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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명 발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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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아는 부모님과 결판을 내기로 했다.
계속해서 부모님과 불편한 상태로 지낼 수 없었고 마음먹은 지금 어떤 식으로든 결판을 내는 게 낫다는 생각이었다. 마음 한편에 계속 불편한 마음을 지니고 있다 보니 시황과 지내면서도 왠지 모를 불안함이 있었다. 케즈론이 삼강그룹을 넘어 세계 최고의 기업이 되었고, 경영의 여제라는 부끄러운 명칭으로 불리는 지금, 얘기하는 게 최적의 시기였다.
틈틈이 남는 시간에 디자인해서 크게 히트를 한 우아한 케즈론 원피스를 입고 본가로 향했다. 지나치게 단정하긴 했지만 그래서 진아가 좋아하는 옷이었다.
어머니와 싸울 거라고 생각하니 긴장이 돼서 진아는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는 가볍게 심호흡을 했다. 작정을 하고 왔지만 그래도 가슴이 크게 떨려왔다. 통보를 하고 온 것도 아니라서 집에 어머니가 있는지 없는지도 몰랐지만 만약 없다면 올 때까지 기다릴 생각이었다.
입술을 질끈 깨문 진아는 차에서 내렸다. 이런 식으로 부모님께 직접적으로 반항하는 건 살면서 처음이었다. 이제껏 부모님이 하라는 대로 살아왔고 시황이 아니었다면 결혼하라는 상대와 결혼했을지 몰랐다. 하지만 이제는 자유롭게 살고 싶었다.
현관문 앞에 서자 가슴이 터질 듯 떨려왔지만 진아는 굳게 마음을 먹고 문을 열어젖혔다.
“아니, 우리 아들이 이번 생일에 나 쓰라고 케즈론에서 가방하고 옷을 사주는 거야. 내가 일부러 지원을 하나 안 해줬는데도 어찌나 능력이 좋은지 회사가 금세 잘 돼가지고...”
거실이 시끌시끌했다. 나이 든 아줌마들이 둘러 앉아 시끄럽게 떠들고 있었다.
“어머, 진아니?”
어떻게 해야 할지 주춤거릴 때, 갑자기 앉아 있던 아줌마 중 한 명이 진아를 보더니 아는 척을 했다.
“안녕하세요.”
“요즘 진아 바빠 보이더니 어쩐 일로 온 거야? 엄마 보러 온 거야? 어라? 그러고 보니 너랑 혜숙 언니하고 입은 옷이 똑같네.”
진아는 그 말을 듣고 놀라서 홍혜숙을 쳐다봤다. 그러자 놀랍게도 자신이 디자인한 우아한 원피스를 홍혜숙이 그대로 입고 있었다. 색은 달랐지만 케즈론에서 만든 옷 특유의 고급스러움이 은은하게 흘러나오고 있었다.
홍혜숙은 민망한지 괜히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진아, 케즈론 대표랑 사귀더니 얼굴 정말 예뻐졌네. 혜숙 언니가 얼마나 네 자랑을 하는지 아니? 들을 때마다 부러워서 정말 배 아프다니까.”
“무, 무슨 말을 하는 거니.”
갑작스러운 말에 홍혜숙이 당황했다.
“네?”
생각도 못한 말에 진아는 자기도 모르게 되물었다.
“그보다 진아 너 정말 인기 많더라. 우리 조카애가 너 얼마나 좋아하는지 아니? 어쩜 이미지가 그렇게나 좋은지 요즘 어딜 가도 난리더라.”
“맞아. 우리 옆집에 며느리가 초등학교 교사인데 여자애들한테 진아가 인기 최고라는 거야. 그 말 듣고 있으니까 계속 네 생각나더라.”
아줌마들은 자기들끼리 웃으면서 정신없이 얘기를 했다.
“우리 딸도 한 미모 하는데 케즈론 대표한테 진아 네가 소개 좀 시켜줄래? 애가 공부는 못해도 예쁘긴 정말 예쁘거든.”
