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드래곤의 유산-383화 (382/629)

0383 ------------------------------------------------------

드래곤 루나모스

“한 번 안 된다고 끝은 아니니까 그리고 싶은 대로 그려봐.”

“실패라는 건 저하고 어울리지 않는 단어군요.”

시황이 나름 생각해서 한 말이지만 수란에게는 실패할 거라는 말로 들린 듯 했다. 수란은 만화에 대한 자신감이 대단했다. 시황은 왜 아까 인터넷에서 그렇게 열심히 싸웠는지 대충 느낌이 왔다. 자기주장이 강하면 싸움이란 늘 존재하기 마련이었다.

한창 시황이 수란과 얘기하고 있는데 대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시간을 봐서는 찬미 아니면 유미가 학교를 마치고 돌아온 것 같았다.

“오빠. 벌써 오셨어요?”

찬미가 목소리를 크게 냈다. 찬미의 목소리가 2층에 있는 방까지 들렸다. 시황의 신발을 보고 돌아온 걸 알고 부른 것이다.

“찬미 왔네. 난 나가 볼 테니까 스토리 잘 생각해봐.”

여기 더 있어봐야 할 것도 없었기 때문에 시황은 방을 나갔다.

시황이 나가자 아루는 아쉬운 표정으로 문을 바라보다 침대에 누워서 만화책을 들고 뒹굴 거렸다.

수란은 그런 아루를 보며 뭔가를 고민했다. 시황의 말을 듣고 나서인지 어쩐지 생각해둔 스토리가 조금 애매한 느낌이 들었다. 다른 스토리를 떠 올렸다. 수많은 스토리들이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다들 조금씩 부족했다. 여자를 우습게 여기는 시황이 깜짝 놀랄 만큼 가슴이 두근거리는 연애 이야기를 그리고 싶었다.

“아루야.”

“응? 왜?”

“넌 시황 오빠의 어떤 점이 마음에 들어?”

수란은 아루를 보며 물었다. 전에는 시황에 대한 게 아니라 사랑이라는 주제에 대해서 물어본 거였는데 지금은 조금 더 직접적인 표현을 듣고 싶었다.

수란의 말을 들은 아루가 미간을 찌푸리며 생각했다.

“마음에 안 드는…….”

“마음에 안 든다고? 오빠를 싫어한다는 거야?”

아루의 말이 다 끝나지도 않았는데 수란이 놀란 표정으로 빠르게 되물었다. 설마 이때까지 시황을 마음속으로는 싫어하고 있었다는 걸까? 매일 아루를 주무르고 섹스를 그렇게 해대니 안 싫어하는 게 이상하기도 했다.

“아니. 내가 어떻게 오빠를 마음에 안 든다고 말 할 수 있겠어. 난 오빠 거니까 오빠가 하고 싶은 대로 하면 돼. 그런데 오빠는 항상 나한테 따듯하게 해줘.”

“난 또.”

생각했던 얘기가 아니자 수란이 가볍게 실망했다.

“정확하게 오빠의 어떤 점이 좋은 거야?”

수란이 다시 아루에게 물었다.

“우웅……. 섹스할 때 엄청 기분 좋은 것도 좋고 키스할 때 기분 좋은 것도 좋고, 가슴 만져주는 것도 좋고…….”

“그런 육체적인 쾌락 말고 마음으로 말이야. 이거 때문에 오빠를 좋아한다. 그런 걸 얘기해줘.”

“아, 그런 말이구나. 오빠는 나한테 따듯하게 해줘서 좋아.”

아까도 했던 같은 답변에 수란이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조금 더 명확하게 다시 질문을 하려고 했는데 아루의 말이 계속 이어졌다.

“옛날 주인님은 나보고 못생겼다고 화도 내고 때렸거든. 하루 종일 일도 해서 잠도 제대로 못 자고. 그때는 엄청 슬프고 힘들었는데. 오빠는 안 그래. 항상 날 예뻐해 주고 잘해주니까 정말 좋아. 그리고 나한테 예쁘다고 말해준 것도 오빠가 처음이고. 헤헤.”

아루가 쑥스러워 하면서 말했다. 아루는 시황과 처음 만났을 때를 생각했다. 시황에게 팔려서 다행이라고 생각했지만 무섭기도 했었다. 무서운 사람처럼 보여서. 하지만 시황은 자신을 노예가 아닌 한 명의 여자로 대해주었다. 그때 생각만 하면 아직도 가슴이 찌릿찌릿 했다.

“흐음…….”

수란은 아루의 얘기를 듣자 몇 가지 스토리가 떠올랐다. 아루를 만화의 모델로 하는 것도 어쩌면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어릴 때부터 어렵게 생활하던 여자를 도와주고 지켜주는 남자. 아루의 얘기만 들으면 시황이 대단히 착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수란은 시화의 본 모습을 알고 있었다.

