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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명 발전 -->
키실리프를 향한 한줄기의 빛이 생겨났다. 그 빛줄기는 정확하게 키실리프의 턱을 향하고 있었다.
“크아악!”
그리고 빛줄기가 생김과 동시에 키실리프의 입에서 끔찍한 비명이 터져 나와 숲을 강타했다. 흔적조차 없이 녹아버린 대지가 진동했다. 키실리프가 가진 힘이란 비명만으로도 지축을 울릴 정도였던 것이다.
키실리프는 턱에서 느껴지는 극한의 고통에 몸을 지탱치 못하고 하늘에서 휘청거렸다. 어떻게든 균형을 잡기 위해 날개를 흔들었지만 결국 그대로 추락하고 말았다. 녹아버린 대지에 키실리프의 몸뚱이가 처박혔고 방금 전과 비교도 되지 않는 흔들림이 몰아닥쳤다.
“꺄아악!”
거대한 지진이라도 일어난 듯했다. 생물이라고 말하기 어려울 정도로 거대한 크기를 가진 키실리프의 추락은 마치 운석이라도 떨어진 것처럼 대지를 격동시켰다.
시황은 침착하게 키실리프의 머리 위에 올라섰다. 얼마나 크기가 큰지 머리 위에 시황이 올라서도 자그마한 벌레가 앉은 것처럼 눈에 잘 띄지도 않았다.
“크윽... 미물 따위가 감히...”
성난 맹수처럼 낮게 읊조린 키실리프는 곧바로 몸을 변화시켰다. 거대한 크기로 싸워봐야 시황에게 약점만 노출할 뿐 이득이 전혀 없다는 판단이 섰던 것이다.
옅은 빛을 뿌리는 입자들이 키실리프의 몸에서 퍼져나가더니 거대한 키실리프의 몸뚱이가 사라지고 시황과 비슷한 크기의 생물체로 변화했다. 인간과 비슷한 형상을 하긴 했지만 피부가 드래곤의 비늘로 감싸여 있었고 눈동자 또한 파충류처럼 수직으로 길게 찢어져있었다.
“나를 전투 형태로 변신시킨 건 네가 처음이다, 인간. 그 점은 높이 사주지. 하지만 너로 인해 세상은 종말을 맞이할 것이고, 인간들은 끔찍한 죽음 속에서 울부짖게 될 것이다.”
비척거리며 일어난 키실리프의 눈동자엔 시황에 대한 강렬한 분노만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자연스럽게 만화에서 나오는 악당 같은 대사를 읊조리고도 부끄러운 줄 몰랐다.
“방금 한 말 꼭 주인공한테 죽는 악당 대사 같은데? 어쨌든 마침 드래곤에 관한 자료도 필요했으니까 네 사진도 좀 찍어야겠다.”
시황은 드래곤을 최종적이면서도 가장 중요한 보스로 설정하고 싶었다. 드래곤의 유산을 받아서인지 드래곤이라는 존재에 대해 애틋한 감정이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눈 앞에 있는 악당 같은 드래곤까지 좋다는 건 아니었다. 애초에 눈앞에 있는 건 진룡이 아닌 드루키아라는 종류의 하찮은 드래곤이었지만 말이다.
“하찮은 미물 따위가 감히 뭐라고 지껄이느냐!”
여전히 담담하게 웃고 있는 시황을 보는 것만으로도 분을 참을 수 없었던 키실리프는 손톱을 뽑아내어 빛살과도 같은 속도로 쏘아져 나갔다. 그 어떤 명검으로도 파괴하기 불가능할 정도로 굳건하면서도 그 어떤 단단한 물질조차 베어낼 예리한 손톱이 시황의 목숨을 끊어버리기 위해 쾌속하게 움직였다.
단순하지만 절대적인 힘과 스피드를 가진 이 공격을 막을 자란 세상에 존재할 수가 없었다. 이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힘을 지닌 키실리프는 그렇게 믿었다.
깡!
