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07 ------------------------------------------------------
서울로
“야, 쟤 오줌 쌌어?”
“진짜네. 왜 저래? 미친 거 아냐?”
평소 직원들 사이에서도 덕망이 좋지는 않았는지 남자가 바닥에 오줌을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는데도 다들 선뜻 다가가서 도와주기 보다는 기분 나쁘다는 듯 쳐다보며 수군수군 거리고 있었다.
“오빠 얘기 끝났어요.”
“어떻게 됐어?”
시황이 출입문 근처의 의자에 앉아서 상황을 훑어보는 사이에 지숙이 후련한 표정으로 시황에게 와서 말한다.
“오늘 바로 그만둬도 된데요. 어제까지 일한 건 통장에 넣어주신다고 하네요. 그나마 여기가 아르바이트생이 많아서 제가 바로 그만 둘 수 있어서 다행이에요.”
“잘 됐네. 그러면 가자. 집에서 준비할 거 준비해서 다시 올라가야 하니까.”
“네. 근데 무슨 일 있었어요?”
시황과 말을 하다 가게 분위기가 조금 이상한지 지숙이 슬쩍 둘러보며 말했다. 아까 전까지 분명 괜찮았는데 바지가 축축이 젖은 남자, 그것도 자신에게 치근덕거려서 엄청 귀찮았던 남자가 굴욕과 두려움이 뒤섞인 표정으로 엉거주춤 화장실로 가는 게 보였던 것이다. 물을 엎지른 건가?
“아무 일도 없어. 나가자.”
“네. 오빠.”
고개를 갸웃한 지숙이 시황과 함께 가게를 나왔다.
시황은 슬쩍 뒤를 돌아 가게를 잠시 쳐다봤다. 얼굴이 일그러진 아르바이트생 몇 명이 바닥을 청소한다. 노골적으로 싫은 표정.
아주 잠깐 일어난 일이었지만 사람들에게 호감을 얻는 게 왜 중요한지가 크게 드러났다. 만약 저 남자가 매우 착하고 주변 사람들로부터 덕망을 얻었다면 저런 결과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어쩌면 싸움이 일어날지도 모르는 순간,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시황을 말렸을 수도 있고 남자에게 무슨 일이냐고 물어봤을 수도 있다. 호감도가 마이너가 되면 모르는 사람만 못하게 되어버리는 것이다.
시황은 새삼 호감도의 중요성을 느끼며 지숙과 걸음을 옮겼다.
차가운 바람이 불어온다.
옷과 필요한 물품 등을 가져온 지숙은 은지가 사는 오피스텔에 짐을 푼 뒤에 시황과 함께 바로 카페로 갔다. 오피스텔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이라 시황과 함께 금방 카페에 도착할 수 있었다.
카페 케즈론의 익숙한 간판을 보자 지숙은 그제야 돌아왔다는 사실을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마치 고향에 돌아온 듯 마음이 편안해진다.
딸랑.
카페 문을 열고 들어가자 은지가 한창 일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사람이 제법 많아 조금 바빠 보였다.
“은지야!”
“어? 지숙아. 어떻게 된 거야?”
지숙이 너무나 반가운 표정으로 은지에게 다가가서 말을 걸자 일을 하던 은지가 화들짝 놀라며 지숙을 쳐다봤다. 어제부터 시황이 안 보이기에 어디 갔나 했더니 지숙을 데리러 갔을 줄이야!
“그건 여기서 말하기엔 너무 길어서 나중에 집에 가서 얘기해줄게. 하여튼 오랜만에 보니까 너무 반갑다. 은지야.”
“지숙이 너 부산 내려가고 내가 얼마나 쓸쓸했는지 아니?”
지숙과 은지는 몇 달 만에 만난 게 정말 반가운지 기쁜 표정을 가득 지으며 얘기를 나눴다. 시황은 신기한 눈으로 지숙과 은지를 바라봤다. 자신을 차지할거라고 서로 싸울 때가 엊그제 같았는데 몇 달 만에 만났다고 이렇게 우애 좋게 행동하다니! 이러면 나중에 섹스할 때도 우애 좋게 같이 해주려나?
