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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래곤 루나모스
갑작스럽게 얼굴이 진득한 액체로 범벅이 되자 수란은 본능적으로 얼굴을 뒤로 뺐다. 그리고 손으로 얼굴에 묻은 액체를 조금 덜어 직접 살폈다. 진득거리는 하얀 액체. 상당히 불쾌하게 생겼지만 의외로 나쁘지 않은 냄새가 났다. 달콤한 시럽 같은 느낌이다.
“이건…….”
“미안. 그러려고 한 건 아닌데. 너무 기분이 좋아서 못 참고 싸버렸어.”
시황은 휴지를 뽑아 수란의 얼굴에 묻은 자신의 정액을 닦아내었다.
하지만 수란은 화를 내지 않았다. 무표정하게 시황을 보기만 할 뿐이었다.
수란이 아무런 말을 하지 않자 시황이 상당히 미안해했지만 수란은 새로운 기분을 느꼈다. 저 쓸데없이 당당한 시황이 겨우 손으로 성기를 문질러줬다고 신음소리나 내면서 힘없이 정액을 발사하다니. 정액이 얼굴에 묻은 건 별로이긴 했지만 시황의 반응이 은근히 수란의 기분을 상쾌하게 만들었다.
“괜찮아요.”
덕분에 수란의 마음이 상당히 너그러워졌다.
“정말 괜찮아? 이것도 어쩔 수 없이 해주는 거잖아.”
“괜찮아요. 그보다 끝났으면 이제 돌아가도 될까요? 좀 씻고 싶네요.”
“어? 어. 괜찮아.”
“그러면 내일 또 오죠.”
수란은 침대에 일어나서 곧바로 시황의 방을 나갔다. 거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얼굴에서는 시황의 정액 냄새가 계속해서 코를 자극했다. 이 달콤한 냄새를 맡을수록 어쩐지 기분이 들떴다. 끈적끈적한 느낌을 제외하면 크게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정액이 얼굴에 묻은 것보다 항상 자기 멋대로 하던 시황이 힘없이 얼굴을 찡그리며 사정을 하던 순간만 계속 생각이 났다.
대단히 묘한 기분. 자신의 손을 한 번 쳐다본 수란의 입가에는 미미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
금요일.
고운과 만나기로 약속한 날이었다.
시황은 최소한의 수업만 들었기 때문에 금요일에는 강의가 없었다. 그에 비해 고운은 금요일에도 수업을 들었기 때문에 시황은 차를 가지고 학교로 갔다. 고운이 수업을 듣는 강의실 앞에서 잠시 기다리자 수업이 끝났는지 학생들이 강의실을 나오기 시작했다.
여느 때보다 옷을 화사하게 입은 고운이 강의실을 나왔다. 작은 키지만 커다란 가슴이 두드러졌다. 예쁘장한 원피스를 입고 있었는데 치마부분이 매우 짧아 단번에 그 쪽으로 눈이 갔다. 대단히 기합을 넣고 온 모습이었다.
“오빠, 안녕하세요. 오래 기다리셨어요?”
시황을 발견한 고운이 화사한 미소를 지으며 시황에게 다가왔다. 얼굴 가득 기쁘고 행복하다는 느낌으로 가득했다.
“방금 왔어. 일단 나가자.”
시황과 고운은 건물을 나왔다. 방금 강의가 끝나서 수많은 학생들이 돌아다니면 커다란 소음을 만들어내다 보니 건물 안에선 얘기를 하기 힘들었다.
밖으로 나오자 선선한 바람이 불었다. 아직 조금 쌀쌀했지만 완연한 봄에 이르렀다. 고운이 다리를 한껏 드러내고 굽이 높은 웨지 힐을 신을만한 날씨이기는 했다.
“점심 먹고 싶은 거 있어?”
“전 아무거나 괜찮아요.”
차를 세워놓은 주차장으로 가며 시황이 묻자 고운이 아무거나 괜찮다고 했다. 굽 높은 웨지 힐을 신었는데도 시황과 고운의 신장 차이가 대단히 커서 안 그래도 키 작은 고운이 더 작게 보였다.
“그러면 파스타 같은 거 먹을래?”
“네. 파스타도 괜찮아요.”
고운은 평범하게 대학교 주변에서 파는 파스타 가게를 생각하며 대답했다. 점심이니까 냄새가 별로 안 나는 파스타도 좋았다.
주차장에 가서 고운은 시황의 차에 탔다. 차에 탈 때 괜히 긴장을 해서 손을 떨었다. 시황의 차를 타고 이렇게 단 둘이 밥을 먹으러 간다는 사실자체가 고운에게는 대단히 가슴 벅찬 일이었다. 고급 외제차에 탔다는 것보다 시황의 옆에 앉아 있다는 사실이 더 흥분됐다. 고운은 운전석에 앉은 시황을 멍하니 바라봤다.
