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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로
12월 29일. 새벽.
벌써 한해가 끝나가려고 하고 있었다. 예전에 찬미와 유리에게 말했던 대로 바닷가 근처에 있는 펜션을 예약했고 대학교 원서도 접수했다.
시황은 계획대로 서울대 영어영문학과에 원서를 썼는데 서울대는 나군에만 넣을 수 있어서 가군과 다군은 다른 대학을 쓸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가군은 대충 고려대 영문학과를 썼고 다군은 건국대 영문학과를 썼다. 이번에 수능 만점을 받은 게 자신 혼자이다 보니 서울대학교에 떨어질 가능성은 전혀 없다시피 했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 보험을 들어놓은 것이다.
이번 수능이 워낙 어려웠던 관계로 유미도 제법 높은 점수의 대학의 지원할 수 있었는데 성균관대학교와 중앙대, 건국대 등 나름 밸런스 있게 원서를 넣었다. 성균관대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중앙대와 건국대가 떨어질 거 같지는 않아 유미도 무리 없이 서울에서 대학을 다닐 수 있을 거 같았다.
그래서 시황은 은비의 엄마가 가르쳐준 곳 중에서 고려대와 성균관대, 청담동과 그렇게 멀지 않은 곳에 대략 15억 원 정도를 투자해서 상당히 넓은 평수의 2층 주택을 구입할 수 있었다. 15억 원이라는 적은 돈으로 이런 좋은 위치에 좋은 집을 살 수 있었던 건 경매로 나온 집이기도 했고 은비가 많은 도움을 준 덕분이었다. 그런데 서울이 아닌 다른 지역이었다면 15억 원이라는 돈이 들지는 않았을 텐데……. 서울의 몇몇 곳은 비정상적으로 집값이 비쌌다. 시황이 그런 비싼 곳에 집을 산 건 아니었지만 드래곤의 유산 없이 평범하게 일하며 돈을 모았다면 평생토록 지금 산 고급 주택을 절대 손에 넣지 못했을 것이다.
이미 집을 샀고 인테리어도 거의 끝마쳤기 때문에 슬슬 서울로 올라가도 큰 무리는 없었다. 하지만 지금 하고 있는 카페를 부모님께 인수인계를 하고 근처에 집도 하나 장만해야 했기 때문에 시간이 조금은 더 필요했다.
시황은 카페를 마치고 집에 돌아와서 바로 케즈론의 성으로 향했다. 저번에 은비에게 말한 드레스와 장신구를 고르기 위해서였다.
콘즈에게 말해 서재를 옷장으로 바꾸고 은비가 입을만한 드레스를 찾았다. 너무 노출이 있는 건 별로였고 각선미 정도를 뽐낼 수 있는 수준의 드레스를 고를 생각이었다.
옷들을 하나하나 꼼꼼히 살펴봤지만 상의부분이 시스루로 돼있어서 가슴이나 속옷이 훤히 드러나는 등 제법 노출도가 강한 드레스가 많아 선뜻 골라잡을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무난한 걸 선택할 수도 없는 게 그래서는 원하는 목적이 이루어지지 않을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시황은 한참을 뒤적뒤적 거리다 겨우 몇 가지 드레스를 고를 수 있었다.
[베룬의 순결한 드레스. 흰 눈처럼 새하얀 드레스는 성스럽고 순결한 기운이 가득 차 있다. 하지만 짧은 치마 부분 때문에 각선미가 그대로 드러나 도발적인 매력도 포함하고 있다.]
[로함의 드레스. 가슴골이 노골적으로 드러나지만 치마가 매우 긴 이 드레스는 걸을 때마다 갈라진 옆선으로 아름다운 각선미가 드러나 보는 이로 하여금 눈을 뗄 수 없게 만든다. 약간의 매혹효과가 첨부되어 있다.]