하지만 그 공격은 어느새 드래곤의 비늘로 뒤덮인 시황의 팔에 쉽사리 막혔다. 얼마나 여유로웠는지 시황은 놀러라도 나온 것처럼 느긋하고 여유로운 표정을 지속 있었다.
“어떻게!”
금빛의 드래곤 비늘로 자신의 공격을 막자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외친 키실리프는 곧바로 숨 쉴 틈조차 없이 번개 같은 속도로 시황을 공격했다. 한번 호흡을 할 시간 동안 키실리프의 손톱이 수백 번 시황의 목숨을 앗아가기 위해 번뜩였다. 공기가 찢겨나가고 날카로운 굉음이 주변 공간을 휩쓸었다.
하지만 그 모든 공격을 우습다는 듯 피해낸 시황은 순간적으로 오른쪽 다리를 지축에 고정하고 용신이 가진 힘을 끌어냈다. 용신은 단순히 신체를 강하게 만들고 식사나 공기가 없어도 살 수 있게 해주는 능력이 아니었다. 신체 자체가 진룡, 즉 케즈론이 가졌던 권능을 그대로 이어받는다는 의미였다.
이 의미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드래곤으로 변하지는 못하지만 케즈론이 지녔던 금빛의 비늘을 언제든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었고 마력을 사용했을 때 이끌어 낼 수 있는 힘의 효율이 극대화되고 증폭 되었다.
어느새 시황의 신체의 절반 정도가 찬란한 금빛의 비늘로 휩싸임과 동시에 시황의 주먹이 키실리프의 안면을 그대로 강타했다.
쿵!
천지가 흔들리고 뇌성이 울려 퍼지는 듯한 강렬한 울림이 키실리프의 안면에서 터져 나왔다. 그 무엇으로도 파괴되지 않는다는 드래곤의 비늘이 유리조각처럼 비산하며 키실리프가 튕겨져 나갔다. 총탄처럼 쏘아져 나간 키실리프는 녹아내린 대지를 물수제비라도 하듯 나뒹굴었다.
“끄아아악!”
얼굴이 뭉개지고 전신이 조각조각 나는 듯한 끔찍한 고통에 키실리프가 비명을 질렀다. 방금 전만 하더라도 비명으로 대지가 흔들렸지만 이제는 그런 힘조차 낼 수 없을 만큼 진정한 고통을 느끼고 있었다.
“여기로.”
시황이 읊조리자 튕겨나갔던 키실리프의 육체가 다시 시황의 앞으로 이동했다.
겨우 한 대를 얻어맞았을 뿐이지만 키실리프의 안면은 말도 못할 정도로 엉망이 되어 있었다. 거기다 안면에서 퍼져나간 충격이 키실리프의 전신을 난도질했고 비늘이 깨진 유리처럼 뜯겨져 나가 있었다.
하지만 이것도 키실리프를 죽이지 않기 위해 시황이 손속에 사정을 둔 거였다. 이전만 해도 키실리프 정도는 요리할 힘이 있기는 했지만 이 정도까지 큰 힘은 아니었다. 모든 건 용신 덕분이었다. 용신을 얻은 지금은 이전과 같은 마기를 가졌음에도 신체가 낼 수 있는 효율 자체가 달랐다. 미량의 마기만으로 무궁무진한 힘을 이끌어 낼 수 있었고 그 덕에 이 세계에서 가장 강하다는 키실리프를 일격에 무너트리는 것조차 우스운 일이 되고 말았다.
“끄억... 도, 도대체 넌... 누구냐...”
키실리프가 일어나려고 발버둥 쳤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아 다시금 쓰러졌다. 키실리프의 눈에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불신만이 가득했다. 도대체 저 인간이 어떻게 황금빛의 드래곤 비늘을 사용했는지도 알 수 없었고 인간 주제에 어떻게 이런 힘을 가질 수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유일하게 알 수 있는 건 저 하찮아 보이는 인간에게 완벽하게 패배를 했다는 것뿐이었다.
“누구긴 네가 말한 대로 하찮은 미물이지. 드래곤 사진이 필요한데 이렇게 다치고 패배했어도 순순히 말 안 들을 거지?”
