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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래곤 루나모스
“그것도 못하면서 연애 만화를 그리겠다고 한 거야? 너 너무 만화를 가볍게 보는 거 같은데.”
“죄송해요.”
어째서인지 수란이 시황에게 사과했다. 사랑한다는 말을 안 해도 연애 만화를 그리는데 아무런 지장이 없었지만 수란은 스스로에 대한 자괴감 때문에 시황의 말을 고분고분하게 들었다.
“네가 살던 곳이 전에 그린 만화와 배경이 비슷해서 그렇게 뛰어난 작품이 나올 수 있었던 거야. 만약 네가 한국에서만 평생 살았으면 그렇게 세세하고 퀄리티 뛰어난 만화를 그릴 수 있었겠어? 절대 아니라고 난 확신해. 경험이라는 건 그만큼 중요한 거야.”
“…….”
수란은 얌전히 시황의 말을 들었다. 시황이 말한다고 해서 터무니없는 헛소리가 아니었다. 수란은 스스로가 시황의 말에 공감했다. 경험이 없었기에 사람들에게 그런 비판을 받은 것이다. 연애를 해봤다면 분명 제대로 된 작품이 나왔을 것이다.
“다시 해봐.”
“네.”
시황의 교육은 가혹했다.
수란은 다시 시황을 바라봤다. 이번엔 반드시 말하겠다고 굳게 다짐했다. 시황의 눈을 바라봤다. 검은 눈동자가 보인다. 시황은 진지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웃고 있어도 싫을 것 같지만 진지한 표정을 짓고 있으니 괜히 더 부담이 됐다. 수란은 침을 한 번 삼켰다. 입이 말라붙는다.
“사…… 사랑해요.”
머뭇거리다 결국 말했다. 정말 사랑 고백을 하는 것도 아닌데 얼굴이 화끈거렸다.
“좋아. 이번에는 내 이름을 말하면서 고백해봐.”
“하아…….”
시황의 말에 수란은 한숨부터 나왔다. 이런 걸 해야 하나 싶은 생각이 계속 들기는 했지만 지금은 감내하는 수밖에 없었다.
다시 시황의 얼굴을 봤다. 여전히 시황은 진지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름까지 붙이려니까 더 말하기 힘들었다.
“시, 시……황 오빠…… 사랑해요.”
수란은 엄청 더듬거리면서 말했다. 말을 하고 나서 차마 시황의 얼굴을 바라볼 수가 없어 고개를 숙였다. 왠지 시황이 웃고 있을 거라 생각하니 창피함에 귀까지 붉어졌다.
“응. 나도 사랑해. 사실 이때까지 숨겼는데 처음 널 봤을 때부터 계속 몰래 좋아하고 있었어.”
“네?”
그런데 시황은 수란의 생각과 전혀 다른 말을 했다. 수란이 놀라서 시황을 쳐다봤다. 당연히 시황이 말을 더듬었다고 한소리 할 거라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지나치게 뜬금 없는 말이라 혹시 웃으면서 농담을 하나 살폈지만 시황은 이제까지 없던 정말 진지한 표정이었다. 이렇게 되니 진담인지 농담인지 구분이 가지 않았다.
“조금 고민했는데 이 기회에 내 마음을 가르쳐 주고 싶어서 말한 것뿐이야. 크게 신경 쓰지 마.”
“진심이세요?”
수란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시황에게 물었다. 지나치게 갑작스러워서 아직까지 믿겨지지 않았다. 시황은 평소에도 자신에게 워낙 장난을 많이 치고 쓸데없는 농담을 했기 때문에 이것도 단순한 농담인가 했는데 분위기가 어쩐지 그런 건 아닌 것 같았다.
“편한 대로 생각해. 부담주고 싶지는 않으니까.”
“갑자기 그러시면…….”
수란은 당황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시황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자기를 처음 봤을 때부터 좋아한다 해놓고 옆에서 아루랑 대놓고 섹스한다는 게 말이나 되는가? 시황의 말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는데 저런 진지한 표정을 보니 또 아예 거짓말 같지는 않았다.
“진지하게는 생각하지 마.”
“전 지금 이 상황이 잘 이해가 안 가요.”
“이해를 못 하면 못 하는 대로 괜찮지. 그거보다 계속 교육해야 하니까 다음은 키스 연습을 해보자.”
