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드래곤의 유산-460화 (459/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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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래곤 루나모스

대기실에 시황과 가을이 같이 앉아서 가볍게 얘기를 나누고 있자 주변에 있는 스태프들과 출연자들이 안 보는 척 하면서 힐끔힐끔 쳐다봤다. 이미 일반인들도 가을과 은비가 시황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아는데 방송 관계자들이 모를 리 없었다.

“요즘 바쁜가봐? 얼굴 보기가 힘드네.”

“네. 일본 스케쥴이 많아서 한국보다 일본에 더 오래 있는 것 같아요. 요즘 너무 바빠서 잠도 못잘 정도로 피곤하기는 하지만 오빠가 준 기회니까 절대로 포기하지 않으려고요.”

일본에서 콘서트와 각종 방송에 출연하다 보니 바쁘건 물론이고 시황을 만날 시간조차도 내기 힘들었다. 그래서인지 최근 가슴 큰 모델하고 자주 다니는 것 같아 신경 쓰이기는 했지만 시황이 만들어준 기회이니 만큼 힘들다고 포기하거나 주저앉을 생각은 전혀 없었다.

사람들이 많아 민감한 얘기는 피하며 간단히 안부를 묻고 있을 때, 이번에 같이 출연하는 여자 아이돌 두 명이 인사차 대기실을 방문했다.

“안녕하세요! 저희는 매혹적이고 치명적인 아름다움의 레드걸즈라고 합니다! 잘 부탁합니다!”

내뱉기 부끄러운 말을 큰소리로 외친 두 여자 아이돌은 설명대로 매혹적인 다리와 치명적인 몸매를 가지고 있기는 했다. 그런 몸매를 부각하고자 다리가 드러나는 짧은 핫팬츠와 높은 굽의 하이힐을 신은 그녀들는 사인 시디를 출연자들에게 건네주며 연신 잘 부탁한다는 인사를 건넸다.

그리고 스캔들이 있었다하나 여전히 대세 아이돌인 가을을 본 두 신인 아이돌은 약간 긴장한 표정으로 시디를 건네다가, 그 옆에 앉아 있는 시황을 보고 어디서 본듯한 상당히 익숙한 얼굴에 누군지 기억해 내려고 애를 썼다.

왠지 떠오를 것 같으면서도 떠오르지 않자 일단 가을에게 먼저 인사를 했다. 그리고 슬쩍 다시 한 번 봤다가 불현 듯 누군지 깨달았다.

“아아! 강시황이다. 대박!”

같이 출연하다고는 들었지만 설마 눈앞에서 볼지는 몰라 무의식적으로 반말로 이름을 부르고 말았다.

“아, 앗! 죄,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그리고 황급히 실수를 깨달은 그녀는 죽은 죄를 지은 것처럼 연신 고개를 숙이며 사과를 했다.

“괜찮습니다. 하하.”

“너무 놀라서 저도 모르게 그랬어요. 정말 죄송합니다. 용서해주세요.”

시황이 괜찮다했는데도 두 신인 아이돌은 계속 사과를 했다. 이때까지 수많은 연예인을 만나봤지만 이렇게 본 것만으로 긴장되고 떨리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보는 순간 위압감 자체가 다른 사람과 확연히 다르게 느껴졌다.

"용서하고 말 것도 없는 건데요. 그렇게 사과하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한참 시황에게 다시 고맙다고 인사를 한 두 아이돌은 뭔가 말할 게 있는지 시황의 앞을 떠나지 못하고 어물쩍거렸다.

“저기, 정말 염치없는 부탁이지만... 방금 그런 짓을 하고도 이런 부탁해서 정말 정말 죄송한데요. 괜찮으시다면 저희 CD 받아주실 수 있으신가요? 대표님께서 받아주신다면 저희 멤버들도 정말 기뻐할 거예요.”

두 신인 아이돌은 겨우 사인CD 하나 건네주는데도 시황이라는 존재에게 압도되어 죽을 죄를 진 것마냥 사정을 했다. 얼마나 긴장했는지 사인 CD를 쥔 손이 덜덜 떨렸다.

“이런 귀중한 CD까지 주시는데, 제가 감사하죠."

시황은 신인 아이돌이었지만 정중하게 대답하며 CD를 받았다.

