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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
일본이라면 단순히 만화를 재미있게 그리는 것만으로도 흥행하지만 한국에서는 가당치도 않은 일. 노래와 마찬가지로 이슈가 필요했다.
제일 좋은 건 TV나 뉴스 등에 나오는 거겠지만 당연히 이건 불가능한 관계로 조금 다르게 이슈를 끌어볼 생각이었다.
시황은 잠깐 고민하다 소진에게 전화를 걸었다. 밤이 늦어서 내일 전화를 걸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이런 일은 바로바로 하는 게 좋으니까.
[여보세요.]
다행스럽게 소진은 아직도 안 자고 있었다.
[아직 안 잤어?]
[네. 방금 막 녹화 끝나고 왔어요. 이제 씻고 자야죠. 그런데 이 늦은 밤에 갑자기 전화는 왜 하신 거에요? 설마?]
[설마?]
[저한테 고백하시려고?]
소진이 농담조로 말을 한다.
[내가 소진이 좋아하는 거 어떻게 알았어? ]
[하하. 오빠 제법 센스 있으신데요.]
시황의 대답에 소진이 크게 웃으면서 말했다. 당황할 줄 알았는데 재치 있게 받아들여서 상당히 기분이 좋은 듯 했다. 이렇게 소진은 드라마에서는 악녀로 나와도 실제로는 털털하고 더 없이 밝은 연예인이다.
[늦게 전화해서 미안한데 좀 중요한 얘기라서.]
[중요한 얘기요?]
[응. 사실 내가 만화를 그려볼까 생각중인데, 그냥 만화만 그리면 한국에서는 벌어먹고 살기도 힘들잖아?]
[아…….]
소진은 시황이 대충 무슨 얘기를 하는지 느낀 듯 했다.
[내가 소진이 그림을 그려서 택배로 보내줄게.]
[아하, 그러면 그 그림을 오빠가 그렸다고 제 트위터에 올려달라는 거군요. 전에 그 방송한다는 광고처럼요.]
한번 그런 식으로 홍보를 한 적이 있는 소진인지라 이해가 빨랐다.
[아니. 이번에는 내가 그렸다는 게 아니라 팬이 보내줬다는 식으로 올려줘.]
[으흠, 그 정도야 충분히 할 수 있는데요. 대신 그렇게 해주시면 제 부탁 하나 들어주시는 거에요?]
[부탁? 어떤 거?]
소진의 말에 시황은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 보통 은지나 지숙, 찬미, 유미, 현주라면 데이트를 해달라거나 섹스를 해달라는 부탁을 할 텐데 소진과 자신은 그 정도로 친한 건 아닌지라 무슨 부탁을 할지 궁금했다.
[전에 제가 스타탄생M MC 중 하나를 맡았다고 했잖아요.]
[응. 그랬지.]
설마 스타탄생M에 나오라는 부탁인가 싶었는데 그건 이미 신청기간도 끝났고 방송 시작도 한지 오래됐기 때문에 그건 아닌 듯 했다.
[그거 말고 이번에 제가 종편 채널 MC를 하나 더 맡게 됐거든요.]
[오, 요즘 소진이 잘 나가나봐. MC 많이 맡네.]
[제가 요즘 좀 제법 인기가 있죠.]
[하하. 그래?]
능청스러운 소진의 말에 시황은 웃을 수 밖에 없었다.
[하여튼 그 종편 방송 컨셉이 어떤 종류든 그 분야에서 가장 잘하는 사람끼리의 대결이거든요. 그래서 제일 첫 화는 사람들의 관심을 끌 수 있는 아마추어 노래 본좌들의 대결로 정해졌는데…….]
이쯤 듣고도 시황은 소진이 무슨 얘기를 하고 싶어 하는지 알 수 있었다.
[오빠 출연해주실 수 있어요? PD님이 저한테 오빠 얘기를 꺼내길래 제가 한 번 물어본다고는 했거든요.]
[그거 한번만 녹화하는 거지?]
[네. 매주 대결 종류가 바뀌니까 한번만 출연하시면 돼요.]
[그러면 한번 나가볼게. 녹화 한번 하는 거야 충분히 가능하니까.]
[고마워요. 오빠.]
오히려 자신이 고마웠다. 지금처럼 인지도를 올릴 수 있는 기회가 흔치 않으니까. 가수로 데뷔할 생각은 전혀 없었지만 인지도는 될 수 있으면 많이 쌓고 싶었다. 다만, 이렇게 인지도를 올리면 그만큼 생활하기 불편하다는 단점이 있기는 하지만 그거야 아루처럼 마법 아이템으로 어떻게든 수습이 가능 하니까.
[뭐, 그 정도 가지고. 그러면 그림은 어떻게 그려줄까? 혹시 마음에 드는 사진 같은 거 있어?]
[그 사진보고 그려주시게요? 그런데 오빠는 노래도 잘 부르는데 그림까지 잘 그리면 완전 반칙 아니에요?]
