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11 ------------------------------------------------------
서울로
“응. 경매로 사면 시중가보다 10~20%정도 싸게 살 수 있데. 내가 그거 포함해서 몇 개 적어왔어.”
은비가 가방을 뒤적거리더니 종이를 꺼내 시황에게 건네주었다.
시황은 종이를 확인했다. 대략적인 가격과 그 집의 주소가 적혀 있었다. 위치는 시황이 말했던 고려대학교와 서울대학교 사이, 그리고 청담동에서 크게 멀지 않은 곳이었다. 아파트는 없었고 빌라와 주택만 있었다.
“흐음…….”
시황을 턱을 쓰다듬으며 고민했다. 이 종이에 적힌 위치가 어떤 곳인지도 잘 몰랐기 때문에 선뜻 지금 결정을 내릴 수가 없었다.
“어때?”
“직접 가봐야 알겠는데요.”
“밥 먹고 가볼까?”
“아니요. 은비 씨 만났는데 그럴 수는 없죠. 내일 제가 직접 가볼게요.”
“그러든가. 맘대로 해.”
은비는 시황의 말에 별거 아니라는 듯 대답했지만 얼굴에 기쁜 기색이 가득했다. 그런 집을 보러 다니는 것도 괜찮기는 했지만 그래도 이왕이면 간만에 만났으니 제대로 된 데이트를 하고 싶었다.
“그러면 밥 먹고 근처 시내에 놀러가 볼까요?
“시, 시내에? 갔다가 들키면 어쩌려고 그래.”
시황의 말에 은비가 살짝 당황해했다. 아무리 모자와 선글라스를 쓰고 돌아다닌다고 해도 알아보는 사람이 있을 게 분명했다.
“걱정 마세요. 제가 준 모자 쓰고 다니면 아무도 몰라볼 거에요.”
“불안한데…….”
“정 불안하면 팔짱끼고 다닐까요? 설마 은비 씨가 이런 화창한 날에 남자랑 팔짱끼고 다닐 거라고 누가 생각하겠어요.”
“그, 그런가?”
팔짱을 낀다는 말에 은비의 표정이 약간 상기되었다. 생각해보니까 모자 쓰고 시황의 품에 푹 안겨서 돌아다니면 정말 사람들이 어떻게 알까 싶다. 평소라면 시내를 돌아다닌다는 생각조차도 안했겠지만 시황과 함께라면 왠지 괜찮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니까요. 저만 믿으세요.”
“아, 알았어. 만약 들키면 네가 책임져야 한다.”
“하하. 그러죠.”
책임지라는 은비의 말에 시황이 가볍게 웃으며 대답했다. 만약 케즈론의 옷장에서 가져온 모자가 아니라면 아까처럼 얼굴을 꽁꽁 둘러 싸매도 분명 은비를 알아보는 사람이 수없이 많을 것이다. 자신이 못 알아보겠다고 말했지만 그거야 은비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기 위한 것일 뿐이었다.
식사를 끝마친 시황과 은비는 차를 타고 근처에 있는 시내로 갔다. 겨울이긴 해도 아직 그렇게 추운 날씨는 아니다 보니 시내에 사람들이 가득했다.
유료주차장에 시황이 차를 세우자 은비가 가볍게 한숨을 내쉰다.
“왜요”
“아, 아무것도 아니거든?”
살짝 긴장한 표정을 짓고 있는 걸 보니 약간 걱정되기는 하는가 보다.
“나가죠.”
시황의 말에 은비가 목도리와 모자를 쓰고 차에서 내렸다. 두껍긴 했지만 세련된 코트에 타이트한 바지를 입은 은비의 스타일은 이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도 한눈에 들어올 정도로 대단히 뛰어났다.
차에서 내린 은비가 재빠르게 시황의 팔짱을 끼고 꽉 달라붙었다. 인기가 생긴 이후로 이런 시내에 혼자서 다니기란 불가능에 가까웠기 때문에 묘하게 긴장된다. 시내를 걷는 다는 건 옛날에는 너무나 당연하고 평범한 일이었는데 갑작스럽게 생긴 인기는 자신의 모든 것을 바꾸어 놓았다.
“처음이라 어딘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가보죠.”
시황은 길도 모르면서 무작정 걸어 나갔다. 순식간에 수많은 사람들의 물결에 휩쓸린다. 거리에 수많은 사람이 있었지만 발군의 스타일을 자랑하는 은비의 모습에 남자들이 한 번씩 은비를 쳐다봤다.
“오, 몸매 쩐다.”
“얼굴은 잘 모르겠는데 몸매는 진짜 개쩌네. 개꼴린다. 헉헉.”
어떤 남자들은 은비의 몸매를 보고 천박한 말을 내뱉기도 했지만 자신이들이 말한 사람이 은비라는 사실은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아무도 못 알아보죠? 좀 더 고개 들고 걸으셔도 돼요.”