“얘는 무슨 말을 하는 거니? 이상한 말 하지 마.”
진아가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홍혜숙이 정색을 했다.
“농담이야. 농담. 이거 봐라. 네 엄마가 우리한테 케즈론 대표 자랑을 얼마나 하는지 꼭 사위, 아들인 줄 알았다니까.”
“맞아. 맞아. 안 그런 척 하면서 얼마나 케즈론을 좋아하는지 만나면 맨날 케즈론 매장에 쇼핑 간다니까. 나도 가방하고 화장품하고 엄청 샀지 뭐야.”
여기저기서 동의하자 다시 홍혜숙이 당황했다. 그리고는 차마 진아의 눈을 쳐다보지 못하고 살짝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진아는 아줌마들한테 끌려서 케즈론과 시황에 관한 얘기를 고문당하듯 한참이나 들었다. 어떻게 그렇게 사생활에 관심이 많은지 시황에 관한 얘기를 끝없이 묻는가 하면, 몇몇 중년의 여성들은 자기 딸을 시황에게 소개 해달라고 은근히 요구하기도 했다.
진아를 진땀 빼게 만드는 중년의 여성들은 돈이 많긴 많은지 전부 케즈론 제품을 사용하고 있었다. 스마트폰은 케즈론 제로였고 가방도 케즈론에서 내놓은 프리미엄 라인이었다. 심지어 옷과 화장품, 하이힐까지 모든 걸 케즈론 제로에서 살만큼 열성적이었는데, 그토록 시황을 싫어하던 홍혜숙도 케즈론에서 출시한 제품으로 진신을 두르고 있었다.
돈이 있는 여자라면 다른 명품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케즈론 제품만 구입하는 게 어느새 당연해졌고, 심지어 돈이 부족하더라도 다른 쓸데없는 명품 가방 10개를 사는 것보다 케즈론 제품 하나를 사는 게 더 합리적인 소비라고 널리 알려져 있었다.
한참이나 얘기를 하던 중년의 여성들은 저녁 시간이 되기 전에 겨우 집으로 돌아갔다. 시끌벅적하던 소리가 사라지고 고요한 적막이 거실을 채웠다.
평소라면 진아에게 화를 내며 헤어지라고 할 홍혜숙이 약간 멋쩍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하필이면 친구들이 와있을 때 와서 부끄러운 꼴만 보이고 말았다.
“친구 분들한테 나랑 오빠 자랑 했던 거야?”
“내, 내가 언제 그랬다고 그러니? 얘도 이상한 소리하네.”
말은 그러면서도 홍혜숙은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몇 년 전이기는 해도 꼭 드라마에 나오는 악역처럼 집안과 재산을 보고 시황과 헤어지라고 화를 냈었다 보니 민망한 감정을 숨길 수가 없었다.
“이제는 오빠 안 싫어하는 거야? 옛날에는 오빠 집안 보잘 것 없다고 싫어했잖아.”
진아는 덤덤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내, 내가 그랬던가? 잘 기억 안 나네.”
“그랬잖아. 우리 오빠한테 그런 말해서 상처 줘놓고 이제는 무시 못 할 정도로 잘 되니까 자랑하고 다녔던 거야?”
“얘는 무슨 말을 그렇게 하니.”
진아는 거침없이 말을 내뱉었다. 시황을 주변 친구들에게 자랑을 하고 전신을 케즈론으로 두른 홍혜숙의 모습만 봐도 이미 암묵적으로 자신과 시황의 관계를 인정했다는 건 알았다. 애초에 어떻게든 결판을 내러 온 거였기 때문에 대충 적당히 좋게 넘어갈 수도 있었지만 도저히 화가 나서 그럴 수가 없었다.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의 능력조차 알아보지 못하고 집안과 재산만 보고 거부하더니 한국을 넘어 세계에서도 가장 거대한 기업의 대표가 되니 주변 사람들에게 자랑하고 다녔다는 게 정말 마음에 들지 않았다. 오늘 인연을 끊는 한이 있더라도 이제껏 느낀 울분을 전부 토해낼 작정이었다.
