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8 문명 발전 ====================
임영선은 시황이 따라준 술을 마셨다. 향긋한 과일향이 풍기는 이 술은 일반 술과 다르게 너무 맛있어서 계속 입에 들어갔다. 자주 술을 마시는 것도 아니고 그다지 술을 잘하는 것도 아니라 금세 취기가 돌았다.
술에 조금 취하기도 하고 현실에서 나올 수 없는 새로운 발견 또한 목전에 두고 있는지라 몸에서 열이 상당히 났다. 그녀는 입고 있던 정장 자켓을 벗어 소파 위에 대충 올려두었다. 비치지 않는 흰색의 단정한 셔츠가 드러났다. 그녀는 셔츠의 손목 단추까지 풀어서 접어 올렸다. 흰색의 셔츠를 접어올린 그녀는 대단히 지적이면서도 단정한 얼굴과 몸매를 지니고 있었다. 40대 중반의 나이이기는 했지만 섹시한 황미주와 다르게 우아한 중년의 아름다움을 드러냈다.
“이 장치의 정확한 작동 원리가 어떻게 되는 거죠?”
“아쉽지만 제가 아는 바는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전 후원으로 제품을 받아볼 뿐 제가 만든 건 아니니까요. 다만 그녀가 말하길, 인간이 의지력을 가질 때 뇌에서 전기활동이 일어나게 되고, 그것을 감지해서 인식한다고 들었습니다.”
“흠... 그러면 그 사람은 이 뇌파를 인지하는 시스템을 만들 정도로 확실히 이해하고 있단 말인가요? 아니, 그러니까 이런 장치를 만들었겠지만 그래도 현재의 기술력으로 이런 장치를 만들 수가 없을 텐데...”
혼란스러운 임영선은 다시 술을 들이켰다. 혼란스럽고 머리가 복잡했다. 차를 타고 올 때만 해도 터무니없는 소리를 하는 거라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실제 뇌파 인식 장치를 보게 되니 거짓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세상 그 어디에도 상상만, 그것도 의지력이 담긴 상상만 하는 걸 출력해주는 장치는 없었으니까. 차라리 속임수인 게 더 마음이 편할 뻔 했다.
시황은 계속해서 임영선의 술잔에 엘프주를 채워 넣었다. 멀쩡한 정신일 때보다 차라리 술에 취한 게 조금 더 상대하기가 편했다.
“이제 뇌파를 이용한 상호작용 장치가 있다는 걸 믿을 수 있으시겠죠?”
“좋아요. 그건 믿겠어요. 그래서 원하는 게 뭐죠? 장미 얘기 때문에 이런 중요한 걸 보여준 건 아닐 테고, 뭔가 다른 목적이 있으니까 보여준 거 아닌가요?”
임영선이 얼굴을 발그레하게 물들이고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말했다.
“제가 이 장치를 이용한 하나의 사업을 하나 해볼까 생각중입니다.”
“사업이요? 무슨 사업 말이죠? 뇌파를 이용한 시스템으로 다른 사람들의 감춰진 정보를 빼앗는 범죄라도 저지를 생각인가요? 그건 제가 절대 용납하지 못해요.”
“저를 너무 나쁘게 생각하셔서 뭔가 오해를 하시듯 한데 그런 범죄를 저지르진 않습니다. 하하.”
시황은 가볍게 웃었다.
“흥, 그러면 뭐죠?”
“게임입니다.”
“게임이요? 세계의 문명을 도약시킬 수 있는 이 엄청난 장치로 겨우 게임을 만든다고요? 정말, 당신이 뭘 생각하는 건지 모르겠군요.”
“그런가요? 하지만 사람들이 뇌파를 이용한 장치로 가상의 공간에 접속해서 현실과 다름없는 감각을 느끼고, 현실에서 이루지 못한 기적들을 행하는 일들은 생각만 해도 흥분되지 않나요?”
“이 장치를 만든 건 인정하지만 방금 말한 것들은 지금 보여준 이 장치보다 더 터무니가 없다는 거 아세요? 정보를 신호로 뿌려서 뇌가 인지하게끔 만드는 것 자체가 어처구니없는 말이에요. 어린애들이나 할법한 공상과학이라고요.”