“있잖아. 오빠는 내가 빨아주는 걸 엄청 좋아해. 특히 혀로 앞에 갈라진 틈을…….”

“그런 얘기는 관심 없으니까. 안 해도 돼.”

갑자기 아루가 시황과 섹스를 하는 얘기를 했다. 깜짝 놀란 수란은 목소리를 조금 높여 아루가 더 이상 그런 얘기를 하지 못하게 했다. 시황이 어디를 느끼는지 전혀 알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이미 얘기를 들은 후라 자동적으로 시황의 거대한 성기가 떠올랐다. 그리고 아루가 시황이 좋아한다는 곳을 혀로 핥아주는 모습이 생각나자 빠르게 얼굴을 흔들어 이상한 상상을 날려 보냈다.

“섹스하면 엄청 기분 좋은데. 너도 오빠한테 해달라고 해. 진짜 기분 좋아.”

“됐거든. 난 이제 스토리 짤 거니까 말 걸지 말아줘.”

더 이상 말하면 아루가 계속 그런 얘기만 할 것 같아 수란은 스토리를 짜기로 했다.

“힝……. 알았어. 난 만화나 봐야지.”

아루가 만화를 본다고 조용해지자 수란은 컴퓨터로 메모장을 열어 생각나는 아이디어들을 적어나갔다. 기본적인 골격은 어느 정도 갖춰진 건 같은데 아루에게선 사랑하는 마음에 대해 자세히 듣기가 어려웠다.

한참 고민을 하던 수란은 찬미에게 물어보기 위해 거실로 갔다. 그런데 거실에선 시황과 찬미가 소파에 기댄 채 키스를 하고 있었다. 그것도 그냥 키스만 하는 게 아니라 시황이 찬미의 가슴을 엄청 주물럭거리고 있었다.

“흠흠.”

수란은 시황과 찬미가 키스를 하는 모습을 보자 괜히 기분이 좋지 않아 일부러 소리를 냈다.

“어, 어머.”

찬미는 수란의 소리에 화들짝 놀라 시황에게서 떨어졌다. 평소 수란과 아루가 방에서 잘 나오지 않아 방심을 하고 있었다. 원래라면 조심해서 키스를 했을 텐데 시황이 당장 키스를 하고 싶어 해서 거절할 수가 없었다.

“찬미 언니 뭐 물어볼 거 있는데 잠깐 얘기할 수 있을까요?”

“으, 응. 괜찮아.”

“찬미 언니 방에서 얘기해요.”

“그래. 오빠 잠시 갔다 올게요.”

시황이 조금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 주자 찬미는 수란과 함께 방으로 갔다.

“들어와.”

“네.”

찬미의 방에 들어간 수란은 침대에 대충 걸터앉아 방을 둘러봤다. 만화책으로 가득한 자신의 방과 다르게 찬미의 방은 평범한 여자들 방처럼 화사한 느낌이 있었다. 머릿속으로 방의 구조도 기억해두었다.

“무슨 얘기야? 걱정이라도 있어?”

찬미는 수란의 옆에 앉아 조금 걱정스러운 눈길로 물어봤다. 수란이 뭔가 물어볼 게 있다고 한 건 처음이었다.

“오빠의 어떤 점이 그렇게 좋으세요?”

수란은 아루에게 했던 질문을 찬미에게도 했다.

“그런 질문이구나.”

찬미는 수란을 보고 가볍게 이해한다는 표정을 지었다. 찬미의 표정에서 왠지 이상한 오해를 하는 듯 했지만 대답을 듣는 게 먼저였기 때문에 수란은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오빠는 나에게 있어서 빛이라고 할까? 이런 대답은 너무 식상한가?”

“빛이라는 게 정확히 어떤 의미에요?”

아루와 다르게 찬미에게는 조금 제대로 된 대답이 나오자 수란은 흥미를 가지고 더 물었다.

“사람은 힘들거나 괴로울 때 깊은 좌절을 느끼게 되잖아. 마음에 어두움이 생기는 거지. 나도 한 때 그런 어두움이 있었어.”

찬미도 시황을 생각했다. 첫 남자 친구에게 큰 상처를 받고 험악한 남자들에게 강간을 당할 뻔 했을 때 더 이상 남자를 믿을 수 없을 거라 생각했다. 깊고 깊은 어둠에서 자신을 이끌어 준 게 바로 시황이었다.

“그때 만약 오빠를 만나지 않았다면 난 아직까지 우울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을 거야. 오빠가 나를 밝혀 준 거지. 그런 의미에서 빛이라고 한 거야. 이런 표현은 지나치게 오글오글거리나?”

듣는 사람이야 부끄럽겠지만 찬미는 그때의 아련한 생각을 되새기는 것만으로도 시황에 대한 사랑이 가슴에 넘쳐났다. 여자들이 왜 시황을 좋아하는지 누구보다 찬미가 잘 알고 있었다.

“빛이라…….”

