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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래곤의 유산-283화 (283/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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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지붕 아래에서

아까 전에 유진아가 벗긴 블레이저는 놔두고 셔츠와 바지만 제대로 입은 채로 시황은 가은, 혜리와 악수를 했다. 보통 때에는 딱히 향수를 쓰지 않는 유진아와 다르게 가은과 혜리에게선 짙은 향수의 냄새가 느껴졌다. 그렇다고 자극적이기만 한 싸구려 냄새가 아니라 적당히 은은하면서도 달콤한 냄새라 은근히 괜찮았다.

“두 분 다 편하게 앉으세요.”

시황은 자연스럽게 가은과 혜리를 소파에 앉히고 유진아의 옆에 앉았다.

“진아야, 요리가 나오려면 시간이 좀 남은 거 같으니까 커피라도 좀 끓여올래?”

“응. 오빠. 알았어.”

시황의 말에 유진아가 싫다는 내색은커녕 당연하다는 표정으로 조신하게 일어나서 커피를 타러 갔다.

“오, 저 사납고 앙칼진 진아를 어떻게 길들이신 거예요? 조련 기술이 장난 아닌데요! 저도 진아 조련 좀 시켜보게 비법 좀 가르쳐 주세요.”

“확실히 진아가 남자 말에 순순히 커피를 타러 가는 건, 저도 처음 보는군요.”

진아가 부엌으로 가자 가은과 혜리가 신기하다는 듯 시황을 바라보며 말했다. 친구들에게는 그나마 덜하지만 모르는 사람이나 남자들에게는 정말 난공불락의 성처럼 도도하게 바로 유진아였다.

“하하. 글쎄요. 제 진심이 담긴 사랑과 키스 때문일까요?”

“끄아악! 내 손발이 오그라든다.”

정말 손이 오그라드는 것처럼 가은이 시황에게 보여주며 비명에 가까운 신음을 흘렸다. 설마 저런 대답을 할 거라고는 상상치도 못했다. 덕분에 좀 신선하기는 했지만.

“뭐 하는 거야? 오빠 앞에선 좀 조신하게 있는 게 어때?”

어느새 커피를 가져온 유진아가 이상한 행동을 하고 있는 가은을 보고 살짝 핀잔을 준 뒤에 커피를 나눠주었다.

“야야, 저 오빠가 방금 뭐라고 했는지 알아? 너도 들으면 깜짝 놀랄걸?맞지 혜리야? 진 대박이었지?”

“그래. 확실히 신선한 대답이긴 했어.”

가은은 아까 전에 시황이 한 말을 흉내까지 내면서 진아에게 보여주었다. 그러자 진아는 얼굴을 살짝 붉히며 사랑스럽다는 눈으로 잠시 시황을 바라볼 뿐이었다.

“우, 우웩. 저거 뭐하는 거야? 나 여기 못 있을 거 같은데? 혜리야 우리 그냥 나가자.”

“흠…….”

가은은 호들갑을 떨며 말했고 혜리는 그런 시황과 유진아를 약간 부럽다는 눈으로 쳐다볼 뿐이었다.

어찌됐든 약간은 딱딱해질 수 있는 자리였지만 시황의 대답 덕분에 분위기가 상당히 편안한 자리가 될 수 있었다.

“아까 들어보니까 화장품 때문에 약속시간보다 일찍 오셨다고요?”

“오옷! 화장품! 맞아요. 그거 때문에 일찍 온 거예요. 샘플 조금 써봤는데 정말 마음에 들더라고요. 그러니 얼른 화장품을 보여주시죠! 남친이 없는 것도 서러운데 더 이상 진아랑 러브러브해대는 꼴은 못 보겠으니까요!”

“하하. 알겠습니다.”

시황은 방에 들어가서 가방 안에 넣어둔 화장품 박스 하나를 꺼낸 뒤에 이어서 아공간에서 나머지 박스를 하나 꺼냈다. 중간에 몇 개 팔고 주변에 나눠주기는 했지만 아직 화장품은 40박스 넘게 남아서 여유는 충분했다.

