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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지붕 아래에서
수업을 하는 중에 유진아에게서 문자가 왔고 시황은 수업을 마치고 기다리겠다고 문자를 보냈다. 그리고 시황은 이어서 바로 수란에게도 문자를 보냈다. 오늘 유진아와 수란이 함께 만나야 계획을 실행할 수 있었으니까.
수업을 다 마친 시황은 유진아가 수업을 하는 생활과학대학 건물 근처에 있는 벤치에 앉아서 기다렸다. 그렇게 오래 기다릴 필요는 없고 30분 정도만 기다리면 유진아의 수업도 끝이 났다.
오후 3시가 조금 넘어서 해가 약간 기울어지기는 했지만 여전히 따스함이 가득했다. 조금씩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벤치에 앉아 캠퍼스의 경치와 지나가는 여자들을 감상하고 있으니 마음까지 평화로워지는 거 같았다.
“저기 앉아있는 남자 좀 괜찮지 않아?”
“그러게? 좀 괜찮다? 너 보니까 은근 관심 있는 눈치다? 가서 말이라도 걸어봐. 혹시 알아 번호라도 딸 수 있을지?”
지나가는 여자들 무리들이 시황을 보며 숙덕숙덕 거렸지만 시황은 전혀 신경 쓰지 않고 가방에서 타블렛을 꺼내 인터넷을 했다. 옛날이야 여자하고 눈만 마주쳐도 혹시 저 여자가 나한테 관심 있는 건 아닌가 하고 망상을 하기도 했지만 지금은 여자들이 저렇게 대놓고 관심을 보내줘도 별다른 감정의 변화가 느껴지지 않았다. 나쁜 기분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엄청 좋은 것도 아닌 그저 평범한 감정.
“진짜 그럴까? 근데 여자가 먼저 가서 그런 부탁하는 거 좀 그렇지 않나?”
“오…… 너 진짜 관심 있나봐? 얼굴 보니까 잘생기기는 했는데 날라리 같지는 않고 딱 공부만 엄청 열심히 했을 것처럼 착하고 순진하게 생겼네. 근데 옷 입은 거 보면 여자한테 인기 많을 거 같기도 하고. 일단 가서 말이라도 걸어봐.”
“그, 그럴까? 잠시만 나 심호흡 좀…….”
시황은 약간 떨어진 여자애들이 자신을 보며 어떻게 접근할까 얘기를 나누고 있었지만 신경 자체를 거의 쓰지 않고 타블렛으로 카페에 관한 글들을 읽고 있었다. 대부분, 아니 거의 전부 카페 케즈론에 대해 극찬이 이어졌는데 중간에 약간 거슬리는 글이 하나 있었다. 나름 유명한 파워 블로거였는데 유독 이 사람만 카페에 대해 악평을 늘여놓고 있었다.
[카페 케즈론이라는 곳 정말 몹쓸 곳이네요. 커피 맛은 괜찮을지 모르겠는데 직원들이 정말 불친절합니다. 다른 카페보다 훨씬 더 비싼 돈을 내고 커피를 마신다는 건 그만큼의 서비스 질을 보장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그런데 여기는 장사가 좀 잘된다고 손님을 아주 무시하고…….]
중간 중간 커피 맛이 좀 괜찮다는 말 말고는 전부 다 카페에 대한 악평뿐이었다. 이런 파워 블러거의 글 보다는 은지와 지숙, 현주를 믿기는 했지만 나중에 무슨 일인지 확인은 해봐야 할 거 같았다.
제법 유명한 파워 블로거답게 댓글이 상당히 많이 달려있었다. 시황은 하나하나 댓글을 읽었다.
[헐; 사람들이 카페 케즈론 칭찬을 많이 해서 가볼까 했는데 가지 말아야겠네요. 장사 잘 된다고 손님 무시했다가 망한 곳이 한둘이 아닌데 카페 케즈론은 이런 점 명심했으면 좋겠어요.]
