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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적인
“말씀 편하게 하세요.”
“어머, 그래도 될까?”
은지의 말에 유추해 볼 때 시황이 돈을 빌려줄 듯해서 그런지 은지의 엄마는 시종일관 아주 만족스러운 웃음을 짓고 있었다. 처음 시황을 봤을 때 고생 한번 안 한 듯한 흰 피부와 순수한 느낌의 얼굴이 상당한 호감으로 다가왔다. 안 그래도 돈 문제 때문에 하루하루가 힘들고 고역인데 은지가 별로 인성이 좋아 보이지 않는 이상한 사람을 데리고 왔으면 지금처럼 절대 웃고 있지 못했을 것이다.
물론 사람이라는 게 첫인상만 보고 알 수는 없는 거지만 수십 년 동안 세월을 살아오면서 그 사람의 행동거지나 얼굴을 보면 인품을 짐작하는 눈을 갖게 되기 마련이고 은지의 엄마와 같은 보통의 어른들은 그런 느낌을 상당히 중요시 여겼다.
“은지는 학교 다닐 때 만났어요.”
“어머, 그래? 은지 요게 정말 앙큼하다니까. 이런 멋진 남자 친구 사귀고 있으면서 엄마한테 말도 안 하고.”
“아니라니까. 엄마. 아직은 그냥 친한 오빠야.”
은지는 엄마의 말에 쑥스러운 표정을 지으면서 말했다. 하지만 중간에 아직은 이라는 단어를 끼어 넣어 나중엔 사귀게 될 거라는 은근한 뉘앙스를 풍겼다.
“얘도 부끄러워하기는.”
시황은 그런 얘기를 듣고도 그저 웃기만 할 뿐 딱히 직접 나서서 별다른 사이가 아니라고 얘기하지는 않았다.
그래서인지 은지의 엄마는 시황에 대해 더 자세히 알기 위해서 이런 저런 것들을 물었는데 보통 아줌마들이 묻는 질문들이 그렇듯 약간 불편하게 느낄 수도 있는 것들이었다.
“부모님은 뭐하셔? 이렇게 멋진 아들 둬서 정말 좋으시겠네.”
“엄마. 그런 거 좀 묻지 마. 어휴 진짜.”
“얘는. 이게 어때서 그러니?”
너무 사적인 질문을 하자 은지가 시황의 눈치를 보며 엄마에게 한 소리를 했다. 아까부터 민감한 질문을 하니 불편해서 견디기가 힘들었던 것이다.
“부모님은 지금 몸이 조금 안 좋으셔서 집에서 쉬고 계세요.”
“어머, 그래? 건강이 가장 중요한데…….”
“엄마, 아빠는 언제 오는 거야?”
“조금 있으면 오실 거야.”
은지가 흐름을 끊기 위해 엄마에게 계속 말을 걸었지만 엄마는 그런 어설픈 수에 넘어가지 않고 계속 시황에게 무언가를 물었다.
“카페 장사는 잘 되고?”
“네. 나름 괜찮게 되고 있는 편인데…….”
시황이 적당히 대답을 하려는데 현관문이 열리면서 조금 덩치가 있는 중년의 남성이 거실로 들어왔다. 은지의 아빠인 듯 하다.
“아빠.”
“은지야 왔어?”
그런데 돈 때문에 꽤나 힘들긴 힘들었는지 은지의 아빠는 수염도 거칠하게 나있었고 얼굴이 퍼석퍼석하게 수척한 느낌까지 주었다. 덕분에 권위적이라는 인상은 크게 들지 않았다. 충분히 대화가 통할 거 같다.
“안녕하세요. 강시황입니다.”
“아, 반갑네.”
시황이 인사를 하자 은지의 아빠가 손을 내밀어 악수를 하며 말했다.
“앉게.”
시황이 거실에 앉자 은지의 아빠가 그 맞은편에 앉아 시황을 가만히 응시했다. 이런 상황 자체가 상당히 어색할 수 있었지만 시황은 결혼허락을 받으러 온 게 아니라 사업에 관한 얘기를 하러 온 것이기 때문에 위축될 이유가 전혀 없었다. 흔히 하는 표현으로 지금 시황은 갑의 입장이지 을의 입장이 아니었다.
“어머, 난 과일이나 좀 깎아와야겠다.”
은지의 엄마가 부엌으로 갔다.
“아빠, 오빠가 사업 관련해서 얘기를 하고 싶다고 해서 데리고 왔어요.”
“음…….”
은지의 말에 은지의 아빠가 조금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 나이가 어떻게 되나?”
“26살입니다.”
“은지에게 말을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많이 힘들다네.”
은지의 아빠는 씁쓸한 표정으로 말했다. 은지의 엄마는 은지가 돈을 빌려줄 사람을 구했다고 해서 주변 아는 사람들에게 돈을 빌리다 빠르게 집으로 온 건데 생각보다 나이가 너무 어렸다. 혹시나 하는 마음이었는데 커다란 절망감이 생긴다.