이번에도 임영선은 부정했다. 뇌파를 인식하는 장치를 만든 것도 말도 안 되지만 어떻게 넘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기계 장치에서 뿌려주는 신호만으로 뇌가 인식하고 실제처럼 느끼는 건 정말 공상과학에나 나올법한 일이었다.
“그러면 만약 그런 장치가 있다면 어떻게 하시겠어요?”
“흥, 제가 속을 줄 알아요? 좋아요. 그러면 원하는 부탁 뭐든 제가 들어드리죠. 장미와 사귀겠다는 것만 빼고요.”
이 와중에도 임영선은 장미와는 사귀지 못하게 했다.
“알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시황은 가방에서 또 하나의 장치를 꺼냈다. 이번엔 조그만 디스플레이가 달린 투박한 기계였다. 방금 건 뇌파를 인식해 디스플레이에 출력해주는 장치였다면 이건 기계에서 신호를 보내 뇌가 인지하도록 만드는 기계였다.
장치를 건네준 시황은 간단하게 사용 방법을 설명해주었다.
설명을 듣는 임영선은 설마 하는 표정만을 계속 지었다. 아무리 그래도 뇌가 신호를 인식하는 장치 따윈 결코 만들 수가 없었다.
그래도 임영선은 시황의 말대로 장치의 전원을 켰다. 그러자 화면에 흑백 꽃 하나가 생겨났다. 어린애들도 가지고 놀지 않을 법한 조약한 그림이었다.
“만져보세요.”
임영선은 살짝 긴장을 하면서 디스플레이에 있는 꽃을 건드렸다.
“어?”
그런데 딱딱하고 뭉툭한 디스플레이의 느낌이 아니라 실제 꽃을 만지는 듯한 촉감이 느껴졌다. 심지어 꽃향기마저 풍겨났다. 그리고 손으로 건드린 곳은 흑백이 아닌 실제 같은 화사한 색감이 덧입혀졌다.
“이게 무슨...”
너무 놀라 말조차 나오지 않았다. 뇌파를 인식해 출력해주는 장치보다 이게 훨씬 더 말이 되지 않았다. 혹시 뭔가 장치를 해뒀을까 싶었지만 조약한 기계 장치 하나로는 그런 장치를 하기조차 불가능했다.
“이제 믿으시겠죠? 혹시 못 믿으시면 버튼을 눌러보세요. 디스플레이에 나오는 그림이 변할 테니까요.”
임영선을 재빠르게 버튼을 눌러 그림을 바꿨다. 이번엔 조약한 돌멩이나 나왔다. 곧바로 만지자 역시나 실제 돌을 만지는 듯한 감각이 느껴졌다.
“화면을 만질 때마다 뇌가 인식하는 신호를 보내서 실제 물체와 똑같은 감각을 재현하는 거에요. 그 신호를 정교하게 만드는 게 어렵긴 하지만, 현재 이 정도까지는 할 수 있습니다.”
“말도 안 돼... 다, 당신 정체가 뭐죠? 어떻게 이런 기술을 개발할 수 있는 거죠? 원리가 뭔가요? 설마 이거보다 더 개발 진척이 되어있는 건 아니죠?”
“하하. 차근차근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런데 전 원리 같은 건 전혀 모릅니다. 그래서 그걸 설명해드리긴 어렵겠네요. 일단 이 기술로 가상현실 게임을 만들까 생각 중에 있습니다. 다만 아직 대규모로 작업하는 건 아니고 한 개인이 기능만 구현해봤을 뿐이에요.”
“누구죠? 그 천재는? 어떻게 그런 천재를 세상이 모를 수가 있죠? 이건 세상을 바꿀 혁명적인 물건이에요.”
“만나게 해드릴까요? 그리고 저와 함께 세상을 변화시켜보지 않으시겠어요?”
임영선은 시황을 쳐다봤다. 도대체 무슨 꿍꿍이인지 속을 알 수가 없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한없이 순수하고 착하기만 했다. 하지만 그 내부엔 소름끼치도록 무서운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저 여자를 좋아하는 이용해먹는 한심한 남자 따위가 아니었다.
그녀는 어느새 차있는 술잔을 들이켰다. 세상을 변화시킬 기술을 직접 확인할 수 있는 유혹을 이겨낼 존재는 세상 그 어디에도 없으리라.