시황의 말에 은비가 슬쩍 주변을 둘러봤다. 남자 몇 명이 자신을 쳐다보는 걸 보기는 했지만 그건 그냥 여자라 쳐다본 거지 자신이 연예인임을 알고 보는 건 아니었다. 수많은 팬들을 상대하다 보니 그런 걸 구별하는 눈이 자동적으로 생긴 것이다.
이쯤 되자 은비도 약간은 안심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모자를 쓴데다 시황과 팔짱을 끼고 걸어가니 사람들은 자신이 정은비라는 사실을 전혀 모르는 듯 했다. 약간은 구부정하던 은비의 가슴이 펴지고 좀 더 자신감 있게 걸음을 옮긴다.
그렇다고 시황과 은비가 특별히 뭘 하는 건 아니었다. 그저 연인들이 그러하듯 시내를 돌아다니며 이것저것 액세서리를 구경하기도 하고 옷 가게에 들러서 옷을 보기도 했다.
“제가 인형 뽑아 드릴게요.”
“뽑을 줄 알아?”
시황은 길가에 있는 인형 뽑기 기계에 서서 말했다. 안에는 유명 애니메이션인 보노보노의 캐릭터 인형들이 가득 들어 차 있었다.
1000원을 넣은 시황은 신중하게 레버를 조절했다. 보통 이런 뽑기 기계는 기계의 쥐는 힘이 얼마냐, 턴을 했을 때 인형을 잡았던 기계손이 힘을 얼마나 풀 것인가 등을 주인이 마음대로 설정할 수 있었기 때문에 몇 천원 가지고는 인형을 뽑기가 상당히 힘들었다.
“에이, 실패했잖아.”
이 기계도 난이도가 제법 어려운지 분명 인형을 제대로 집었음에도 턴을 하며 인형을 잡았던 기계손이 활짝 벌어졌고 인형은 맥없이 추락하고 말았다.
“이번엔 성공할게요.”
그냥 잡는 걸로는 인형을 뽑는 게 불가능했기 때문에 시황은 마기를 끌어올려 운동능력을 폭발적으로 증가시켜 더욱 더 세밀하게 레버를 조절했다. 마치 기계손과 한 몸이라도 된 듯 1mm의 오차조차 없이 완벽하게 원하는 지점에 기계손을 놓을 수 있었다.
버튼을 눌리자 기계손이 내려가며 인형의 옷 사이에 들어갔고 턴을 하며 기계손이 벌어졌음에도 전혀 떨어지지 않았다.
“헐, 대단하다. 어떻게 그 사이에 집어넣은 거야?”
“이 정도는 보통이죠.”
시황이 웃으면서 말하며 같은 방식으로 인형을 한 번 더 뽑았다. 인형을 뽑으려고 마기까지 쓰는 건 좀 지나치기는 했지만 이런 식으로 마기를 사용하면 마기를 컨트롤하는 능력이 발달해서 정교한 움직임이 가능하다.
딱히 싸울 일이 없다보니까 예전에는 권법 수련하는 걸 조금 등한시 한 것도 있었는데 톨레이만을 만난 이후로 매달 격투게임에서 목숨을 건 사투를 벌이니 자동적으로 권법 수련을 열심히 하게 된다.
“헐, 대박.”
“하나는 제가 갖고, 하나는 은비 씨가 가지세요.”
“고마워.”
시황이 준 인형을 은비가 기분 좋게 받아든다. 이런 인형이야 사려고 마음먹는다면 수십, 수백 개는 더 살 수 있었지만 그렇게 사는 거랑 시황이 직접 뽑아준 거랑은 그 가치가 달랐다. 인형이 너무 귀엽고 예뻐 은비는 인형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었다.
그 뒤로도 계속 시내 곳곳을 돌아다녔는데 이젠 완전히 자신감을 찾은 은비가 시황을 끌고 다니며 온갖 가게를 다 돌아다녔다. 평범한 연인과도 같은 이 데이트에 완전히 재미가 들린 듯싶었다.
사실 연예인이라는 게 참 고달픈 게 이런 평범한 일조차도 사람들의 시선 때문에 못하는 일이 빈번하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아무런 문제가 없을 말조차도 연예인이라는 이유만으로도 비난 받고, 심지어 얼굴이 안 예쁘다는 이유만으로도 온갖 수치스러운 욕을 얻어먹으니 스트레스를 안 받을 수가 없는 것이다.
“아, 재밌다.”
“벌써 4시네요.”
얼마나 시내를 돌아다녔는지 벌써 오후 4시가 넘었다.
“그럼 이제 영화 보러 갈래? 이 근처에 내가 말한 DVD방 있거든.”
“그렇게 해요.”
시황은 은비를 따라 길을 걸었다. 제법 큰 시내라 조금 걸어서야 은비가 말한 DVD방에 도착할 수 있었다. 예상하기는 했지만 생각과 다르게 상당히 깔끔한 곳이었다. 음침한 조명에 어두운 공간이 아닌 밝고 환한 실내에 귀엽게 생긴 여자 아르바이트생이 카운터에 있었다.
