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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래곤의 유산-540화 (539/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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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래곤 루나모스

“주신이 뭐야?”

시황은 루나모스의 귀에 속삭이며 물었다. 처음 들어보는 단어였다.

“저의 주인이시니 전 우주를 관장하는 신이라고 생각하는 듯 해요. 저에게 있어 신과 같은 존재이니 틀린 말은 아니지 않나요?”

루나모스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신? 내가? 부담스러운데 정정하는 게 낫지 않아?”

“괜찮아요. 오히려 그렇게 믿는 편이 편하실 거예요. 거기에 가도 다들 주인님을 신처럼 생각할 테니 편하게 반말을 쓰며 종을 부리듯 해도 되니까요.”

“그래? 네가 말하면 그런 거겠지. 뭐, 알았어. 그러면 이제 어떻게 하면 돼? 그러고 보니 내가 지금 말은 어떻게 알아듣는 거지?”

“들어오실 때 제 능력을 발현했어요. 언어에 대한 문제는 신경 안 쓰셔도 돼요. 그리고 제가 직접 보내드릴 테니 저 아이들을 따라가서 간단하게 마왕이라고 불리는 적을 잡으시면 돼요.”

루나모스가 침착하게 말했다. 하지만 시황은 불안한 마음이 크게 생겼다. 애들 장난을 하는 것도 아니고 실제 전쟁이 일어나는 세계에 가서 마왕을 잡아야 했다. 루나모스는 놀러나가는 듯 얘기하지만 절대 그렇게 간단할 리가 없다는 걸 시황은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내 능력으로 그런 게 될까?”

“간단한 일이에요. 그리고 제가 몇 가지 마법 주문석을 드릴 테니까 그걸 사용하세요.”

루나모스는 손을 내밀었다. 그 손위엔 언제 꺼낸 건지 선명한 푸른빛을 일렁이는 아름다운 보석이 세 개 놓여있었다.

“광역 마법이에요. 상당히 강력한 위력이라 졸개들에게 사용하시면 편하실 거예요.”

“아, 고마워. 이런 거면 되겠다.”

시황은 보석을 집어 들었다. 그러자 시야에 설명이 떠오른다.

[강림하는 불씨 : 하늘에서 떨어진 불씨 퍼져나가며 광범위한 범위를 초고열로 불태워버린다.]

[멸망의 뇌성 : 하늘에 생겨난 거대한 번개구름이 광범위한 범위를 초토화시킨다.]

[공간 압축기 : 지정한 범위의 공간을 단번에 압축한다.]

설명만 봐도 그 끔찍함이 바로 느껴진다. 여기에 5레벨이 되면서 받은 죽은 자의 스태프와 파멸의 비를 머금은 잔혹한 검을 쓴다면 어떻게 해낼 수 있을 것 같기도 했다.

“고개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나렴.”

루나모스는 아직까지 굳은 채로 무릎을 꿇고 있는 루펠린을 일으켜 세웠다.

루펠린은 침을 삼키고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들었다. 드디어 주신의 용안을 보게 된다 생각하니 긴장으로 손이 덜덜 떨려왔다. 가볍게 심호흡을 한 루펠린은 시황을 바라봤다. 그런데 의외로 주신치고는 평범하게 생겼다. 그저 인간처럼 보일 뿐 신성함이 어려 있다거나 경외감이 들거나 하지는 않았다.

시황도 루펠린을 마주봤다. 루펠린의 모습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신성했다.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큼직한 눈과 오뚝한 코는 마치 러시아의 미녀를 연상케 하는 듯 했고, 곱디 고운 순백색의 날개 때문인지 전체적으로 신성함이 강렬하게 서려있었다.

“주신 님의 용안을 보게 되어 영광입니다.”

루펠린은 예를 다해 인사를 했다.

평범하게 보이긴 하지만 주신은 주신이었다. 주신이라 생각하고 보니 오히려 아무런 느낌조차 없는 평범함이 더욱 경이롭게 다가왔다.

