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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래곤 루나모스
이런 영화 엔딩같은 마무리 상태가 되었을 땐 역시 히로인을 끌어안아줘야 했다.
아무것도 한 거 없이 옆에만 있던 루펠린은 시황이 끌어안아주자 뜨거운 감동의 눈물을 흘리는 와중에도 크게 당혹스러워하며 몸을 움직이지 못했다. 루나모스의 주인인 시황에게 안겨도 될지도 몰랐고, 처음으로 남자에게 안기는 부끄러움에 어떻게 해야 될지 알 수도 없었다.
이런 루펠린의 혼란한 마음과 다르게 살아남은 도시의 사람들은 기뻐하며 환호했고 분주하게 하늘을 날던 성기사단도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눈물만을 흘리고 있었다.
시황이야 방금 도착해서 루나모스에게 받은 마법 주문석으로 몬스터를 처리한 것뿐이지만 여기 사는 사람들은 그 동안 수없이 고통과 절망을 맛보고 있었다. 그러다 갑작스럽게 기적과도 같은 일에 희망이라는 감정이 소용돌이치며 모두를 열광의 도가니로 몰고 갔다.
심지어 성에서 최후의 일전을 다짐하고 있던 황제와 왕자, 공주, 권력가들마저도 전율스러운 기쁨에 루나모스에게 올리는 경배의 말을 읊었다.
몬스터 무리가 모두 사라지자 도시를 감싸던 보호막이 사라졌고, 로실린은 곧바로 시황에게 날아왔다.
“아... 시황... 님...”
벅찬 기쁨을 품고 날아오던 로실린은 시황과 루펠린이 끌어안고 있는 모습을 보고 말을 잇지 못했다. 뭔가 지금 말을 걸면 안 될 것만 같았다. 잘은 모르겠지만 여자로서의 직감이 그렇게 말했다. 로실린은 옆에서 얌전히 있었다.
시황은 루펠린을 놓아주었다.
“가, 감사합니다. 영광입니다.”
그러자 루펠린이 말을 더듬으며 시황에게 감사하다고 했다. 뭐가 뭔지 너무 혼란스러웠지만 왠지 그래야 할 것 같았다.
“고맙긴. 이제 다 끝난 거야? 마왕도 방금 죽은 건가? 생각보다 금방이네?”
한 며칠, 늦으면 몇 주나 있어야 되나 걱정을 하던 차에 의외로 쉽게 끝난 듯 해 안심이 됐다. 루나모스가 알아서 하겠지만 그래도 너무 오래 여기 있는 건 부담이 되었다.
“마왕은 아직 마왕성에 있습니다. 그래도 이걸로 마왕의 군대는 절반 이상 처리돼서 저희도 다시 희망을 가지고 싸워나갈 수 있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마왕군도 오늘 끝을 보기 위해 상당한 병력을 투자했다. 그게 일순 사라졌으니 상당한 타격을 받았을 게 분명했다.
“마왕성은 여기서 멀어?”
“그렇게 멀지는 않습니다. 날아서 일주일만 가면 도착할 수 있습니다.”
“일주일?”
생각보다 엄청 멀었다.
그때 루나모스의 말소리가 바로 귓가에 들려왔다.
[주인님, 원하시면 제가 언제든지 마왕성으로 보내드릴게요. 편하신 대로 즐기시다가 가시고 싶을 때 말씀해주세요.]
“이거 어떻게 대답하는 거야?”
시황은 갑작스럽게 들려오는 루나모스의 말에 직접 소리를 내어 물었다.
[저를 생각하시면서 머릿속으로 대화를 하겠다는 의지력을 가지시면 돼요.]
[아, 이렇게? 간단하네.]
갑자기 시황이 뜬금없이 말하자 로실린과 루펠린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지만 시황은 큰 신경 쓰지 않고 루나모스와 말을 이어나갔다.
[알았어. 그러면 나중에도 이런 식으로 말 걸면 되는 거지?]
