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7 문명 발전 ====================
“엄청 올랐네. 이제 한 40만 정도 되는 경험치만 모으면 8레벨이 될 것 같아.”
“다른 이종족 여자들과도 섹스할 수 있도록 찾아볼까요?”
“아니야. 이정도면 충분한 거 같아. 이제 톨레이만이 저주를 건 격투 게임에서 수준 높은 사람하고 이기면 경험치를 많이 받으니까 그걸로 경험치를 좀 모으면 되거든. 안 그래도 랭크를 많이 올려서 시간만 맞으면 1위하고도 붙을 수 있어.”
“톨레이만이 저주를 걸어요?”
시황의 가슴을 만지던 루나모스의 손길이 멈췄다. 톨레이만의 저주라는 말에 눈빛이 매서워졌다.
“어? 어. 옛날에 걸었어. 가상현실에서 싸우다가 죽으면 현실에서도 죽는 저주인데 처음엔 짜증나긴 했어도 그거 덕에 좀 강해지긴 했으니까.”
“잠깐만요.”
루나모스는 시황의 몸에 걸린 저주를 확인했다. 톨레이만이 건 저주답게 아주 정밀하게 검사하지 않으면 그 누구도 알 수 없을 만큼 은밀하게 숨겨뒀다. 감히 시황에게 이런 저주를 걸었다는 생각에 루나모스는 분노했다.
“왜 그래?”
“이 저주는 건 당사자가 아니면 못 풀게 되어 있어요. 지금 당장 가서 저주를 풀어요.”
“가면 바로 풀어주나?”
“싫으면 풀게 만들어드릴게요.”
루나모스는 곧바로 마법으로 자신과 시황에게 옷을 입혔다. 그리고 단번에 공간을 뛰어 넘어 톨레이만의 성으로 갔다. 주제넘게 케즈론의 선택을 받은 시황에게 간섭한 톨레이만을 용서할 수 없었다.
단번에 시야가 변하고 눈에 들어온 건 아담한 크기의 침실이었다. 한국에 있는 괜찮은 주택처럼 느껴지는 평범한 인테리어였다. 시황은 이런 곳에 톨레이만이 있을까 싶어 내부를 둘러보자 창가 쪽 책상에 이전에 만난 적 있는 남자가 의자에 앉은 채로 루나모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톨레이만이었다.
“무슨 일이신가? 고귀한 루나모스 님께서 이 누추한 곳까지 찾아오고.”
“네가 주인님께 건 저주를 풀러왔다.”
루나모스의 눈에는 적대감이 가득했다.
“주인님? 저 인간이 네 주인님이라는 거냐?”
“그렇다. 고귀하신 나의 주인님이지.”
루나모스는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세상에. 우주를 지배하는 드래곤이 한낱 인간의 노예가 되다니, 놀라운 일이로군.”
“너의 감상은 필요 없다. 빨리 저주나 풀어.”
“흠...”
톨레이만은 루나모스를 쳐다보다 시황을 응시했다. 서로의 눈이 마주쳤다.
시황은 꼿꼿한 자세로 톨레이만의 눈을 바라봤다. 이전엔 거대한 압박감에 몸을 제대로 움직일 수 없었지만 지금은 톨레이만과 눈이 마주쳤음에도 약간의 위압감만 느낄 뿐, 두렵거나 하진 않았다.
“7레벨이나 되었군. 짧은 시간에 그렇게 높은 레벨을 올리고 고고한 드래곤까지 노예를 삼을 정도면 네 능력을 내가 미처 제대로 알아보지 못했다는 뜻이겠지. 확실히 이건 내 잘못이야. 좋아. 저주를 풀어주지. 단순히 탐욕에 찌든 인간이라고 생각했지만 내가 과소평가를 했어. 전능한 드래곤을 노예로 삼고도 욕망에 빠져 세계를 유린하지 않은 건, 그만큼 네가 금강석처럼 단단한 절제력과 올곧은 마음을 가졌다는 뜻이기도 하겠지.”