[저도 갔다 왔습니다. 카피가 맛있긴 하던데 사람이 너무 많아서 시끄럽고 별로더라고요. 조용히 책이나 좀 볼까 했는데 너무 시끄러워서 포기. 가격도 비싼데 그렇게 시끄러우니 그냥 다른 카페 가는 게 나을 거 같았어요.]
[맞아여. 카페 케즈론 진짜 별로임. 전 거기 커피 맛 하나도 없던데. ㅋㅋ; 거기 커피 맛있다는 사람들 혀가 좀 이상한 거 같음. 오히려 옆에 있는 카페들이 훨 낫던데 ㅋㅋ]
유명한 파워 블로거라서 댓글에도 카페 케즈론을 욕하는 글들이 제법 많았다. 그 중에서 너무 시끄럽다 같은 비판은 개선을 하기 위해 고려를 해볼 만한 가치가 있었지만 커피 맛이 없니 주변에 있는 카페가 더 낫니 하는 건 그 카페 주인이 쓴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어처구니가 없는 글이었다.
너무 극찬만 있는 것도 말이 안 되니 이정도 비난은 있을 법했지만 그래도 은지와 지숙, 현주를 생각하면 뭔가 이 비난에 냄새가 나기는 했다. 어찌됐든 그런 건 나중에 알아볼 일이고 시끄럽다는 부분을 개선을 할 필요성이 있어보였다.
시황이 어떻게 해야 소음 문제를 개선할 수 있을까 고민을 하고 있는데, 아까 전부터 시황을 바라보던 여대생 중 하나가 결국 말을 걸어보기로 한 건지 살짝 긴장한 표정으로 시황에게 다가왔다.
“오빠. 뭐 봐?”
“아, 진아 왔구나. 그냥 카페에 대한 글 좀 검색해서 읽고 있었어. 근데 좀 빨리 마쳤네?”
“응. 교수님이 빨리 마쳐주셨어.”
유진아가 자연스럽게 시황의 옆에 앉자 말을 걸려고 다가오던 여대생의 움직임이 시간이라도 멈춘 듯 굳어버렸다. 그리고는 새빨갛게 변한 얼굴로 친구에게 빠르게 되돌아갔다.
“야, 거봐. 여자 친구 있잖아. 저런 남자가 여자 친구 없을 리가 없지. 말 걸었으면 완전 개쪽당할 뻔 했다.”
“그, 그러게. 어떻게 그 타이밍에 여친이 바로 오냐? 진짜 대박 사건 하나 생길 뻔 했다.”
“아…… 진짜 아깝다. 저 정도로 괜찮은 남자 찾기도 힘든데. 짱나. 괜찮은 남자치고 여친 없는 남자가 없다니까.”
시황에게 전화번호 좀 달라고 말을 하려던 여대생은 계속 투덜투덜 거리면서 친구와 함께 걸어갔다. 어쩌면 시황에게 일어났을지 모를 헌팅이라는 작은 해프닝이 의도치 않게 유진아에 의해 가볍게 마무리되었다.
“일단 차에 가서 얘기하자.”
“응. 오빠.”
시황은 근처에 유진아가 세워놓은 차에 탔다. 캠퍼스에서 나던 시끌벅적하던 소리가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조용해졌다.
차에 타고 잠깐 서로를 바라보던 시황과 유진아는 누가 뭐라고 하지 않았음에도 자연스럽게 끌어안고 키스를 했다. 유진아의 간곡한 요청으로 단순히 입술과 입술을 맞대는 뽀뽀가 아니라 서로의 혀가 뜨겁게 얽히는 키스를 했다.
방금 전 벤치에 앉아 청순한 표정으로 시황과 얘기를 하던 유진아가 맞나 싶을 정도로 정열적으로 입을 움직였다.
“하아…….”
만족할 만큼 키스를 한 유진아는 기다란 은색의 실을 늘어트리며 시황에게서 입술을 떼어냈다. 평소에 그토록 도도하던 유진아의 얼굴이 발그레해지며 기분 좋은 표정을 짓자 엄청나게 뇌쇄적인인 매력이 흘러나왔다.
