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드래곤의 유산-567화 (566/629)

567  문명 발전  ====================

다음날.

9시가 넘은 늦은 밤이었다.

어두운 도로가를 달려 시황은 임영선과 만나기로 한 장소에 도착했다. 서울대 학과 건물 근처의 주차장에서 차를 세우고 기다리고 있자 멀리서 단정한 정장을 입은 중년의 여성이 걸어오는 게 보였다. 만난 적은 없었지만 장미의 느낌이 얼핏 풍기는 얼굴을 보자마자 임영선이라는 걸 시황은 곧바로 알아차렸다.

얌전히 기다리자 그녀는 가방에 전화를 꺼내 어디론가 연락을 했고, 곧이어 시황의 폰에서 진동이 울렸다. 시황은 바로 전화를 받았다.

[주차장에 도착했어요. 어디 있죠?]

어제보다는 조금 누그러진 목소리로 임영선이 물었다. 하지만 누그러졌다고 해도 여전히 불신과 경계심이 가득했다.

[지금 나갈게요. 잠시 만요.]

시황은 전화를 끊지 않고 그대로 차에서 내려 가로등 아래에 서 있는 임영선에게 갔다.

“안녕하세요. 강시황입니다.”

“일단 반가워요. 전 임영선이에요.”

인사를 건네자 임영선은 그다지 반갑지 않은 얼굴로 대답하며 전화를 끊었다. 그런데 사진으로만 보던 시황과 직접 만난 시황은 그 느낌이 전혀 달랐다. 사진으로 볼 땐 잘 못 느꼈지만 직접 보니 생각과 다르게 대단히 순수하고 착하다는 느낌이 강하게 풍겨왔다. 믿지 못하게도 말이다.

“일단 제 차에 타시죠.”

“알겠어요.”

임영선은 도도한 표정으로 말했다. 순수하고 착한 건 겉모습이지 속마음은 아니었다. 괜히 장미가 속아 넘어가서 좋아죽으려고 하는 게 아니었다. 외모도 그렇게 풍기는 분위기도 그렇고 여자를 혹하게 만드는 뭔가가 있었다.

시황은 먼저 가서 조수석 문을 열어주었다. 임영선이 타자 문을 닫고 시황도 운전석에 앉았다.

9시가 지난밤이라 주변이 적적했다. 간간히 사람들이 지나다니긴 했지만 고요하게만 느껴졌다.

“좋지 못한 일로 만나게 돼서 죄송합니다.”

“흥, 그런 건 필요 없고 장미하고나 빨리 헤어져주세요. 당신 때문에 더 이상 장미하고 싸우는 것도 싫으니까요.”

“그거에 대해서 깊게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거 외에도 중요하게 할 말이 있으니 조용하게 얘기할 곳으로 가시지 않겠어요?”

“뭐죠? 장미 얘기 말고도 중요하게 할 말이라니? 그렇게까지 당신하고 오래 말을 나누고 싶지 않아요.”

“불편하신 마음은 압니다. 그래도 중요한 말이니 부탁드리겠습니다.”

시황의 말에 임영선은 조금 갈등했다. 중요한 말이라고 하니 신경도 쓰였고 오늘 확실히 결판을 내고 싶기도 했다. 아무래도 어두운 차에서 얘기를 나누는 건 조금 불편하기도 하고 시황이 저렇게 부탁하니 거절하기도 조금 그랬다. 막상 만나서 대화를 나누니까 너무 공손하고 예의발라서 매몰차게 대할 수도 없었다. 차라리 가벼운 날라리 같은 사람이었으면 편했을 텐데 말이다.

“알겠어요. 그런데 지금 조용한데가 어디 있죠? 카페 같은데도 어차피 사람들이 있잖아요?”

“제가 예전에 살다가 지금은 비워둔 집이 있습니다. 그렇게 멀지는 않아요.”

“수상쩍긴 하지만 그렇게 하죠.”

“감사합니다.”

임영선이 허락을 하자 시황은 어제 장미와 섹스를 했던 이전 집으로 향했다. 어두운 도로를 달리는 동안 임영선과 가볍게 얘기를 나누었다.

“서울대에서 뇌 관련 연구를 하신다고 들었어요.”