시황은 한참을 놓고 고민을 한 끝에 베룬의 순결한 드레스로 거의 마음을 굳혔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가장 큰 이유는 로함의 드레스는 가슴골이 너무 노골적으로 드러난다는 점 때문이었다. 인터넷에서 은비 가슴가지고 크니 작니 예쁘니 못생겼니 하는 글은 전혀 보고 싶지 않았다. 거기다 한국은 가슴 노출에 대해서는 상당히 보수적이지만 다리 노출은 별로 신경 쓰는 편이 아니라는 점도 주요했다.
드레스를 고른 시황은 그 다음으로 하이힐을 훑어봤다. 은비의 키는 163.2cm. 여성의 평균키보다 크기는 했지만 여자 여기자들 중에서는 작은 편에 속했다. 그래도 머리가 작고 몸매의 밸런스가 뛰어나 키가 커 보이면 커 보였지 작다는 느낌은 전혀 들지 않았다.
“너무 굽이 높은 건 별로고…….”
시황은 은비와 어울릴 것 같은 하이힐을 일일이 살펴봤다. 4레벨 신발장이다 보니 기본적으로 발 크기에 맞춰 하이힐이 딱 맞게 조절 되는 건 물론이고 신어도 운동화처럼 편안한 착용감을 보장해줬다. 하지만 이런 편리성 보다는 디자인이 중요하다.
한참을 뒤적거리던 시황은 흰색의 드레스와 잘 어울릴 것 같은 하얀색 하이힐을 골랐다. 그렇게 굽이 높아 보이지 않는데 정작 신으면 10cm나 커지는 킬힐이었다. 디자인도 시황이 원하던 것처럼 보는 것만으로도 고급스러움이 넘쳐흐르고 있었다. 재질 자체가 일반적인 하이힐과 다르게 독특하게 빛을 반사했는데 어떻게 보면 크리스탈과 비슷한 느낌이 풍겼다.
“괜찮은데.”
벌써부터 시황의 머릿속에 은비가 드레스와 하이힐을 신었을 때 어떤 느낌이 날지 떠올랐다. 의도한 바이기는 했지만 흰색으로만 코디를 하니 아름답기는 하지만 포인트 없이 심심한 느낌이 확실히 든다. 하지만 이 심심한 느낌은 은비의 얼굴과 가치를 매길 수 없는 보석으로 채우고도 남으리라.
시황은 계속해서 은비에게 필요한 매니큐어라든가 마스카라 등 최하급 마법 물품을 골랐다. 최하급이라는 딱지가 붙어는 있지만 이런 최하급 물품들은 지구에 있는 그 어떤 것들보다 뛰어난 가치를 지니고 있었다.
고를 걸 다 고른 시황은 마지막으로 아공간에 손을 집어넣어 보석함을 꺼냈다. 별다른 마법적 능력은 없지만 가치로만 따지자면 여기 있는 다이아몬드 반지 하나로 서울에 있는 집을 몇 채나 구입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 가치 때문에 일부러 손도 안 대던 것이기도 했다. 능력을 넘어선 돈은 큰 화를 불러일으키기 마련이니까.
시황은 조심스럽게 다이아반지 하나와 목걸이 하나를 꺼냈다. 베룬의 드레스가 가슴골이 드러나는 정도는 아니었지만 쇄골이 노출되고 가슴선 바로 위까지 파여 있었기 때문에 목걸이를 꼭 껴도 매우 잘 어울렸다.
반지와 목걸이를 조심스럽게 살펴본 시황은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압도적인 아름다움.
보통 생각하는 투명한 빛의 다이아몬드가 아니라 은은한 붉은색이 있는 레드 다이아몬드로 만들어진 반지와 목걸이였다. 조금의 불순물조차 허용하지 않은 이 다이아의 순수함은 보고 있기만 해도 경건해질 정도였다.
이런 레드 다이아몬드는 일반 다이아몬드와 다르게 가격이 매우 비쌌고 보통 1캐럿에 10억 원 정도 한다고 한다. 지금 시황이 들고 있는 반지가 7캐럿, 목걸이가 다해서 20캐럿 정도 되니까 단순히 계산하면 반지와 목걸이 합쳐서 300억 원 정도한다는 얘기였다. 물론 이건 시황이 인터넷을 보고 찾은 대략적인 가격이라 실제로 경매에 내놓으면 얼마에 팔릴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고를 거 다 고르고 챙길 거 다 챙긴 시황은 마무리로 드레스와 하이힐에 케즈론 마크를 새겨 넣고 전부 아공간에 집어넣었다. 이걸로 준비 끝이다.