“기분 좋았어? 오빠?”
“응. 좋았어. 진아는 키스도 잘하네. 배울 점이 많다니까.”
“오늘 밤에 내가 새롭게 배운 거 가르쳐 줄게. 정말 기분 좋을 거야.”
“그래? 벌써 기대된다.”
유진아는 시황의 귓가에 낮게 속삭였다. 시황과 같이 밤을 지새우며 몇 번 섹스를 했지만 처음 섹스를 했을 때처럼 여전히 유진아가 시황을 리드해가고 있었다. 마치 남녀의 구도가 바뀐 듯한 모습이었지만 이런 것도 나름 즐거웠기 때문에 시황은 순순히 유진아가 하자는 대로 했다.
“친구들하고 6시쯤에 만나서 저녁만 먹고 바로 우리 집으로 가자.”
“6시에 만나기로 했어?”
“응. 최대한 빨리 보고 오빠랑 조금이라도 더 오래 있고 싶은 걸. 오늘 늦게까지 안 재울 거니까 각오해 두라고.”
유진아는 시황에게 최대한 밀착해서 말하고는 슬며시 성기부분을 만졌다. 요즘 시황과 함께 자고 섹스를 해서인지 스스로가 생각하기도 좀 많이 대담해진 거 같았다. 이러니까 마치 가련한 시황의 몸을 탐하는 듯한 모습 같기는 했지만 시황이 너무 숙맥에다 여자를 아직까지 잘 몰라서 직접 리드를 해줘야했다.
“하하. 무섭네. 그, 그건 그렇고 가격은 얼마 정도로 할 생각이야?”
마치 치녀처럼 유진아가 자꾸 성기가 있는 옷 위를 매만지자 시황이 부끄러운 듯 어색하게 몸을 빼며 화제를 돌렸다. 계속 만져도 상관은 없었지만 아무래도 당하는 쪽은 이런 식으로 반응해야 만지는 쪽도 나름 즐거우니까.
“생각해봤는데 5천만 원 정도도 괜찮을 거 같아”
“5, 5천? 아무리 그래도 그건 너무 비싼데. 사실 난 1~2천만 원에 파는 게 적당하다고 생각했거든.”
“안 돼. 오빠 2천만 원은 너무 싸. 그런 어중간한 가격이면 일반 사람들도 좀 무리를 해서 사게 된단 말이야. 애초에 우리가 노리는 건 최고가 브랜드고 오빠가 가진 그 화장품은 지구상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특별한 화장품이잖아? 보통 피부 관리 때문에 몇 억씩 쏟아붓는 사람들도 많은데 이 화장품을 5천만 원에 사서 피부가 완벽해지면 피부 관리랑 비교해서 어마어마하게 싼 가격인거야. 이걸 단순히 화장품으로 볼 게 아니라 피부미용 가격까지 생각을 해야 해.”
일 얘기가 나오자 신중해진 표정으로 유진아가 시황의 성기에서 손을 떼고는 말했다. 방금 전 시황을 희롱하던 그 여자가 맞나 할 정도로 눈이 날카롭게 변했다. 일과 사생활을 완벽하게 구분하는 모습이 유진아 다운 모습이기는 했다.
“확실히 진아 말을 듣고 보니까 그런 거 같네.”
“그리고 오빠가 여자들 화장품을 사는 걸 잘 몰라서 그러는데 그렇게 일반 직장인 중에서도 화장품 산다고 몇 백만 원은 우습게 쓰는 사람들 정말 많아. 여자는 아름다움을 위해서라면 없는 돈도 만들어 내거든.”
1~2천만 원이라는 것도 시황이 나름 최대한, 정말 말도 안 되게 비싸다고 생각한 가격이었는데 유진아의 말을 듣고 보니 그 가격이 그렇게 비싼 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확실히 살아온 환경이 달라서 그런지 돈에 대한 감각자체가 달랐다.
“음, 그렇구나.”
시황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름 여자를 이해한다고 생각했지만 여자의 세계는 그거보다 훨씬 깊고도 넓은 듯 했다.