“하는데 그게 당신이랑 무슨 상관이죠?”

뜬금없는 물음에 임영선은 조금 까칠하게 대답했다. 딸인 장미를 생각하면 무슨 말을 하든 도저히 좋게 봐 줄 수가 없었다.

“사실 저희 기업에서 뇌파와 관련된 상호작용 시스템을 개발하려고 하거든요.”

“그게 무슨 말이죠? 뇌파로 상호작용 시스템을 만든다니? 그런 건 들어본 적도 없어요.”

“그런가요? 사실 지금 간단한 시제품을 만들어두기는 했습니다. 저희 쪽에 그런 걸 잘하는 천재가 한 명 있거든요.”

시황은 직접 만들었다고 하고 싶어도 제대로 설명을 하기 힘이 드니 루나모스를 천재 개발자로 설정하고 말을 했다. 나중에 뭔가를 물어보더라도 루나모스와 만나게 하면 손쉽게 전문적인 지식을 풀어낼 테니까.

“지금 농담하는 건가요? 뇌파를 이용해서 상호작용을 하는 시스템 같은 건 누구도 만들지 못해요. 만약, 정말 만약에 뇌파를 인식해 작용을 시스템을 만들었다고 하더라도 뇌파가 가진 기본 정보자체가 정보가 턱없이 부족해요. 의식이 깨어있는가? 아니면 자고 있는가? 정도밖에 명확하게 알지 못하는 뇌파로 어떻게 상호작용을 한다는 거죠?”

“믿지 못하시는 건 이해합니다. 그래서 제가 직접 그 시제품을 가지고 왔으니까요. 제가 조용한 곳에 가자고 한 이유 중에 그것도 포함돼 있어요.”

“당신, 그런 허풍으로 우리 장미를 좋아하게 만들었나 봐요? 아주 되지도 않는 말을 그럴싸하게 말하는 재주가 있군요?”

“하하. 그런가요?”

임영선은 매력적으로 웃는 시황을 쳐다봤다. 자신이 확실하게 뇌 공학을 전공한 사람이 아니었다면 시황이 하는 말에 껌뻑 속았을지도 몰랐다. 세상에 뇌파를 이용한 상호작용 시스템이라니? 그딴 건 과학이 100년 더 발전한다고 해도 구현이 불가능한 제품이었다. 도대체 무슨 시제품으로 속여먹으려는지 모르겠지만 눈앞에서 그 비밀을 파헤치고 톡톡히 창피를 줄 생각이었다. 그리고 장미와도 헤어지게 만들고.

그렇게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이전 집에 도착했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임영선과 함께 현관문을 열고 들어갔다.

평범한 주택이기는 했지만 실내는 꽤 돈을 들인데다 케즈론의 성에서 가구를 가지고 왔던지라 세련되면서도 서양의 고풍스러운 아름다움이 공존하고 있었다.

임영선도 여자인지라 고급스러운 실내 인테리어에 꽤 놀랐다. 이런 집을 비워두다니. 케즈론이 뭐하는 곳인지는 잘 몰라도 기업의 대표라더니 돈 하나는 많긴 한 듯 했다.

“소파에 앉으세요. 손님이 오셨으니 간단한 거라도 대접해드릴게요.”

“아니...”

뭐라고 말 사이도 없이 시황이 부엌으로 가버렸다. 임영선은 일단 소파에 앉았다. 아무래도 자기에게 잘 보이고 점수를 따내서 장미와 사귀는 걸 허락받으려는 작정인 것 같았는데, 절대로 그런 속보이는 행동에 넘어갈 생각은 없었다.

시황은 일부러 루나모스에게 부탁해 달콤한 과일로 만든 엘프주를 준비했다. 그리고 케즈론 카페에서 파는 디저트를 쟁반에 담아 거실로 갔다. 그리고 도도하게 앉아 있는 임영선의 앞에 있는 테이블에 놓고는 엘프주의 뚜껑을 따서 와인 잔에 부어주었다. 달콤하고 풍부한 과일 맛이 나는데다 얼음까지 넣어 시원한 음료를 마시듯 할 수 있었다.

“오늘 장미의 어머니께 드리기 위해 특별히 주문한 과일주에요. 나름 신경 써서 준비했는데 입맛에 맞으실지 모르겠네요.”