“나의 주인님께서 친히 너희들을 도와주신다고 하는구나.”

“감사드립니다. 루나모스 님. 이 은혜 결코 잊지 않겠습니다.”

“다만 조건이 있단다.”

루나모스가 조건을 걸자 루펠린은 침을 꿀꺽 삼켰다. 드래곤인 루나모스가 물질적인 것을 요구하지는 않을 게 분명했다. 아까 미스릴 얘기를 하는 듯 했지만 루나모스라면 손등 뒤집듯 우습게 구할 미스릴 따위를 요구할 리가 없었다. 도대체 무슨 조건을 걸지 도무지 떠오르는 게 없었다.

"무엇인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우리 주인님께 신성한 성녀의 순결을 바치도록 하렴.”

“서, 성녀님의 순결을!”

루펠린 화들짝 놀라 말을 더듬고 말았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성녀의 순결을 바치라니.

“제, 제가 대신 하면 안 되겠습니까? 저도 아직 순결한 몸. 성녀님 대신 제가 순결을 바치도록 하겠습니다.”

루펠린이 사정을 했다. 순수하고 때 묻지 않은 고결한 성녀님의 얼굴이 떠오른다. 그분 대신이라면 자신의 순결 따윈 거리낌 없이 줄 수 있었다.

“그러면 너하고 성녀하고 같이 주인님께 순결을 바치렴. 주인님께서 친히 너희들을 돕기 위해 험하고 척박한 곳으로 가는데 그 정도 조건 정도는 들어줘야 되지 않겠니? 물론 거절하고 그냥 돌아가도 괜찮단다. 자, 어떻게 하겠니?”

괜히 한 마디 했다가 성녀에서 루펠린까지 순결을 바치게 되었다. 루펠린은 당혹스러움에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 정도까진 안 해도 되지 않아?”

시황이 루나모스에게 작게 속삭였다.

“그저 도움만 주는 건 오히려 저들에게 좋지 않아요. 부탁에는 대가가 따른다는 걸 확실히 인지시켜줄 필요가 있어요. 그리고 확실한 조건이 있어야 주인님의 도움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진실로 깨닫게 될 테고, 귀찮은 일을 하는 주인님께도 나름의 보람이 생기지 않겠어요?”

“음, 그런가. 확실히 그런 조건이면 보람이 생기긴 하겠네.”

루나모스가 하는 말은 시황에게 있어 나쁜 건 전혀 없었다. 나쁘긴커녕 성녀와 섹스를 하면 유산 경험치를 얻을 수 있어 이득만 됐다.

“알겠습니다...”

수많은 고민을 하던 루펠린은 결국 수락을 하고 말았다. 자신의 순결 따위야 줘도 전혀 상관없었지만 성녀님의 순결을 지키기 못해 괴롭기만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세상을 마왕에게서 구하려면 루나모스의 주인인 전능한 신의 도움이 꼭 필요했다.

“자, 그러면 이제 주인님과 너를 카필로니아 제국으로 보내주마.”

“잠깐만! 성에 다녀와도 될까?”

루나모스가 보내기 전에 시황은 문득 떠오르는 게 있었다.

“알겠어요. 지금 다녀오세요. 저 아이를 데리고 가셔도 돼요.”

“응. 알았어.”

시황은 문을 소환해 여전히 긴장하고 있는 루펠린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는 곧바로 케즈론의 성으로 건너갔다. 익숙한 서재의 풍경이 나타났고 시황은 책상에 앉았다.

갑자기 공간이 변하고 낯선 곳으로 오자 루펠린은 당황해 주변을 둘러봤다.

“여, 여긴...”

“내 성이야. 아, 그리고 난 시황이라고 부르면 돼.”

“존귀한 이름을 가르쳐주셔서 영광입니다.”

당황한 와중에도 루펠린은 시황에게 예를 차리는 건 잊지 않았다.

“잠깐만 기다려 할 게 있으니까. 콘즈야.”