“네? 자, 잠시 만요. 그건 너무 갑작스럽잖아요.”
수란은 시황의 속도를 따라갈 수가 없었다. 자기한테 짝사랑 했다고 고백하는 듯 했다가 갑자기 키스를 하자고 하니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정리가 되지 않았다. 시황의 진심을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가슴이 서서히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누워 봐.”
시황은 혼란스러워하는 수란을 침대에 눕혔다.
수란은 저항하지 않고 맥없이 침대에 드러누웠다. 수란의 눈이 흔들렸다. 아직까지 상당히 당황하고 있는 중이었다. 농담인지 진담인지 구분이 안가는 시황의 고백을 들어서 그런지 처음 방에 들어왔을 때의 마음과 지금의 마음이 전혀 달라져 있었다.
“키스해도 돼?”
“모르겠어요…….”
아까 전이었다면 키스를 맹렬하게 거부했을 텐데 지금은 머릿속이 뒤죽박죽이라 이런 간단한 문제도 판단을 내릴 수가 없었다. 이대로라면 정말 시황과 첫키스를 하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몸이 덜덜 떨렸다. 거부해야 된다고 생각이 안 드는 건 아니었지만 자신의 마음을 스스로가 알기 어려웠다.
“하지 말라고 하면 안 할게. 나도 억지로 하는 건 싫으니까.”
평소의 시황이라면 분명 억지로 키스를 하고 이상한 농담이나 했을 텐데 지금의 시황은 전혀 달랐다.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는 모습은 지나치게 진지해서 거짓은 아닌 것 같다는 생각만 계속 들었다.
“…….”
수란은 그저 고개만 돌릴 뿐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러자 시황의 얼굴이 점점 다가왔다. 몸이 떨렸다. 고개를 조금 더 돌렸지만 이정도로는 시황을 막을 수 없었다.
결국 시황과 수란의 입술이 맞닿고 말았다. 수란은 눈을 질끈 감았다. 말랑한 시황의 입술이 그대로 느껴졌다. 첫키스였다. 어쩐지 몸이 자꾸 부들부들 떨렸다.
시황이 수란의 손을 맞잡았다. 원래라면 여기서 가슴을 만지는 거나 여기저기 더듬는 게 보통이지만 수란을 생각해서 그런 건 하지 않았다. 건전하게 키스만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시황의 입술이 떨어졌다. 그렇게 길지 않은 시간이었다. 입술이 떨어졌음에도 수란은 여전히 눈을 질끈 감고 있었다.
“키스를 처음 해본 느낌은 어땠어?”
“…….”
시황은 수란에게 노골적으로 물었다. 수란은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한 번으로는 모르겠어? 한 번 더 할래?”
“…….”
수란은 여전히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아니, 할 수가 없었다. 몸은 덜덜 떨렸고 머리는 엉망진창이었다. 다시 시황이 키스를 해주었다. 아주 가벼운 입맞춤. 하지만 수란에게는 전혀 가볍지 않았다. 만화를 보면서 상상할 때와 직접 남자와 키스할 때의 느낌은 비교를 할 수가 없었다.
다시 키스를 하고 나서 시황은 곧바로 묻지 않고 조금 기다려주었다. 평소 수란이 냉정한 척 해도 의외로 마음이 여린 듯 했다.
시간이 지나자 수란의 마음도 점차 안정되어갔다. 수란은 눈을 떴지만 차마 시황을 바라볼 수가 없었다. 침대에서 일어나 구석에 앉아서 고개를 숙였다.
“하아…….”
수란은 한숨을 쉬었다. 어쩐지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마음이 안정될수록 이제까지의 일이 머릿속에 정리되었고 시황과 키스를 하고 말았다는 사실을 다시금 실감했다. 이 집에 거주하는 여자들을 보면서 이런 일이 생기지 않게 그간 조심해왔는데 시황의 고백 한 번에 결국 이렇게 돼 버린 것이다.
“왜 한숨을 쉬어?”
“그냥요.”
수란은 나직이 대답했다. 여전히 마음이 심란해서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자꾸 한숨이 나왔다.
“이제 좀 진정 된 거 같으니까 키스한 감상을 말해볼래?”
“감상을요?”