“흥, 과일주가 다 거기서 거기죠.”

재벌인 시황이 준비했다고 하자 임영선은 약간 호기심이 생겨 와인잔에 있는 과일주를 살짝 마셨다. 순간, 입 안으로 산뜻한 과일향이 진하게 풍기며 자극적이지 않은 달콤함이 혀에 감겼다. 이제껏 먹어보지 못한 맛의 과일주였다. 꿀꺽 삼키자 끝에 옅은 알콜이 살짝 느껴진다.

무슨 과일인지는 모르겠지만 대단히 맛있었다. 신선함 마저 느껴지는 과일주라니? 비싼 술은 이렇게 맛이 있는 걸까? 임영선은 그대로 와인 잔에 있는 엘프주를 홀짝이며 다 마셔버렸다.

“맛 괜찮지 않나요? 더 드릴까요?”

“뭐, 나쁘진 않네요. 우리 장미도 이런 거 주면서 환심을 샀나보네요? 참 수완도 좋으셔.”

“장미한테 술을 준 적은 없어요. 자, 드세요. 이 술은 원기회복에도 좋아서 마시고 나면 몸이 좀 개운하실 거예요.”

시황이 술을 따라주자 임영선은 다시 엘프주를 금세 다 마셔버렸다. 여자가 딱 좋아할만한 감미롭고 풍부한 과일 맛이라 계속 입에 들어갔다. 약간 취기가 올라오는 듯 했지만 이 정도는 상관 없었다.

“장미 얘기는 차차하고 일단 아까 말한 뇌파를 이용한 상호작용 시스템의 시제품을 보여드릴까요?”

“좋아요. 어디 한 번 보죠. 얼마나 터무니없는 걸 만들고 그런 말을 하는 건지.”

임영선은 포크로 조각 케이크를 잘라 먹으며 말했다. 이 조각 케이크도 어찌나 맛있는지 손이 멈추질 않았다.

시황은 가방에서 꺼내는 척 하며 아공간에서 시제품을 하나 꺼냈다. 그건 모르는 사람이 보면 최근 유행하는 평범한 가상현실 기기처럼 보였다. 하지만 이건 뇌파 인식 시스템의 아주 초창기 형태로, 머리로 생각하고 직접 쓰고자 마음먹은 글을 디스플레이로 보여주는 간단한 형태의 기계였다. 이것도 루나모스에게 말해 받아왔다.

“이거입니다. 이걸 머리에 착용하고 머릿속으로 생각한 글을 직접 적는 것처럼 강렬하게 마음을 먹게 되면 그 뇌파를 인지해서 디스플레이에 뿌려주는 기계입니다.”

“나 참. 거짓말을 하려고 해도 적당히 해야죠. 뇌파로 그런 걸 구분하기란 불가능해요.”

“일단 한 번 써보시죠.”

“좋아요. 무슨 수작을 부렸을지 직접 확인해보죠.”

임영선은 먹던 디저트를 놔두고 시황이 건네준 뇌파 인식 장치를 머리에 뒤집어썼다. 그러자 어두워진 시야에 검은 디스플레이만이 보였다. 무슨 장치를 해뒀는지 장치를 여기저기 만졌지만 검은 디스플레이만 보일 뿐,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흥, 역시 되지도 않는구만.”

“직접 글을 쓰는 것처럼 머릿속에서 하고자 하는 의지를 가져보세요. 그래야 인식을 하고 작동을 해요.”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릴 하는 건지.”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임영선은 시황의 말대로 장미의 이름을 공책에 쓰는 것처럼 강렬한 마음을 머금었다. 당연히 되진 않겠지만 이렇게라도 해야 시황이 변명을 못할 테니까. 이것만 확인하고 곧바로 장미하고 헤어지라고 확실하게 말할 작정이었다.

“어?”

그런데 믿지 못할 일이 일어났다. 눈앞에 있는 검은 디스플레이에서 장미라는 이름이 선명하게 적혀나갔다. 눈을 깜짝였지만 분명하게 장미라고 적혀있었다.

“무, 무슨 짓을 한 거죠? 장미라고 생각할 줄 알고 미리 뜨게 해놨나 본데, 이런 어설픈 속임수에는 속지 않아요.”