“야야, 너 저 오빠랑 키스 언제 한거야? 앙큼한 것! 키스를 했으면 나한테 보고를 해야지.”

“무, 무슨 소리 하는 거야?”

“모른 척 하겠다는 거야? 혜리의 날카로운 눈빛 보이지? 너 빨리 얘기 안 하면 혜리가 귀찮게 잔소리할지도 모른다? 그러니 빨리 썰을 풀어보시지?”

“잔소리 안 하거든?”

시황이 방에 들어간 사이에 거실에서는 가은과 혜리, 아니 가은 혼자 유진아의 연애얘기를 듣고 싶어서 끊임없이 캐묻고 있었다.

“화장품 가지고 왔어요.”

“오오! 화장품이다. 박스도 진짜 예뻐! 진짜 감동이다. 감동.”

화장품을 탁자에 내려놓자 가은의 관심이 순식간에 화장품으로 옮겨갔다. 처음 봤을 때부터 느꼈지만 정말 정신없는 성격이었다.

“먼저 살펴보세요.”

시황의 말에 가은이 빠르게 화장품을 개봉했고 이어서 혜리도 기대가 가득한 표정으로 박스를 열었다.

“오오! 병도 예쁘다. 세상에. 진아 너 너무한 거 아니야? 이렇게 좋은 화장품이 있으면 빨리 가르쳐 줬어야지!”

“음……. 이런 향기는 처음 맡아보는데 상당히 유니크하면서 좋은 느낌이야. 거기다 잠깐 바른 것만으로도 피부가 좋아지는 게 눈에 보일 정도니까……. 진아가 칭찬할 만한데?”

온갖 좋은 화장품을 다 써봤을 법한 가은과 혜리도 진심으로 감탄을 하며 말했다. 아직까지는 상당히 순조로운 느낌. 여자라면 케즈론이 가진 능력을 모르지 않을 테니 안 순조로운 게 이상하기도 하다만.

“그래서 이거 얼마야? 나 빨리 사고 싶은데!”

“응. 5천만 원만 줘.”

가격을 합리화하기 위한 어떠한 말도 덧붙이지 않고 유진아는 아주 심플하게 대답했다. 대신 만이라는 표현을 씀으로써 5천만 원도 싸다는 인상을 주기는 했다.

“5천?”

그러자 가은이 진아를 보며 되물었다.

시황은 그런 가은을 보며 확실히 화장품 하나에 5천만 원이라는 걸 선뜻 받아들이기 어려울 거라는 생각은 들었다. 가방 같은 것도 아니고 소모성 아이템인 화장품이 5천만 원이라는 건 게임에서 포션이 무기보다 비싸다는 것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회복량이 좀 더 높다고 하더라도 소모성인 포션을 무기보다 비싸게 주고 사긴 많이 아까우니 말이다.

이건 이제 저 5천만 원이라는 가격을 가은과 혜리가 납득할 수 있도록 어떻게든 합리적인 가격으로 만느냐 못 만드냐의 싸움이었다. 포션도 단순히 회복만 되는 게 아니라 힘이 영구적으로 올라간다는 걸 인지시키면 그런 비싼 돈을 지불하더라도 사는 사람이 분명 존재했다. 그리고 그 이후로 활용도가 입증되면 없어서 못 팔정도가 되리라.

“응. 5천만 원.”

“생각보다 그렇게 비싸진 않네. 나 하나 더 살래. 언니한테도 줘야지.”

“나도. 하나 더. 이런 화장품이면 미리 사두는 게 합리적으로 소비를 하는 방법이지.”

가은과 혜리는 5천만 원이라는 말도 안 되는 가격에 아무런 불만을 나타내지 않고 오히려 하나를 더 사겠다고 말했다.