[하하. 그냥 보통 수준이야.]
[음, 그러면 제가 코코아톡으로 사진 보내드릴게요.]
[응.]
[아, 그리고 그 방송에 관한 건 언젠지는 저도 잘은 모르겠는데 나중에 다시 전화가 갈 거에요.]
[그래. 알았어.]
소진과 약간의 잡담을 더한 시황은 전화를 끊었다. 원래는 그냥 그림만 그려준다고 할 생각이었는데 어쩌다보니 방송에도 출연하게 됐다. 스타탄생M 같은 건 그 기간이 너무 길어서 출연할 엄두가 안 났지만 하루 녹화하는 건 크게 부담이 없어서 괜찮았다. 오히려 그 방송에 출연하게 되면 인맥을 쌓을 수 있을지도 모르니 소진에게 고마워해야 할 판이었다.
띵동.
시황이 생각을 하고 있는 와중에 소진에게서 코코아톡이 왔다. 엄청 빠른 속도다. 코코아톡을 켜고 바로 사진을 확인했다. 연말 시상식에 나갔는지 아름다운 드레스를 입고 있는 소진의 모습이 보였다. 아루나 수란이, 아니 은비보다도 얼굴 자체는 좀 못했지만 소진의 그 독특한 아름다움과 드레스가 조화되어 은근히 상당한 매력을 뿜어내고 있었다.
시황은 바로 코코아톡을 써서 소진에게 보냈다.
[이 사진 엄청 예쁘다. 너무 예뻐서 소진이 안 같은데?]
[이제야 제 미모를 알아보시는군요! 후훗.]
시황의 농담 섞인 말을 소진도 가볍게 받아들였다. 얘기를 하면 할수록 참 마음에 드는 아이다. 처음에는 같이 온 은비에게 눈이 갔는데 얘기를 하면 할수록 소진에게 관심이 끌린다.
소진과 코코아톡을 더 하다 대충 끝낸 시황은 케즈론의 성으로 가서 최하급 마법 물품들을 뒤적거렸다.
[보존용 청결 용지 1000매. 이 용지에 그림을 그리게 되면 다른 이물질이 묻지 않아 청결하고 깔끔하게 유지할 수 있다.]
[그림 보관용 액자. 자유자재로 사이즈가 변하는 액자. 고급스러우면서 튼튼한 재질로 만들어져 벽에서 떨어지더라도 쉽게 부서지지 않는다.]
최하급 마법 아이템들이다 보니까 기능들이 소소하다. 하지만 이정도만으로도 충분하다. 그 뒤에 하급 마법 물품 중에서 그림 그릴 때 쓰는 펜을 하나 골랐다.
[만화용 펜. 얇은 선부터 굵은 선까지 그릴 수 있는 건 물론이고 일정한 굵기의 선으로만 그릴 수 있는 기능이 있다. 따로 잉크를 사용할 필요가 없으며 펜의 뒷부분으로 선을 문지르면 실수한 부분이 깔끔하게 지워진다.]
시황은 그림 그릴 종이와 액자, 그리고 펜을 가지고 오피스텔로 돌아왔다.
“오빠, 저 졸려요.”
시황이 오자 아루가 시황의 품에 안기며 얼굴을 부비적거리며 말한다.
“오빠 할 일 있으니까 오늘은 수란이랑 먼저 자.”
“오빠랑 같이 자고 싶은데…….”
아루가 칭얼거린다.
“아루야, 오빠 말 들어야지.”
“오빠. 그러면 나중에 잘 때 저 꼭 안아주세요.”
“알았어.”
시황은 아루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처음 자신을 대할 때와 다르게 이제는 제법 자신의 의지대로 행동하는 모습이 너무나 흡족하다. 물론 다른 남자한테도 그러면 문제겠지만 아루는 자신 외에 다른 남자는 무서워하면 무서워했지 먼저 다가갈 일은 없었다.
“수란아, 가자.”
“그래.”
수란이도 피곤한지 만화책을 내려놓고 아루를 따라서 2층으로 올라갔다. 2층으로 올라갈 때 슬쩍 보이는 아루와 수란의 흰 허벅지를 감상하던 시황은 탁자에 용지를 한 장 빼서 올려두고 드레스를 입은 아름다운 소진의 모습을 스케치도 하지 않고 그리기 시작했다.
마력 회로를 최대로 가동했기 때문에 금세 흰 종이에 소진의 모습이 채워져 갔는데 마치 실제로 소진이 있는 듯 생동감이 넘칠 정도로 아름다운 그림이 그려졌다. 그런데 이 그림을 그리는 속도가 얼마나 빠른지 일반인은 아무리 연습한다고 해도 절대로 따라잡지 못할 정도였다.
음영까지 다 채워 넣은 시황은 마무리로 오른쪽 아래에 케즈론 마크를 집어넣었다. 이 케즈론 마크가 나중에 아주 큰일을 해낼 것이다.