“오빠가 엄마한테 그런 말 듣고 얼마나 가슴 아파했는지 알아? 그래놓고 염치도 없이 자랑한 거야?”
사실 시황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지만 진아가 느끼기엔 그렇게 보였다. 자신의 어머니가 했던 행동이기에 더욱 시황에게 염치없고 미안했던 것이다.
“그, 그랬니? 그건 미안하구나.”
“...뭐?”
당연히 화를 낼 줄 알았던 홍혜숙이 미안해하자 정작 진아가 놀랐다. 어머니가 저런 식으로 사과하는 걸 살면서 처음 봤던 것이다. 아무리 잘못을 하고 미안한 일을 해도 사과조차 안 하던 어머니가 사과를 하다니? 너무 놀라 순간 말이 안 나왔다.
“내가 그땐 미안했다. 나도 참 쓸데없이 그런 말을 해가지고. 나도 그때 말한 거 후회하고 있단다.”
“진심이야?”
도무지 믿겨지지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어머니가 저렇게 순수하게 사과할 사람이 아니었다. 뭔가 다른 꿍꿍이가 있는 게 아닐까 의심까지 됐다.
“당연히 진심이지. 그땐 이런 대단한 사람이 될 줄 몰랐단 말이야. 아무리 봐도 집안도 안 좋고 보잘 것 없이 보였는데... 참 시황이 능력이 대단하긴 해. 화장품도 써보니까 주름이 싹 사라지는 게 정말 좋더라.”
“하아...”
진아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보니까 자신의 잘못을 진심으로 뉘우치는 게 아니었다. 시황이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존재가 되자 그 위압감에 인정을 한 것뿐, 집안에 대한 편견과 오만한 태도는 여전했다. 자신의 어머니지만 참 딱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반대로 저런 어머니조차 자존심을 내려놓고 시황을 인정할 정도로 대단한 사람이 되었다는 느껴졌다. 어찌 보면 잘못을 뉘우치고 인정해주는 것보다 이런 식으로 압도적인 능력으로 어머니의 자존심을 꺾어놓은 게 더 대단한 것 같기도 했다.
“참, 시황이가 얼마나 대단한지 가는 곳마다 내가 가는 곳마다 시황이 얘기를 하지 뭐야. 너랑 같이 케즈론 경영하는 거 사람들이 다 아니까 네 칭찬도 얼마나 많이 하던지, 엄마가 얼마나 기분 좋았는지 아니?”
“그랬어?”
“우리 딸도 옷을 얼마나 잘 만드는지 몰랐다니까. 이 옷도 네가 디자인 한 거라며? 어디 나갈 때마다 이 옷 예쁘다고 다들 난리야.”
진아는 허탈한 웃음이 나왔다. 여기에 오기 전만해도 인연을 끊고 오로지 평생 시황만 바라볼 각오까지 했는데 어느새 어머니가 케즈론에 중독되고 시황을 신도가 된 것 마냥 찬양하고 있으니 허탈하기만 할 뿐이었다. 화를 내려고 해도 힘조차 나지 않았다. 그래도 어머니라고 저렇게까지 시황을 좋아해주니 왠지 후련한 마음이 생기긴 했다.
별다른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다른 여자애들의 부모님이 시황을 좋아해주는 걸 보며 얼마나 부럽고 슬펐는지 몰랐다. 그런데 비록 시황의 엄청난 능력과 존재감에 자존심을 꺾은 것이기는 해도 저렇게나마 좋아해주니 순수하게 기분이 좋았다.
“그러면 오빠한테 사과할 거야?”
