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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래곤 루나모스
“오늘 즐거웠어.”
벽에 서 있는 수란을 바라보며 시황이 말했다. 대사를 읊는 게 아니라 진심이었다.
“저도…… 그렇게 나쁘진 않았어요.”
말투만 보면 그럭저럭 이었다고 느낄 수도 있지만 수란은 오늘 상당히 즐거웠었다. 새로운 것들을 봐서 그런 건지 시황과 다녀서 그런 건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즐겁긴 즐거웠다.
“둘은 여기서 키스하는 거야?”
“네…….”
분명 같은 시황과 집 앞 벽에 기대어 서 있을 뿐인데 왠지 어색하고 긴장되는 분위기라 수란은 조그맣게 대답했다. 예상치 못한 분위기에 키스를 하는 것과 다르게 이제 곧 키스를 할 거라고 확정된 상태이다 보니 긴장감에 몸이 떨렸다.
“키스해도 돼?”
“네.”
수란이 고개를 끄덕였다.
키스해도 되냐고 묻는 남자와 그걸 허락하는 여자. 남들이 본다면 상당히 이상한 관계이기는 했다.
“이번엔 조금 더 제대로 된 키스를 해볼까? 혀도 써서. 그런 장면도 넣어야 되잖아.”
“…….”
시황의 말에 수란이 고민했다. 분명 단순한 입맞춤이 아니라 혀까지 쓰는 농도 깊은 감정도 알 필요성은 있었다. 경험을 해본 것과 해보지 않은 건 글을 쓸 때 어마어마한 차이가 난다는 걸 직접 겪었으니까.
“그건 아직 싫어?”
“알겠어요. 그렇게 해요.”
수란은 허락했다. 집 앞에서 혀까지 쓰면서 키스를 하겠지만 이건 단순히 만화를 그리기 위한 경험일 뿐이었다. 굳이 말하자면 드라마나 영화에서 남자 배우와 키스를 하는 여자 배우의 비즈니스적인 마음이라고 할까? 돈을 받고 하는 일은 아니라 시황에 대한 호감이 아예 없다고는 말 못하겠지만 수란은 최대한 그렇게 생각하고 싶었다.
“그럼 할게.”
수란의 머리를 잡고 시황은 입을 맞췄다. 아까 얘기했던 대로 단순한 입맞춤이 아니라 서로의 혀가 엉키는 본격적인 키스였다.
하지만 수란은 만화나 영화로만 봤을 뿐 직접 해본 경험이 없다 보니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수란은 입을 벌려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을 했다. 그런데 입을 맞추는 것도 부끄러운데 직접 입을 벌리고 혀를 낼름낼름하는 건 감히 시도조차 할 수 없었다. 진한 키스를 하자고 해놓고 수란은 민망함에 가만히 입을 다물고 있었다.
수란이 가만히 있을 걸 어느 정도 예상을 했기 때문에 시황이 직접 리드를 했다. 혀를 집어넣어 혀를 수란의 이에 갖다 대자 수란의 입이 조금 열렸다. 여기서부터 시작이었다.
서로의 혀가 엉켰다. 수란은 여전히 수동적이고 어색해했지만 시간이 지나자 조금씩 나아졌다. 뭐든지 처음이 가장 어려운 법이다.
키스를 끝낸 시황이 수란을 바라봤다. 수란의 얼굴은 상기되어 있었다.
“기분 어땠어? 좋았어?”
“…….”
일부러 노골적으로 묻는 시황의 말에 수란은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한 번 더 할래?”
“다음에요.”
수란은 거절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고 싶었다.
그런데 시황은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가만히 수란을 쳐다봤다. 시황과 수란의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시황의 입술이 수란에게 다가갔다. 서로의 입술이 맞닿았다.
그렇게 키스가 이어졌다.
**
수란과 시황은 만화의 자료 조사를 한다는 핑계로 둘이 자주 돌아다녔다. 수란이 하고 싶다던 코스프레 행사를 가기도 하고 서점에 돌아다니기도 했다. 며칠 만에 수란이 계획한 것들을 대부분 다 했다.
평소처럼 시황은 오전에 학교를 갔다. 수업이 많지 않은 날이라 점심시간쯤에는 마칠 수 있었다.
마지막 강의. 같이 수업을 듣는 고운은 시황의 옆에 앉아있었다. 고운은 오른손으로 턱을 괴고 한결같은 눈으로 시황을 바라보고 있었다.
“오빠, 오늘 같이 점심 먹을래요? 제가 맛있게 하는 음식점 아는데.”
“미안. 약속이 있어서 조금 곤란할 것 같아.”
언제나처럼 강의를 마치고 같이 놀자는 고운의 요청을 시황은 웃으며 거절했다. 싫어서 거절한 건 아니고 정말 약속이 있었다.
