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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지붕 아래에서
“오빠가 원망스럽지 않나요?”
수란은 안쓰러운 표정으로 찬미를 바라보다 옆에 가서 등을 쓰다듬어주며 말했다. 시황을 도와주고는 있지만 눈물을 흘리는 찬미를 보니 괜히 가슴이 아팠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시황에게 꿀밤을 한 대 때리고 싶다고나 할까?
“아니……. 다 내 탓인 걸.”
“그게 왜 언니 탓이에요.”
“오빠가 외롭지 않게 더 신경을 썼어야 했는데…….”
수란은 전혀 이해가 안 간다는 눈으로 찬미를 쳐다봤지만 찬미의 생각은 확고했다.
시황의 산 이 집에 사람이 많아지면서 스킨십을 하거나 단 둘이서 사랑을 나누기에 매우 힘이 들었다. 집에는 항상 아루와 수란이 있는 건 물론이고 밤에는 유미와 은지, 현주와 어시스트인 시은까지 있다 보니 시황과 옛날처럼 지내기가 어려웠다. 여기에 학교를 다닌다고 정신까지 없어져 확실히 이전과 다르게 시황에게 많이 소홀해졌었다. 그렇다고 시황에 대한 사랑이 줄어든 건 아니었다. 새로운 환경에 적응할 시간이 조금 필요했을 뿐이지.
“그러면 이제 어떻게 하실 거예요? 이대로 그냥 오빠를 놔두실 거예요?”
“아니……. 절대로 그럴 수는 없어.”
단순히 좋아한다는 수준의 감정이었다면 시황이 유진아와 만나는 순간 찬미는 깊은 배신감을 느끼고 시황과 당장 헤어졌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시황은 찬미에게 있어 사랑을 넘어 살아갈 목적이나 다름없었다. 유미가 시황을 사랑한다는 걸 알고 시황과 이어주겠다고 괜히 다짐한 게 아니었다.
“유진아를 못 만나게 하실 건가요?”
수란의 말에 유진아는 바로 고개를 흔들었다. 찬미도 시황을 사랑하는 여자인데 시황과 유진아가 만나는 걸 좋아할 리는 없었다. 아까 수란의 말을 듣고 울기까지 했으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강제적으로 시황을 유진아와 못 만나게 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만약 그러다 시황이 환멸이라도 느끼고 영영 떠나버리기라도 할까 너무나 두렵기도 했고, 시황이 하고자 하는 것과 생각을 강제적으로 억압하고 싶지도 않았다.
수란에게서 유진아가 시황을 좋아한다고 말을 들었을 때부터 다짐하기는 했지만 이번엔 좀 더 확고한 다짐이 필요할 거 같았다. 시황에게 자극적이고 강압적인 말을 하는 게 아니라 시황이 자신과 유미에게 매력을 느끼게끔 해야 했다. 이건 정글에서의 영역 싸움과 비슷했다. 시황의 마음에서 조금이라도 더 큰 지분을 얻어야만 최종적인 승자가 될 확률이 높았다.
방금 전까지 눈물을 뚝뚝 흘리던 찬미의 눈에서 어느새 다시 강렬한 불길이 타오르고 있었다. 이건 시황이라는 영역을 차지하기 위한 전쟁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절대로 시황에게 티를 내서는 안 됐다. 여자들만의 싸움이니까.
그러기 위해선 일단 가장 강한 경쟁자인 유진아를 견제할 필요성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 이런 집 분위기로는 그런 일이 절대 불가능했다. 현주와 시은은 시황과 관계가 없는 사람이니 빼더라도 지숙과 은지는 어떻게든 회유를 해야 했다. 그러고 보니 문득 지숙과 은지에 대한 궁금증이 생겼다. 같이 지내기는 했지만 학교도 다니고 은지와 지숙은 일이 바쁘기도 해서 딱히 이렇다 할 교류는 아직까지 없었다.
“수란아.”
“네?”
한참동안 고민을 하는 듯 싶더니 갑자기 의욕이 충만해진 찬미를 수란은 어리둥절하게 쳐다보며 대답했다.
“오빠하고 지숙이랑 은지가 어떤 관계인지 대충이나마 알고 있어?”
“흐음, 저도 자세하게는 모르지만 대충은 알고 있어요. 그런데 이런 거 말해줘도 괜찮을지 몰라서…….”
“부탁할게 수란아. 말해준다고 내가 은지랑 지숙이한테 나쁘게 하고 그런 일은 절대 없을 거야.”