“좋아요. 제가 드리고 싶은 부탁이었어요. 당신과 일을 할지는 모르겠지만 도대체 이게 어떻게 가능한지 직접 확인해보고 싶기는 했으니까요.”
“알겠습니다. 그러면 시간 나실 때 만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아까 한 말씀 잊으시진 않으셨죠?”
“뭘 말이죠?”
뜬금없는 시황의 말에 임영선이 되물었다. 아까 한 말이라니?
“만약 사실이면 그 어떤 부탁이든 다 들어주신다는 말씀이요.”
“아!”
그랬다.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그때는 도저히 믿지 못했기 때문에 한 말이긴 했지만 상황이 이렇게 되고 보니 치명적인 독으로 작용했다. 자존심 때문이라도 아니라고는 못했지만 시황이 도대체 무슨 부탁을 할지 걱정이 되기는 했다.
“맞아요. 그런 말 했어요. 그래서 뭐 하고 싶은 부탁이라도 있나요? 제가 내뱉은 말이니 약속을 어기거나 하진 않아요.”
임영선은 괜히 더 당당한 척 했다. 시황의 앞에서 당혹해하는 감정을 내비치고 싶지 않았다.
“그러면 교수님의 몸을 만져도 될까요?”
“뭐, 뭐라고요?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세요?”
당당하게 자신의 몸을 만지겠다는 시황의 말에 임영선은 경악했다. 아무리 봐도 30살도 되지 않는 남자가 40이 넘어 아무런 매력이 없는 자신의 몸을 만지겠다니? 설마 장미의 일로 수치라도 줄 생각인걸까? 임영선은 어이가 없어 웃음까지 났다. 자기를 너무 가볍게 본 거 아닌가? 아무리 모든 부탁을 다 들어준다고 말했지만 그런 음란한 부탁까지 들어줄 생각은 없었다.
“오늘 너무 피곤해 보이셔서 마사지라도 해드리고 싶어서요. 안 되나요? 전부 다 들어주신다고 해서 마사지라도 해드리고 싶었던 건데. 정 싫으시면 다른 부탁으로 바꾸겠습니다. 그런데 제가 마사지를 좀 잘해서 받으시면 나쁘진 않으실 거예요.”
“아... 마사지...”
혼자 별의별 야한 생각을 다하던 임영선은 살짝 민망한 표정을 지었다. 몸을 만진다고 해서 당연히 야한 짓을 할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게 아니라 오히려 자신을 생각해서 마사지를 해주고 싶다는 의미였다. 단순한 호의였는데, 술에 취하기도 했고 워낙 말을 헷갈리게 하는데다 시황을 좋게 보지 않다 보니 혼자 착각을 해버렸다.
“안 되나요?”
“흥, 알겠어요. 얼마나 마사지를 잘하는지 모르겠지만 그렇게 하고 싶어 하니 한번 해봐요.”
괜히 민망함을 감추려고 임영선은 쏘아붙이듯 말했다.
“감사합니다. 그러면 먼저 안마부터 해드릴게요.”
시황은 임영선의 뒤쪽으로 가서 먼저 어깨부터 주물렀다. 당연하게도 몸의 피로를 풀 수 있게 치유력을 끌어올렸다. 그리고 7레벨이 되면서 얻은 케즈론의 칩 능력으로 임영선의 성감대 위치도 확인했다. 귓불과 목덜미 등 각종 감도에 따라 각각의 부위가 분홍빛깔로 표시되었다.
어깨를 주무르며 확실히 그 성감대들을 체크했다.
“흐음...”
의외로 시황의 어깨 마사지는 상당히 좋았다. 평범하게 좋다라고 말하기엔 부족할 만큼 대단히 잘했다. 하루 종일 피곤하게 일을 하고 와서인지 어깨 마사지만으로도 몸이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마사지를 잘한다더니 빈말이 아니었다.
“일을 많이 하셔서 그런지 어깨가 엄청 뭉치셨네요. 일단 어깨부터 하고 다리도 해드릴게요.”
“다리도 한다고요?”
“싫으신가요? 그러면 그만 하겠지만 그래도 이참에 제대로 마사지 받아보시는 건 나쁘시진 않을 거예요.”
