렇게 행복한 삶이 기다리고 있는데 허무할 리가 없었다.

시황은 연인들의 얼굴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사라졌던 의욕이 다시 생겨났다.

그래. 앞으로도 수 없이 많은 기쁨이 있을 터였다.

여기가 종점이 아니었다.

“시황 님, 그리고 케즈론 님께서 기다리고 계세요.”

갑자기 콘즈가 말을 걸었다.

“케즈론? 돌아가신 거 아니었어?”

“가보시면 알아요. 지금 보내드릴게요.”

경쾌한 소리와 함께 배경이 흐릿해졌다. 앞에 있던 찬미도 콘즈도 사라졌다. 마치 꿈속에라도 들어온 듯 주변이 뿌옇게 빛이 났다.

“유산을 이은자여, 반갑네.”

주변 공간이 울리듯 소리가 났다. 그리고 옅은 빛이 생기더니 눈앞에 병약한 금발의 청년이 의자에 앉아 있었다.

누구도 가르쳐주지 않았지만 시황은 눈앞의 남자가 케즈론이라는 걸 알아차렸다.

“반갑습니다.”

시황은 간단하게 인사했다. 케즈론을 만났다고 해서 다리가 벌벌 떨리거나 하진 않았다. 오히려 오래전에 알던 고향 친구를 만난 듯한 막연한 반가움이 느껴졌다.

“알겠지만 나라는 존재는 이미 세상에 존재치 않는다네.”

“눈앞에 보이는데 존재하지 않는다는 건가요?”

“그렇다네. 자네 눈앞에 보이는 건 나의 마지막 의지를 담은 형체일 뿐 자아를 가진 살아있는 존재는 아니야.”

“흠, 꼭 영화 같군요.”

영화에서도 한 번씩 본 장면이라 시황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사실 자신이 행하는 일이나 유산을 보면 영화보다 더한 것들이라 눈앞에 케즈론의 의지를 담은 형체가 있다고 해서 이상하진 않았다.

“9레벨이 된 소감이 어떤가?”

“아직 실감이 나진 않는군요. 어쩐지 목표를 잃은 느낌이 들기도 하고요.”

“그런가? 이제 와서 말하긴 미안하다만 사실 이 모든 건 꿈이라네.”

“흐음...”

갑작스러운 케즈론의 말에 시황은 턱을 쓰다듬었다.

“자네가 유산을 얻은 것도, 그 유산으로 모든 걸 이룩해낸 모든 것이 꿈이라네. 현실은 여전히 아무것도 이룬 게 없는 존재라는 말이지.”

“그런가요?”

“꿈에서 깨면 모든 게 원점으로 돌아가고 이제껏 쌓아올린 명성과 아름다운 연인들은 흐릿한 기억만으로 존재하게 되고 만다네. 자네가 유산을 얻고 지내왔던 삶이 그렇게 신기루처럼 사라지는 거지. 두렵지 않은가?”

“실제로 그렇게 된다면 허무함보단 슬픔이 더 생길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미 제가 살아왔던 삶이 꿈 따위가 아니라는 걸 아니까 별다른 생각이 들진 않는군요.”

“농담이 통하지 않는 사내로군. 재미없어.”

케즈론은 병약한 얼굴로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제가 살아왔던 삶이 그렇게 허무할 리가 없다는 걸 아니까요.”

“그런가? 좋아. 그렇다면 자네가 여기 온 진실된 목적인 마지막 10레벨 유산을 얻는 방법을 말해주지. 10레벨 유산을 얻기 위해선 과거로 돌아가서 지금과 같이 모든 걸 이루어야 한다네. 물론 그냥 하는 건 재미가 없으니까 한 가지 제약이 있어. 바로 유산 능력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거지. 순수한 능력만으로 지금과 같은 걸 이루어 내야 하는데, 어떤가? 가능할 것 같은가?”

“이미 걸어온 길이니까 불가능 할 것 같진 않습니다. 미래의 기억도 존재하니까. 어찌됐든 해봐야 알 것 같긴 하지만... 농담치고는 별로 재미는 없군요.”