[그렇습니다. 수십만의 병력이 한 번에 사라져서 한동안 마왕군은 쳐들어오지 않을 테니 최대한 여유롭게 즐기셔도 괜찮아요.]
[고마워.]
어떤 원리인지는 모르겠지만 다행스럽게 마왕성까지 가는 쓸데없는 시간을 줄일 수 있었다. 그러면 루나모스 말대로 일단 좀 상황파악도 하고 하루 정도 쉰 다음에 마왕성에 가는 게 나을 듯 했다.
“마왕성엔 내일 가자. 루나모스가 바로 보내준다네.”
“아! 루나모스 님께서!”
로실린과 루펠린이 동시에 루나모스의 이름을 외쳤다. 갑자기 시황이 갑자기 왜 말하나 했더니 루나모스와의 대화 때문인 듯 했다. 알고 있으면서도 신으로 모셔오던 전능한 드래곤 루나모스를 부리는 존재를 다시금 인식하게 되니 평범한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음에도 신비로움이 가득 느껴졌다.
“이제 어떻게 하지? 그냥 쉬면되나?”
시황이 로실린과 루펠린에게 물어보자 어떻게 발견했는지 자그마한 날개를 단 성기사단원들과 루나모스의 신자들이 날아와 시황의 주변을 에워쌌다. 그리고는 경건하게 예를 올렸다.
이런 신적인 존재로 대우받는 건 처음이라 시황은 당황했으면서도 겉으로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가만히 있었다.
“그러시면 대성당으로 가셔서 쉬고 계시면 제가 직접 황제를 불러오겠습니다.”
시황의 물음에 로실린이 대답했다. 아까 전엔 시황이 직접 상황을 알고 싶다고 해서 총사령관에게 데리고 가려고 했던 거지만, 지금은 자신이 직접 고귀하신 시황에게 황제를 만나러 가자고 말할 수 없었다. 당연히 시황을 만나러 황제가 오는 게 맞았다.
“황제를? 뭐 그렇게 귀찮게 할 필요 있나. 만나야 하면 내가 직접 가면 되지.”
황제라 해도 크게 긴장되거나 하지 않았다. 만약 한국이나 미국의 대통령이었다면 조금 긴장이라도 했겠지만 다른 세계의 황제는 전역한 예비군이 4스타를 보는 듯한 느낌에 가까웠다. 높은 사람인 건 알겠는데 직접적으로 그 위엄이 와 닿진 않았다.
“알겠습니다. 그러면 제가 안내하도록 하겠습니다.”
로실린이 날개를 펼치고 성으로 천천히 날아갔고 시황과 루펠린이 뒤따랐다. 그러자 경건하게 예를 올리던 성기사단과 신도들도 시황을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늘에는 피로 점칠된 갑옷을 입은 기사단과 흰 의복을 입은 신도들, 수백이 날개를 펼치고 날아가자 대단한 장관을 이루었다.
도시에 있던 날개 없는 일반인들도 그 모습을 넋을 잃고 바라봤다.
도시를 가로질러 성으로 날아갔기 때문에 그렇게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성의 거대한 정원에 로실린이 안착했고 시황과 루펠린이 뒤따라 땅을 디뎠다. 나머지 성기사단과 신도들은 성 안까지는 들어오지 못하고 하늘에서 다시금 예를 취했다.
허공에서 로실린과 시황, 루펠린이 내려오자 미스릴 갑옷으로 전신을 감싼 왕실 수호기사단원들이 빠르게 걸어왔다.
“누구냐!”
그리고는 시황을 향해 새하얗게 빛나는 섬뜩한 검을 들이댔다. 성녀와 성기사단장의 뒤를 쫓아온 정체불명의 인간을 발견한 것이다.
당연히 오해한 거겠지만 혹시 몰라 시황은 장갑에 마력을 주입해 검은 드래곤의 절대적 갑옷을 장착했다. 비늘이 돋아나듯 시황의 전신이 드래곤의 비늘로 감싸여졌다.
“감히! 무엄하게 뭘 하는 거냐! 얼른 칼을 집어넣지 못하겠느냐!”
