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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래곤 루나모스
“아, 그 얘기야? 어떻게 눈치 챈 거야?”
시황은 특별히 고운에게 그 사실을 숨기지 않았다. 사람들이 모르는 게 제일 나았지만 고운이 동네방네 떠들고 다니지 않을 거라고 믿고 있었다. 시황은 기본적으로 주변의 여자들을 크게 신뢰하고 있었다.
“저는요. 오빠 목소리가 아니라 발걸음 소리만 들어도 오빠인지 알 수 있어요.”
“그건 좀 무서운데……. 하하.”
시황은 가볍게 웃었다. 정말이라는 듯 눈을 빛내고 있는 고운이 귀여웠다. 고운은 진작부터 시황에게 팬이라고 말한 만큼 시황에 대해 관심이 아주 많았다. 다른 여자들은 이성적으로 다가온다는 느낌이라면 고운은 시황을 연예인 보듯 한다고나 할까?
“저 정말 그 영상보고 엄청 마음에 들어서 맨날 하루 종일 봤어요. 오빠 노래는 정말 대단한 것 같아요.”
“보통이지 뭐. 고마워.”
고운은 친구인 보영은 놔두고 계속해서 시황에게 말을 걸고 얘기를 하며 관심을 나타냈다. 대부분 시황을 칭찬하고 좋다는 얘기뿐이었다.
“전 그 영상에서 오빠가 마이크를 이렇게 잡고 얘기하는데 엄청 멋진 거예요. 그래서 그 장면을 몇 번이나 돌려봤어요.”
“그랬나? 잘 기억이 안 나네.”
시황은 생각조차 나지 않는 걸 고운이 흉내까지 내면서 말했다. 정말 별 거 아닌 행동인데 이렇게 하나하나 집어서 얘기해 주는데 아무리 시황이라도 상당히 부끄러웠다.
한참 고운이 얘기하는데 교수가 강의실에 들어왔다. 출석을 부르고 수업이 시작되었다. 개강하고 처음 하는 수업인데 교수는 신경 쓰지 않고 수업을 다 했다.
고운, 보영과 시간표를 같이 맞췄기 때문에 시황은 계속 같이 다녔다. 점심시간에는 간단히 학식을 먹고 캠퍼스를 돌아다니며 다음 강의를 기다렸다.
무료한 시간이었다. 고운, 보영과 얘기를 하기는 하지만 시황은 이렇게 무의미하게 시간 보낸다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대학교에서 얻을 수 있는 경험치는 대부분 다 얻었기 때문에 계속 학교를 다니는 게 무의미했다.
“오빠, 수업 끝나고 뭐 하실 거예요?”
벤치에 앉아 쉬고 있는 시황에게 고운이 물었다.
“나? 집에 가려고.”
“바쁘세요? 안 바쁘시면 수업 끝나고 노래방 가시지 않을래요?”
“미안. 오늘은 할 일이 조금 바쁘네.”
집에 가서 확인할 것도 있고 해서 마냥 놀기는 그랬다. 만약 옛날처럼 고운에게 이성적인 감정을 느끼고 섹스를 하고 싶다는 욕망이 잔뜩 있었으면 고운이 말하는 대로 다 했을 것이다. 하지만 고운에게 그런 강렬한 감정이 생기지 않았다. 그저 동생 같기만 했다.
“히잉, 오빠 노래 연습 많이 했는데. 그러면 담에 꼭 같이 가요.”
“응. 그러자.”
오후 수업까지 끝낸 시황은 집으로 돌아왔다. 고운은 헤어지기 싫은 표정이었지만 정작 시황이 집에 가고 싶었기 때문에 곧바로 헤어졌다.
주차장에 차를 대고 시황은 집에 들어갔다. 찬미와 유미는 아직 학교에서 오지 않은 듯 했고 은지와 지숙, 현주는 카페에 일하러 가서 없었다. 집에 있는 사람이고는 아루와 수란 뿐이었다.
둘은 방에서 뭘 하는지 나와 보지도 않았다. 가볍게 씻고 옷을 갈아입은 시황은 수란과 아루가 있는 방에 들어갔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수란은 컴퓨터로 뭔가를 하고 있었고 아루는 침대에 누워 만화책을 보고 있었다. 둘 다 집 밖에는 나가지 않고 거의 은둔형 외톨이 같은 생활을 하고 있었다.
“오빠!”
시황이 방에 들어오자 아루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시황에게 안겼다. 시황은 아루를 들어 침대에 앉혔다.
“둘 다 뭐하고 있어?”
“저 만화책 보고 있었어요. 이거 엄청 재밌어요. 오빠도 볼래요?”