“...”
임영선은 고민했다. 어깨를 주무르던 시황의 손길이 워낙 좋아서 피로가 풀리고 몸이 녹아내리는 듯 했다. 대단히 기분 좋은 감각인지라 계속 마사지를 받고 싶기는 했다. 솔직히 직접 만나본 시황은 생각처럼 그렇게 나쁜 사람은 아니었고, 웬만한 사람들보다 훨씬 친절하고 착하기까지 했다. 매너 있는 시황이 설마 자신의 몸, 그것도 40대 중반의 매력하나 없는 몸을 성적인 목적으로 만지진 않을 거였다. 순수한 호의인데 괜히 오해해서 또 민감하게 구는 것도 민망한 일이었다.
“알겠어요. 그렇게 해요.”
“그러면 전신 마사지를 해드릴까요? 기왕 이렇게 된 거 장미 일로 점수도 좀 딸 겸, 제대로 해드릴게요.”
“흥, 그런 걸 해준다고 장미와 사귀는 걸 허락해주진 않을 거예요.”
“하하. 여전히 단도하시네요. 알겠습니다. 그건 일단 넘어가고 같이 일을 할 수도 있는 사이이니 제가 호의로 전신 마사지를 해드릴게요. 이건 괜찮으시죠?”
“그거라면 성의도 있으니 받아들이죠.”
“감사합니다. 잠깐 준비를 좀 할 테니까 기다려주세요.”
시황이 방에 들어가자 임영선은 고개를 흔들었다. 술에 취해서인지 갑자기 시황이 해주는 전신 마사지를 받기로 해버렸다. 평소라면 부끄러워서라도 허락을 안 할 일인데 어찌된 건지 거부하나 하지 않고 허락해버렸다. 사실 몸이 녹아내릴 만큼 어깨 마사지 기분이 좋기도 했고 의외로 시황이 괜찮게 느껴진 것도 있었다. 얼굴도 딱 좋을 만큼 깔끔, 단정해서 장미 일만 아니라면 사실 꽤나 호감을 느낄 법한 남자였다.
“방에 옷 준비해뒀어요. 씻지는 않으셔도 되고, 속옷까지 다 벗고 입으세요. 그리고 불러주시면 제가 그 방으로 갈게요.”
“소, 아니, 알겠어요.”
속옷 얘기를 꺼내려던 임영선은 그냥 알겠다고 했다. 괜히 말을 꺼냈다가 무지를 들켜 민망한 일을 당할 것만 같았다. 사실 이렇게 마사지 받아보는 게 처음이었다.
방문을 잠그고 나서 시황의 말대로 속옷까지 다 벗고 준비해둔 옷을 입었다. 준비된 옷은 속이 비치지 않는 반팔 티와 짧은 반바지였다. 반바지가 조금 짧긴 했지만 그렇게 민망한 복장은 아니었다.
옷을 다 입고 준비를 마친 임영선은 시황을 불렀다.
시황은 또 술과 디저트를 가지고 와서는 침대 옆 테이블에 놓았다.
“마사지 하는 동안 이거 드셔도 돼요. 자, 이제 침대 등받이에 등을 받치고 앉으세요. 다리부터 해드릴게요.”
임영선은 침대 등받이에 기대고 앉았다. 그러자 시황이 오일처럼 보이는 향긋한 액체를 손에 바르더니 천천히 발을 마사지 해주기 시작했다.
“하아...”
기분 좋은 감각이 등골을 타고 흐른다. 발을 꾹꾹 눌러줄 때마다 몸이 움찔움찔할 정도로 쾌감이 밀려들었다. 평범하게 기분 좋은 감각이 아니라 묘하게 성감을 자극하는 성적인 쾌감이었다.
임영선은 시황이 놓아둔 와인잔을 들고 술을 마셨다. 이러니까 꼭 실제 가게에서 마사지를 받는 것만 같았다. 분위기 또한 대단히 감미로웠다. 술에 취해서일까? 겉옷을 벗고 마사지를 해주고 있는 시황의 섹시한 근육이 대단히 매력적으로 보였다.
순간적으로 드는 생각에 화들짝 놀란 임영선은 고개를 흔들었다. 술에 취해서인지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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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