“점심 약속이에요? 그러면 저녁에 만나서 보영이하고 같이 술 마시러 갈래요?”
“술?”
갑작스런 술 얘기에 시황이 되물었다.
“네. 그거 알아요? 저 오빠하고 아직 술 마셔본 적이 없어요.”
“계속 거절만 해서 미안한데 오늘 저녁에도 바빠서. 안 될 것 같아. 다음에 시간 나면 같이 밥이라도 먹자.”
처음 만났을 때부터 팬이라고 하더니 고운은 시황에게 계속해서 관심을 나타냈다. 마치 여자 팬들이 남자 연예인을 좋아하는 것처럼 엄청난 호의를 가지고 있었다.
“언제요? 저 언제든지 시간 돼요. 이번 주 금요일은 어때요?”
이번엔 평소처럼 물러나지 않았다. 고운은 반드시 시황과 약속을 잡겠다는 듯 강하게 나갔다.
“금요일? 음……. 그때는 괜찮을 것 같네. 그러면 만나서 점심이라도 같이 먹자.”
“정말요? 오예.”
시황과 약속을 잡자 고운이 정말 기뻐했다.
아루와 은비처럼 대단히 예쁘지는 않았지만 고운도 또래 대학생들 치고는 예쁘장하고 귀엽게 생겼었다. 특히 158센티미터밖에 안 되는데다 전체적으로 상당히 말랐음에도 가슴은 C컵이나 되는 묘한 언밸런스함이 매력적이었다.
분명 객관적으로 보면 괜찮은 여자애지만 시황은 이상하게 고운에게는 관심이 안 갔다. 지나치게 적극적이라 그런 걸까? 아니면 더 이상 여자관계를 늘리고 싶지 않다는 심리가 작용해서일까? 시황 스스로도 알 수 없었지만 끌리지 않는다는 점은 명백했다.
“그러면 밥 먹고 영화 볼까요? 어디서 만나지. 오빠는 어디가 좋아요?”
약속이 정해지자 고운은 그날 뭘 할지 계속해서 시황에게 물었다. 조금 귀찮기는 했지만 시황은 내색하지 않고 고운이 최대한 원하는 방향으로 맞춰주었다.
교수가 들어오고 수업이 시작되었다.
수업 하는 중에도 고운은 교수를 보는 게 아니라 시황만 바라봤다. 깊은 사랑에 빠진 소녀의 눈으로 시황의 행동 하나 하나를 자신의 눈에 각인시켰다. 그때 책상 위에 올려둔 고운의 스마트폰으로 코코아톡이 오며 진동이 울렸다. 고운이 문자를 확인하고 스마트폰의 잠금을 해제 하자 시황의 얼굴이 커다랗게 나오는 배경 화면이 바로 보였다.
시황도 우연찮게 그 화면을 봐버렸다. 고운이 자신을 좋아하는 건 알았지만 설마 스마트폰의 배경으로 해놨을 줄이야. 기분이 나쁜 건 아니었지만 어쩐지 민망했다.
문자를 다 보낸 고운은 다시 시황을 바라봤다. 수업 내용 따위는 하나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고운은 시황이 좋아서, 정말 좋아서 이렇게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처음에는 이정도로도 만족했지만 시간이 지나자 점점 시황과 가까워지고 싶었다. 요즘 계속 시황에게 같이 밥을 먹자고 하는 것도 이런 이유였다.
시황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수업이 끝나버렸다. 고운은 가방을 챙겨서 시황, 보영과 함께 강의실을 나갔다.
“이제 집으로 가시는 거예요?”
“아니. 여기서 만날 사람이 있어.”
“학교에서요?”
“응.”
설마 여자인가 하는 생각에 고운의 미간이 조금 찌푸려졌다. 시황이 여자 친구가 있다고 해도 이상한 건 아니지만 좋아하고 있었기 때문에 여자 친구라는 존재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짜증이 났다.
건물을 나가자 밝은 태양빛과 따스함이 느껴졌다. 완연한 봄이 되었다. 겉옷을 걸치긴 했지만 제법 가볍게 옷을 입은 사람들이 캠퍼스를 돌아다니고 있었다. 고운은 시황과 손을 잡고 이 캠퍼스를 걷고 싶었다.
“저기 있네. 그러면 난 갈게. 내일 보자.”
“아, 네.”
약속한 사람이 기다리고 있었는지 시황은 고운이 미처 대답하기도 전에 뛰어가 버렸다. 갑작스럽게 시황이 떠나자 고운은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시황을 계속 눈으로 쫓았다. 누구랑 만나는지 궁금해서 참을 수가 없었다.
“안 가?”
옆에 얌전히 있던 보영이 고운에게 물었다.
“잠깐만.”