“지숙아, 오늘은 쉬고 내일부터 은지한테 카페 일 어떻게 하는지 배워.”
“네. 오빠.”
“어? 오빠. 은지도 카페 일 하는 거에요?”
은지가 궁금한 표정으로 묻는다.
“응. 서울에 가면 너희 둘이서 잘 관리해줘야 하니까.”
“아…….”
이해했다는 표정을 지은 은지는 기쁜 웃음을 지었다. 아무래도 혼자보다는 친한 친구인 지숙과 같이 일하는 게 훨씬 나을 테니까.
시간은 금방 흘러 어느새 교대 시간이 됐다. 시황은 찬미에게 적당히 설명하고는 은지와 지숙과 함께 퇴근을 했다.
시황은 아루가 기다리는 집에 들르지도 않고 바로 은지의 집에 들어갔다.
“간만에 오니까 마음이 편해져요.”
지숙이 숨을 깊게 들이키며 말했다.
“나도 혼자 지내기 쓸쓸했는데 지숙이가 와서 다행이야.”
그런데 반가워하던 아까전과 다르게 은지는 조금 어색한 표정으로 말했다. 막상 집에 오고 나니까 더 이상 시황과 단 둘이서만 있기 힘들다는 사실이 떠오른 것이다. 이전에는 일을 끝내고 오면 시황과 TV를 보기도 했고 침대에 알몸으로 누워서 이런저런 애기를 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젠 지숙이 있기 때문에 그런 행복한 일상을 보내기가 불가능해졌다.
“배고프다. 우리 밥부터 먹자.”
“네. 그렇게 해요. 뭐 시킬까요?”
시황과 단 둘이 있으면 자주 배달 음식을 시켜 먹다보니 은지의 입에서 자연스럽게 말이 나왔다.
“지숙이도 왔는데 나가서 먹자. 내가 사줄게.”
“우왕, 오빠 고마워요.”
지숙이 기뻐하면서 시황을 끌어안았다. 넓고 탄탄한 시황의 가슴에 안겨 얼굴과 몸을 비비적거리는 지숙을 보자 은지는 순간 가슴에서 뭔가가 치밀어 오르는 걸 느꼈다. 분명 처음 지숙을 봤을 때는 너무 오랜만에 보는 거라 기쁜 마음뿐이었는데 지금은 그런 마음 따윈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질투심이라는 감정만 생겨났다.
그런 은지의 마음도 모르고 시황의 안고 비비적거리던 지숙이 애인처럼 시황의 팔짱을 꼈다. 그러자 은지도 참지 못하고 재빠르게 시황의 팔짱을 낀다.
“잠깐만. 이건 좀 이상하지 않아?”
보통 여자 친구와 팔짱을 끼는 건 솔로를 제외하면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두 명의 여자와 객관적으로 봐서 예쁘다고 할 만한 여자와 동시에 팔짱을 끼는 건 너무나 이상한 모습이었다.
아마 이대로 길거리를 나가면 지나가던 사람들이 전부 쳐다볼 것이고 어쩌면 저번처럼 사진에 찍혀 인터넷에 올라올지도 모른다.
“저도 팔짱 끼고 싶은 걸요. 오빠.”
은지가 말했다.
“은지야, 오빠가 불편해 하니까 팔짱 풀어. 내가 대신 끼고 있을게.”
지숙이 어색하게 웃으며 말한다.
“그러지 말고 지숙이 네가 푸는 건 어때? 팔짱 끼는 거 보다 주머니에 손 넣는 게 훨씬 더 따듯할걸?”
“넌 방금 전까지 일 했잖아. 팔짱 끼는 일은 내가 할 테니까 빨리 풀어.”