당황한 임영선은 말까지 조금 더듬었다.

“의심되면 다른 말도 생각해보세요.”

임영선은 당혹스러워하면서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숫자를 생각했다. 그러자 생각한 그대로 디스플레이에 적혀나갔다.

“마, 말도 안 돼.”

디스플레이에 적힌 숫자를 보고는 임영선이 당황해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눈앞에 있는 건 숫자는 시황이 절대 알 수 없는 자신의 계좌번호였기 때문이었다. 그 뒤로 계속 검증을 하기 위해 순차적으로 여러 생각들을 했고, 생각한 그대로 디스플레이에 적혀나갔다.

이러면 믿기 싫어도 믿을 수밖에 없었다. 머릿속에 떠올리는 게 아니라 하고자하는 강렬한 의지를 품는 글자만이 적혀나갔다. 뇌파라는 건 뇌에서 흘러나오는 전기활동을 도출, 증폭해 기록한 걸 말한다. 뇌파는 의식 수준을 나타낼 뿐, 사고나 감정, 의지 등을 판별하기란 매우 어려웠다. 그런데 지금 있는 이 장치는 의식 수준을 판별하는 걸 아득히 뛰어 넘어 하고자 하는 의지를 가진 뇌파만을 분류해 디스플레이에 띄워주었다. 이건 도대체 얼마나 천재적인 존재가 만들어야 하는 건지 상상조차 가지 않을 만큼 대단한 기계였다. 만약 명확한 이론으로써 성립만 한다면 노벨상은 물론이고 사회의 전반적인 혁신을 이끌 수 있는 엄청난 발견이었다.

“이젠 믿으시겠어요?”

“도, 도대체 이걸 누가 만든 거죠? 어떻게 이런 고등한 장치를 만들 수 있는 존재가 있다는 걸 아무도 모르는 거죠? 당신은 그 사람을 어떻게 아는 거죠? 당신 기업에서 후원하는 건가요? 이건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에요.”

장치를 벗어낸 임영선은 순식간에 말을 쏟아냈다. 놀람과 흥분으로 머리속이 엉망진창이 되어 있었다. 직접 겪었음에도 너무 현실성이 없어 아직까지 믿겨지지 않았다.

“일단 그녀를 아는 존재는 저뿐이에요. 정말 엄청난 천재라 제가 지속적으로 후원하니까 이런 장치까지 만들더군요. 그래서 이것과 관련해서 드릴 중요한 얘기가 있습니다. 장미 얘기는 조금 미루고 이 얘기부터 계속 이어나가도 될까요?”

임영선은 멈칫했다. 장미 얘기도 중요했다. 하지만 이 뇌파를 인식하는 장치 얘기는 인류적인 문제였다. 인류가 큰 도약을 하게 될지도 모르는 혁명적 발견이었다. 어머니이자 학자인 임영선에겐 둘 다 놓칠 수 없는 중요한 일이었다.

“알겠어요. 일단 이 얘기부터 하고 장미 얘기를 하죠. 어차피 장미에 대해 얘기를 해봤자 저는 헤어지라고 밖에 할 말이 없으니까요.”

“장미에 대한 얘기는 나중에 하고, 먼저 이 뇌파 인식 시스템에 관한 것부터 얘기를 해드릴게요. 아, 술이 다 떨어지셨네요. 디저트도 많이 남아있으니까 더 드시고 싶으시면 말씀해주세요.”

시황은 임영선의 와인 잔에 엘프주를 부어주었다. 임영선의 말대로 장미에 관해 얘기를 해봤자 설득이 될 리가 만무했다. 이제껏 알고 지내며 자신에 대해 아는 게 아니다 보니 무조건 헤어지라고만 할 거였으니까.

그래서 시황은 계획을 바꾸기로 했다. 장미에 관해 설득을 하는 게 아니라 아예 장미 얘기를 꺼내지도 못하게 만들기로.

시황은 웃음을 머금었다. 꿍꿍이가 가득한 음흉한 미소였지만 역시나 다른 사람이 보기엔 순수하고 선한 미소로만 보일 뿐이었다.

============================ 작품 후기 ============================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