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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지붕 아래에서
“유미야. 언니 말 잘 들어.”
“어, 언니.”
유미는 당황스럽기도 하고 뭔가 어이가 없기도 해서 뭐라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런데 원래라면 이런 사실을 아는 순간 찬미에게 화라도 내야 할 텐데 오늘따라 유독 찬미의 표정도 그렇고 분위기가 너무나 심각해 화를 낼 수가 없었다.
“네가 오빠를 좋아한다고 나한테 고백했을 때, 언니는 너랑 시황 오빠가 사귀는 게 더 나을 거라고 생각했어. 나 같은 여자보다는 네가 더 시황 오빠에게 어울렸으니까.”
“가, 갑자기 왜 그래 언니.”
20여 년 동안 찬미를 봐왔지만 오늘만큼 찬미가 낯선 건 처음이었다. 평소 다정다감하면서도 때때로는 엄하게 자신을 꾸짖는 언니의 모습이 아니라 한 여자로서 짙은 고뇌에 빠진 모습은 유미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그래서 난 뒤에서 너와 오빠가 잘되기를 기원했어. 내가 비록 오빠와 사귀지는 못하더라도 너와 오빠가 행복한 것만 봐도 기뻤으니까.”
“언니. 그러지 마……. 힝…….”
찬미의 덤덤한 말에 유미는 눈물이 핑 도는 걸 느꼈다. 찬미가 자신을 위해 그렇게까지 생각했으리라고는 정말 몰랐다. 만약 반대 상황이라면 자신은 찬미를 위해 그럴 수 있었을까? 아마 시황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찬미와 엄청 싸웠을 것이다.
“사실 네가 오빠와 사귀게 되면 한 가지 부탁을 하려고 했어. 한 달에 단 하루, 아니 단 몇 시간만이라도 오빠와 사랑을 나눌 수 있게 해달라고.”
“언니, 미안. 흑……. 난 언니가 그렇게까지 날 생각해줄지 몰랐어.”
“넌 내 하나뿐인 동생인 걸. 유미야.”
찬미는 눈물이 잔뜩 고여 조금씩 아래로 흘러내리는 유미를 살며시 안아줬다. 얼마 전만 해도 작고 귀여운 꼬맹이였는데 어느새 완전히 성숙해져서 한 남자를 사랑까지 할 정도가 되어버렸다.
“그래서 원래라면 차분히 기다리려고 했어. 네가 오빠와 잘 될 때까지. 그런데 아까 수란이 한 말을 들으니까 그러면 안 되겠다 싶더라.”
“어, 어째서?”
유미는 흐르는 눈물을 닦아내고 궁금한 표정으로 찬미에게 물었다.
“생각해보렴. 유미야. 네가 그 무엇보다 사랑하게 된 오빠의 그 매력을 너 혼자만 느꼈을까? 이 세상에는 수많은 남자가 있지만 오빠처럼 순수하고 마음씨가 좋은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내가 상처를 받았을 때, 네가 여러 가지 문제로 고민을 할 때 그걸 진정으로 위로해주고 해결해준 사람은 오빠밖에 없었어.”
“맞아. 오빠가 아니었으면 난 아직도 얼굴에 여드름이 가득 했을 걸.”
유미는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쳤다. 언니인 찬미도 시황을 좋아한다 하더니 정말 고개가 절로 끄덕여지는 말만 한다.
“유진아가 오빠에게 고백한 것도, 오빠 주변에 은지, 지숙이 등이 있는 것도 다 오빠의 매력을 한 눈에 알아봤기 때문이야. 만약 지금처럼 지내게 된다면 언제 어떤 여자가 오빠를 채어갈지 모르는 거지.”
“그, 그럼 어떻게 해?”
구구절절 옳은 말에 유미는 걱정이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이제 내 말 잘 들으렴. 유미야. 지금 네 혼자 힘으로는 오빠를 붙잡기가 힘이 든단다.”
“으, 응.”
“일단 나와 네가 노력을 해서 어떻게든 오빠 마음속의 지분을 최대한 확보를 해야 돼. 우리끼리 다투는 게 아니라 다른 경쟁자들 보다 먼저 앞서나가는 게 가장 중요하니까.”
“그, 그렇구나. 그럼 어떻게 해야 오빠 마음을 차지할 수 있을까?”
