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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명 발전 -->
루나모스를 보고 난 뒤로 키실리프는 얌전하게 현실을 받아들이고 시황이 시키는 대로 행동했다. 시황에게 한 번의 일격으로 죽을 뻔한 상처를 입기는 했지만 드래곤답게 잠시 시간을 주자 스스로 완벽하게 치유했다.
“변신해봐.”
“알겠습니다.”
그리고 이전과 다르게 시황에게 존댓말을 사용했다. 키실리프는 마치 군대에서 국방부장관을 끌고 다니는 대통령을 앞에 둔 병사처럼 뻣뻣하게 굳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세상을 관장하는 용신을 자기 마음대로 다루는 시황에게 키실리프 같은 하찮은 미물 따위가 감히 반말을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시황의 명령대로 키실리프는 드래곤으로 변신했다. 자그마한 입자들 생겨나고 옅은 빛을 뿌리더니 크기를 가늠조차 할 수 없는 거대한 드래곤이 되었다. 저 거대한 괴물을 누가 이길 수 있을까 싶을 만큼 흉포하고 끔직한 모습이었지만 키실리프는 여전히 벌벌 몸을 떨었다. 지금 모습은 하찮은 미물들에게 경외감을 받고 거대한 크기로 밟아죽이기 쉬웠지만 순수한 전투력은 방금 전의 모습의 훨씬 높았다. 이 모습으로 싸워봐야 시황에게 샌드백처럼 두드려 맞을 뿐 반격조차 할 수 없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았다.
“너무 큰데 좀만 줄여봐.”
“알겠습니다!”
키실리프는 시황이 원하는 만큼 크기를 줄였다. 그리고 시황이 지시하는 대로 저 멀리 있는 높은 산을 배경으로 그럴싸한 자세를 취했다.
“됐다. 이제 가만히 있어.”
시황은 케즈론 제로로 키실리프의 사진을 찍었다. 드래곤을 중점에 둔 가상현실 게임을 만들려는 만큼 그 무엇보다 드래곤의 퀄리티가 중요했다.
다양한 각도로 사진을 찍고 이어서 키실리프를 전투모드로 변신하게 만들었다. 이건 예정에 없었지만 의외로 멋있었던지라 사진을 찍기로 했다. 키실리프가 착실하게 변신하자 시황은 다시 몇 장의 사진을 더 찍었다.
그리고 키실리프에게 말해서 주변의 몬스터들을 끌어 모았고 키실리프를 보고 두려움에 떠는 몬스터 사진까지 전부 다 찍는 걸로 일정을 마무리 했다.
처음에는 몬스터 사진 몇 개만 찍고 끝내려고 했는데 적절한 타이밍에 키실리프가 설쳐준 덕에 상당한 양의 자료를 모을 수 있었다. 이제 검과 방어구, 캐릭터 등은 카필로니아 제국에 가서 사진을 찍으면 됐다.
“이제 슬슬 돌아가자. 벌써 시간이 이렇게나 됐네.”
케즈론 제로로 시간을 보자 여기 온지 벌써 상당히 시간이 흘러있었다. 일을 마무리 하고 집에 돌아가면 될 듯 했다.
“이제 집으로 가는 거예요?”
“그래. 가야지. 할 건 다 했으니까.”
“휴... 다행이다.”
시황의 말에 실피나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시황과 루나모스가 있어서 안전하다는 건 알지만 그럼에도 왠지 마음이 진정되지 않았다. 얌전히 있는 키실리프는 물론이고 주변에 모여든 몬스터까지 무섭지 않은 게 없었다.
“루나모스는 어떻게 할래? 같이 갔다가 갈래? 아니면 지금 갈래?”
“먼저 가 있을게요. 어차피 제가 있어도 별다르게 할 일은 없으니까요.”
“알겠어. 그러면 나중에 봐.”