톨레이만은 의외로 손쉽게 저주를 풀어준다고 했다. 케즈론의 유산으로 온갖 악행을 저지를 거라 생각한 인간이 드래곤을 노예로 삼고도 악행은커녕 세상이 이로운 영향을 주고 있었다. 톨레이만은 자신의 실책을 순순히 인정했다.
“내가 지레짐작만으로 저주를 건 것에 대해 사과도 하지. 하지만 말이야.”
“또 무슨 말을 하려는 거지? 빨리 저주부터 풀어.”
저주나 풀 것이지 톨레이만이 쓸데없이 말을 길게 하고 여지를 남겨두자 루나모스가 짜증을 냈다.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해보고 싶은 욕심이 있구나. 네가 어떤 능력을 가지고 있는지. 내가 저주를 건 격투 게임에서 랭크 1위인 유저와 승부를 겨뤄 승리를 한다면 내가 가진 최고의 마법 도구 중 하나를 주도록 하지. 어떤가? 물론 저주는 이기든 지든 풀어주겠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지요.”
톨레이만의 요구에 시황은 순순히 응했다. 안 그래도 게임에 들어가 랭크 1위인 천빙설과 싸우려고 했는데 그것도 모르고 톨레이만은 천빙설과 싸워서 이기면 엄청난 마법 도구를 준다고 했다. 그야 말로 길가다 5만 원짜리 지폐 다발을 주은 수준의 행운이었다.
“마침 대회가 열리고 있군. 이제 막 우승자가 가려진 듯 하니 마지막으로 네가 싸워주도록 하여라.”
“알겠습니다.”
시황의 대답이 끝나자마자 톨레이만이 손을 튕겼고, 시황은 접속기를 착용하지도 않았음에도 곧바로 격투 게임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하얗게 번지던 시야가 돌아오자 끝없이 펼쳐진 평평한 공간에 한 여인이 차가운 눈빛으로 서 있었다. 가슴이 시릴 정도로 아름다우면서도 랭크 1위를 내어준 적이 없는 전설적인 유저, 천빙설이었다.
원래라면 대회가 마무리 되어야 하는데 갑작스럽게 마지막 이벤트가 남아 있다는 공지사항이 모든 유저들의 시야에 뜨자 홀에서 대회를 지켜보던 유저들이 놀란 표정으로 스크린을 바라봤다. 심지어 인터넷으로 대회만 보던 사람들에게도 예외없이 마지막 이벤트가 남았다는 공지사항이 생겨났다.
정작 게임사는 있지도 않은 이벤트가 남았다는 말에 무슨 영문인지 몰라서 긴급하게 알아보는 중이었지만 유저들은 그런 사실 까진 알지 못했다.
천빙설도 공지사항을 봤던지라 시황을 응시했다. 언젠가부터 자신과 비견될 고수라며 항상 같이 이름이 거론되던 강시황이라는 남자였다. 이번 대회에 출전 하지 않아 조금 아쉬웠는데 이렇게나마 싸울 수 있게 되어 천빙설은 상당히 만족했다.
“가겠어요.”
이미 대전 상대라고 인식한 천빙설은 가타부타 말을 하지 않고 곧바로 검을 뽑아 시황을 베었다. 얼어붙을 듯한 냉기가 흘러나오는 새하얀 검신이 벼락같은 속도로 시황의 가슴을 갈랐다.
웬만한 상대들은 눈에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 쾌속한 검술에 저항조차 하지 못하고 죽었지만 시황은 마기를 끌어올려 엄청난 민첩함으로 간단하게 피해내었다. 카필로니아 제국을 침략해 음속보다 빠르게 공격했던 마왕에 비하면 여유롭게 피할만한 공격 속도였다.
어렵지 않게 자신의 공격을 시황이 피해내자 천빙설의 눈이 더욱 진지해졌다. 만만히 볼 상대가 아니라는 걸 일합의 공격으로 깨달았다.