둘 다 웃고는 있는데 입 꼬리만 올라갔을 뿐 눈은 하나도 웃고 있지 않았다. 모르는 사람이 봐도 억지로 웃는다고 느껴질 정도로 말이다.
“내가 왜?”
“은지 네가 힘들까봐 그러는 거지. 내 마음 좀 알아줄래?”
“나도 너 생각해서 그러는 거야. 그리고 지숙아. 그리고 네가 오래 있다가 오랜만에 와서 아직 분위기 파악을 잘 못하는 거 같은데, 나랑 오빠는 맨날 이렇게 팔짱 끼고 다녔어.”
“야! 강은지! 빨리 팔짱 낀 거 안 풀래? 내가 오빠랑 팔짱 낀다니까!”
“왜 소리를 치고 그래? 옆집에 피해를 주잖아.”
결국 참지 못한 지숙이 은지에게 크게 소리쳤다. 그러자 은지가 매너 없이 소리친다는 듯한 표정으로 지숙을 나무란다.
분명 아까 만났을 때만 해도 옛날의 그 은지와 지숙이 맞나 싶을 정도로 우애 있는 모습이었는데 불과 하루가 지나기 전에 옛날의 그 앙숙으로 되돌아와 버렸다. 덕분에 그럭저럭 웃고 있던 입매도 어느새 사라져버렸다.
지숙은 화가 난 표정으로 은지를 쳐다봤다. 아까 전에는 은지를 봤을 때 기뻤던 감정이 마치 거짓말 같다. 아빠 공장이 망하면서 심적으로 너무 힘들다보니 옛날에 은지와 티격태격하던 게 미화가 되었을 뿐이었다. 다시금 안정된 생활로 돌아오자 예전과 똑같은, 아니 그보다 더 짜증이 났다.
“이러다 끝이 없겠네. 은지야, 지숙아. 둘 다 팔짱 풀고 그냥 걸어가자.”
“야! 강은지, 네가 먼저 풀어.”
“싫은데?”
시황의 중재에도 지숙과 은지는 한참동안 실랑이를 벌였고 결국 하나둘셋에 동시에 푸는 걸로 합의를 보고서야 시황은 겨우 해방될 수 있었다. 자신을 가지기 위한 이 여자들의 싸움이 좋기는 하지만 때때로는 도를 지나쳐서 피곤하기 까지 하다.
지숙과 은지와 팔짱을 끼지 않았지만 시황의 양옆에 딱 달라붙어서 있었다. 이것도 좀 불편하고 보기에 약간 이상하기는 했지만 그나마 팔짱을 끼는 거 보다는 나았다.
시황은 은지와 지숙을 데리고 대학교 앞 시내에 있는 한우고기 전문점으로 갔다. 그간 고생했을 은지와 지숙이 한우를 먹고 힘 좀 내었으면 하는 마음에서였다.
“오빠, 고마워요. 잘 먹을게요.”
“고맙긴.”
자리에 앉은 은지가 시황에게 감사의 인사를 했다.
“오빠, 다음에 돈 벌면 제가 맛있는 거 사드릴게요.”
“하하. 고마워.”
지숙도 질세라 바로 말한다. 그나마 아까처럼 싸우지는 않았지만 시황의 맞은편에 앉은 은지와 지숙이 묘한 신경전을 벌인다. 그나마 다행스럽게도 신경전이상으로만 끝났다는 점이다.
고기집 아르바이트를 해서인지 지숙이 능숙하게 고기를 구웠고 맛있게 익은 고기들을 시황이 앉은 쪽으로 가져다주었다.
너무 많이 먹어 더 이상 먹을 수 없을 정도로 고기를 먹은 시황과 은지, 지숙은 마무리로 된장찌개에 밥까지 먹었다. 이렇게 많은 먹은 적은 또 오랜만이라서 엄청난 포만감에 바지가 조일 정도였다.