“그, 그리고 마지막으로 딱 한 가지만 더 부탁드려도 될까요?”

“부탁이요?”

“정말 귀찮으시겠지만 저희 CD에 사인 해주실 수 있을까요? 해주신다면 평생 보물로 간직하겠습니다.”

별로 어려운 부탁도 아닌데 신인 아이돌이라 그런지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벌벌 떨며 말했다. 이마에선 긴장으로 식은땀으로 보이는 땀방울이 송글송글 맺혀있었다.

“그 정도야 언제든 해드릴 수 있죠. 너무 그렇게 긴장 안 하셔도 돼요.”

시황은 가볍게 웃으며 새롭게 건네받은 시디 케이스에 사인을 해주었다. 이렇게까지 부탁하는데 어설프게 사인하는 건 시황도 부끄러웠기 때문에 마력회로를 가동해 사인을 했다.

컴퓨터 프린터 이상으로 사인이 아름답게 적혀 나갔다. 아까부터 흥미롭게 지켜보던 사람들이 시황의 사인을 보고 가볍게 감탄을 터트렸다. 단순한 사인이었지만 품격이 느껴지는 그 아름다움에 다들 역시 시황이라고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정말 감사합니다! 정말 정말 감사합니다!”

레드걸즈 두 멤버는 시황에게 다시 몇 번이나 감사하다고 외치고 나서 감격이 가득한 얼굴로 돌아갔다. 겨우 시디를 건넨 것뿐이지만, 혹시 시황이 노래를 듣고 마음에 들어서 케즈론 모델이나 CF라도 찍게 된다면 앞에 있던 가을처럼 인생이 완전히 바뀌는 거였다. 긴장이 안 될 수가 없었다.

지나치게 공손한 신인 아이돌 레드걸즈가 돌아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방송 PD가 직접 대기실에 왔다. 40대 초반으로 보이는 중년의 여자 PD도 평소 뻣뻣하던 목을 숙이고는 시황에게 공손하게 인사하며 사인을 받았다. 그리고 직접 시황이 나와서 해줬으면 하는 것들을 간단하게 설명해주었다.

이렇게 되다 보니 가을과는 길게 얘기도 나누지 못하고 방송 녹화 시간이 되었다. 레드걸즈에게 받은 CD는 찬미에게 맡기고 시황은 스튜디오로 걸어갔다.

그런데 살짝 열린 한 대기실의 문틈으로 싸우는 듯한 소리가 작게 났다. 보통 사람은 듣지 못할 만큼 작은 소리였다.

“너 진짜 개념 없다. 선배가 얘기하는데 중간에 끼어들어서 말 잘라 먹는 건 어디서 배운 거야? 어? 너 완전 미친 거지? 그게 아니고서야 사람인데 그런 짓을 할 수가 있어?”

“죄송합니다. 흑...”

시황은 슬쩍 안을 쳐다봤다. 화를 내고 있는 여자는 청순하고 착한 이미지로 대중에게 사랑받는 배우인 윤미소였고, 눈물을 흘리며 죄송하다고 하는 여자는 악역을 맡아 무서운 이미지로 대중에게 각인된 신인 배우였다.

여자 선배가 화를 내면 여자 후배도 매서운 눈초리로 흘겨볼거라 생각했는데,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저 후배는 고개를 푹 숙이고 눈물만 훌쩍이고 있었다.

윤미소가 험한 말을 하며 화를 내자 혹시 밖에 들릴까 누군가 황급히 문을 꽉 닫았다.

방금 전에 했던 말도 밖에까지 들릴 만큼 큰 소리는 아니었지만 시황의 귀가 일반인에 비해 대단히 발달되어 있어 들을 수 있었던 거였다. 하지만 문을 닫으면 평범하게는 듣기 어려웠기 때문에 마기를 끌어올려 청력을 증가시켰다. 그러자 어렴풋이 들리던 소리가 선명하게 들려온다.

“아니, 죄송할 필요 없어. 나 김PD님하고 친한 거 알지? 내가 무슨 짓을 해서라도 너 방송 못 나오게 할 거니까 그렇게 알아둬. 알겠어? 개 같은 년이 진짜 사람 짜증나게 만들고 있어. 내가 주인공인데 어디서 찌끄레기 같은 년이 말을 가로채.”