평온하던 로실린이 눈을 부릅뜨고 불같이 화를 내자 방금 기세 좋게 시황에게 검을 들이대었던 수호기사단원들이 찔끔해서 주춤주춤하다가 검을 검집에 집어넣었다. 루펠린도 처음 보는 로실린의 모습에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어떻게 내가 옆에 있는데도 위대하신 분에게 정중하지 묻지 않고 검부터 들이대느냐? 절대 이 일을 그냥 넘어가지 않을 것이다.”
“죄송합니다! 큰 무례를 범했습니다!”
수호기사단원들은 성녀의 분노에 변명조차 하지 못하고 몸을 떨었다. 처음 보는 남자, 그것도 날개조차 없는 정체불명의 인간이 성녀의 뒤를 쫓아온 듯해 혹시 몰라 검을 꺼낸 거였다. 하지만 상황을 보니 아무래도 저 평범해 보이는 남자가 마왕군을 물리친 위대한 존재인 듯 했다.
“모, 목숨을 바칠 테니 부디 용, 용서를...”
꿈이길 바랄 정도로 끔찍한 사실을 깨달은 수호기사단원들은 몸을 더욱 심하게 떨기 시작했다. 어찌나 두려워하는지 몸의 진동에 갑옷이 부딪히며 불쾌한 소리를 지속적으로 내었다. 몬스터 앞에서조차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용맹하게 싸운 기사들이더라도 위대한 존재의 비위를 거스르는 건 나라의 존망이 달린 문제인지라 이렇게 몸을 떨며 두려워할 수밖에 없었다.
“아니, 그런 건 됐고. 별로 신경 안 쓰니까 너무 그렇게 사과할 필요는 없어. 일단 황제나 만나러 가자.”
시황은 갑옷을 해제하며 덤덤히 말했다.
“알겠습니다. 제가 안내해드리겠습니다.”
로실린의 안내로 시황이 성 안으로 걸어 들어갔고 사나운 표정을 한 루펠린이 두려움에 정신을 못 차리는 수호기사단원들을 힐끔 쳐다보고는 따라 들어갔다.
다행스럽게도 성 안에서는 로실린과 루펠린을 알아 봤는지 기사들이 전혀 제지를 하지도 검을 겨누지도 않았다.
케즈론의 성보단 못하지만 제법 넓고 화려한 성이었다. 아름다운 조각들과 그림들을 지나 제법 걷자 왕이 있는 거대한 문 앞에 도착했다.
시종들이 문을 열어주었고 시황은 제법 넓은 홀로 걸어 들어갔다.
왕이 업무를 보는 곳인지 화려하기 그지없는 장식들이 가득했고 웅장한 의자에 황제가 앉아서 진중한 표정으로 신하로 보이는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들 옆에는 번쩍이는 갑옷을 입은 기사들이 움직이지도 않고 시황을 바라봤다.
“성녀 님 오셨습니까? 방금 일어난 그 기적은 어떻게 된 일이죠? 혹시 루나모스 님께서 강림하신 겁니까?”
로실린이 들어오자 모두의 시선이 쏠렸다. 왕과 대화를 나누던 금발의 젊은 청년이 곧바로 로실린에게 걸어와 방금 일어난 기적에 대해 물었다.
“여기 계신 위대하신 존재께서 직접 저희를 구원하기 위해 강림하셨습니다. 모두 무릎을 꿇고 예를 갖추세요.”
“이, 이분이 위대한 존재!”
“오오! 루나모스 님께서 우리를 버리시지 않았구나. 감사드립니다.”
로실린의 말에 내부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무릎을 꿇고 시황에게 예를 차리기 시작했다. 심지어 권력을 나타내는 웅장한 의자에 앉아 있던 황제마저 스스럼없이 무릎을 꿇었다.
나이가 많은 사람까지 무릎을 꿇고 예를 취하자 시황은 괜히 민망했다. 하지만 여기서 당황하면 그게 더 한심했기 때문에 얌전히 있다가 로실린에게 살짝 일어나도 된다고 말을 했다.