고기집을 나온 시황과 은지, 지숙은 이런 저런 얘기를 하며 오피스텔로 돌아왔고 자연스럽게 겉옷을 벗었다.
“배불러서 그런지 졸린다.”
지숙이 소파에 앉으며 말했고 은지도 그 옆에 앉는다. 겨울이다 보니 겉옷을 벗었음에도 청바지와 두꺼운 재질의 상의를 입고 있어 속살은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잠깐 TV나 보자.”
시황도 코트를 벗은 뒤에 소파에 앉았다. 그러자 당연하다는 듯 은지와 지숙이 들러붙었는데 상당히 밀착을 했음에도 옷이 두껍다보니 부드러운 살결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약간의 아쉬움을 느끼며 시황은 TV를 켜고 채널을 돌렸다. 시황은 특별히 TV를 보지는 않아 별 생각 없이 채널을 돌렸는데 순간적으로 은비의 얼굴이 나왔다.
“어? 은비네.”
“소진 언니 나오는 드라마네요.”
시황의 말을 들은 은지가 드라마를 보며 말했다. 드라마를 안 봐서 어떤 상황인지는 모르겠지만 은비가 못되게 생긴 아줌마와 싸우는 장면이었다. 어찌나 연기를 잘하는지 순식간에 드라마에 몰입이 될 정도였다.
“연기 잘하네.”
나중에 서울 가면 은비보고 아루에게 연기나 좀 가르쳐 달라고 부탁해야겠다. 집에만 있던 예전과 다르게 아루가 제법 활발하게 돌아다니며 카페에도 자주 놀러왔지만 평범한 여자애들에 비하면 여전히 부족한 점이 많았다.
은비가 나오던 장면이 지나고 이어서 이상한 남자와 소진이 등장했다.
“아, 그래. 은지야, 소진이는 어디서 사는지 알아?”
“소진 언니요? 자세히는 모르는데……. 왜요?”
“우리도 이제 서울에 갈 건데, 어디 사는지 알아두면 좋잖아.”
“아……. 그러면 제가 나중에 물어볼게요.”
은지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생각해보니 서울에 가면 소진이랑도 자주 만나게 될 거 같았다. 소진도 시황과 친분이 있으니 분명 친한 연예인들을 카페에 데리고 올테고 그러다보면 혹시 다른 연예인하고 친분이 생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왠지 기대감이 잔뜩 생긴다.
“오빠 서울 어디로 가실 거에요?”
“아직 확실히 정하진 않았어. 대학 발표도 나야하고 카페에서 너무 멀어도 안 되고……. 생각보다 고르기가 까다롭네.”
지숙의 물음에 시황이 대답했다. 카페에서 틈틈이 어디에 집을 살지 제법 찾아봤지만 아직 정해진 것들이 없다보니 확실히 어디라고 확실히 정하기가 어려웠고 또, 인터넷으로만 정보를 확실히 알기는 어려워 직접 서울에 가봐야 할 거 같았다.
잠깐 고민하던 시황은 생각 난 김에 은비의 시간이 될 때 서울에 가기로 마음을 먹었다. 직접 돌아다녀 봐야 대충 위치가 어떤지 느낌이 올 테고 어느 집이 괜찮은지 확인도 할 수 있었다. 옷을 살 때도 인터넷에서의 정보만 보고 사면 사이즈를 제대로 몰라 작거나 큰 옷이 오는 경우도 허다한데, 집은 오죽하겠는가? 직접 가서 확인해보는 게 답이다.
“오빠는 그럼 이제 집에 갈게. 둘 다 피곤할 텐데 푹 쉬어.”
바로 은비와 통화를 해봐야겠다는 생각에 시황이 은지와 지숙에게 말했다.
“네? 하나도 안 피곤해요. 오빠. 좀 더 놀다가 가요.”
“맞아요. 왜 지금 가려고 하세요.”
시황이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하자 은지와 지숙이 못 가게 막는다. 밤에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이 남았는데 이대로 보낼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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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