“크윽... 하찮은 미물 따위의 명령을 들을 바에는 스스로 한줌의 불길이 되는 게 낫다.”
“그렇지? 그러면 귀찮으니까 빨리 불길이나 돼.”
“뭐?”
갑작스러운 시황의 말에 키실리프는 엄청난 고통을 느끼면서도 되묻고 말았다. 도대체 인간이 원하는 의도를 알 수가 없었다. 자신에게 뭔가 부탁이 있는 듯 하더니 빨리 불길이나 되라고 하다니?
“시황 님. 괜찮으세요?”
그때 옆에서 모든 걸 지켜보고 있던 실피나와 라비올라가 조심스럽게 시황의 옆에 다가왔다. 악룡 키실리프가 나왔을 때만 해도 이대로 끝인가 했지만, 역시라면 역시일지 시황의 힘 앞에선 끔찍한 괴물인 악룡 키실리프조차도 힘을 쓰지 못했다.
“보다시피 난 괜찮아. 나보단 너희는 괜찮아?”
“네. 저희도 괜찮아요. 시황 님께서 주신 갑옷 덕분에 전혀 안 다쳤어요.”
키실리프 때문에 대지가 흔들릴 때 중심을 잡지 못하고 바닥에 쓰러지거나 돌멩이가 날아와 부딪히기도 했지만 아프긴커녕 솜에 맞은 듯 아무런 느낌조차 없었다. 전부 시황이 준 특별한 갑옷 덕분인 듯 했다.
“다행이네. 이제 대충 다 찍었으니까 슬슬 돌아가자. 나 따라와서 고생 많았어.”
“전혀 안 힘들었어요. 전 시황 님과 함께할 수 있어서 행복하기만 한 걸요.”
이 와중에도 실피나는 시황의 팔을 살짝 붙잡으며 달콤하게 말했다. 악룡 키실리프조차 손쉽게 때려잡는 시황의 옆이라면 두려울 게 없었다.
“큭... 뭐 하는 짓거리냐! 감히 천하디 천한 미물들이 나를 앞에 두고...”
시황이 여유를 준 덕에 괴물같은 회복력으로 비늘이 다시금 돋아나던 키실리프가 참지 못하고 소리를 질렀다. 마치 자신은 존재하지도 않는 것처럼 하는 행동들에 자신심이 상하며 큰 분노가 일었다.
“아직도 안 죽었어? 언제 죽을 거야?”
“무슨 말을 지껄이는 거냐.”
“명령 들을 거면 차라리 죽는다며? 그러니까 빨리 죽으라고. 아니면 내가 죽여줘? 귀찮게 하네.”
시황은 쓰러진 키실리프를 집어 들었다. 마기가 일어나며 강대한 힘이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용신에 의해 극대화되고 증폭된 그 힘은 강철보다 단단한 키실리프의 신체조차도 한줌의 핏조각으로 만들만큼 막대했다.
그 힘을 느낀 키실리프의 안색이 변했다. 그 어떤 존재보다 강대한 힘을 지녀 오만하고 자존심 강한 키실리프였지만 그만큼 비열하고 누구보다 자신의 목숨을 소중히 여겼다. 아니, 이제까지 목숨이 소중한지도 모를 정도로 세상을 하찮은 듯 내려다 봤지만 위기가 닥치자 죽고 싶지 않다는 비굴한 감정이 불쑥 솟아났다.
“자, 잠깐! 왜 그렇게 급하게 하려고 하지? 강대한 힘을 가진 미물치고는 참을성이 없군.”
“급한 게 아니라 귀찮으니까 그냥 죽이려고. 그럼 잘 가라.”
시황의 손이 키실리프의 목을 조여들자 키실리프가 다급한 표정을 지었다. 이대로라면 저 피도 눈물도 없는 미물에게 정말 살해당할지도 몰랐다.
“잠깐! 잠깐, 잠깐.”
“왜 또?”
“일단 네 말을 들어보기로 하지. 충분히 수용 가능한 얘기라면 거절하지 않을 의사도 있다.”