“대충은 들었습니다.”
“마음은 고맙네만 자네가 어떻게 빌려줄 수 있는 금액은 아니네.”
“아빠…….”
한숨을 쉬며 말하는 아빠의 표정을 보며 은지는 눈물을 글썽거렸다. 자신이 생각했던 것 보다 집이 더 많이 힘든 거 같았다. 괜히 엄마가 소진 언니에게도 돈을 더 빌려 달라는 게 아니었다. 이런 비극이 자신에게 닥쳤다는 게 정말 견딜 수 없이 슬프다.
“제가 화장품 사업을 하려고 준비 중이었습니다.”
갑작스런 시황의 말에 은지의 아빠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원래는 공장을 사고 직접 운영할까 고민도 했었습니다. 그런데 아버님도 아시다시피 제 나이도 어리고 경험도 미천해서 신경써야할 부분이 너무 많더군요.”
“그건 그렇지만…….”
시황이 하는 말의 의미를 대충 이해한 은지의 아빠가 눈을 커다랗게 뜨며 말했다.
“그러던 와중에 은지에게서 아버님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은지가 힘들어하는 걸 보고 도와주고 싶기도 했고 아버님이라면 저의 부족한 부분을 보완해주실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자네…….”
은지의 아빠는 시황에게 무언가를 말하려다 멈추고 시황을 바라봤다. 단순히 입에 발린 소리만 하는 게 아니라 눈과 표정에서 그 진정성이 드러나 있었다. 그리고 은지와 사귄다고 이제 26살밖에 안 된 청년이 돈을 빌려준다고 했다면 사기꾼이라고 의심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처음 집에 왔을 때 은지가 얘기했던 것처럼 돈을 갚아준다는 게 아니라 사업과 관련해서 얘기를 풀어낸다는 점에서 더욱 큰 신뢰가 갔다.
“이거 먹고 얘기해.”
“감사합니다.”
은지의 엄마가 과일을 깎아서 조그만 식탁 위에 올려주었다. 시황은 포크로 과일을 찍어먹었다.
“원하는 게 뭔가?”
“저와 같이 화장품 사업을 해보시지 않겠습니까?”
“화장품 말인가?”
“그렇습니다.”
“흐음…….”
시황의 말에 은지의 아빠는 깊이 고뇌하는 표정을 지었다. 사실 돈을 갚는다고 해서 공장의 미래가 있는 건 아니었다. 경제불황으로 세제의 수요가 감소한데다 친환경세제의 수요 증가로 오래전부터 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그나마 근근이 공장을 유지해오다가 그마저도 힘들게 되어 이런 상태에 된 것이다. 하지만 시황과 함께 화장품 사업을 한다고 해서 성공한다는 보장은 그 어디에도 없다. 어쩌면 더 큰 빚을 남기게 될지도 모른다.
“어떤 화장품을 말하는 거니?”
“제가 하나 가지고 왔으니까 보시지요.”
은지의 아빠가 깊은 고민에 빠져있자 은지의 엄마가 시황에게 물었고 시황은 미리 준비해놓은 화장품세트를 가방에서 꺼내서 은지의 엄마에게 건네주었다.
“어머, 고급스러워라.”
은지의 엄마가 낮은 감탄을 내며 말하자 은지의 아빠와 은지도 궁금한 표정으로 화장품을 바라본다.
“보시면 아시겠지만 제가 팔려고 하는 화장품은 저가의 화장품이 아닙니다. 백화점에서 파는 명품 브랜드를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시황의 말을 들으며 은지의 엄마가 박스를 열고 에센스를 열어 손등에 발라보았다. 그러자 살결이 수분을 머금어 촉촉해지며 화사해진다. 향기도 싸구려 같지 않고 상큼하고 향기로운 꽃향기가 은은히 퍼지는 게 감탄만 나온다.
“좋다. 이거 얼마니? 은지야 너도 써봐.”
“아, 응.”
엄마가 건네주자 은지도 에센스를 손등에 발랐고 일반 제품과 격이 다른 느낌에 감탄을 하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떠니? 은지야?”
시황의 아빠가 궁금한 듯 은지를 쳐다본다.
“좋아. 아빠. 보습도 잘되고 향기도 좋아서 엄청 비쌀 거 같아.”
“흠…….”
은지가 건네주자 은지의 아빠도 향기를 맡아봤다. 대충 스킨, 로션만 쓰는 중년의 남성답게 어느 부분이 좋은지 확실히 알 수는 없었지만 일반 화장품과 다르다는 느낌은 분명히 났다.
“그게 다가 아닙니다. 이 화장품을 바르게 되면 기미와 잡티, 여드름 제거는 물론이고 주름을 효과적으로 개선해 줍니다.”
