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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래곤 루나모스
“오빠!”
언제나처럼 만화책을 보고 있던 아루가 시황이 들어오자마자 반응을 했다. 아루가 시황을 껴안고 몸을 비볐다. 항상 문 앞에서 시황과 아루는 저렇게 시간을 보냈기 때문에 그 사이 수란은 재빠르게 보고 있던 인터넷 창을 껐다. 마치 야한 동영상을 보다가 부모님이 들어왔을 때만큼 신속한 움직임이었다.
“수란은 뭐 보고 있었어?”
침대에 앉은 시황은 아루를 가볍게 들어 자신의 무릎 사이에 앉히면서 말했다.
“네? 뭐가요?”
수란은 뒤를 돌아보지도 않고 아무것도 없는 컴퓨터 바탕화면만 보면서 대답했다. 아무것도 없는 화면에 의미 없이 마우스를 움직였다. 부모님이라면 잘 모르고 넘어갈 수도 있지만 시황이 그냥 넘어갈 리가 없었다.
“내가 들어올 때 엄청 급하게 뭐 껐잖아. 그거 뭐였어?”
“그런 적 없는데요.”
수란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혹시 야한 거라도 보고 있었던 거야? 수란은 그런 거 싫어할 줄 알았는데 의외네.”
“그런 거 아니에요! 이상한 소리 하지 마세요.”
시황의 터무니없는 말에 수란이 고개를 돌려 시황을 바라보며 말했다. 수란의 얼굴이 상당히 찡그러져 있었다.
“괜찮아. 난 그런 거에 신경 안 쓰니까. 그런데 아루는 그런 야한 거 보는 거 아니지? 아루는 수란처럼 안 봤으면 좋겠는데.”
시황이 아루 볼을 만지며 말했다.
“야한 거? 아루도 그런 거 봐요.”
아루가 옆에 있는 만화책을 보여줬다. 거기엔 미남형 남자 둘이 상의를 탈의한 채 서로의 얼굴을 맞대고 있었다. 아루도 이런 걸 본다는 걸 시황은 처음 알았다. 수란을 놀려줄려다가 의외의 것을 알아버렸다. 조금 충격이기는 했지만 연예인이나 남자 아이돌을 좋아하는 건 아니었기 때문에 이해하고 넘어가기로 했다.
“아니라니까요! 제가 올린 만화의 반응을 보고 있었을 뿐이에요.”
이대로라면 정말 야한 걸 보다 들킨 걸로 확정될까봐 수란은 어쩔 수 없이 시황에게 사실을 밝혔다. 시황 모르게 올렸다가 반응이 좋으면 보여주고 안 좋으면 다시 올리려고 했는데 이런 상황이 되어버릴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다.
“벌써 올린 거야? 반응이 어떤데? 한 번 보여줘.”
무릎 사이에 앉아있던 아루를 들어 침대에 앉힌 시황은 수란에게 다가갔다. 수란은 하루 종일 집에서 인터넷을 하고 만화만 그리는 방구석 폐인이기는 해도 항상 청결하게 잘 씻었기 때문에 몸에서 좋은 향기가 났다.
“하아…….”
수란은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쉬고는 자신이 올린 포털 사이트 게시판을 시황에게 보여주었다. 보여주기 싫어도 여기서 거절할 방법이 없었다.
“잠깐만 나와 봐. 제대로 보게.”
수란은 입술을 질끈 깨물고는 의자를 비켜주었다. 짧은 반바지를 입고 있어 매력적인 허벅지가 드러났다. 시황의 눈이 자동적으로 수란의 허벅지를 따라갔지만 정작 수란은 긴장으로 몸이 조금 떨리고 있었다. 벌써부터 시황의 반응이 상상되었기 때문이었다.
“으음…….”
시황은 수란이 그린 만화를 차근차근 보기 시작했다. 요즘 찬미나 은지에게 뭔가를 자꾸 묻는다 싶었는데 만화 때문인 건 지금 처음 알았다.
확실히 내용이 조금 익숙한 느낌이 났다. 완전히 새롭게 창조한 게 아니라 주변 여자애들로부터 이야기를 듣고 그걸 주된 스토리에 적절하게 내용을 버무린 것 같았다. 그림체야 말하면 입 아플 정도로 좋았고 스토리도 괜찮았다. 어머니에게 학대 받던 여자애가 남자를 만나면서 상처를 치유하고 사랑을 깨달아가는 과정을 그렸는데 시황이 보기에도 큰 거부감이 없었다. 그런데 남녀의 사랑을 묘사하는 게 많이 이상했다. 어느 정도면 사람들이 신경 안 쓰고 볼 텐데 그 어느 정도의 선을 넘어섰다.