시황은 그런 고운의 시선을 느끼며 차를 운전해 청담동으로 갔다. 파스타를 잘 안 먹어서 어디서 괜찮게 하는지 알 수 없어 대충 주워들은 걸로 청담동에 가기로 한 것이다.
중간에 고운이 어딜 가냐고 물었지만 시황은 가게를 찾는 중이라고 간단히 대답했다.
청담동에 도착했다. 차를 세우고 시황은 고운과 함께 세련돼 보이는 가게로 들어갔다. 그런데 아무런 부담 없이 들어가는 시황과 다르게 고운이 조금 주춤했다.
“너, 너무 비싼데 같은데…….”
“일단 들어가 보자.”
시황은 고운을 데리고 자리에 앉았다. 이내 직원이 메뉴판과 함께 물을 갖다 주었다. 메뉴판을 펼치자 영어로 적힌 다양한 음식이 먼저 보였다. 가격도 기본적으로 2만 원 이상이었다.
메뉴판을 본 고운이 깜짝 놀랐다.
“오빠, 너무 비싼 곳인 거 같아요. 나가서 다른데 갈까요?”
슬쩍 직원을 쳐다본 고운은 시황에게만 들리도록 낮고 조용하게 말했다. 고운이 생각한 건 학교 앞에서 파는 5~6천원 파스타였지 이런 고급 가게가 아니었다.
“하하. 괜찮아. 이정도 가격이면 피자 시켜먹는 거랑 비슷하잖아.”
“그, 그런가.”
여전히 고운은 불안해했지만 다시 나가는 것도 곤란해서 일단 그나마 싼 파스타를 골랐다. 그런데 그것조차도 가격이 2만 7천원이었다.
시황이 직원을 불러 주문을 했는데 파스타 두 개로 거의 6만원에 육박하는 가격이 나왔다.
간단하게 나온 빵을 먹고 있으니 파스타가 나왔다. 이게 2만 7천원? 이라는 생각이 단번에 드는 파스타였지만 어쨌든 맛은 좋았다.
“오늘 수업은 끝이지?”
“네. 오늘은 방금 수업 하나밖에 없었어요. 내일은 토요일이라 쉬니까 오늘 저 밤새 놀아도 괜찮아요.”
시황은 단순히 점심만 같이 먹는지 알았는데 고운은 점심을 먹고 밤새 같이 놀고 싶어 했다. 밤새도록 뭐하고 놀자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고운이 이렇게 적극적으로 나오자 시황은 조금 곤란함을 느꼈다.
“뭐 하고 싶은 거 있어?”
“그냥 전 오빠랑 같이 있기만 해도 좋아요. 아, 그리고 이거요.”
고운은 가방에서 조그만 상자를 꺼내 시황에게 건네주었다. 포장까지 예쁘게 되어 있었다.
“이게 뭐야?”
“열어보세요. 헤헷.”
시황은 포장을 풀고 상자를 열었다. 향수였다. 그것도 제법 비싼 향수였다. 케즈론 화장품을 만든다고 브랜드들을 조사했기 때문에 시황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향수네?”
“네. 오빠한테 어울릴 거 같은 향이라서 샀어요. 뿌려주실 거죠?”
고운이 꼭 뿌려달라는 눈으로 쳐다보자 시황은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계속 고운이 쳐다봐서 향수를 간단하게 뿌려봤는데 향 자체는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시황에게 향수는 별로 필요가 없었다. 기본적으로 쓰는 바디 클렌저나 기초 화장품 등의 품질이 워낙 좋아 인공적인 향기의 향수보다도 더 자연적이고 풍부한 향기가 풍겼다.
“고마워.”
“아니에요. 오빠가 잘 써주시면 전 그걸로 행복해요.”
마치 연예인한테 선물을 주는 여자애처럼 고운이 대답했다.
보통 처음에는 시황이 먼저 좋아하거나 여자들이 소극적인 경우뿐이었는데 이렇게 적극적으로 좋아해주는 애를 만나니 새로우면서도 부담스러웠다. 마음이 있으면 괜찮을 텐데 이상하게도 고운에게는 별다른 감정이 생기지 않아서 미안한 마음까지 생길 정도였다.
식사를 다 끝내고 별 생각 없이 시황이 계산을 하려고 했는데 갑자기 고운이 자기가 내겠다고 했다. 왜 들어올 때부터 불안해하나 했더니 자기가 점심을 사주고 싶어서 그랬던 것 같았다.
“내가 데리고 온 거니까 여기는 내가 낼게. 고운이가 선물도 해줬고.”
“그래도…… 제가 만나자고 해서 만나는 건데…….”
평범하게 1~2만 원 정도 나왔으면 시황도 고운이 내게 했을 것이다. 그런데 시황은 당연히 자기가 낼 거라 생각하고 비싼 데를 데리고 온 거라 고운에게 미안해서 돈을 지불하게 할 수가 없었다. 결국 저녁은 고운이 사는 걸로 합의를 보고 시황이 돈을 냈다.