“그럼. 사과해야지. 내가 얼마나 못된 짓을 했니. 엄마도 그때 생각만 하면 참 후회돼. 생각해보면 처음 만났을 때도 눈빛이 예사롭지 않은 게 참 비범한 느낌이 들었다니까. 내가 그걸 알긴 알았는지 그 뒤로 밤마다 뭔가 잠자리도 뒤숭숭하고 마음이 편치 않았다니까.”
그 거만하고 오만하던 어머니가 저렇게까지 저자세라니. 진아는 이젠 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시황과 가까이 있어서 잘 못 느꼈지만 새삼 정말 대단한 사람을 연인으로 뒀다 싶었다. 생각해보면 세계를 충격으로 만든 혁신적인 제품을 연이어 출시하면서 단순히 능력만 좋은 게 아니라 세계를 이끄는 혁신적 인물, 그 자체가 되어있었다. 세계적인 역사서에 실리는 건 당연하고 한국에선 이미 위인전까지 수두룩하게 나올 정도의 입지적인 인물이 된 것이다. 단순히 돈만 많고 능력이 있는 존재들과는 질적으로 전혀 달랐다.
“알았어. 그러면 오빠한테 전화할 테니까 잠깐 기다려봐.”
진아는 시황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잠깐 울리고 전화를 받는다.
[오빠, 저 진아에요.]
[무슨 일 있어? 목소리가 조금 이상한데.]
역시 시황이었다. 평범하게 말한다고 했는데 미세하게 떨리는 목소리를 알아차리고 금세 안부부터 물었다.
[아니에요. 그보다 저희 어머니가 오빠한테 사과하고 싶다는데 잠깐 전화기 넘겨드려도 될까요?]
[정말? 나야 상관없지.]
[잠시만요.]
진아는 어머니에게 전화기를 넘겼다. 그리고 약간 긴장되는 눈으로 바라봤다. 혹시라도 또 마음이 변해서 상처주는 말이라도 할까 걱정이 됐던 것이다. 그런데 생각과 다르게 본적 없을 정도로 상냥한 목소리로 인사를 건네고 안부도 물었다.
[참 내가 예전에 나쁘게 굴었지? 미안하네. 나도 그 말을 하고 마음이 좋지만은 않았어. 지금이라도 내가 뉘우치고 앞으로 자네하고 진아한테 잘할 테니까 내 사과를 받아줄 텐가?]
진아는 시황이 어떤 대답을 할지 몰라 긴장하며 바라봤다. 예전에 어머니가 했던 말이 워낙 상처 될 만한 말이라 용서를 하지 않을 지도 몰랐다. 만약 용서를 하지 않더라도 어쩔 수가 없었다. 그만큼 무거운 죄였기에.
[내가 미안했어. 그래도 역시 시황이답게 참 배포있고 마음씨가 넓네. 앞으로 진아하고 잘 만나도록 해.]
“휴...”
다행이 시황이 용서를 해준 듯 했다. 진아는 가볍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의 어머니를 용서해준 시황에게 너무 고맙고 감사할 뿐이었다.
그런데 홍혜숙은 사과가 끝나놓고 한참동안 시황과 얘기를 하면서 전화기를 놓아주질 않았다. 뭐가 그렇게 좋은지 한없이 웃으면서 시황을 칭찬하기 바빴다.
[다음에 진아랑 놀러와. 내가 잘 대접해줄게. 그래. 그러면 진아 바꿔줄게.]
홍혜숙이 전화를 넘겼다.
진아는 시황에게 감사의 인사를 했다. 언제나 그렇듯 시황은 덤덤하게 웃으며 오히려 자신을 생각해주고 위로해주었다. 어쩐지 눈물이 날 것 같았지만 꾹 참았다.
전화를 끊은 진아는 후련한 얼굴이 되어 있었다. 족쇄처럼 자신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었던 어머니의 관계가 완전히 해결 된 것이다. 그것도 이전과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자신을 생각해주고 좋아해주기까지 했다.
어느새 진아의 얼굴이 확연히 밝아져 있었다.
========== 작품 후기 ==========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