시황은 다 그린 그림을 액자에 집어넣었다. 마법 아이템인 만큼 고급스러움이 잔뜩 풍기는 액자는 용지 사이즈에 알맞게 줄어들었다.
“휴…….”
마무리가 되자 시황은 멀리서 자신이 그린 그림을 바라봤다. 인터넷에 보면 한 번씩 잘그리는 사람의 그림이 올라와서 감탄성을 자아내는데 시황이 그린 그림은 그런 그림들보다도 한단계, 아니 몇 단계 위의 실력이었다. 완벽한 선의 굵기, 완벽한 음영처리, 완벽한 비율. 사람이 그린 게 맞나 싶을 정도로 섬세하면서도 아름다운, 그렇다고 완벽하게 사실적이기 보다는 손으로 직접그린 멋이 묻어나는 그런 그림이었다.
“호오…….”
자신이 그리긴 했지만 마력 회로의 힘이 99.9% 들어간 그림이다 보니 자기도 모르게 감탄이 자꾸 나온다. 보면 볼수록 정말 아름답고 멋진 그림이다. 이 예술가적인 마력 회력의 능력치를 더 올리면 어떤 그림이 나올지 궁금할 정도다. 하지만 이정도로도 노래와 그림 실력은 차고도 넘치니 이 예술가 마력 회로의 능력치를 더 올리기 보다는 새로운 마력 회로를 선택할 생각이었다.
그림을 바라보던 시황은 혼자만 보기 아까워 폰으로 자신이 그린 그림을 찍어서 소진에게 보냈다.
[어때? 괜찮아?]
그리고 코코아톡으로도 감상을 묻는 글을 써서 보냈는데 소진은 벌써 자는 건지 코코아톡 답장이 오질 않았다. 가볍게 실망감을 느낀 시황은 액자를 한곳에 치워두고 샤워를 했다. 이제 슬슬 자야 내일 또 일을 할 수 있으니까.
욕실에서 간단히 샤워를 끝내고 나오자 폰에서 띵동 거리는 소리가 계속 들린다. 폰을 보자 소진에게서 코코아톡 답장이 와 있었다.
[오빠, 씻는다고 이제 봤어요.]
[와, 그런데 그림 진짜 상상초월하게 잘 그리시는데요?]
[이거 벌써 그린 거에요?]
[와, 어떻게 이렇게 그려요?]
[오빠, 왜 대답이 없어요.]
[오빠 자는 거에요?]
답장 안 하면 계속 코코아톡 보낼 기세인지라 시황은 소진에게 전화를 했다. 소진이 바로 받는다.
[코코아톡 많이 보냈네. 나도 샤워한다고 이제 봤어.]
[그래요? 근데 오빠 이거 진짜 오빠가 그린 거에요? 와……. 이거 정말……. 와…….]
소진은 말도 제대로 못하고 감탄하기 바빴다.
[괜찮아?]
[괜찮은 수준이 아닌데요. 이렇게 그림을 잘 그리는 게 정말 말이 되는 거에요? 진짜 대단한데요?]
[마음에는 들어?]
[정말 마음에 들어요. 제 방에 걸어두고 사람들한테 엄청 자랑할 거에요.]
[그래? 하하. 나중에는 좀 더 연습해서 그림에 색도 넣어줄게. 아직 그것까지는 못해서 말이야.]
소진은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했다. 정말 감동 받은 거 같아.
[오빠, 정말 고마워요. 근데 왜 오빠 이름이 아니라 팬이 보냈다고 하라고 하신 거에요? 전 오빠가 그림을 별로 못 그려서 그런 부탁한지 알았는데…….]
시황이 팬이 보냈다고 말하라할 때 소진은 시황의 그림 실력이 썩 좋지 않아 부끄러워서 그런 말을 한 줄 알고 왜 그래야 하냐고 무식하게 이유를 캐묻지 않았다. 그런데 자신의 생각과 다르게 이건 미술가가 그렸다고 해도 믿을, 아니 길거리에서 그림 그려주는 미술가보다 비교도 안 되게 잘 그리는데 왜 정체를 숨기는지 이해가 가질 않았다.
[내가 노래도 잘하는데 그림까지 잘 그린다고 하면 사람들이 배아파할까 봐 그러지. 하하.]
[그러게요. 저도 지금 배가 엄청 아파 오거든요. 그렇게 노래 잘하시면 그림은 못 그리셔야 되는 거 아니에요?]
[하하.]
소진의 능청스러운 말에 시황은 크게 웃었다. 그런데 방금 댄 이유가 완전히 농담으로 한 건 아니었다. 모든 사람이 같을 수는 없는 일이고 분명 자신이 그림까지 잘 그린다하면 열등감을 느끼는 사람이 존재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 사람이 또 전처럼 허위사실이나 분란을 일으킬 가능성이 컸다.
그럴 바에는 이렇게 자잘하게 터트리는 게 아니라 자신의 능력을 한 번에 뻥하고 터트릴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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