어떤 식으로 설명을 해야 합리적일지 생각을 정리하던 시황은 가은과 혜리의 말을 두 귀로 똑똑히 듣고도 장난인가? 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돈에 대한 가치가 사람마다 차이가 난다지만 아무리 그래도 5천만 원짜리 화장품을 저렇게 손쉽게 2개 사겠다고 말하는 건 정말 새로움을 넘어 경악을 할 수준이었다.

로또 1등으로 된 그런 벼락부자가 아니라 1억 따위는 내키면 쇼핑 한 번에 써버리는, 전 재산이 얼마인지 상상조차 가지 않는 그런 부자들이 생각하는 돈의 가치란 일반인과 달라도 너무나 달랐다.

“오늘은 이것뿐이고 나중에 내가 한 박스씩 더 줄게. 오빠 통장으로 미리 1억 입금해놔.”

“통장 번호 좀 주시겠어요? 지금 바로 입금해드릴게요.”

“아, 네.”

흔히 하는 말로 정말 쿨한 거래였다. 따지는 것도 없고 돈도 바로 넣어준다고 하는데다 하나만 사는 게 아니라 두개를 산다. 중고 거래를 할 때도 가격 좀 깎아달라는 사람을 안 만나는 게 힘이 들 정도인데 이렇게 비싼 화장품을 가볍게 사는 걸 보니 돈이 많은 게 대단하긴 대단하구나 라고 시황은 생각했다. 뭐, 그걸 잘 아니까 시황도 돈을 벌려고 카페를 확장하고 여러 가지 사업을 하려는 거지만.

시황이 계좌번호를 써서 건네주자 가은은 스마트폰을 꺼내서 바로 돈을 이체했다. 그런데 보통 스마트폰 같은 건 이체 한도가 낮다보니 1억 같이 액수가 큰 금액을 보낼 수가 없었기 때문에 가은은 보안등급이 높은 OTP카드를 이용해서 간단히 1억을 이체했다.

혜리도 같은 방법으로 이체를 했고 시황의 통장에 순식간에 2억이라는 돈이 생겼다. 시계를 1억 주고 샀는데 화장품 2개 팔아서 금세 복구를 한 건 물론이고 1억 원이라는 돈이 더 생겨버렸다.

이런 무리에 끼여 있으니까 괜히 과거에 천원이 없어 콜라도 못 사 마시던 때가 생각났다. 만약 드래곤의 유산이 아니었다면 로또 1등이 되었더라도 이런 식으로 거래를 하고 돈을 버는 건 불가능 했을 것이다.

“오오! 화장품 진짜 좋다. 손등에 바르니까 피부 탄력 생기는 것 좀 봐. 내거 하나 더 미리 사버릴까? 샘플만 써도 다른 화장품 못 쓰겠던데.”

“화장품 유통기한도 있는데 미리 많이 사둘 필요는 없지. 다 쓰면 또 진아한테 말해서 사면되니까.”

“그건 그래. 아! 그리고 진아야, 나 저분한테 오빠라 불러도 돼? 전화번호도 얻고 말이야.”

“흐, 흐응……. 별로 안 내키는데.”

유진아는 5천만 원이나 하는 화장품을 2개나 산 가은을 보며 정말 안 내킨다는 표정을 지었다. 혜리는 모르겠는데 가은이는 괜히 시황에게 꼬리칠 거 같아 걱정이 되었던 것이다.

“화장품 홍보 많이 해줄게. 너 내 인맥 알잖아.”

"흐음……."

"진아야아. 부탁할게. 정말 홍보도 많이 해줄게. 응? 응?"

“휴, 어쩔 수 없지. 대신에 오빠한테 연락하기 전에는 나한테 미리 허락받고 연락해.”

“그래. 그래. 알았어. 시황 오빠가 나한테 빠질까봐 너 걱정되는구나. 내가 매력이 넘치긴 하지.”