가벼운 마음으로 오피스텔로 돌아가자 바로 전화기에서 전화가 울린다.
은비다.
[야! 왜 전화를 안 받아.]
약간 화가 난 목소리였다.
[아, 미안해요. 할 일이 있어서 몰랐어요.]
[무슨 일? 내일 서울에 와서 나한테 드레스랑 목걸이 주기로 했잖아. 설마 까먹은 건 아니지?]
은비가 쀼루퉁한 목소리로 시황에게 말했다. 자꾸 전화를 안 받았던 게 조금 짜증이 났던 것이다.
[아, 맞다. 죄송해요. 까먹었어요.]
[뭐? 거짓말이지? 농담이지?]
방금 했던 말은 그냥 해본 말이었는데 시황이 미안한 목소리로 까먹었다고 하자 은비는 순간 머리가 어질어질해지면서 눈물이 핑 도는 걸 느꼈다. 자기는 하루 종일 시황만 생각하고 매일 만나고 싶어 죽을 것만 같았는데 정작 시황은 자신에 대해서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는 다는 사실이 너무 슬퍼서 견딜 수가 없었던 것이다.
[네. 농담이에요. 방금 드레스랑 반지 다 골라서 온다고 전화 못 받았어요. 미안해요.]
[……바보야. 그런 걸로 장난치지 말라고. 바보. 멍청이.]
감정을 주체할 수가 없어 순간적으로 눈물을 주룩 흘렸던 은비가 시황의 말에 겨우 마음을 진정시키며 눈물을 닦아내었다. 내일 당장 연기시상식이 있었지만 방금 시황의 말을 듣는 순간 시상식이고 뭐고 당장 시황에게 가야겠다는 생각밖에 나지 않았다.
[하하. 죄송해요.]
[바보. 그럼 벌로 내일까지 나랑 같이 있어야 한다.]
벌인지 상인지 알 수 없는 조건을 걸며 은비가 말했다.
[같이요?]
[그래. 하루 종일. 어차피 시상식은 30일 밤에 있으니까 오후쯤에 청담동에 있는 미용실에 가서 머리하고 메이크업 받으면 돼.]
[하하. 알겠어요.]
대충 할 말은 다했지만 이후로도 은비는 전화를 끊지 않고 끊임없이 시황에게 얘기를 했다. 원래는 조금만 얘기하고 끊으려고 했는데 시황의 장난에 대한 약간의 복수였다.
12월 29일의 밤이 어두워져간다.
뉘엿뉘엿 지는 해 사이로 시황과 은비는 손을 잡고 한강 공원을 걷고 있었다. 마치 연인 같은 이 모습에 은비는 상당히 만족스러운 웃음을 머금었다. 거기다 며칠 전에도 걸었던 곳이지만 그때는 시황이 여기를 마지막으로 집으로 돌아가 정말 아쉬웠는데 오늘은 하루 종일같이 지낼 수 있다는 게 상당히 기뻤다.
“저녁은 이번에 산 집에 가서 먹을까요?”
“그럴까? 어차피 옷하고 반지하고 확인해야 하니까.”
시황의 말에 은비가 쑥스럽게 웃으면서 대답했다. 안 그래도 오늘 새벽에 말한 것처럼 시황과 같이 밤을 보내기 위해서 부모님에게 일 때문에 집에 못 들어간다고 말을 해놓았다. 그런데 밤을 같이 지새운다 생각하니 은비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저번 DVD방에서 했던 그 야릇한 행동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직까지 질염이 낫지 않았기 때문에 그 이상의 진도는 나갈 수가 없었다.
“춥네요. 마트에 들러서 먹을 거 좀 사고 가요.”
“마트? 응. 알았어.”