고운이 어떻게든 얻어먹고 돈을 남자가 다 지불하게 만들려고 했으면 시황도 미련 없이 관계를 끊었을 것이다. 하지만 반대로 고운은 시황에게 선물을 사주고 돈도 자기가 다 내려고 해서 곤란했다. 고운이 진아처럼 부자면 모르겠는데 그런 것도 아니니 마음의 부담이 더 심하다고 할까?
점심을 먹고 평범하게 데이트를 했다. 영화도 보고 길거리를 돌아다녔다. 저녁이 되고 고운이 사주는 밥을 먹은 뒤에 조금 걷다 자연스럽게 술을 마시러 갔다. 이렇게 되면 정말 밤새도록 놀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에 적당히 술을 마시고 고운을 데려다 줘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둘이서 얘기를 할 수 있는 소란스럽지 않은 술집이었다. 방금 밥을 먹었기 때문에 간단한 안주를 시키고 술을 마셨다. 고운은 의외로 술을 잘 마셨다.
“오빠는 제가 오빠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모르죠?”
“어?”
고백인가? 갑작스러운 고운의 얘기에 시황은 단지 되묻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술이 들어가서 그런 건지 원래 이런 얘기를 하려고 했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고운은 언제나처럼 희고 앳된 얼굴로 시황을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술이 취한 것 같진 않았다.
“처음 방송에서 보고 정말 좋아했는데 그 뒤로 오빠가 방송을 안 하더라고요. 그때 언제 오빠가 또 방송하나 기다리는 게 정말 힘들었어요.”
“미, 미안.”
“그런데 학교에서 같은 과, 같은 수업을 들었을 때 운명이라고 느꼈어요. 오빠가 보기에도 이 정도면 정말 운명적인 만남 같죠?”
“그런가?”
“그럼요. 한국에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요. 같은 대학, 같은 과, 같은 교실에서 수업을 듣는 건 하늘이 맺어준 인연이나 다름없어요.”
“으음…….”
평소라면 시황도 뭐라고 맞장구를 쳐줬을 텐데 왠지 그랬다가는 단번에 사귀자고 할 것 같아 그런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아무리 시황이라도 마음도 없는데 여자의 호감을 이용해 육체적인 쾌락만 추구하고 싶지는 않았다. 시황과 관계를 맺은 여자는 어쨌든 시황이 좋아한다는 감정이 있었으니까.
“오빠 이거 먹고 우리 집에 가서 더 마실래요? 저 자취해서 집에 아무도 없어요.”
고운이 갑자기 도발적으로 나왔다. 단 둘밖에 없는 집에서 술 마시고 뭘 하게 될지는 뻔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시황은 고운의 프로필을 살폈지만 여전히 처녀가 맞았다.
고운이 처녀라지만 저 말대로 따라갔다가는 분위기상 분명 고운과 섹스를 하게 될 거고 그러면 다른 여자들과 다르게 상당히 피곤한 상황이 벌어지게 될 게 분명했다.
“미안. 그건 좀 힘들 것 같은데.”
“…….”
시황의 거절에 고운의 표정이 조금 변했다.
“오빠. 솔직히 말해서 저 오빠랑 사귀고 싶어요. 오빠는 저 어때요? 싫지는 않죠?”
시황의 거절 때문인지 갑자기 고운이 고백을 했다. 진지한 눈빛. 단순히 술을 취해 하는 말이 아니라 진심으로 하는 말이라는 걸 시황도 느꼈다.
여기서 시황이 ‘응’이라고 말하면 단번에 고운과 사귀게 된다. 아직 다른 여자들과도 사귀는 단계까지 못 갔는데 아이러니하게 별로 만난 지 오래 되지도 않은 고운에게 긍정적인 대답을 한 번 하는 것만으로 맺어지는 것이다.
“자꾸 미안하다 해서 미안한데…… 좋아하는 여자가 있어서…….”
시황은 누구라고 특정 짓진 않았다. 그저 거절을 하기 위해 가장 무난한 대답을 한 것 뿐이었다. 이게 거짓말도 아니고 사실이라 문제될 건 없었다.
그런데 시황의 거절을 들은 고운의 표정이 급변했다. 오후부터 기분 좋아서 연신 웃기만 하던 고운이었는데 단번에 표정이 일그러진 것이다.
“그 여자죠?”
“어? 그 여자라니?”
시황은 딱히 떠 올린 사람이 없는데 정작 고운이 누군가를 떠올렸다. 고운이 누구를 말하는지 전혀 알 수 없어 시황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전에 학교에서 만난 여자요.”
“아…… 수란 말이구나.”
시황은 고운이 말하는 상대가 누군지 단번에 알았다.
============================ 작품 후기 ============================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