수란을 잠시 시황을 바라봤다가 왠지 모를 민망함에 고개를 돌리며 대답했다. 시황을 봤을 때 자동적으로 시황의 입술로 눈이 갔다. 아루는 시황과 이런 걸 매일 했다니…….
“아직도 모르겠어? 그러면 알 때까지 해야지.”
“자, 잠깐만요. 말할게요.”
시황이 다가오자 수란이 뒤로 주춤 물러섰다. 싫다라는 감정이 아니라 부끄럽다라는 감정이 불쑥 솟아났다.
“그, 그게…… 마쉬멜로우 같은 부드러움이 있고 레몬처럼 신 맛이 느껴지기도 하고 초콜릿보다 달콤한 맛이…….”
수란은 횡설수설했다. 머릿속에 방금 전 키스한 그 현실적인 감각이 떠올랐지만 그걸 그대로 말하기 부끄러워 이상한 수식어들을 붙였다.
“아직 전혀 모르는 거 같은데. 다시 누워봐.”
“자, 잠깐…….”
다시 시황에 의해 침대에 누운 수란은 시황과 입을 맞췄다. 입술만 맞대는 간단한 입맞춤이었다. 짧은 입맞춤이지만 그 횟수가 상당했다. 시황은 만족스러운 대답을 들을 때까지 계속해서 수란과 입을 맞추었다.
결국 수란에게서 나름 만족스러운 대답을 듣고야 시황은 입맞춤을 멈추었다. 교육이었기 때문에 입을 맞추면서 절대 수란의 다른 중요 부위는 건드리지 않았다.
“음, 그 정도면 괜찮은 것 같네. 대충 느낌은 알겠지?”
“네…….”
겨우 시황에게서 풀려난 수란은 침대에 앉아 고개를 푹 숙였다.
“확실히 전보다 이해도가 높아진 것 같지 않아?”
“…….”
수란은 시황의 말에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분하지만 사실이었다. 상상만 하던 것과 실제로 키스를 했을 때의 느낌이 전혀 달랐다. 이제 만화를 그린다면 조금 더 제대로 된 표현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내가 조금 생각해봤는데 단순한 현대 이야기 보다는 네 장점을 살려서 현대로 온 중세 공주 이야기를 써보는 건 어때?”
“네?”
터질 것 같은 심장을 진정시키며 방금 시황과의 키스를 다시 상기하던 수란은 갑작스러운 말에 시황을 쳐다봤다. 시황과 눈이 마주쳤다. 수란은 슬그머니 다시 고개를 숙였다.
“웹툰은 여자들도 많이 보니까 그쪽 취향에 맞추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중세에 살던 공주가 현대로 와서 운명적인 사랑을 하는 스토리 괜찮지 않아?”
“음…….”
수란의 미간이 찡그러졌다. 방금까지 부끄러워서 어쩔 줄 몰라 하던 표정이 사라지고 진지한 표정으로 변했다.
시황은 그런 스토리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지만 여자들은 좋아할 거라고 생각했다. 요즘 남자만 만화를 보는 것도 아니고 여자 독자도 많기 때문에 여성들이 좋아할법한 웹툰도 상당히 많았다.
“괜찮은 것 같아요. 제가 경험한 것도 있으니까 더 현실적으로 그릴 수 있을 것 같아요.”
만화 얘기가 나오자 평소의 수란으로 돌아갔다.
“제대로 된 스토리는 네가 짜야하지만 그 남자와 서로 좋아하는 부분은 내가 도와줄게.”
“네? 어떻게요?”
“네가 짠 이야기를 직접 우리가 해보는 거지. 너도 데이트를 해보거나 남자와 사귀는 경험은 처음이니까 충분히 그 감정을 잘 나타낼 수 있을 거야.”
“아…….”
수란은 시황의 말을 이해했다. 방금까지 했던 교육도 나름의 수확은 있었지만 이건 정말 큰 도움이 될 것 같았다. 수란의 머리에서 시황을 이미지 해서 자신과 시황이 겪어나가는 각종 에피소드들이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지금 당장 가서 그 에피소드들을 구상하고 싶었다.
“다음 교육은 내일하면 되니까 오늘은 여기서 끝내자.”
“네. 그러면 전 올라가볼게요.”
수란은 시황에게 인사를 하고 곧바로 방으로 갔다.
시황은 그런 수란의 뒷모습을 지그시 바라볼 뿐이었다.
============================ 작품 후기 ============================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