“아니, 그냥 없었던 걸로 하자. 아무리 생각해도 기분 나빠서 안 되겠다.”

“노, 농담이야. 오빠가 유명해지기 전에 미리 알아두고 싶어서 그런 거 뿐이야. 진짜야.”

유진아는 썩 안 내키는 표정으로 어쩔 수 없이 시황과 전화번호를 주고받는 걸 허락했다. 미리 허락받고 연락하라는 걸 알았다고는 대답했지만 저 가은이 허락을 받을 리가 없었다. 사정사정하는데다 홍보를 많이 해주겠다는 말에 가르쳐 주기는 했는데 괜히 가르쳐 준 건가 하는 후회가 급격히 생겨났다.

“오빠, 근데 아이라이너나 립스틱 같은 건 없어요? 화장품만으로는 좀 아쉬운데.”

“그건 아직 제품을 안 만들었어요. 나중에 만들 게 되면 평가 좀 부탁드려도 될까요?”

“우왕! 물론이죠. 신제품 써보는 건 재밌으니까요! 그것도 화장품만큼 품질 좋으면 제가 홍보 많이 해드릴게요.”

“감사합니다.”

별 거 아닌 듯 말하는 가은의 말에 시황은 여자 화장품은 스킨, 로션, 에센스가 끝이 아니라 훨씬 더 많다는 걸 새삼 깨달을 수 있었다. 아무래도 여자가 아니다 보니까 그런 쪽까지 미처 생각하지는 못했었다. 거기다 로션 같은 거 말고는 특별한 기술 자체가 없어 만들 능력이 안 되기도 했고. 이런 값비싼 화장품과 어울릴만한 아이라이너, 립스틱 같은 건 5레벨이 되어야 어떻게 생각을 해볼 수 있을 듯 했다.

띵동!

화장품을 살펴보며 혜리와 시황에게 계속 말을 거는 가은, 그리고 그런 가은은 영 못마땅하다는 눈으로 유진아가 지켜보는 사이에 벨소리가 울렸다.

아까 전 유진아가 부탁한 요리였다.

문을 열어주자 순식간에 셀 수가 없을 정도로 많은 요리들이 차려졌다. 이러니까 마치 중세시대 연회라도 하는 듯한 느낌이 들 정도였다.

이렇게 시황이 여자들과 즐거운 한 때를 보내고 있는 순간 시황의 집에서는 찬미와 수란이 심각한 표정으로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

아루를 유미와 놀도록 보낸 뒤에 찬미는 침대에 앉아 수란을 바라봤다. 요 며칠 시황의 외박이 점점 잦아지자 찬미는 너무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정말 몇 번이나 시황에게 직접 물어볼까 말까 망설였었다. 괜히 물어봤다가 시황이 기분 나쁘기라도 할까 걱정이 되어 망설이던 차에 수란이 직접 알아보겠다고 해서 이렇게 결과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휴…….”

가슴이 터질듯 두근거리자 찬미는 가볍게 숨을 내쉬었다. 수란에게서 어떤 말이 나올지 너무 불안해 견딜 수가 없었다.

“아까 학교에 가서 오빠를 만나고 왔어요.”

수란의 입이 떨어지자 찬미의 손이 살짝 떨렸다.

“결론부터 말할게요. 오빠는 유진아랑 같이 차에 타고 있었어요. 이것만으로 섣부르게 단정할 수는 없지만 오빠와 유진아의 눈빛이나 행동이 심상치 않았어요.”

“아……. 그럴 수가…….”

찬미는 갑자기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설마 했지만 시황은 정말 유진아와 만나고 있었던 것이다. 거기다 외박까지 했다면 어떤 관계가 됐을지 안 봐도 뻔했다. 대충 짐작은 했지만 직접 수란을 통해서 듣게 되자 찬미의 눈에서 보석처럼 투명한 눈방울이 방울방울 떨어져 내렸다.

============================ 작품 후기 ============================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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