드르륵!
한창 시황과 유진아가 화장품의 가격에 대해 얘기를 나누고 있는데 시황의 폰에서 문자가 왔다는 진동이 울렸다.
“잠깐만.”
“응.”
시황은 바로 휴대폰을 꺼내서 확인했다. 역시 예상대로 수란이었다.
[학교에요. 이제 버스에서 내렸는데 어디로 가면 되죠?]
[잠깐만 그리로 갈게. 근처에서 기다리고 있어.]
약간 걱정하기는 했지만 어찌어찌 잘 찾아온 듯 했다. 찬미와 유미는 괜찮은데 수란은 혼자서 어딜 내보내기가 불안했다. 그래도 그나마 수란이니까 불안하다 정도인거지 아루는 절대로 혼자서 밖에 내보낼 생각이 없었다. 아루가 혼자 나가는 건 정말 상상만 해도 끔찍했으니까.
“진아야 아는 동생이 학교에 왔다는데 정류장으로 가줄래?”
“응. 알았어. 남자?”
“아니. 여자 애. 나랑 같이 만화 그리는 동생이야.”
“아…….”
여자라는 말에 유진아는 약간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시황을 좋아하는 여자들이 많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눈으로 직접 확인한 적은 없었기 때문에 별다른 불안감 같은 건 없었다. 하지만 시황을 좋아할 걸로 추측되는 여자를 직접 눈으로 확인하게 된다 생각하니 괜히 가슴이 떨렸다.
유진아가 운전을 해서 수란이 기다리는 버스 정류장으로 갔다. 그런데 수란이 어디 있는지 찾을 필요도 없이 남자들이 웅성거리며 몰려있는 곳이 바로 눈에 들어왔다. 수란이 연예인 이상으로 아름답다보니 꽃에 꿀벌이 다가오듯 남자들이 몰려드는 건 너무나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시황은 차에서 내린 뒤에 신기한 듯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는 수란을 뒷좌석에 태웠다.
“안녕하세요.”
“네. 안녕하세요. 임수란이에요.”
수란이 차에 타자 유진아가 약간은 어색한 웃음으로 인사했고 수란은 평소보다 더욱 무표정한 얼굴로 인사했다.
“얘가 내가 다니는 학교를 보고 싶다고 하더니 말도 없이 갑자기 왔네.”
“아, 그렇구나.”
유진아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같이 만화를 그리는 동생이라고 해서 그냥 평범하게 생겼거니 했는데 예상 외로 예쁘다고 소문난 연예인 이상으로 아름다웠다. 만약 자신이 연예계 쪽에서 일했다면 당장이라도 스카웃을 할 정도로 압도적인 미모였다. 이런 미모의 여자애가 좋아한다고 아양의 떨면 여자를 잘 모르는 숙맥인 시황이 도저히 안 넘어갈 수가 없겠다는 불안감이 가슴에서 피어올랐다.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저는 경쟁자가 아니니까요.”
“네?”
의미를 알 수 없는 수란의 말에 유진아가 순간 당황해서 되물었다. 평소 그토록 도도한 유진아였지만 시황과 관계된 일에는 작은 사실 하나에도 표정이 다채롭게 변화했다.
“학교 구경을 하고 싶은데 안내 좀 해주실 수 있나요?”
“아, 그럼요.”
“수란아, 난 나중에 약속 있으니까 학교 잠깐 구경시켜 주고 집에 데려다 줄게. 괜찮지?”
시황의 말에 수란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유진아 얼굴만 보면 됐으니까.
유진아는 차를 운전해서 수란에게 서울대의 이곳저곳을 데려다 주었다. 그런데 안내는 하고 있지만 머릿속에는 아까 수란이 했던 경쟁자가 아니라는 말이 자꾸 떠올랐다. 시황에게 자신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괜찮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시황의 존재가 그때보다도 더 커진데다 직접 시황과 관계된 사람을 보니 불안한 마음이 생기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 작품 후기 ============================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