시황은 이것 또한 농담이라는 걸 곧바로 알아차렸다. 옛날 루나모스가 자신의 능력이라도 과거로 돌아간다는 건 불가능하다고 말했었다. 아무리 케즈론이라도 루나모스와 동급의 능력을 가지고 있으니 과거로 시간을 역행하는 게 가능할 리가 없었다.

“정말 재미없는 사내라니까.”

말은 그러면서도 케즈론은 즐거운 듯 웃고 있을 뿐이었다.

시황은 케즈론을 응시했다.

“의지를 남기면서까지 저에게 하고 싶은 말은 뭐죠? 그런 농담을 하려고 부른 건 아니실 테고.”

“맞아. 농담을 하고 싶어서 의지를 남긴 거네. 안 되는가?”

“안 될 건 없지요.”

“하하. 사실 이렇게나마 나의 유산을 이은 존재를 보고 싶었던 거라네. 톨레이만에겐 무작위로 유산을 이을 존재를 뽑는다곤 했지만 사실 한없이 순수한 존재들만이 유산을 얻도록 약간의 제한을 걸어뒀다네. 내 유산으로 죄 없는 생명이 무수히 죽어나가거나 다른 행성이 멸망하는 건 나또한 원하지 않았으니까.”

“그건 농담이 아니군요.”

시황은 약간은 진지해진 케즈론의 얼굴을 보고 농담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약간의 제약을 걸었다곤 해도 로또따위와 비교도 되지 않는 확률일 텐데, 결국 유산에 당첨된 자신의 천운에 다시 한 번 감사했다.

“맞아. 이건 농담이 아니야. 그런데 말일세. 만약 아무런 제약 없이 모든 존재에게 똑같은 확률로 유산을 준다고 했을 때도 자네가 받았을 것 같지 않은가? 유산의 운명이 자네한테 정해져 있을지 모르는 일이지 않은가?”

“운명 같은 건 믿지 않아서요. 그저 운 좋게 희박한 확률에 당첨된 거고 그 덕에 지금과 같은 삶을 누리게 되어 감사드릴 뿐입니다.”

“하하. 단호하군. 사실 나조차도 신의 존재를 모르고 앞으로 다가올 삶을 모른다네. 살아있는 존재에게 정해진 운명이라는 것이 존재하는 것인가? 아무리 노력해도 삶을 바꾸지 못하는 것인가? 난 그저 거대한 힘을 가졌을 뿐, 신처럼 전지전능하지는 않아. 어쩌면 내가 그것을 알고 싶어서 무작위의 존재에게 유산을 건네준 것인지도 모르지. 난 태어나면서부터 거대한 힘을 가졌기 때문에 스스로의 노력으로 정해진 테두리의 한계를 바꿔나가는 존재를 확인하고 싶었던 거야.”

“만족하셨습니까?”

“아마 만족하지 않았을까? 실제의 내가 존재했다면 자네를 보고 대단히 흡족했을 거라네.”

“다행이군요.”

시황은 침착한 눈으로 케즈론을 바라봤다. 단순한 변덕과 장난으로 유산을 무작위로 준 거라고 생각했는데, 어쩌면 태어나면서부터 전능한 힘을 가진 자신에 대한 도전이었는지도 몰랐다.

“그리고 이번엔 제대로 10레벨에 대한 말을 해주지. 자네가 9레벨에 도달했다는 건 거의 모든 부와 명예, 세상을 바꿀 능력을 얻었다는 말과 다름없네. 그 정도가 되어야만 9레벨이 될 수 있으니까. 어떤가? 맞는가?”

“그렇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아직 미흡한 부분이 있을 거라네. 그렇지 않은가?”

“그렇습니다.”

케즈론의 말대로 시황은 아직 마력이 부족했다. 수많은 유산과 능력을 얻었지만 루나모스같은 전능한 존재가 되기엔 턱없이 마력이 부족했던 것이다.

“하하. 자, 이걸 보게.”