천빙설은 진지하게 자세를 취했다. 검을 곧추세워 그대로 내리꽂았다. 일반인은 눈에 보이지도 않을 법한 속도로 시황을 죽이기 위해 쾌속하게 검이 움직였다. 빛살처럼 내리꽂히는 검의 뒤로 마치 하늘에서 눈꽃이 쏟아지는 듯한 아름다운 잔상이 피어났다. 천빙설이 사용하는 고유의 무공 낙설화였다.
시황은 살기가 가득 느껴지는 그 공격을 피하기보단 손에 마기를 주입해 검은 드래곤의 갑옷을 한쪽 팔에만 둘렀다. 그리고 그대로 검을 쳐냈다. 간단한 듯 보이는 동작이었지만 그 속도만은 천빙설이 한 공격을 가볍게 뛰어넘었다.
팅!
얄팍한 소리와 다르게 천빙설이 엄청난 충격에 받으며 뒤로 튕기듯 날아가 버렸다. 두께가 가늠조차 가지 않는 강철이 눈에 보이지도 않을 속도로 검을 후려친 느낌이었다. 인간이 낼 수 있나 싶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힘이었다.
천빙설은 빠르게 일어났지만 검을 쥔 손에 감각이 느껴지지 않았다. 만약 게임이 아니라 현실이었다면 손바닥이 찢어지는 건 물론이고 엄청난 내상을 입어 제대로 서있지도 못했을 게 분명했다.
“아, 미안. 너무 세게 쳤어.”
별 거 아니라는 듯 말하는 시황의 모습에 천빙설은 자존심이 상했다. 이제껏 그 누구도 자신의 앞에서 저렇게 당당하게 서있지 못했다. 어떤 식으로 무공을 익혔는지 모르겠지만 기교보단 힘을 위주로 익힌 듯 했기에 천빙설은 빠름보다는 정교한 기교로 승부를 보기로 했다.
가볍게 숨을 내쉬고 천빙설이 다시 검을 꾹 쥐고 달려들었다. 기교를 승부를 본다고 했지만 기본적으로 속도가 뒷받침 되는 무공이었기 때문에 웬만한 실력자라도 감히 피하지도 못할 쾌속함이 검에 서려있었다.
하지만 시황은 가볍게 피해냈다. 마기를 극도로 끌어올린 눈은 천빙설이 휘두르는 검이 하나하나 구분되듯 보였고, 민감해진 감각은 몸을 뒤틀고 발로 땅을 살짝 박차는 것만으로도 검을 회피할 수 있게 만들었다. 처음엔 약간 동작이 컸지만 이후엔 몸을 가볍게 틀고 거의 상체만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공격을 피해냈다.
모든 공격을 시황이 간단하게 피해내자 이를 악문 천빙설이 하늘로 솟아올라 자신의 비전절기인 천빙낙설화를 사용했다. 가녀린 몸매를 가진 천빙설이 하늘에서 날카로운 얼음 꽃이 떨어지듯 도망갈 곳조차 없이 사방을 점하며 검을 휘둘렀다. 흐릿한 잔상만이 남을 정도로 엄청난 속도에 그 어떤 고수라도 피하지 못하고 꿰뚫려 죽는 게 보통이었다.
확실히 이전보다 빠르고 민첩한 공격이기는 했지만 시황은 단번에 빈틈을 발견해냈다. 곧바로 오른발로 땅을 박차고 튀어 올랐다. 천빙설이 공격을 하고 검을 거두어들이는 그 순간, 시황의 주먹이 그대로 천빙설의 배에 꽂혀들었다.
“컥!”
천빙설은 단 한 번의 일격에 나가떨어졌다. 그것도 시황이 아주 가볍게 쳐서 평범하게 나가떨어진 거지 만약 마왕을 죽였을 때처럼 온 힘을 다했다면 완벽한 물리 법칙을 따르는 이 공간이 엉망진창이 됐을 거였다.
천빙설이 패배하고 바닥에 쓰러지자 관전을 하고 있던 사람들이 놀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상대인 강시황은 최근 강하다고 소문이 있기는 했지만 접속도 많이 하지 않고 한 번만 싸우고 꺼버렸기 때문에 다들 패배한 애들이 과장해서 말하는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이제껏 한 번도 랭크 1위 자리에서 내려온 적이 없는 천빙설을 단 한 번의 공격으로 제압하고 승리를 따냈다. 너무 압도적인 차이라서 사람들은 아무런 말조차 하지 못하고 스크린을 바라봤다.