유미는 어느새 찬미와 같이 협동해서 시황의 마음을 가지기로 무언의 합의를 해버렸다. 한 남자를 가지고 자매 둘이 싸우는 것도 아니고 한 남자와 동시에 연애를 하겠다는 이 흔치 않은 합의는 시황을 절대 포기하지 못한다는 결의가 느껴질 정도였다.
“유미는 언니만 믿으면 된단다. 언니가 오빠와 사랑을 나누면서 어떻게든 오빠가 좋아하는 것들을 알아낼게.”
“사, 사랑을 나누겠다고?”
시황과 섹스를 하겠다는 말을 스스럼없이 하는 찬미를 보며 유미는 얼굴이 화끈거려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찬미가 항상 당당하고 자신감 넘치는 건 알았지만 동생 앞에서 저런 말도 그냥 해버리다니. 괜히 자신이 더 부끄러웠다.
“그래. 오빠가 좋아하는 음식, 옷 취향, 스타일은 물론이고 오빠의 성감대, 좋아하는 체위까지 전부 다 언니가 알아내서 유미에게 가르쳐 줄게.”
“서, 서, 성감대라니……. 미, 민망하게.”
“유미야. 부끄러워하지 마. 서로 좋아하는 남녀가 사랑을 나누는 건 너무나 당연한 자연의 이치야.”
“그, 그래도 나 그런 거 해본 적도 없고 부끄러운 걸…….”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하는 찬미의 말에 유미는 고개를 숙이며 조그맣게 말했다. 시황과 섹스를 한다는 건 생각을 해본 적도 없었다. 시황이 가슴을 만진 적은 많지만 그건 그거고 섹스는 그것과 비교도 안 되게 큰일이니까.
“언니가 잘 알려줄 테니까. 걱정하지 마. 언니도 처음에는 무섭고 그랬는데 적응 되고 나니까 매일매일 하고 싶을 정도로 좋아지더라.”
“처, 처음 하면 엄청 아프다던데……. 언니도 많이 아팠어? 왠지 나 무서워……. 언니…….”
유미는 찬미의 품에 안기며 말했다. 처음 찬미가 시황과 사랑을 나눴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정말 큰 충격을 받았지만 찬미의 마음을 이해한 지금은 오히려 찬미에게 너무 고맙고 미안했다.
“그렇게 부끄럽고 무서우면 네가 오빠랑 첫 경험할 때 언니가 도와줄까? 아무래도 언니랑 같이 있으면 덜 부끄럽고 무섭지 않을까? 오빠도 그 정도는 이해해 줄 거고.”
“언니. 정말 고마워. 난 언니한테 맨날 그렇게 나쁘게만 했는데 언니는 날 위해서……. 흑…….”
찬미의 마음 씀씀이에 감동을 받은 유미는 결국 다시 눈물을 흘리고야 말았다.
유미의 눈에서 아까보다 더 많은 눈물이 펑펑 쏟아지는 걸 본 찬미는 그저 유미를 껴안고 등을 쓰다듬어 줄 뿐이었다.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지금까지는 그저 방관자적 입장에서 유미와 시황이 잘 되기를 바랐지만 이제부터는 시황을 쟁취하기 위해 자신이 좀 더 적극적으로 나설 생각이었다.
뚜렷한 목표가 정해지자 찬미의 눈이 뜨겁게 불타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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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 그러면 나 이제 서울로 올라갈게. 혹시 모르는 거 있으면 바로 연락해.”
“그래. 여긴 걱정 안 해도 된다. 내가 나이는 먹었어도 네 엄마랑 다르게 익히고 배우는 건 훨씬 나으니까 말이다. 허허.”
이제 막 문을 열기 위해 정리를 하는 케즈론의 카페 안에서 시황은 부모님과 마주 앉아 서울에 가기 전에 몇 가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루와 수란 덕분에 어느 정도 여자 문제가 해결되어서 만화를 계약 한 뒤에 바로 서울에 올라가는 날을 정해버렸다.
일단 부모님이 따라가는 찬미와 유미, 그리고 아루와 수란과 함께 오늘 먼저 서울에 가고 은지와 지숙, 만화 어시스턴트 일을 해야 하는 시연은 내일 다시 시황이 데리러 오기로 했다.