“나의 가슴은 지금 흐르는 용암 같아. 만져봐. 내 가슴을.”
시황은 만화의 남주인공이 여자에게 고백하는 신을 보고 직접 읽었다. 어떤 생각을 해야 저런 대사를 쓸 수 있는지 궁금했다.
“큭…….”
시황이 대사를 읽자 수란이 신음을 토해냈다.
“이 대사 조금 이상하지 않아? 왜 이런 표현을 쓴 거야? 네가 보는 만화에도 이런 표현은 전혀 안 나오잖아?”
“…….”
수란의 얼굴이 빨개졌다. 호흡도 가빠졌다.
“그리고 이 키스신도 자세가 엄청 이상해. 이런 자세로 키스가 가능하도 생각한 거야?”
남자와 여자 주인공이 현실에서 불가능한 자세로 키스를 하고 수중에서 키스를 하는 등 표현 방식이 지나치게 다채로웠다. 시황이 보기엔 도저히 용납이 안 가는 수준인데 다른 행성에서 살고 온 수란은 그녀만의 감각이 또 있는 듯 했다.
중세 시대 배경의 만화는 잘 그렸는데 현대 배경은 아직까지 무리인 듯 했다.
“뭐라고 하는 건 아니고 네 생각이 조금 궁금해서.”
그런 말이 더 압박이지만 시황은 정말 잘 모르겠다는 듯 수란에게 물었다.
“…….”
수란은 말이 없었다.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만화에 대해서라면 누구보다 자존심이 강한데 이런 결과가 되자 참기 힘든 듯 했다.
“이렇게 되면 나한테 교육 받는다고 했지?”
“네…….”
의외로 수란은 순순히 대답했다. 정말 자존심 상하고 창피해서 견딜 수 없었지만 이대로라면 아무런 발전을 하지 못할 거라는 걸 스스로가 자각하고 있었다. 분하지만 지금은 시황에게 제대로 교육을 받고 만화를 더 잘 그리고 싶었다. 하지만 이렇게 생각을 해도 괜히 시황에게 짜증이 나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수란은 뚱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 한번 네가 만화에서 그렸던 대로 대사를 해보자.”
시황은 수란의 옆에 앉았다. 그리고 손으로 수란의 턱을 들어 올려 자신의 얼굴을 보게 했다. 수란의 눈에선 눈물이 글썽거리고 있었다. 안쓰러운 마음이 들기도 했지만 평소와 다른 이런 가냘픈 모습에 시황은 조금 흥분되었다.
“나의 가슴은 지금 흐르는 용암 같아. 만져봐. 내 가슴을.”
시황은 방금 본 대사를 읊었다. 만화니까 현실과 다르게 조금 더 감성적인 대사를 쓰고 싶은 건 알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나쳤다.
“큭……. 하지마세요. 왜 자꾸 그러시는 거예요. 흑…….”
결국 수란의 커다란 눈에서 눈물이 하나 떨어졌다.
시황은 설마 수란이 울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에 상당히 당황했다. 단순히 장난을 친 게 아니라 대사를 직접 읽어주고 얼마나 현실성이 부족한지 가르쳐 주고 싶었던 것뿐이었다. 수란이 울고 있는 모습이 평소와 달리 대단히 예쁘고 매력적으로 보인다고 해서 일부러 울릴 정도로 시황이 나쁜 녀석은 아니었다.
“미안. 그럴 의도 말한 건 아닌데…….”
시황은 울고 있는 수란을 안아주려고 했다. 그러자 수란이 팔로 시황을 가볍게 밀쳐냈다. 하지만 시황은 다시 수란을 안아줬고 이번엔 수란도 거부를 하지 않았다.
“나는 잘해보려고 한 건데……. 일부러 그런 게 아닌데 흑…….”
사람들의 댓글과 시황의 반응에 상처를 받은 수란은 눈물을 흘렸다. 한번 흐른 눈물을 멈추지 않고 계속 흘렀다. 시황의 티셔츠가 축축하게 젖었다. 시황은 그런 수란의 등을 가볍게 쓰다듬어 주었다.
아루가 울고 있는 수란을 보다가 머리를 만져줬다.
“울지 마. 나도 눈물이 나오잖아. 힝…….”
수란이 울자 아루도 눈물을 글썽이더니 울기 시작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시황은 자신이 엄청 나쁜 짓을 한 것만 같았다. 시황은 아루의 눈물도 닦아주었다. 시황은 여기서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뭐라고 말해봐야 큰 의미가 없었다.
둘 다 한참을 울고 나서야 진정이 됐다. 만약 이 장면을 다른 여자들이 봤으면 분명 시황에 무슨 일이냐고 물어봤을 것이다.