시황은 바닥에 쓰러진 천빙설의 손을 잡고 일으켜주었다. 자신이야 현실의 몸 그대로지만 천빙설은 어차피 게임이라서 크게 아프지도 않을 거였다.
“괜찮아?”
그래도 시황은 예의상 물었다.
“괜찮습니다.”
천빙설은 시황을 바라봤다. 자신을 처음 이긴 남자였다. 이제껏 패배라는 단어를 모르고 살아왔던지라 지금 느끼는 이 기분은 새로운 감각이었다. 이 세상에 자신보다 강한 남자가 존재할 줄이야. 놀랍고도 놀라웠다.
“저를 이긴 남자는 당신이 처음이에요. 강시황이라고 들었는데 맞나요?”
패배를 했음에도 차분한 얼굴을 한 천빙설이 이름을 물었다.
“맞아. 하마터면 질 뻔했어. 정말 강하더라. 다음에 기회에 있으면 또 싸워보자고.”
“풋. 좋아요.”
지기는커녕 봐주는 게 티가 났지만 자신을 위해 그런 상냥한 말을 해주는 게 의외로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패배를 하게 되면 비참한 기분이 들 거라고 생각했는데 워낙 실력차가 나서 그런지 의외로 덤덤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웃으니까 훨씬 예쁘네. 그러면 다음에 봐.”
“앗, 잠깐...”
천빙설은 뭐라고 더 말을 하려고 했지만 시황이 순식간에 사라져 버려 말을 잇지 못했다. 마지막에 웃으니까 예쁘다는 말만은 뇌리에 선명히 남았다. 예쁘다는 말에 기이할 정도로 가슴에 남아 있었다. 천빙설은 시황이 사라진 곳을 멍하니 바라봤다.
또 다시 시야가 하얗게 번지고 방금 있던 톨레이만의 방으로 돌아왔다.
“역시 강하군. 생각했던 것 이상이야. 유산으로 막대한 부와 권력을 얻었음에도 나태해지지 않다니 대단한 절제력을 가지고 있군.”
톨레이만은 시황이 가진 마력을 보고 당연히 이길 거라는 건 알았지만 설마 저렇게 간단하게 천빙설을 이겨낼지는 몰랐다. 천빙설은 대단히 기교가 뛰어난 검사라 그만큼 뛰어난 전투 감각이 필요했다. 단순히 탐욕과 욕망에 찌들었다고 생각한 시황은 자신의 추측과 다르게 대단히 올곧고 노력을 하는 인간이었다.
“드래곤의 유산은 나태하게 살아왔던 저에게 내려진 축복이니까요. 더 이상 한심하게 살지 말자고 다짐했고 그 말대로 노력해 나갈 뿐이에요.”
“너를 오해한 걸 사과하지. 저주는 풀었으니 이제 격투 게임에 접속하지 않더라도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이다.”
“자존심 강한 네가 순순히 저주를 풀어주다니 의외로군.”
생각보다 쉽게 톨레이만이 저주를 풀어주자 살짝 놀란 눈으로 쳐다봤다.
“루나모스, 착각하지 마라. 난 잘못을 지어놓고도 아니라고 우기는 하찮은 존재들과는 다르다. 그에게 주는 선물은 이제껏 오해한 내 사죄의 의미가 담겨있기도 하지. 그리고 네가 강시황이라는 인간의 옆에 있으니 앞으로 그에 대해서는 일절 관여하지 않도록 하겠다. 이정도면 나름 괜찮은 거래이지 않나?”
“알았어. 그러면 빨리 주인님께 준다는 선물이나 줘.”
“너무 재촉하지 않아도 지금 줄 생각이었다. 자, 원하는 걸 골라 보거라.”
톨레이만의 말이 끝나자 시황의 눈앞에 3가지 마법 도구가 생겨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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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