“모두 일어나십시오.”
로실린의 말에 모두 일어나서 시황을 바라봤다. 황제는 물론이고 젊은 청년과 여자들이 시황을 뚫어지듯 바라봤다. 그들의 눈에는 경외심이 가득 나타나고 있었다.
“루펠린의 간곡한 요청으로 루나모스 님의 주인이신 위대하신 시황 님께서 직접 강림하시어 저희 세계를 구원해주시기로 하셨습니다.”
로실린의 말에 주변에서 탄성이 터져 나오더니 다시금 정중하게 예를 갖추며 모두가 감사의 인사를 올렸다.
시황은 어색하게 웃었다. 분위기가 도저히 적응이 되지 않았다. 그저 빨리 쉬면서 로실린과 루펠린하고 즐겁게 놀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선 이 엄중하고 불편한 분위기를 빨리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본대로 눈에 보이는 몬스터들은 내가 처리했으니까 한동안 안전할 거야. 마왕은 내일 쯤 잡으러 갈 테니까 그 동안 좀 쉬고 싶은데 쉴만한 곳 있어?”
황제의 나이가 적어도 60대는 넘어 보였지만 나름 신으로 떠받들어주는데 존댓말을 쓰면 이상할 거 같아 반말을 했다. 미안하긴 해도 상황 상 어쩔 수가 없었다.
“위대하신 분께 저희가 어찌 편의를 봐드리지 않을 수 있습니까? 당장 시종들에게 말해 성에서 가장 좋은 곳으로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황제폐하, 제가 위대하신 분을 안내해드려도 될까요?”
그때 이때까지 얌전히 있던 한 여자가 앞으로 걸어 나오며 말했다. 작고 귀여운 날개를 가진 미녀였다. 뚜렷한 이목구비는 역시나 로실린과 루펠린처럼 러시아 미녀를 연상케 하는 인형 같은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도리어 황제가 시황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나야 상관없지. 아, 그리고 마왕 잡고 나서 미스릴을 포함한 자그마한 보상을 좀 받고 싶거든. 가능하지?”
미리 미스릴을 준비해놓게 하고 그리고 노동의 가치를 증명해줄 자그마한 보상도 원했다. 아무래도 목숨까지 거는데 미스릴만 받아가기엔 너무 손해였다. 크진 않더라도 희귀한 보석이나 몇 개만 얻으면 여자들에게 선물도 줄 수 있어 나쁘지 않을 듯 했다.
“위대하신 분께서 원하신다면 그 무엇인들 못 드리겠습니까. 저희가 준비해놓도록 하겠습니다.”
누구에게도 고개를 숙여본 적 없는 절대적 권력을 가진 황제가 공손히 대답했다. 루나모스의 주인이자 몬스터 수십만 마리를 단번에 없앤 신이었다. 감히 목을 뻣뻣이 세우고 있다가 몬스터한테 떨어졌던 그 끔찍한 신벌을 받고 싶지는 않았다.
“고마워. 그러면 네가 쉴만한 곳으로 좀 안내해줄래? 나머지는 일처리는 너희들이 알아서 하고. 난 좀 쉬고 있을게.”
시황이 안내를 지원한 여자에게 말했다.
“전 카필로니아 제국은 4황녀인 실피나 카필로니아라고 한답니다. 위대하신 분을 안내해드리게 돼서 영광이에요.”
“실피나! 위대하신 분께 무례를 범하지 말거라!”
가볍게 시황에게 말을 거는 실피나에게 황제가 엄격하고 근엄한 목소리로 꾸짖었다.
“괜찮아. 실피나, 안내 좀 부탁할게.”
“저한테만 맡겨주세요!”
시황이 이름을 불러주자 4황녀 실피나의 얼굴에 환희와 기쁨이 차올랐다. 위대한 시황에게 이름을 불린 것 자체가 더없는 영광이었다.
============================ 작품 후기 ============================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