“이제 좀 괜찮아졌어?”
“네. 죄송해요.”
한참을 울고 나서야 수란은 그 냉정하던 모습으로 되돌아왔다. 이 상황에서 이런 생각은 조금 그럴지 모르겠지만 울고 난 수란은 평소보다 연약해 보여 시황의 마음에 쏙 들었다. 수란은 우는 게 의외로 예쁘다는 걸 처음 알았다.
“아루도 괜찮아졌어?”
“네. 힝……. 근데 수란아 왜 운거야?”
왜 우는지도 모르고 따라 울었던 아루가 수란을 보고 물었다. 하지만 수란은 설명하기 부끄러워 그 이유를 아루에게 말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아무리 울어도 약속은 약속이니까 교육은 언제 받을래? 오늘은 좀 힘들 것 같아 보이는데.”
의외로 시황은 여자가 운다고 해서 봐주는 성격은 아니었다.
“내일해요. 오늘은 생각을 조금 정리하고요.”
“알겠어.”
시황은 수란의 방을 떠났다. 자신의 방에 돌아온 시황은 어떤 식으로 수란을 교육시킬지 고민했다.
다음날이 되자 수란은 평소와 다르게 은근히 시황을 피했다. 아침밥을 먹을 때도 시황과 눈을 마주치지도 않았고 밥을 먹자마자 시황은 쳐다보지 않고 방으로 돌아갔다. 설마 약속해놓고 안 오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의외로 수란은 다른 사람들이 다 학교를 가고 출근을 하자 직접 시황의 방으로 왔다.
“왔네?”
“어제 약속했는데 지켜야죠.”
어제 그렇게 울었던 수란이라고 생각이 되지 않을 정도로 평소처럼 무표정한 모습이었다.
“이리로 와서 앉아봐.”
시황의 말에 수란이 얌전하게 침대에 앉았다. 평소처럼 얇은 티와 짧은 반바지를 입고 있었다. 매끈한 다리와 은근히 비치는 브래지어가 시황의 시선을 끌어당겼다. 평범한 옷을 입었지만 수란의 얼굴과 몸매가 평범하지 않았다.
“내가 어제 생각을 해봤거든. 널 어떻게 조교, 아니 교육을 시킬지.”
“네.”
시황이 일부러 조교라는 단어를 실수인 척 내뱉어 봤지만 수란의 얼굴엔 일말의 감정도 드러나지 않았다. 지금 이 얼굴만 보면 기계라고 해도 사람들이 속을 정도로 평소보다 더 무표정했다.
“농담이야. 농담. 하하.”
“…….”
시황 혼자만 웃었다.
“흠흠, 어쨌든 너에게 부족한 건 남자와 여자가 사귀고 서로 좋아한다는 감정을 품는 것과 연애를 하면서 서로의 사랑을 표현하는 방법 등이잖아.”
“네.”
수란은 무표정하게 대답했다.
“그거 외에 다른 것들은 아주 좋아. 스토리라든가 인물의 개성 같은 건 말이야. 특히 그림체가 최고지.”
“네.”
수란은 기계처럼 같은 대답만 반복했다.
“그래서 일단 나한테 섹스해 달라고 말해봐.”
“네?”
수란의 톤이 변했다. 무슨 헛소리를 하냐는 표정이었다.
“농담이야 농담. 섹스가 아니라 사랑한다고 말해봐. 직접 말을 해봐야지 그 말을 내뱉었을 때 감정을 알지 않겠어?”
중간 중간 섞는 시황의 농담이 상당히 거슬렸지만 수란은 시황의 의견 자체에는 동의했다. 그런 말을 해보지도 않고 그 감정을 어떻게 느끼겠는가?
수란은 시황을 바라봤다. 시황과 눈이 마주쳤다. 시황의 눈이 자신의 마음을 훑어보는 듯 했다. 수란은 시황을 보고 사랑한다고 말하려고 했지만 어쩐지 부끄러워져서 입 밖에 그 말이 나오지 않았다.
“…….”
“안 해?”
한참을 쳐다보기만 하자 결국 시황이 수란에게 안 하냐고 물었다.
“할게요.”
수란은 다시 마음을 굳게 먹었다. 그리고 사랑한다고 말하기 위해 입을 벌렸다.
“사…… 사……”
도저히 말이 나오지 않았다. 사랑한다는 말을 한다는 게 이렇게 어렵고 부끄러운 일인지 몰랐다. 별 거 아닌 상대에게도 이런데 정말 좋아하는 사람에게 말하는 건 얼마나 부끄러울까? 수란은 이런 감정을 처음 느껴봤다.
“못하겠어요.”
수란은 결국 포기했다.
============================ 작품 후기 ============================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