“그런 건 보통 기능성 화장품에 다 있지 않아?”
시황의 말에 은지의 엄마가 묻는다. 보통 화장품에 상투적으로 들어가는 표현이 저런 잡티 제거와 화이트닝 효과 같은 거였으니까.
“써보시면 아시겠지만 그런 일반 기능성 화장품하고 효과가 다릅니다. 이걸 보시지요.”
시황은 가방에서 타블렛을 꺼내 미리 저장시켜 둔 유미의 사진을 보여주었다. 은지의 엄마는 물론이고 은지의 아빠와 은지까지 타블렛을 관심 있게 쳐다본다.
처음 나온 유미의 사진은 화장품을 바르기 전이라 얼굴 가득 여드름이 나있었다. 그런데 사진을 넘길수록 그 여드름의 수가 상당히 줄어들어 마지막 사진에서는 볼에 조금 여드름이 있을 뿐 대부분의 여드름이 자취를 감추었다. 포샵질을 하지 않았나 싶을 정도로 획기적인 변화였다.
“유미 여드름이 이 화장품 때문에 사라진 거에요?”
“응. 맞아.”
은지가 감탄을 하며 말했다. 유미와 그렇게 친하지는 않아도 시황 때문에 어쩌다 한 번씩 만나기는 했기 때문에 유미의 변화는 어렴풋이 알고는 있었다. 그런데 그게 이 화장품 때문인지는 전혀 몰랐다.
“아는 사람이니?”
“응. 엄마. 오빠가 아는 동생인데 여드름이 정말 많이 없어지긴 했어.”
“그래?”
은지의 엄마가 화장품을 바라본다. 직접 썼을 때도 상당히 좋기는 했지만 기미나 잡티는 물론이고 주름 개선까지 해준다니 상당히 탐이 났다.
“시황아, 이건 얼마니? 제법 비싸지?”
“아직 확실하게 정한 가격은 아니지만 대략 1000만 원이상으로 잡고 있습니다.”
“1000만 원?”
“1000만 원이라니?”
“오빠 1000만 원이요?”
시황의 말에 너무 놀라 은지의 가족이 비명과도 같은 소리를 냈다. 좋은 건 알겠는데 1000만 원이라니? 정말 말도 안 되는 미친 가격이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세상에 누가 화장품을 1000만 원이나 주고 사겠나?”
은지의 아빠가 허탈한 표정으로 말했다. 100만 원이래도 기도 안 찰 텐데 1000만 원은 정말 너무했다.
“이 화장품이 최고급 제품이라서 그렇습니다. 이 제품 말고 일반적으로 만들어 파는 화장품은 보통 명품과 비슷한 가격대를 유지할 생각입니다.”
“자네 포부는 잘 알겠네. 하지만 그게 가능한 일이라 생각하는가? 해외 명품 브랜드라면 모를까 국내 제품을 그렇게 비싼 가격에 팔수나 있을지 솔직히 의문이라네.”
은지의 아빠의 말에 시황은 어떤 식으로 사업을 전개할지 대략적으로 설명해주었다. 하지만 아까 전과 다르게 시황의 설명이 허황되게 들릴 뿐이었다. 그만큼 1000만 원이라는 가격이 가져다 준 충격이 너무나 컸던 것이다.
“불안해하시는 건 이해합니다. 저도 지금 당장 화장품 공장으로 바꿔달라는 건 아닙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자는 건가?”
“제가 준비하지 못한 부분이 많아 화장품 공장을 본격적으로 가동하려면 대략 1년 이상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런 이유로 일단 제가 먼저 필요한 돈을 빌려드리겠습니다. 1년 안에 이 돈을 70%이상 갚으시면 은지 아버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시면 됩니다. 하지만 1년이 지나도 돈을 갚지 못하시면 제가 원하는 대로 무조건 화장품 공장으로 바꿔주셔야 합니다.”
“그, 그런…….”
시황으로서는 크게 손해 보는 일은 아니었다. 돈을 갚으면 갚는 대로 좋고 못 갚으면 화장품 공장을 손쉽게 손에 넣게 되니 목적한 바를 이루게 되는 것이다.
지금 당장 화장품 공장으로 바꾸라는 게 아니라 1년이라는 시간적 여유를 남겨뒀기 때문에 은지의 아빠는 크게 고민을 했다. 하지만 이미 마음속에서는 어느 정도 결정을 내린 상태였다. 어찌됐든 지금 당장 부도가 나는 거 보다는 나았으니까.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하아…….”
시황의 말에 은지의 아빠가 쉽게 대답을 하지 못하고 주저주저했다.
“여보…….”
“아빠…….”
“알겠네. 그렇게 하도록 하지.”
한참을 더 고심하던 은지의 아빠가 결국엔 수락을 하고 말았다. 이게 최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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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