DVD를 고른 시황은 배정받은 방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밝고 화사한, 퇴폐적인 분위기라고는 전혀 없는 곳이기는 했지만 막상 방 안에 들어가자 창문 하나 없이 공간이 완벽하게 밀폐되어 있었다. 여기까지면 영화소리 방음 때문에 그렇구나 할 텐데 방 안에는 침대처럼 보이는 커다란 소파가 놓여 있었고, 거기다 뭐에 쓰라는 건지 모르겠지만 샤워실까지 존재했다. 소파야 누워서 볼 수도 있으니 그러려니 해도 도대체 영화를 보면서 샤워할 일이 어디 있다고 샤워실을 마련해둔 걸까?
“여기 엄청 편하지? 누워서 볼 수 있게 커다란 소파도 있고 화장실까지 안에 있어.”
은비는 무슨 이유로 큰 소파와 샤워실이 있는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러니까 당당하게 시황을 여기에 데리고 온 거기는 하지만 말이다.
“그러게요. 엄청 편하네요.”
시황은 아무것도 모르는 척 하며 은비에게 말했다. 그리고는 방금 가져온 외국 로맨스 코미디 영화를 DVD에 넣고 돌린 뒤에 불을 껐다. 방이 완전 어둑해지면서 제법 극장 같은 분위기가 난다.
소파에 시황이 눕자 은비가 그 옆에 눕는다. 전면에 100인치 정도 돼 보이는 흰색 천에 프로젝터가 영상을 뿌리며 영화가 시작한다.
하지만 시황은 영화보다는 잿밥에 더 관심이 많았기 때문에 영화가 시작되고 중간중간 은비를 슬쩍슬쩍 바라봤다. 방이 어두컴컴했지만 이런 어둠은 시황에게 별다른 문제가 되지 않았다.
시황은 살짝 기회를 엿보다가 은비의 손을 잡았다. 전에도 만져봤지만 은비의 손은 가늘고 길면서 비단결같이 부드러웠다.
갑자기 시황이 손을 잡자 은비가 움찔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딱히 뿌리치거나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시황이 손을 잡은 이후로 그쪽에 자꾸 정신이 쏠려서 영화에 하나도 집중이 되질 않았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손을 만지작거리던 시황이 자신의 배에 손을 갖다 대었다.
“뭐, 뭐하는 거야. 바보야.”
“배 만지고 싶어서요.”
“가, 갑자기 배를 왜 만져.”
시황이 너무 당당하게 말하자 은비가 당황한 목소리로 말했다. 바닥이 따끈따끈하고 방이 살짝 더울 정도라 코트와 모자는 옷걸이에 이미 걸어뒀기 때문에 간단한 니트밖에 입고 있질 않았다.
“만지면 안 돼요?”
약간 실망한 듯한 시황의 목소리에 은비가 우물쭈물한다. 이 와중에도 시황이 니트 안에 손을 집어넣어 배를 슥슥 쓰다듬는데 이게 묘하게 기분이 상당히 좋았다. 그나마 요즘 다이어트 때문에 뱃살이 쏙 들어가서 다행이지 뱃살이 있었으면 절대 못 만지게 했을 것이다.
“그, 그럼 조금만 만져.”
“고마워요.”
시황이 뜬금없이 배를 만진 건 얼마 전 인터넷에서 한 가지 재미난 글을 봤기 때문이다. 자기 남자 친구가 자꾸 배를 만져도 되냐고 물어보는데 도대체 왜 배를 만지겠다는지 모르겠다는 글이었다. 사실 남자가 여자의 배를 만지는 이유는 뻔했기 때문에 가슴을 만지기 위한 중간 거점이니 전략적 요충지니 하는 우스꽝스러운 댓글이 많이 달렸었다.
시황도 그것과 아주 똑같은 이유에서 은비에게 배를 만져도 되겠냐고 한 것이다. 저번에 만났을 때는 은비와 키스를 하기는 했지만 만난지 제법 오래 된지라 갑자기 가슴을 만지는 건 좋지 못한 행동이었다. 평소라면 키스를 하며 그런 분위기가 되도록 이끌었겠지만 지금은 영화를 보는 중이니 키스보다는 배를 만지는 게 더 나았다.
은비는 자꾸 자신의 배를 쓰다듬는 시황이 신경 쓰였다. 기분이 제법 좋기는 했지만 괜히 가슴이 떨리고 호흡이 조금 가빠졌다. 그런데 배꼽 주위를 쓰다듬던 시황의 손이 점점 올라오기 시작했다.
어떻게 저지할 사이도 없이 어느새 시황의 손이 브래지어의 바로 아래까지 올라와 있었다. 조금만 더 손을 움직이면 당장에라도 가슴이 만져질 위기. 하지만 은비는 움찔하며 몸을 살짝 떨기만 했을 뿐 별다른 제지는 하지 않았다. 하지만 어두운 방 안에서 구별이 갈 정도로 얼굴이 엄청나게 달아올라 있었다. 제지를 안 한 게 아니라 너무 당황해 못한 것이다.
“배, 배만 만진다고 했잖아.”
은비의 목소리가 크게 떨리고 있었다.
============================ 작품 후기 ============================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