시황에게 가볍게 입을 맞춘 루나모스는 검은색의 구멍을 열어 그 안에 들어갔다. 별 거 아닌 듯 보이는 이 행동은 키실리프같은 드래곤도 꿈꾸지 못할 마법적 능력이었다. 아무런 마력의 미동조차 없이 공간을 뛰어넘는 루나모스를 보며 키실리프는 전율했다. 인간과 비교해도 초월적인 마법적 힘을 지닌 키실리프였기에 전설 속에나 등장하는 용신의 존재가 얼마나 대단한 능력을 지녔는지 단번에 깨달았던 것이다.
“이제 돌아가야지. 그런데 그냥 가면 아쉬우니까...”
시황은 가볍게 손을 튕겼다. 그러자 발아래 카필로니아 제국이 보이는 아득한 공중으로 단번에 이동했다. 사실 손을 튕길 필요도 없었지만 바로 이동하면 당황할까봐 약간의 모션을 취한 거였다.
“꺄아아악!”
하지만 그럼에도 실피나와 라비올라는 크게 비명을 지르며 시황에게 엉겨 붙었다. 잠시 부드러운 감각을 느끼고 나서 시황은 둘을 안정시켰다. 그리고 겉에 가벼운 옷을 입혀주고 키실리프에게 몇 가지 지시를 했다.
시황의 지시를 들은 키실리프는 다시 드래곤의 모습으로 변신했다. 붉은색의 비늘이 생겨난 거대한 몸체가 카필로니아 제국 상공에 떠올랐다.
시황은 실피나와 라비올라를 데리고 키실리프의 위에 올라탔다. 워낙 몸체가 거대해서 밀려나가지만 않는다면 떨어질 걱정을 할 필요가 없을 만큼 넓은 공간이었다.
키실리프는 날개를 가볍게 흔들며 카필로니아 제국의 성으로 날아갔다.
까마득한 상공에 있을 때는 뭔지 몰랐던 사람들은 점점 키실리프가 내려오자 끔찍하고 위험한 악룡이라는 걸 바로 알아차렸다.
순식간에 도시가 혼란에 빠졌다. 비명이 울려 퍼지고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 마왕의 침략으로 세계가 멸망할 뻔한 게 얼마 전인데 또다시 악룡 키실리프로 인해 세상이 멸망할 위험에 처했던 것이다.
갑작스러운 소란에 황제가 다급하게 성을 나왔고 악룡 키실리프를 보고는 절망어린 표정을 지었다. 이전 마왕이 출몰했을 때보다 더 큰 위험이 세상에 닥쳤던 것이다. 황제는 무릎을 꿇고 루나모스에게 기도를 했다.
악룡 키실리프가 나타났다는 소식에 루나모스에게 기도를 하고 있던 로실린과 훈련을 하던 루펠린이 다급하게 기사단을 이끌고 허공에서 악룡 키실리프의 앞을 막아섰다. 자신들의 능력으로는 키실리프를 막을 수 없다는 걸 알았지만 그럼에도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이대로 키실리프를 들여보낸다면 세상이 또다시 큰 위협에 처할 수 있었다.
결연한 표정을 지은 루펠린은 로실린에게 속삭였다.
“빨리 가서 시황 님을 모시고 와주세요. 시간은 제가 벌겠습니다.”
“그래도...”
“이대로 저희가 다 죽는다면 세계가 또다시 멸망할지도 모를 위험에 처하게 됩니다. 희망은 성녀님께서 시황 님을 데리고 오는 것뿐입니다. 제발...”
루펠린은 로실린에게 말하며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빛으로 검을 뽑아들어 키실리프를 겨누었다. 날개를 펼쳐 키실리프의 앞을 막아선 루펠린의 모습은 역사에 기록해도 이상치 않을 정도로 신성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루펠린의 뒤에 선 기사단도 경건한 얼굴로 검을 뽑아 언제든 공격을 준비를 했다.
“알겠어요. 그러면 잠깐만, 정말 잠깐만 기다려줘요.”
로실린은 입술을 질끈 깨물고 날개를 펼쳤다. 최대한 빠르게 시황을 불러와야만 루펠린을 구할 수 있었다. 제발 루펠린이 죽지 않길 바라며 로실린은 시황에게 가려고 했다.