고운은 시황이 만나는 사람을 확인했다. 여자였다. 그것도 그냥 여자가 아니라 엄청 예쁜 여자였다. 아니, 엄청 진짜 예쁜 여자였다. 단순히 예쁘기만 한 게 아니라 청순해 보이는데다 몸매도 말도 안 되게 아름다웠다. 고운이 입술을 깨물었다. 왠지 모를 패배감에 몸이 떨렸다.
시황은 웃으면서 그 여자에게 뭔가를 얘기했고 그 여자는 무표정하게 대답했다. 시황이 저렇게 웃으며 얘기해주는데 정작 여자는 무표정하게 대답하자 고운은 속에서 화가 부글부글 끓었다.
“어? 시황 오빠 만나는 여자 엄청 예쁘다. 사귀는 건가?”
고운은 화가 나서 얼굴이 썩어 들어가는데 보영은 눈치 없이 말했다.
“그, 그냥 친구겠지. 오빠는 인기 많으니까 저런 이상한 여자가 꼬이기도 할 거야. 분명 오빠 얼굴보고 접근했을 걸?”
남자 아이돌 팬이 자기가 좋아하는 아이돌이 열애설이 나자 그 상대인 여자를 욕하는 것처럼 고운도 시황과 만나는 여자를 비난했다.
“그런 거 같진 않은데……. 하여튼 가자.”
보영이 가자고 했음에도 고운은 시황과 만나는 여자를 계속 노려봤다. 고운의 눈을 눈치 챘는지 그 여자도 고운을 쳐다봤다. 서로의 눈이 마주쳤다.
“왜?”
갑자기 수란이 누군가를 쳐다보자 시황도 그 쪽으로 쳐다봤다. 고운이 여기를 바라보고 있었다.
“누가 절 봐서요. 저 여자는 누구죠?”
“같이 수업 듣는 여자애. 아직 안 갔네.”
시황은 고운에게 손을 흔들어주고 수란과 함께 캠퍼스를 걸었다.
수란은 고운이 신경 쓰이는지 한 번 더 뒤를 돌아봤다. 고운은 옆에 있는 친구가 가자고 하는데도 잔뜩 화가 난 표정으로 여기를 보고 있었다. 수란은 어렴풋이 그 이유를 알았지만 별다른 행동을 하지는 않았다.
“오늘 캠퍼스 데이트만 하면 끝인가?”
“네. 일단은요.”
수란은 일부러 일단이라는 말을 붙였다. 여기서 바로 끝내기는 조금 아쉬운 감이 있었다. 아직 해보지 못한 경험이 많이 있었으니까.
“그런데 캠퍼스 데이트라고 해봐야 별 건 없는데.”
“경험을 해보는 게 중요하니까요. 혹시 건물 안에 들어갈 수도 있어요?”
“당연하지. 들어가 볼래?”
“네.”
수란의 부탁대로 시황은 근처에 있는 아무 건물에나 들어갔다. 그리고 강의실을 수란에게 보여주었다. 시황이야 항상 보는 그런 강의실이니 별 다른 느낌이 없었지만 수란은 강의실을 보며 뭔가를 생각하는 듯 했다.
캠퍼스 데이트라고 해봐야 캠퍼스를 돌아다니다 학식을 먹고 벤치에 앉아 쉬는 게 다였기 때문에 얼마 걸리지 않았다. 같이 학교를 다니는 학생이라면 같이 도서관에 간다든가 하는 등 이것저것 할 게 있었겠지만 수란은 학생이 아니었기 때문에 대학교를 둘러본다 정도의 의미밖에 없었다.
학교에서 점심을 먹고 오늘은 일찍 집으로 돌아왔다. 수업을 듣지 않는 이상 학교에 오래 있고 싶어도 있을 수가 없었다. 시황이 동아리에 든 것도 아니었고.
집으로 돌아온 시황과 수란은 여느 때처럼 시황의 방에서 키스를 연습했다. 매일 이어지는 이 키스 연습은 상당히 하드 했다. 어느 정도 했으니 충분할 텐데도 둘 다 어찌나 열심히 연습하는지 계속해서 입을 맞추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시황의 손이 수란의 가슴을 만졌다. 평소 자제하고 있었는데 계속된 키스로 익숙해지다 보니 자기도 모르게 만진 것이다.
키스를 하던 수란이 움찔 하더니 시황을 밀어내었다. 그리고 침대에서 일어나더니 무표정하게 시황을 쳐다봤다.
============================ 작품 후기 ============================
매일 쓰고 싶은데 일주일 내내 쓰면 컨디션이 안 좋은 날이 있어서 하루씩 쉬게 되네요.
이 소설은 이번에 완결을 꼭 하고 싶기 때문에 꾸준히 쓰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