공원을 걷던 시황이 은비를 데리고 차로 갔다.
“하아, 춥다.”
차에 타자 은비가 손을 비비며 말했다. 12월이라는 날씨는 그저 가만히 있기만 해도 소름이 돋을 정도로 추웠기 때문이다.
시동을 걸어 히터를 켜고 시황은 집 근처에 있는 대형마트로 향했다. 이번에 구입한 집은 한강에서 그렇게 멀지 않은 곳에 위치했기 때문에 금방 마트에 도착할 수 있었다.
마트 주차장에 차를 대자 은비는 저번에 시황이 준 모자를 꾹 눌러쓰고 차에서 내렸다. 예전에는 사람 많은 곳만 가면 가슴이 두근두근거려 어쩔 줄을 몰랐는데 시황이 준 이 모자를 쓰면 알아보는 사람이 하나도 없어 이제는 제법 자연스럽게 사람 많은 곳을 다닐 수 있게 되었다.
시황이 차에서 내리자 은비가 당연하다는 듯 팔짱을 끼고 마트로 들어갔다. 그냥 보면 평범한 연인 같은 모습이었다.
카트를 끌면서 시황은 오늘 밤에 먹을 반찬과 쌀, 식기 등을 샀다. 집 인테리어는 언제 들어가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완료됐지만 식기 같은 건 아직까지 준비를 해놓지 않았다.
한참 쇼핑을 하고 있는데 뒤에서 묘한 눈초리가 느껴졌다.
“야, 지금 지나간 여자 정은비 같지 않아?”
“정은비?”
20대 초반의 뚱뚱한 남자 한 명이 날카로운 눈초리로 말하자 옆에 있던 친구가 무슨 이상한 소리를 하냐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래. 저 키랑 체형, 걸음걸이. 완전 정은비인데?”
얼굴이 제대로 인식조차 되지 않음에도 외형만 보고 정은비라는 걸 알아챈 남자의 말에 은비가 화들짝 놀라 시황의 품에 깊숙이 파고들었다. 여기서 자신이 정은비라는 사실을 들키면 정말 곤란해진다.
“야, 네가 정은비 덕후인 건 아는데 헛소리 자제 좀요. 이런 사람 많은 마트에 정은비가 저렇게 대놓고 남자랑 팔짱끼고 돌아다니겠냐?”
“뭐, 그건 그런데 느낌이 왠지 정은비 같단 말이야. 내 날카로운 육감을 못 믿냐?”
“뻘소리는 됐고 카메라나 구경하러 가자. 이번에…….”
날카로운 직감을 보여줬지만 그 뚱뚱한 남자도 그냥 별 의미를 둔 말은 아닌지 친구를 따라서 전자제품이 있는 곳으로 가버렸다.
“하아…….”
“긴장했어요?”
“그래. 바보야. 들키면 큰일이란 말이야. 스포츠 신문이랑 인터넷 기사로 바로 뜰 걸?”
은비가 긴장을 풀며 말했다. 세상에 엉덩이만 보고도 연예인을 구별하는 사람이 있다는 말은 들었지만 여기서 만날지는 몰랐다. 만약 그 남자가 좀 더 확신을 가지고 의심을 했으면 정말 큰일 날 뻔했다.
“걱정 마세요. 만약 들켜도 제가 다 책임질게요.”
“네가 어떻게 책임져. 바보야. 네가 방송국 사장이면 또 몰라도. 흥.”
시황의 말에 은비가 까칠하게 대답했지만 자신의 붉어진 얼굴이 들키지 않기 위해 시황의 품에 얼굴을 파묻다시피 하며 걸었다. 드라마를 찍을 때 남자배우가 저런 대사를 말했을 땐 아무런 느낌도 없었는데 시황이 말하니까 마치 메아리가 치듯 계속해서 머릿속에서 떠올랐다. 다 책임져 주겠다니. 어떻게 책임져줄지 궁금해서 자신이 정은비라는 걸 밝히고 싶은 마음까지 든다.
============================ 작품 후기 ============================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