“마중 나온 거야?”
그런데 듣기만 해도 가슴이 벅찬 목소리가 키실리프 쪽에서 들려왔다.
로실린은 빠르게 뒤를 돌아봤다. 그러자 키실리프의 등에서 시황과 실피나, 라비올라가 천천히 날아왔다.
“시, 시황 님!”
로실린은 설마 했던 시황이 키실리프의 등에서 내려오자 순간 무슨 일인지 이해를 하지 못했다. 루펠린 또한 시황을 보고는 입까지 벌릴 정도로 놀란 표정을 지었다. 키실리프로 인해 목숨까지 걸 각오를 했던지라 그 놀라움은 더욱 컸다.
“다들 왜 그래? 무슨 큰 일이라도 생겼어? 또 마왕이라도 나온 거야?”
시황은 일부러 이렇게 등장해놓고 아무것도 모르는 척 물었다.
“악룡이 나타났다고 해서 온 건데... 그보다 도대체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모르겠습니다. 혹시 저 악룡이 시황 님께 나쁜 짓이라도 한 것입니까?”
루펠린은 혹시 시황이 악룡에게 사로잡힌 게 아닐까 걱정을 하며 물었다. 물론 말도 안 되는 일이라는 건 알지만 그럼에도 부인이 되는 입장에서 크게 불안했다.
“그건 아니고 앞으로 카필로니아 제국 지키는 수호룡으로 쓰려고 데리고 온 거야.”
“악룡을 수호룡으로 쓰신다고요?”
로실린이 빠르게 시황의 앞에 와서는 되물었다. 뭐가 뭔지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저 오만하고 자존심 강한 악룡이 순순히 말을 들을 리가 없는데 말이다.
“그래. 일 때문에 잠깐 들렀다가 우연찮게 만난 김에 앞으로 영원히 카필로니아 제국 수호룡이 돼 주기로 했어. 그보다 잠깐만 방금 엄청 멋지던데 다시 그 자세 취해봐.”
“네?”
“키실리프한테 검을 겨눴던 자세 말이야. 엄청 예쁘고 멋졌거든.”
“아... 네. 알겠습니다.”
이런 와중에도 시황이 예쁘다고 해주자 루펠린은 얼굴을 살짝 붉히며 시황이 말한 대로 키실리프를 향해 검을 겨누었다.
시황은 키실리프의 등 위에서 사진을 찍긴 했지만 근접 사진도 찍기 위해 한 번 더 자세를 취해달라고 한 거였다. 기사단과 루펠린의 경건하면서도 기백 있는 사진을 찍고 성스러운 성녀인 로실린의 모습도 사진으로 찍었다.
루펠린과 로실린은 아예 게임 상의 캐릭터로 등장을 시킬 예정이었다. 거대한 날개나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을 분위기와 아름다움을 가진 그녀들이기에 게임에 등장한다고 해도 아무런 위화감이 없었다.
사진을 다 찍은 시황은 다시 키실리프를 데리고 성으로 내려갔다. 물론 키실리프가 자리 잡고 앉을만한 공간이 성에 없었기 때문에 평범한 인간의 형태로 변해서 성에 안착했다.
키실리프가 성의 정원에 내려앉자 황제는 재빠르게 달려오다가 시황을 발견하고는 곧바로 예를 갖추며 인사를 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모르겠지만 아무리 키실로프라 해도 시황보다 중요한 존재는 없었다.
시황은 방금 루펠린과 로실린에게 얘기해줬던 대로 간단하게 키실리프가 앞으로 카필로니아 제국의 수호룡이 될 거라서 설명해주었다. 황제는 어안이 벙벙한 표정이었지만 악룡 키실리프가 수호룡이 된다는 사실에 기쁨과 동시에 불안한 표정을 했다. 혹시라도 시황이 없을 때 악룡 키실리프가 횡포라도 부릴까 무서웠던 것이다.