아까 전 굳게 다짐한 만큼 찬미는 어느새 상당히 냉정해져 있었다. 설사 은지와 지숙이랑 시황이 깊은 관계라는 충격적인 말을 들어도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말이다.
“그러면 찬미 언니한테만 알려드릴게요. 제가 아는 건 오빠의 첫사랑이 은지 언니라는 거랑 은지 언니 집이 어려울 때 직접 은지 언니의 부모님에게 찾아가서 돈을 빌려드렸다는 거, 그리고 은지 언니도 시황 오빠를 깊이 좋아하는 거 같다는 점이에요. 전에 살던 오피스텔의 맞은 편 집이 바로 은지 언니 집이라 그런지 한 번씩 놀러 가면 다음날까지 안 돌아올 때도 있었고요.”
수란은 대충 안다고 해놓고는 보통은 절대 알 수 없는 그런 얘기들을 술술 늘어놓았다.
“후우……. 그, 그러면 지숙이는?”
분명 아까까지만 해도 시황과 은지, 지숙이 어떤 관계라도 평정심을 잃지 않을 자신이 있었는데 시황의 첫사랑이 은지라는 것과 한 번 놀러 가면 다음날까지 집에 안 오고 외박을 한다는 말에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하지만 찬미는 깊게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진정시키고는 지숙이에 대해서도 물었다.
“지숙 언니는 은지 언니 만나러 놀러온 시황 오빠를 보고 반했다는 거 같아요. 그런데 그 후에 은지 언니처럼 지숙 언니 집도 크게 기울어서 학교를 다니지 못할 정도라 집에 돌아가서 아르바이트를 했었는데 오빠가 직접 찾아가서 데리고 왔다나 봐요. 지숙 언니도 오빠를 많이 좋아하는 거야 찬미 언니도 아실 거구요.”
“그렇구나.”
찬미는 순간 질투심이 솟아날 뻔 했지만 이성적으로 생각하며 마음을 진정시켰다. 이미 시황은 지숙, 은지와 몸을 섞었다는 사실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 착하고도 순진하고 남을 위할 줄 밖에 모르는 시황이 먼저 여자들을 유혹했을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아마도 은지, 지숙이 먼저 시황과 그런 관계가 되고 싶었을 테고 그런 유혹을 시황이 차마 거절하지 못했을 게 분명했다.
하여튼 이런 사실을 이성적으로 생각해보면 결코 나쁘지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지금 상황에서는 좋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은지, 지숙과 합의만 한다면 집을 좀 더 자유스러운 분위기로 만드는 게 가능할 테니까.
“어떻게 하실 건가요?”
“은지, 지숙과 얘기를 해볼 생각이야.”
“오빠는 그냥 놔두고요?”
“응. 오빠는 잘못이 없으니까. 다 내 잘못인 걸.”
“하아…….”
수란은 어떻게든 찬미를 이해시킬 생각이었지만 설마 이렇게 순순히 시황과 유진아의 일을 받아들이고, 그걸로 모질라서 자신의 잘못이라고 생각할 줄은 몰랐다. 도대체 시황의 어떤 점이 그렇게 좋을까 싶었다. 수란이 생각하는 시황이라면 매일 아루와 야한 짓만 하는 변태에 가까웠으니까.
“그래서 수란아. 미안한데…….”
“네?”
“그게…….”
찬미는 얼굴을 붉히며 말을 할까 말까 망설였다. 하지만 이렇게 부끄러워하기만 해서는 근본적으로 해결되는 게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에 찬미는 마음을 굳게 먹었다.
“오빠가 나나 다른 여자들이랑 친근하게 이런 저런 스킨십을 하거나 바, 밤에 우리 방이나 은지, 지숙이 있는 방에 들어가는 걸 보더라도 이해를 좀 해줬으면 좋겠어.”
찬미가 직접적으로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시황과 섹스를 하더라도 이해를 해달라고 말과 다름없었다. 뭐, 두 명이 같이 자는 방에서 어떻게 섹스를 할 건지는 둘째치더라도 말이다.
“알겠어요. 좋아하는 사람과 사랑을 나누는 건 당연한 일이니까요. 저랑 아루는 그런 거 전혀 신경 안 쓰니 걱정 안 하셔도 괜찮아요.”
“으, 응. 고마워. 수란아.”
“아니에요.”