케즈론이 가볍게 손을 들어올렸다. 거기엔 커다란 금덩어리처럼 생긴 찬란한 보석이 빛을 내뿜고 있었다. 그저 바라만 보는데도 몸이 위축될 정도의 거대한 존재감과 위압감을 흩뿌렸다.

“뭔지 알겠는가?”

“모르겠습니다. 평범한 보석은 아닌 듯 한데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대단한 힘을 가지고 있군요.”

“나의 모든 마력이 담긴 심장이라네. 10레벨의 조건은 이 심장의 마력을 흡수하는 거라네. 어떤가? 간단하지 않은가? 이 심장의 능력을 흡수한다면 끝없는 마력으로 신과 닿을 정도로 전능한 능력을 가질 수 있게 된다네. 우주에 있는 수많은 행성들의 주인으로 군림하는 것이지.”

“마력을 흡수하는 것만으로 끝인가요?”

생각보다 10레벨의 조건은 간단했다. 혹시 이것 또한 농담인가 했지만 진지한 케즈론의 표정은 진실이라는 걸 가리키고 있었다.

“그렇다네. 다만 인간인 자네가 이 마력을 전부 흡수하기 위해선 1000년, 아니 어쩌면 2000년에 이르는 시간이 필요할지도 모른다네. 비록 그 시간 동안 내가 준비한 마력 흡수실에서 아무런 의식도 없이 냉동인간처럼 지내야 하지만... 어쩔 수는 없는 일이지. 어떤가? 지금 하겠는가?”

“하지 않겠습니다.”

시황은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좋아. 그러면 한 가지 조건을 더 말해주지. 지금 거부한다면 자네는 이 막대한 마력을 얻을 기회를 완전히 놓치게 돼. 나의 마력이 담긴 심장은 무로 되돌아가고 다시는 얻을 수 없게 되는 거지.”

“그래도 하지 않겠습니다.”

역시나 시황은 망설이지 않았다. 1000년이라는 시간을 보내서 거대한 마력을 얻어 봐야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저런 마력 따위보단 연인들과 지내는 현재가 중요했다.

사랑하는 연인들이야 말로 자신의 모든 것이니까.

“농담이라네. 진지한 친구라니까. 자 받게. 아까 말한 대로 오랜 시간이 걸리긴 하겠지만 신체 내에 흡수하는 것만으로도 언젠간 모든 마력을 자신의 것으로 할 수 있을 거야. 무의식이 되거나 하진 않으니 걱정은 하지 말게.”

케즈론이 심장을 던졌고 시황은 조심스럽게 받아들었다.

“정말인가요?”

“하하. 정말이라네. 너무 농담을 했더니 의심이 많아졌군. 자, 그러면 난 이만 가보겠네. 내가 준 유산으로 원하는 삶을 살도록 하게.”

마지막 말을 마친 케즈론의 형체가 빛으로 변해 사라졌다. 작별인사를 할 시간조차 없었다.

흐릿하던 세계가 변하고 다시금 익숙한 서재로 돌아왔다. 그런데 케즈론에게 농담이랍시고 꿈이니 하는 말을 들었더니 왠지 불안한 마음이 슬며시 생겨났다.

정말 이 모든 게 꿈이면 어떡하지?

“오빠, 다녀오셨어요?”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옆에 있던 찬미가 다가와서 부드럽게 안아주었다.

“아니구나.”

꿈이 아니었다.

부드러운 찬미의 살결과 향긋한 향기가 느껴진다.

시황은 자기도 모르게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뭐가요?”

“그냥. 너희들이 있어서 다행이구나 싶어서.”

찬미는 어리둥절했지만 시황은 새삼 자신이 가진 행복이 가슴 깊이 스며드는 걸 느꼈다.

앞으로 그녀들과 함께 보낼 삶이 벌써부터 두근거려 참을 수가 없었다.

새로운 막의 시작이었다.

========== 작품 후기 ==========

참으로 오래 되었지만 드래곤의 유산 마지막이 얼마 남지 않았네요.

아마 다음 편 정도로 마무리 될 듯 합니다.

왠지 시원섭섭하지만 자세한 얘기는 전부 마무리 짓고 하도록 하겠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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