“죄송합니다. 용서해주세요... 흑...”

둘이서 무슨 일 때문에 싸우는지는 모르겠지만 TV에서의 이미지와 어울리지 않게 윤미소가 상당히 심한 말을 했다. 욕먹고 있는 신인 여배우가 불쌍하기는 했지만 끼어들 수는 없었다. 무슨 일로 싸우는지도 모르고 그들과 아무런 관계조차 없는 타인이었으니까.

시황은 그냥 모른 척 하고 지나가려는데 이번에 다른 여자가 윤미소에게 말을 거는 소리가 들려왔다.

“미소 언니, 지금 대기실 앞으로 강시황 지나간대요. 제가 가서 드레스 협찬 좀 부탁해볼까요?”

“너 같은 게 강시황 대표님한테 말한다고 될 것 같아? 못생긴 네 얼굴 보고 기분만 나쁘실 거란 생각은 안 해봤어? 어? 애가 생각이 없어. 괜히 이상한 짓 하지 말고 가만히 있어. 얼굴만 봐도 짜증나니까.”

“죄송합니다....”

“흥, 내가 직접 가서 부탁하고 친분을 좀 쌓아야지. 강시황처럼 대단한 남자를 은비나 가을 같은 애들한테 주기 아깝단 말이지.”

스타일리스트에게도 막말을 한 윤미소는 바로 대기실을 나와 강시황을 찾았다. 주변을 둘러보다 저 앞에 걸어가는 세련되고 키 큰 남자를 발견했다.

“어머, 강시황 대표님 아니세요?”

윤미소는 언제 화를 냈냐는 듯 TV에서 짓는 청순하면서 화사한 미소로 시황에게 말을 걸었다. 방금 대기실에서 싸우고 욕하는 소리만 아니었어도 근거 없이 착하다고 느낄 만큼 순수한 미소였다.

“반갑습니다.”

“대기실에 있다가 강시황 대표님께서 지나간다는 소리 듣고 허겁지겁 나와 봤어요. 대표님 팬이기도 하고 제가 평소에 케즈론을 정말 좋아하거든요.”

아까부터 만나는 연예인마다 케즈론 좋아한다는 말은 빼먹지 않고 했다.

“하하. 감사합니다. 그런데 제가 지금 방송 출연을 해야 돼서 길게 얘기는 못 할 거 같아요.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바쁘신데 잡은 제가 죄송하죠. 혹시 나중에 시간 되세요? 제가 꼭 할 얘기가 있거든요 정말 중요한 얘기니까 나중에 차라도 마시면서 할 수 있을까요?”

“중요한 얘기라... 알겠습니다. 어떻게 연락드리면 되죠?”

이때까지 만난 모든 연예인들의 부탁을 뿌리쳤던 시황이 윤미소의 부탁은 잠시 고민하다 들어주기로 했다. 그러자 옆에 있던 찬미가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고 가을은 조금 불안한 듯 바라봤다.

“여기 제 스마트폰이거든요. 전화번호 찍어주시겠어요?”

윤미소가 피치 사의 스마트폰을 꺼내 시황에게 건네주었다. 시황은 자신의 휴대폰 번호를 찍어 건네줬고 윤미소가 곧바로 전화를 걸었다. 이내 찬미의 가방 속에서 진동 소리가 울렸다.

“감사합니다. 대표님. 전화번호 교환할 수 있게 돼서 정말 너무 기뻐요. 나중에 문자 보낼 테니까 꼭 답장 주셔야 돼요. 저 마음이 너무 약해서 답장 안 주시면 울지도 몰라요.”

방금 후배나 스타일리스트에게 말할 때와는 전혀 다르게 윤미소는 시황에게 가벼운 애교까지 떨었다. 남자라면 홀딱 넘어가지 않을 수 없는 귀여운 애교였다.

“제가 어떻게 무시하겠어요. 방송 끝나면 꼭 답장 드릴게요.”

“헤헷. 그러면 오늘 방송 힘내세요! 화이팅!”

“감사합니다.”