시황이 콘즈를 불러서 7레벨이 되면서 획득한 특등급 소환수 카탈로그를 받아서 하나하나 살펴보기 시작했다. 정체모를 곳으로 가는 만큼 최대한 안전하게 하고 싶었다.

쭉 살펴보다 마음에 드는 소환수가 하나 보였다.

[불멸의 힘이 서린 귀여운 곰 인형 : 목숨이 위험할 정도의 상처나 사망할만한 상처를 대신 받아주는 곰 인형. 한 번 터지게 되면 한 달이 지나야 다시금 원복 되어 사용이 가능하다. 아공간에 있는 것만으로도 능력이 발동된다. 평소에도 소환해 타거나 가지고 놀 수도 있다.]

이게 과연 소환수라고 부를 수 있을지는 몰랐지만 어쨌든 죽을 위기에 처해도 살아날 수 있는 소중한 소환수였다.

시황은 콘즈에게 말해 불멸자의 귀여운 곰 인형을 획득했다. 검은 공간에서 아장아장 걸어 나온 곰 인형이 시황에게 귀여운 얼굴로 손을 흔들었다. 인형이긴 했지만 약간의 인지능력은 있는 듯 했다.

시황은 그 인형을 아공간에 집어넣었다.

준비는 끝났다.

다시 루펠린을 데리고 루나모스의 방으로 돌아왔다.

“준비 다 했어.”

“그러면 카필로니아 제국의 대성당으로 보내드릴게요. 우리 주인님을 잘 부탁해.”

“알겠습니다! 최선을 다해 시종을 들겠습니다!”

루나모스의 말에 루펠린이 결의에 찬 목소리로 대답했다.

가볍게 웃어준 루나모스가 가볍게 팔을 흔들었고 시황과 루펠린의 모습은 방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았다.

**

강렬한 빛무리가 흩어지며 시황과 루펠린이 대성당의 심부에서 모습을 나타냈다.

신성함을 가득 머금은 그 빛무리는 대성당의 가장 신성한 구역에 뿌려져 위대한 존재가 강림했음을 만천하에 드러내었다.

시황을 위한 루나모스의 사려 깊은 배려였다.

순식간에 시야가 변하고 웅장한 드래곤 석상이 있는 신성해 보이는 장소로 오게 되자 시황은 그 신비로움에 주변을 둘러봤다.

바로 앞에 포효하는 듯한 정밀한 드래곤 석상과 그 주변에 날개 달린 아름다운 미녀들이 드래곤을 에워싸고 경외시하고 있었다.

“여긴 어디지?”

“여기는 저희 신성교단의 대성당 중에서도 가장 신성시 여기는 장소로써, 루나모스 님께 예를 올리기 위한 곳입니다.”

시황이 궁금해하자 옆에 있던 루펠린이 곧바로 설명을 해주었다.

“그러면 저게 루나모스인 거야?”

“그렇습니다. 천 년 전, 세상이 혼란할 때, 7성녀들의 간곡한 부탁으로 직접 강림하시어 악의 무리를 처리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이후에 루나모스 님을 기리기 위해 만든 곳이 바로 이 장소입니다.”

왠지 루나모스가 직접 그런 일을 했다는 게 쉽게 상상되지 않았다. 시황에게 있어 루나모스는 항상 섹스를 하며 신음을 흘리고 색기를 가득 뿜어내는 얼굴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그렇구나. 그런데 어디로 가야 돼?”

“잠시 기다리시면 주신 님, 아니 시황 님을 위해 성녀님께서 직접 마중을 나오실 겁니다.”

루펠린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문이 열리고 다급한 얼굴을 한 여자들이 몰려왔다.

그 여자들의 가운데는 압도적인 미모와 더불어 신성함이 서려있는 고귀해 보이는 여자가 침착한 발걸음으로 다가왔다. 다들 희고 고운 날개를 가지고 있어 마치 천사처럼 아름답고 성스러워보였다.

“로실린 트리디오스, 고귀하신 분을 뵈어 인사드립니다.”