아루가 방금까지 보고 있던 순정 만화책을 시황에게 보여줬다. 시황도 만화책을 보기는 했지만 아루가 보는 저런 순정 만화는 무리였다.
“난 괜찮으니까 아루가 재밌게 봐. 근데 수란은 뭐하고 있어?”
수란은 시황이 들어오든 말든 신경도 쓰지 않고 의자에 앉아 뭔가 댓글을 계속 달고 있었다. 시황은 수란에게 다가가서 뭘 하고 있는지 확인했다.
시황이 생전 처음 보는 사이트에서 만화와 관련된 싸움을 하고 있었다. 서로 좋아하는 만화가 낫다고 싸우는 중이었다. 수란은 무표정한 얼굴로 엄청난 속도로 타자를 치며 댓글을 달고 있었다.
“뭘 그렇게 싸우는 거야?”
“자꾸 이상한 소리를 하니까요. 보세요. 제가 제대로 말해주니까 아무런 말도 못하잖아요.”
시황은 수란이 가리키는 대로 화면에 있는 글을 봤다.
[ㅂㅅ. 초딩이냐? 아까부터 쓰레기 만화 가지고 재미있다고 우기네. 적어도 초등학교는 나온 뒤에 생각하고 글 써라 ㅂㅅ ㅋㅋ]
댓글에는 논쟁과 전혀 상관이 없는 수란에 대한 원색적인 욕만 가득했다. 뭐 때문에 싸우는지는 몰라도 저런 댓글은 상당히 아닌 것 같긴 했다. 논쟁과 상관없는 욕설은 자신이 졌다는 걸 시인하는 꼴이니까.
“언제까지 할 거야?”
“다 했어요.”
수란은 여전히 무표정하게 있었다. 시황이라면 저런 욕을 보면 화가 날 텐데 수란은 큰 감정의 변화가 없었다. 감정의 변화가 없으니 오히려 화가 난 거라고 해야 할까? 수란의 마음을 시황이 알 수는 없었다.
“하루 종일 방에서 그런 거 하는 거야?”
“아니요. 어쩌다 보니 의견이 맞지 않는 사람이 있어서 잠깐 논쟁을 했을 뿐이에요.”
“그래? 근데 너랑 아루랑 둘 다 지나치게 집에만 있는 거 아니야? 밖에 나가지도 않고 하루 종일 방에서 컴퓨터 하거나 만화를 보거나 TV만 보는 것 같은데.”
시황의 말대로 수란과 아루는 거의 집에만 있었다. 그나마 아루는 유미와 함께 나가 놀기라도 하는데 수란은 밥 먹을 때 외에는 방에만 틀어박혀서 나오질 않았다.
“꼭 나가야 할 이유가 있는 건 아니잖아요? 제가 나라를 돌아다니면서 신경 써서 발전시켜야 하는 것도 아니고. 제가 집에만 있어도 세상은 문제없이 잘 돌아가요.”
수란은 방금 논쟁이 있어서 그런지 평소보다 더 냉정한 표정으로 말했다.
물론 수란이 집에만 있다고 세상이 변하는 건 없었다. 하지만 그런 의미로 시황이 얘기를 꺼낸 건 아니었다. 집에만 있으니까 조금 안쓰러워서 꺼낸 얘기였을 뿐이었다.
“집에만 있지 말고 조금이라도 밖에 나가는 게 낫지 않나 해서 하는 말이야.”
“혼자 나가봐야 갈 곳이 없는데 나갈 이유가 있을까요? 특별한 목적 없이 길거리를 배회하는 걸 원한다면 할 수야 있지만 그런 무의미한 짓을 하고 싶지는 않아요.”
“으음, 그렇구나.”
시황은 수란의 말을 이해했다. 친구도 없고 목적도 없는데 밖에 나간다고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시황이 아는 사람 아무도 없는 도시에 가도 할 게 없어서 집에만 있을 텐데 다른 행성에서 온 수란이 밖에 나가 뭔가를 할 일이 있을 리가 없었다. 인터넷에 빠져드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면 나랑 섹스 할래?”
“가, 갑자기 그 얘기가 왜 나와요.”
정말 갑작스런 시황의 말에 무표정한 수란의 얼굴이 당혹감으로 물들었다.
“나 때문에 여기로 왔는데 미안해서 그러지.”
“미안한 거랑 섹스랑 전혀 상관없잖아요. 그리고 전 이렇게 마음 편히 지내는 것도 충분히 만족하고 있으니까 이상한 쪽으로 신경 안 써주셔도 돼요.”