활짝 웃으며 응원하는 윤미소를 뒤로하고 시황은 스튜디오로 다시 걸음을 옮겼다. 대기실로 들어간 윤미소의 웃음소리가 섬뜩하게 들려왔다.

“전화번호 교환하셨네요?”

도저히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찬미가 시황에게 물었다. 이제까지 유명한 배우들 다 놔두고 왜 하필 윤미소인지 궁금했던 것이다.

“응. 재미있을 거 같아서. 아, 그리고 가을아. 얼마 전 드라마에서 악역 맡았던 신인 배우 누구야? 방금 윤미소하고 같이 방송도 나갔던 거 같은데.”

“주세미요? 아까 방송 같이 한다는 거 같던데...”

“아, 그래. 주세미. 혹시 걔하고 좀 만날 수 있을까?”

둘이 화해시킨다든가 그럴 생각은 아니었다. 섹스하는 것만으로도 바빠 죽겠는데 그런데 쓸 관심도 시간도 없었다. 시황은 그저 케즈론 홍보를 위해 드레스에 어울리는 사람을 찾고 있을 뿐이었다.

“한 번도 만난적이 없어서요... 죄송해요, 연락할 수 있는지 주변에 물어볼게요.”

“아, 그거 그러면 제가 알아봐드릴까요?”

전혀 접점이 없어 가을이 난처해하자 옆에 있던 PD가 불쑥 말을 걸었다.

“그래주시면 저야 감사하죠.”

“그러면 저하고도 전화번호 교환하셔야 나중에 연락드릴 수 있는데...”

PD는 시황과 전화번호를 교환할 수 있다는 기쁨으로 터져 나오는 웃음을 꾹 참았다. 물론 전화번호를 받았다고 해서 사적으로 만나거나 연락할 생각은 아니었다. 괜히 귀찮게 굴었다가 시황의 미움을 사기라도 하면 큰일이었으니까. 그저 순수하게 전화번호 그 자체를 원했다. 시황의 전화번호를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도 자신의 가치와 급이 올랐으니까.

시황은 바로 PD와 전화번호를 교환했다. 드래곤의 유산을 받기 전까지만 해도 휴대폰에 저장된 번호는 부모님이 다였는데, 이제는 유명한 연예인들과 대기업 임원 그리고 방송국 PD까지 나름 사회적으로 알아주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상당히 많았다. 사실 시황은 남자들의 전화번호 같은 건 전혀 관심이 없었지만 상대 쪽에서 간절히 원하는 경우가 많아서 어쩔 수 없이 교환을 한 게 대부분이었다.

전화번호를 교환하기는 했지만 PD덕분에 주세미에 대한 건 간단하게 해결할 수 있었다.

시황은 스튜디오로 가서 방송 녹화를 했다. 세계에서 유명한 한국의 먹거리나 브랜드, 문화 등을 보여주며 시청자들의 자부심을 극한으로 고취시켜 주는 소재의 방송으로, 자랑스러운 세계 속의 한국이라는 적절한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거기서 너무 우려내서 사골이 닳도록 나오는 게 케즈론에 관한 거라 이어폰 홍보도 할겸 한번 출연하기로 한 거였다.

방송 중 나오는 녹화 된 영상은 시황이 보기에도 낯이 뜨거울 정도로 케즈론을 찬양하고 있었다. 직접적인 상표명은 나오지 않았지만 누가 봐도 케즈론인 걸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케즈론 매장에 쇼핑을 하러 온 외국인들에게 뭘 어떻게 했는지, 외국인들이 엄지를 치켜세우며 ‘옷이 너무 예뻐요, 한국 사랑해요.’라고 어설픈 한국어로 말하기도 했다.

시황은 영상을 본 뒤에 부끄러움을 참으며 간략하게 소감을 말했다. 그리고 이번에 새로 출시한 이어폰 등을 얘기하며 이것 또한 세계에서 큰 돌풍을 일으킬 거라고 자신하는 것으로 모든 녹화가 완료되었다.

방송이 끝나고 가을은 시황과 있고 싶어 했지만, 아직 스케쥴이 남아 있어 다른 방송사로 곧바로 이동해야 했다.

아쉬워서 계속 쳐다보는 가을과 헤어지고 시황은 찬미와 함께 곧바로 집에 돌아왔다.

============================ 작품 후기 ============================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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