찬미의 얘기를 듣고나니 수란은 뭔가가 떠오를 것 같았다. 아루와 찬미. 둘 다 큰 상처를 가졌었고 시황이 그 상처를 아물게 해줬다. 분명 시황이 의도적으로 한 행동이라고 수란은 생각했지만 나름 감탄이 나오기는 했다.

“더 궁금한 거 있어?”

찬미가 뭔가를 생각하고 있는 수란에게 물었다.

잠시 생각을 정리한 수란은 몇 가지 질문을 더 찬미에게 했고 찬미는 자세하고 상세하게 말해주었다.

수란은 찬미의 얘기를 확실히 메모를 했다. 수란이 이런 얘기를 들은 건 찬미만이 아니었다. 유미, 은지, 지숙, 현주까지 집에 있는 모든 여자들에게 비슷한 질문을 던졌고 나름의 대답을 들을 수 있었다.

여자들의 말을 듣고 나서 수란은 시황의 간교한 술책을 간파할 수 있었다. 시황은 여자들이 가진 마음의 상처를 비집고 들어갔다. 그리고 그걸 이용해 극도의 호감을 이끌어 냈다. 정말 의도적인건지 안타까움에 상처를 감싸주기 위해 그런 건지 잘은 모르겠지만 전자일 확률이 상당히 높았다.

수란은 자신에게 그런 상처가 없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여자들처럼 시황에게 이끌릴 염려가 없다는 점에서 안도와 분함이 동시에 느껴졌다. 왜 분한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런 감정이 생기는 것까진 스스로를 속일 수가 없었다.

이 이야기들을 토대로 수란은 한가지의 이야기를 썼다. 상처 많은 여자를 만난 한 남자가 그녀를 도와주며 서서히 서로를 알아가며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 약간 슬프면서도 감동적인 스토리였다.

수란은 본격적으로 이 이야기를 그려나갔다.

이 집에 있는 모든 여자들의 이야기가 함축된 스토리인 만큼 제법 분량이 되었다. 할 거라고는 집에서 컴퓨터밖에 없는 수란이었기 때문에 며칠 내내 매달린 끝에 이야기를 중간쯤까지 그릴 수 있었다.

수란은 이 만화를 잘라서 곧바로 포털 사이트에 올렸다. 포털 사이트에 올렸다고 해서 사이트 측과 계약을 하고 연재를 하는 건 아니었다. 수란이 올린 곳은 실력 있는 신규 웹툰 작가를 위해 누구나 올릴 수 있는 웹툰 게시판이었고 여기서 인기를 끌게 되면 정식으로 연재할 수 있었다.

수란의 그림체야 워낙 대단했기 때문에 수란의 만화는 단번에 큰 관심을 받았다. 자신의 만화에 달린 댓글을 보며 수란은 의기양양하게 웃었다. 시황은 연애도 못해본 자신이 연애 만화를 못 그릴 거라고 했지만 남녀의 심리 따위는 완벽하게 꿰뚫고 있었다. 연애 따윈 해보지 않아도 해 본 사람보다 더 심리 묘사를 잘할 자신이 있었다.

그런데 수란의 이 의기양양함도 얼마 가지 못했다. 슬슬 부정적인 댓글들이 달리기 시작한 것이다.

수란은 심각한 표정으로 댓글들을 읽었다.

[이거 그린 사람 진심 모솔일 듯. 세상에 어떤 남녀가 저렇게 사귀냐 ㅋㅋㅋㅋ]

[이거 혹시 개그 만화?]

[스토리는 좋은데 남녀가 사귀는 부분에서 지나치게 현실성이 떨어지네요. 솔직히 이거 때문에 몰입이 안 돼요.]

부정적인 반응이 있는 만큼 긍정적인 댓글도 있기는 했다.

[보기 싫음 보지 마. 뭐가 그렇게 불만이 많음? 난 재밌기만 하구만. 근데 작가님 진짜 모솔?]

[제 얘기에 기분 나빠하지는 마세요. 위에 글대로 그림체랑 스토리 자체는 엄청 좋아요. 완전 제 스타일이라 1화부터 매일 봤어요. 근데 현실성이 조금 떨어지기는 해요. 작가님이 연애만 해보면 정말 대단한 작품이 나올 것 같아요. 항상 응원할게요. 홧팅!]

수란은 댓글을 읽으면서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연애를 못해본 거 같다는 댓글은 수란의 자존심에 큰 상처를 내었다.

수란은 다시 자신의 만화를 살펴봤다. 하지만 이상한 부분은 전혀 없었다. 사람들이 다들 지적하는 수중 키스 신도 드라마에서 본 적이 있어서 넣은 거였다. 어색한 장면이 전혀 아니었다.

“아루야. 수란아. 뭐해?”

수란이 입술을 질끈 깨물며 반응을 살피고 있는데 하필 이때 시황이 방문을 열고 들어왔다.

============================ 작품 후기 ============================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