섹스를 하자고 해서 수란이 당연히 허락할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지만 그걸 감안해도 비집고 들어가기 어려운 벽이 있는 것 같았다. 시황은 단순히 수란과 섹스를 하고 싶다는 욕망보단 무미건조하게 지내는 수란에게 사랑을 주고 싶었다. 홀로 이 세계에 있는 수란이 정말 가여웠다. 과연 수란이 진정한 사랑을 할 수 있을까?
시황이 가진 수란에 대한 감정은 확실히 아까 전 고운과는 명백히 달랐다.
“오빠 저 하고 싶어요.”
수란에게 섹스를 하자고 했는데 정작 아루가 하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미안. 아루는 나중에 내 방에서 하자. 알겠지?”
시황은 아루와 섹스를 할까 잠깐 고민했지만 이젠 수란 앞에선 그런 걸 안 하는 게 나을 것 같아 나중에 자신의 방에서 섹스를 하기로 했다.
“히잉. 네……. 그러면 저 오빠 무릎에 앉을 래요.”
아쉬운 표정을 잔뜩 지은 아루가 시황의 무릎에 앉았다. 자그만 아루의 체구가 시황의 품에 들어왔다. 작은 가슴, 작은 몸집. 여기 온 뒤로 아루는 이것저것 많이 먹었는데도 키는 물론이고 다른 곳도 커지지 않았다. 아무래도 더 이상 자라는 건 무리인 듯 했다. 그나마 시황이 아루의 가슴을 많이 만져줘서 가슴이 조금 커진 게 다였다.
시황은 귀여운 아루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러면 그 얘기는 됐고 웹툰은 뭐 할지 생각해봤어?”
“몇 개 생각해둔 건 있는데 조금 애매해요. 남녀의 사랑에 대해서 그려보고 싶은데 의외로 어려운 거 같아서요.”
시황이 묻자 수란의 눈이 빛나더니 곧바로 대답했다. 처음엔 시황의 부탁으로 만화를 그렸다면 이제는 확실히 만화를 좋아하게 된 것 같았다.
그런데 의외로 수란은 남녀의 사랑에 대한 걸로 다음 만화의 소재를 정했다.
“응? 너 연애해본 적 있어?”
“아니요. 없는데요. 왜요?”
“연애 해본적도 없이 남녀의 심리는 어떻게 알고 그릴 건데?”
“이미 만화로 충분히 많이 봐서 잘 알고 있어요.”
아까까지만 해도 냉정해 보이던 수란이었는데 연애도 안 해보고 연애물을 그린다고 하자 갑자기 조금 순진하고 어리숙해 보였다.
“그래도 좀 무리 아닐까? 직접 연애를 해봐야 그 심리를 알 테고 사람들이 공감하지 않겠어?”
“걱정 안 하셔도 괜찮아요. 이미 순정 만화로 그런 심리를 확실히 다 익힌 데다 아루한테 사랑에 관한 의견을 많이 듣기도 했으니까요.”
“그건 조금 아닌 거 같은데…….”
하필 다른 사람도 아니고 아루한테 사랑에 관한 의견을 많이 들었다는 말에 시황은 곤란함을 느꼈다. 이제는 옛날처럼 경험치에 대한 미련이 많이 줄어든 편이지만 그래도 레벨을 올려야 한다는 욕망 자체는 있었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경험치적인 부분만 따져도 지금 수란의 말은 상당히 곤란했다. 물론 시황의 예상과 반대로 수란이 그린 만화가 잘 될 수도 있었겠지만 어쩐지 그럴 거라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다.
“그러면 직접 사람들의 반응을 보여 주면 되나요?”
전혀 자신을 신용 못하는 시황을 보자 수란이 얼굴을 조금 찌푸리며 말했다. 자신을 무시하는 것 같아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벌써 올렸어?”
“아니요. 아직 안 그렸어요.”
시황이 놀라며 물었지만 다행스럽게 수란은 아직 만화를 그리진 않았다.
“사람들의 반응을 보여준다고?”
“네. 제가 그려서 사람들 반응이 좋으면 더 이상 무시하지 말아주세요. 다른 건 모르겠는데 만화는 제가 오빠보다 훨씬 더 잘 아니까요.”
수란이 기분 나빠한 건 만화에 대해서 시황이 전혀 신용하지 못해서인 듯 했다. 만화에 대한 자존심이 대단히 강했다.
“그러면 반응이 안 좋으면 어떻게 할 건데?”
“반응이 안 좋으면 오빠한테 교육이라도 받기로 하죠.”
수란은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었다.
============================ 작품 후기 ============================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