성녀로 추정되는 미녀가 시황을 보더니 예를 차리며 인사를 했다. 워낙 강렬한 루나모스의 기운을 풍기며 강림한지라 존재에 대한 의문을 느낄 필요조차 없었다.

시황을 본 여자들은 루펠린이 루나모스의 도움을 얻어내는데 성공했다며 환희에 찬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난 강시황이야. 시황이라고 부르면 돼. 자세한 건 루펠린이 설명해 줄 거야.”

루나모스가 한 말이 있어서 시황은 편하게 반말했다. 저런 아름다운 여자들에게 신으로 떠받들어지게 된다 생각하니 의외로 기분이 좋았다.

“성녀님, 무사히 루나모스 님의 도움을 받기로 하고 돌아올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옆에 계시는 분은 루나모스 님의 주인으로서 루나모스 님을 대신하여 악에서 세상을 구하기 위해 몸서 강림하셨습니다.”

“오오!”

루나모스의 주인이라는 말에 주변에서 크게 기뻐하며 경외감이 가득한 눈으로 시황을 바라봤다.

평범한 인간일 뿐인데 저렇게까지 소개를 하고 경외감에 찬 시선으로 바라보자 시황은 살짝 부담스러웠다.

“다만...”

“다만?”

“너희들은 물러가거라. 성녀님과 중요하게 할 얘기가 있다.”

루나모스의 조건에 대해 말하려던 루펠린은 로실린의 주변에 있는 종들을 물러나게 했다.

“알겠습니다.”

로실린을 따라온 종들은 정중하게 시황에게 인사를 하고는 조심스럽게 루나모스의 예배실을 빠져나갔다.

“존귀하신 시황 님, 앉으시지요. 고귀하신 분을 위해 마련된 자리입니다.”

루펠린은 루나모스의 드래곤 석상 아래에 있는 사치스럽고 고급스러운 의자에 시황을 앉혔다. 그리고는 성녀에게 무릎을 꿇고 루나모스가 말한 조건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어차피 숨길수도 없는 일 최대한 빠르게 말을 하는 게 나았다.

“루나모스 님께서 저희들에게 주인님을 친히 강림시키시며 세상을 악에서 구하는 조건으로 성녀님과 저의 순결을 고귀하신 시황 님께 바치라 하셨습니다.”

“그런가요? 알겠습니다.”

성녀 로실린은 조금 당황하는 듯 했지만 거부하거나 하지 않고 순순히 수긍을 했다. 세상을 악에서 구할 수 있다면 자신이 가진 순결 정도는 충분히 시황이라 불리는 고귀한 존재에게 바칠 수 있었다. 로실린은 순결을 바칠 시황에게 예를 올렸다.

“저희를 위해 고귀하신 몸을 이끄시고 강림하여 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앞으로 고귀하신 시황 님의 수발은 저와 루펠린이 들도록 하겠습니다.”

“너무 부담 갖지 마. 싫으면 안 해도 되니까. 루나모스가 시켰다고 해서 꼭 할 필요는 없어.”

시황은 별 거 아니라는 듯 말했지만 로실린과 루펠린은 루나모스의 명령을 결코 거절할 수 없었다. 대신 시황을 바라보는 로실린과 루펠린의 눈에 경외심만 더욱 가득 생겨났다. 전능한 존재인 드래곤 루나모스를 가볍게 부르며 신경조차 쓰지 않는 시황을 보니 절대적 존재로서의 위엄이 그대로 느껴졌던 것이다.

“아닙니다. 세상을 구하기 위해 친히 강림하신 존귀하신 시황 님을 위해 저희 순결을 바치는 것쯤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래? 그렇단 말이지? 그러면 키스해봤어?”

고결하고 신성하며 위엄까지 가지고 있는 성녀를 희롱하면 어떤 얼굴을 할지 궁금해졌다. 죽음까지 무릅쓰고 전혀 상관없는 세상을 구하러 왔는데 이 정도쯤은 해도 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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