“시황아. 서울에 가면 여자 조심해야 한다. 네가 지금 잘 몰라서 그렇지 아무리 봐도 찬미랑 지숙이, 은지까지 너한테 마음 있는 거 같으니까.”
“괜찮아. 엄마. 내가 잘 알아서 할게.”
시황은 별 거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찬미라는 애가 참하고 똑 부러진 게 참 예쁘긴 하다만 그래도 아루가 우리한테 얼마나 성심성의껏 잘해줬니? 절대 아루랑 헤어지고 그러면 안 된다 시황아. 사람의 도리라는 게 있어.”
“어흠, 그런 건 다 시황이가 알아서 하겠지. 뭔 걱정이 그렇게 많다고 쯧.”
“하하. 아루랑 자주 내려오고 할 테니까 걱정하지 마. 그러면 사람들 기다리니까 난 이제 슬슬 갈게.”
“그래. 시황아 도착하거든 꼭 전화해.”
“응. 엄마. 갈게.”
시황은 서울에 가기 전에 부모님과 인사를 끝내고 차를 가지고 오피스텔로 돌아갔다. 오피스텔 앞에는 이미 준비를 마친 수란과 아루가 서 있었는데 수란의 옆에는 생전 처음 보는 남자 하나가 서서 뭔가 말을 걸고 있었다.
“그러지 말고 시간 있으면 차라도 한잔해요. 제가 정말 마음에 들어서 그래요.”
약간은 껄렁한 느낌이 드는 스타일과 말투에 시황은 약간 인상을 썼다. 스타일도 스타일이지만 수란의 옆에 헌팅하는 남자가 붙어 있는 것 자체가 심기를 건드렸던 것이다.
“관심 없습니다. 귀찮으니까 그만 말 거시고 가시던 길이나 계속 가시죠.”
“아니, 그러지 말고…….”
“기다리던 사람이 왔네요. 그럼 이만.”
“저, 저기요.”
수란은 남자가 말을 걸든 말든 신경도 쓰지 않고 아루와 함께 바로 시황의 차에 탔다.
“수란이 엄청 쿨하네.”
“수란이 정말 멋있어. 헤헷.”
시황은 가볍게 웃으면서 뒷좌석에 앉은 수란을 보며 말하자 아루도 맞장구를 쳤다. 원래는 차에서 바로 뛰쳐나가 남자를 쫓아버릴 생각이었는데, 수란이가 생각 외로 엄청 단호하게 대해서 차에서 내릴 필요도 없었다.
“저런 남자 귀찮으니까요.”
“그래. 그래. 좋은 마인드야. 나 말고 다른 남자하고는 말도 섞지 마.”
“다시 생각해보니까 시황 오빠보다는 저 남자가 더 신용이 가네요.”
비록 수란의 말은 이래도 방금 모르는 남자와 얘기할 때 짓던 그 무뚝뚝함과는 전혀 다른 편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하하. 그런가.”
수란의 말을 가볍게 웃어넘긴 시황은 차를 몰아 찬미의 집으로 향했다. 얼마 멀지 않은 거리라 금방 도착할 수 있었다.
“오빠!”
찬미의 집 앞에는 이미 준비를 끝낸 찬미와 유미, 부모님이 차 앞에 서 있었다. 시황과 같이 출발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
시황은 수란과 아루와 함께 차에 내려서 찬미의 부모님께 간단히 소개를 해주었다.
“허허. 자네 집안은 유전자가 좋아서 그런지 동생들도 다 예쁘구먼.”
“제 눈에는 찬미랑 유미가 더 예쁜 거 같은데요.”
“그런가? 하하.”
“어머, 시황이는 말도 참 잘한다니까.”
물론 찬미와 유미도 엄청 예쁘기는 했지만 그래도 수란과 아루에 대기엔 손색이 없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시황을 엄청 좋게 보고 있는데다 그런 칭찬까지 들으니 찬미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기분이 상당히 좋아져 큰 웃음을 터트렸다.
“그럼 이제 슬슬 출발하게나.”
“네. 알겠습니다.”
“오빠 그럼 나중에 봐요.”
“응. 유미야.”
자신에게 손을 흔드는 유미는 물론이고 찬미에게 까지 손을 흔들어준 시황은 수란과 아루를 데리고 다시 차에 탔다.
꽤나 오랜 시간이 걸리기는 했지만 드디어 서울로 올라가게 된 것이다.
============================ 작품 후기 ============================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