수란은 찬미의 행동이 크게 이해는 가지 않았지만 나름 흥미롭기는 했다. 흔히 막장 드라마라 불리는 그런 드라마만큼이나 막장스러운 이 관계가 어떻게 끝맺을지 말이다. 일부다처제인 세계였다면 아무것도 아닌 일이었겠지만 어쨌든 한국은 일부일처제였으니 말이다.
“고마워. 그러면 난 이제 은지랑 지숙에게도 얘기를 해보러 갈게.”
“네. 언니. 저도 최대한 도와줄게요.”
“고마워. 그럼 갈게.”
찬미는 수란의 방에 나와서 먼저 은지와 얘기를 하고 나중에 유미, 지숙에게 차례대로 얘기를 하기로 했다. 평범한 사람의 상식으로는 이해가 가진 않겠지만 분명 은지와 지숙은 이해를 해줄 게 분명했다. 같이 시황을 좋아하니까.
“그래. 가보자.”
찬미는 은지가 있는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
찬미가 며칠 동안 은지, 지숙, 유미와 대화를 해서 유의미한 결과를 이끌어 내는 동안 돈 많은 여자들 사이에 한 가지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바르기만 해도 피부가 아기처럼 뽀얘지고 온갖 잡티, 여드름까지 다 사라지는 기적의 화장품이 존재한다.’라는 마치 도시전설과도 같은 소문이었다.
그 소문의 근원이 가은과 유진아라는 걸 모르는 사람은 그런 게 있겠냐 라고 생각하며 무시한 반면 가은과 유진아에게서 샘플을 직접 얻어 써본 몇몇 돈 많은 여자들이 바로 화장품을 구입해 주변에 자랑을 하고 다녔다.
처음에는 그딴 게 어디 있냐고 무시하던 사람들도 피부가 안 좋던 애가 갑자기 상당히 좋아진 피부로 나타나서 자랑을 하자 슬슬 혹하기 시작했다.
“너 피부 엄청 좋아졌다?”
“이번에 화장품 산다고 돈 좀 썼지.”
“응? 화장품? 무슨 화장품?”
“너 설마 모르니? 진아 언니가 지금 팔고 있는 화장품 효과가 진짜 장난 아니야. 내가 피부 때문에 관리를 엄청 받았잖아?”
“응. 응. 그랬지. 근데 그다지 효과 없었잖아?”
“그래. 내가 쏟아 부은 돈이 얼만데 말이야. 근데 진아 언니가 파는 화장품을 사서 바르니까 정말 거짓말처럼 피부가 싹 좋아지는 거 있지? 이거 기적의 화장품이라고 소문 다 났는데 네가 아직도 모르는 게 신기하다.”
“아, 그 이상한 화장품 소문 말이지? 그거 거짓말인 줄 알았는데 진짜였나 보네? 관심 좀 생기는데? 그거 얼마나 해? 나도 하나 사고 싶은데.”
“7천 줬지.”
“7, 7천? 7천원은 아니지?”
“어머, 얘는 당연히 7천만 원이지. 그 화장품을 사려고 하는 사람이 워낙 많아서 이것도 가은 언니 덕분에 겨우겨우 구할 수 있었던 거야. 이게 들어보니까 남은 수량도 얼마 없고 한 달에 만드는 양도 엄청 적다고 하더라. 지금 못 구하면 예약 밀려서 정말 구하기 힘들걸?”
“그, 그럼 나도 사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돼? 네가 가은 언니한테 얘기 좀 해줄래?”
“흐음, 맨 입에?”
“알았어. 알았어. 오늘 내가 맛있는 밥 사줄게. 그러니까 가은 언니한테 말 좀 잘해줘.”
“오케이. 콜.”
이런 식으로 화장품을 산 여자들이 친구들에게 엄청나게 자랑을 하다 보니 케즈론의 화장품이 기적의 화장품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단번에 돈이 많다고 나름 소문난 집안이나 여자들 사이에서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그런데 그 화장품을 사려면 유진아나 가은, 혜리와 어느 정도 인맥이 있어야 했는데 현중 그룹의 회장 딸인 가은과 SJ그룹 회장의 딸인 혜리와 인맥이 있는 사람 자체가 얼마 없었기 때문에 친구의 친구에게 부탁을 해서 화장품을 사고자 하는 사람들이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있었다.
덕분에 처음 유진아가 제시했던 5천만 원이라는 가격도 어느새 1억 원이라는 말도 안 되는 가격이 되어버렸지만 돈이 좀 있는 여자라면 누구라도 그 화장품을 갖기를 선망할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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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