“생각해보니까 너보단 아는 사람한테 부탁하는 게 나을 것 같아서 그냥 세계의 후환이나 제거하려고. 아까 뭐라더라 나 죽이고 인간들 다 죽인다며? 그 전에 널 죽이는 게 낫잖아. 합리적으로 생각하면 말이야. 안 그래?”
“죽이지 않겠다.”
“뭐?”
“인간들을 죽이지 않겠다. 그러니 날 살려주지 않겠는가?”
대화를 하면 할수록 키실리프는 비굴해져갔다. 어떻게든 자존심을 지키면서 살려고 했지만 이래선 도저히 답이 보이지 않았다. 차라리 비굴하더라도 이렇게나마 목숨을 구걸하는 게 살 수 있는 길이었다.
“싫어.”
“그, 그러면 네가 말하는 부탁은 물론이고 뭐든지 다 들어주겠다.”
“뭐든지 다 들어준다고?”
“그렇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뭐든지 다 해주겠다.”
시황이 혹하는 듯 하자 키실리프가 재빨리 대답했다. 하지만 이건 진심이 아니라 시황의 시선을 돌리고 훗날을 도모하기 위한 계책에 지나지 않았다. 악당이라면 빠지지 않고 하는 비열한 짓거리였다.
“그러면 카필로니아 제국 지켜줄 수 있어? 앞으로 영원히. 얼마전에 마왕 때문에 멸망할 뻔 했는데 네가 있다면 그런 일은 이제 없겠지.”
“알겠다. 네 말대로 하겠다.”
물론 키실리프는 그럴 생각이 없었다. 제약을 걸어봤자 인간의 마법 수준은 뻔할 테니 아무리 강대한 힘을 지녔다고 해봤자 풀어낼 자신이 있었다. 인간과 드래곤의 마법 격차는 단순한 힘만으로 이겨낼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좋아. 그러면 허락했으니까 어기지 못하게 해야겠지? 너희 같은 애들은 뒷통수 치는 게 일상이니까.”
“알겠다. 어떤 제약이든 걸도록 해라.”
“말 안 해도 그럴 거야. 루나모스 잠깐 와봐.”
키실리프를 대충 땅바닥에 집어던지 시황이 루나모스를 부르자 허공에서 검은 구멍이 생겨나더니 맨발에 가벼운 복장을 한 루나모스가 걸어 나왔다. 그리고 부유하듯 시황의 근처로 왔다.
루나모스를 본 키실리프의 표정이 급변했다. 마치 봐서는 안 될 존재라도 본 듯한 충격적인 얼굴이었다.
“요, 용신...”
그리고 막힌 듯한 목구멍에서 겨우 한마디를 내뱉었다. 눈앞에 나타난 존재는 세계의 규칙을 관장하고 전능한 힘을 가진 신이었다. 같은 드래곤이라고는 불리지만 자신 따위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격을 가진 존재였다.
“루나모스 님을 뵙습니다.”
루나모스를 본 실피나와 라비올라도 황급히 예를 취하며 인사를 했다. 루나모스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다 들었지? 쟤 말한 거 어기면 죽을 것 같은 고통을 느끼게 해줘. 세 번 어기면 아예 죽게 하고.”
“알겠어요.”
시황의 말에 루나모스가 가볍게 손을 휘둘렀고 동시에 키실리프는 절대로 벗어날 수 없는 족쇄에 휘감겼다. 인간이 아닌 용신이 거는 족쇄를 벗어날 수 있는 존재란 그 누구도 존재치 않았다.
그리고 그런 용신에게 당연하다는 듯 명령을 내리는 시황을 키실리프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바라봤다. 도대체 저 인간의 정체가 무엇이기에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어난 건지 이해를 할 수 없었다. 키실리프의 얼굴이 당혹스러움과 절망감으로 물들었다.
“샘플 확보했네. 고마워. 이제 사진 촬영해볼까?”
시황은 키실리프를 바라보며 가볍게 웃어주었다. 그러자 본능적으로 두려움을 느낀 키실리프가 살면서 처음으로 몸을 떨었다.
========== 작품 후기 ==========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