“일단 안에 들어가자. 여긴 사람이 많네.”
시황은 황제와 로실린, 키실리프를 이끌고 성으로 들어갔다. 호화로운 방에 들어가서 대충 자리를 잡고 앉은 뒤에 추가적인 설명을 해주었다.
“방금 말했던 대로 키실리프는 카필로니아 제국의 수호룡이 될 거야. 물론 키실리프는 제약에 얽매여있어서 자기 마음대로 패악질을 부리지는 못해. 하지만 그렇다고 키실리프가 너희 말을 다 들어주면 세계의 균형에 문제가 생기기 때문에 몇 가지 조건을 걸 거야.”
시황은 아공간에서 뭉툭하게 생긴 반지를 하나 꺼내서 용언으로 간단한 마법을 걸었다.
옆에서 지켜보던 키실리프는 시황이 용신만이 쓸 수 있는 용언을 손쉽게 사용하자 놀란 눈으로 쳐다봤다. 용신을 거느리고 용언을 사용하는 인간이라니? 아무리 봐도 인간의 냄새가 짙게 풍겼지만 어쩌면 인간의 형태를 한 신일지도 몰랐다. 그렇지 않다면 도저히 이 상황을 설명할 수가 없었다.
“자, 이거 받아.”
시황은 반지를 황제에게 건네줬다.
“이게 무엇인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간단해. 반지에 숫자 보이지? 그 숫자만큼 키실리프에게 도움을 부탁할 수 있어. 물론 다른 나라를 공격하는 등의 부탁은 안 되고 수호룡이니 만큼 위험으로부터 제국을 지키는 쪽의 부탁만 가능해. 어때? 쓸 만하지?”
“시황 님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쓸만한 정도가 아니었다. 이 반지라면 앞으로 키실리프 제국은 숱한 위험을 이겨낼 궁극적인 힘을 지닐 수 있었다. 성에 있는 그 어떤 보물보다도 귀중한 게 바로 이 반지였다.
“그리고 황제의 피를 이은 사람만 쓸 수 있게 해놨고 혹시 잃어버리더라도 다시 돌아오는 기능까지 있으니까 너무 소중하게 보관 안 해도 돼. 이정도면 됐지? 뭐 더 필요한 거 있어?”
“아닙니다. 이정도만 해도 큰 은혜입니다. 다시 한 번 감사드리옵니다.”
감격한 얼굴을 한 황제의 인사를 받으며 시황은 고개를 끄덕였다. 저렇게 좋아하니 괜히 기분이 좋아졌다. 약간 신이 된 느낌이라고 할까? 어쨌든 이걸로 키실리프에 관한 용건은 끝이었다.
시황은 평범한 인간의 형태를 한 키실리프를 바라봤다. 그러자 키실리프가 움찔한다. 눈이 마주치는 것만으로도 두려웠던 것이다.
“너한테 볼 용건은 이걸로 끝이야. 반지에 마법 걸어놨으니까 얌전히 있다가 도와달라고 부르면 바로 와서 도와주면 돼. 알겠어?”
“알겠습니다. 위대하신 존재의 명에 따르겠습니다.”
“그래. 이제 가.”
키실리프는 다시금 시황에게 예를 취하고는 드래곤의 형태로 변해서 안식을 취할 자신만의 보금자리를 향해 날아갔다. 시황에게 죽을 뻔 했지만 몇 번 카필로니아 제국을 도와주는 걸로 마무리 되어서 크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훗날 시황의 은총으로 제국 최고의 보물인 수호룡의 반지를 받게 된 황제의 얘기가 과장되고 각색되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위대한 전설이 되지만, 그건 정말 먼 나중의 얘기였다.
어쨌든 방금 전 상황이 역사서에나 등장할 거창한 전설이 될 줄도 모르고 시황은 황제에게 말해 각종 무기와 갑옷, 성의 디자인 등의 사진을 찍었다.
이걸로 만족스러울만한 자료를 대량으로 모았다.
========== 작품 후기 ==========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