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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
“시연 씨, 시황 오빠 좀 도와주시면 안 될까요?”
시연이 자꾸 거절하자 찬미까지 나서서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사실 이럴 필요 없이 어시스트를 뽑으면 되긴 하지만 아직 시황은 그런 어시스트를 부릴 능력도 안 됐고 제대로 된 만화를 그리기 위해서는 처음부터 차근차근 많은 연습을 해나가야 했기 때문에 지금 상태에서는 아마추어이기는 해도 시연에게 배우는 게 제일 괜찮은 선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일반적으로는 프로만화가 밑에서 문화생을 하면서 차근차근 올라가는 게 보통이지만 시황과는 거리가 먼 얘기였다. 어차피 돈 때문에 만화를 그리는 것도 아니었고 그림실력이라면 세계의 그 어떤 만화가와 비교해도 뒤떨어지지 않으니까.
“정말 시간이 없어요.”
“음, 내가 시연이 실력을 몰라서 그러는데, 실력이 괜찮으면 카페 아르바이트 그만 두고 내 만화 그리는 것만 도와줘도 카페에서 일하는 거랑 같은 월급 줄게.”
시황의 파격적인 조건에 시연이 움찔했다. 하루 종일 카페에서 뼈 빠지게 일하는 거랑 자신이 좋아하는 만화를 그리는 거랑 같은 월급을 준다니 혹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정말요?”
“응. 그런데 일단 시연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시험해봐야 하니까 이 종이에 내가 방금 그렸던 걸 다시 간단히 그려볼래? 그림을 꼭 잘 그릴 필요는 없고 그냥 어떤 식으로 그려야 하는지만 보여주면 돼.”
시황의 말에 시연의 얼굴에 잠깐 갈등이 어리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시연은 고등학교 시절부터 만화와 애니메이션을 좋아해서 만화부에 들어갔었고 그때 틈만 나면 만화를 그렸었다. 물론 프로 만화가에 비하면 비교도 안 되는 실력이겠지만 적어도 기본적인 개념은 확실히 알고 있었다.
시황이 카페를 보는 사이에 시연은 테이블에 앉아서 시황이 그렸던 간단한 한 페이지의 만화를 다시금 그리기 시작했다.
그림 자체는 시황이 말도 안 되게 잘 그렸지만 그게 다였다. 만화에 대한 기본적인 기초 자체가 없었던 것이다. 시연은 시황이 나눴던 컷을 새로 분할하고 그곳에 들어가는 연출과 구도를 대략적으로 그렸다. 시연이 아까 말한 콘티였다.
그리고 시연은 그 콘티를 보면서 나름 정성을 들여서 그림을 그렸다. 다른 건 잘 못해도 만화만큼은 잘 그릴 자신이 있었다.
비록 시황보다는 많이 못한 그림 솜씨였지만 만화의 구성이나 연출은 시연 쪽이 비교도 안 되게 뛰어났다. 아마추어이기는 했지만 만화에 대한 내공이 다른 것이다.
“다 그렸어?”
“네.”
시연이 건네 준 원고를 받은 시황은 테이블에 앉아 꼼꼼하게 훑어보았다. 그림 자체야 프로에 비하면 많이 못 했고 자신에게도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미흡했지만 정작 만화의 연출이 뛰어나서 흡입력이 제법 있었다. 이정도면 충분히 배울만한 실력이었다.
“오, 내거보다 훨씬 낫네. 시연이 만화 잘 그리는구나.”
“보통이에요.”
시황의 칭찬에 시연이 가볍게 대답한다. 하지만 입 꼬리가 살짝 올라간 게 딱 봐도 기분이 좋다는 게 보였다. 저 무뚝뚝하고 냉정한 시연이 저렇게 좋아할 줄이야.
“그러면 아르바이트 새로 구할 때까지만 일하고 그 뒤로는 나한테 만화 그리는 법 좀 가르쳐 줘.”
“네.”
“음, 시간은 7시부터 11시 정도까지면 되려나? 이건 일단 나중에 좀 더 생각해보자.”
“네.”
말은 짧았지만 시연의 볼은 약간 상기되어 있었고 별다른 표정을 짓지는 않았지만 상당히 기뻐하고 있다는 게 보였다.
단기간에 만화를 그리긴 어려울 거 같았고 좀 더 숙련이 될 시간이 필요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으리라.
오늘이 인터뷰를 한다는 날이었지만 시황은 특별하게 옷을 신경 써서 입지는 않았다. 평소처럼 몸에 잘 맞는 셔츠와 베이지색의 면바지만을 간단하게 걸치고 카페로 출근했다.
요즘 들어 부쩍 활발해진 아루는 이전처럼 집에만 있는 게 아니라 오늘처럼 간간이 시황과 카페에 나와서 놀기도 했다. 유미와 놀면 좋을 텐데 요즘 유미는 공부한다고 바빠서 시황도 과외할 때나 한 번씩 만나는 정도였다.
“재밌다.”
자전거에서 내린 아루가 기분 좋은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카페를 들어가자 현주가 평소처럼 미리 와서 청소를 하며 기다리고 있었다.
시황을 본 현주는 당장 달려와 진한 스킨십을 하려고 했지만 옆에 아루가 있는 걸 보자 움찔하는 표정을 지었다. 이렇게 이른 아침에 시황과 은밀하게 스킨십 하는 게 하루의 활력소인데 그걸 못하게 되자 갑자기 힘이 빠진다.
“같이 청소하자. 아루야.”
“네! 전 청소 잘 해요.”
시황은 아루와 함께 카페 청소를 빠르게 끝내고 가게를 오픈했다. 너무나 같은 일상이라 약간 무료해질 정도였다.
만화를 그리고는 있지만 볼만한 수준이 되기까지는 제법 시간이 걸렸고 노래도 유투브 조회수 3000만 정도에서 더 이상 오르지 않고 있었다.
카페를 확장할까 해도 몇 달만 더 있으면 서울에 진출할 거라 곤란했고……. 아예 지금 서울로 올라갈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생각해보면 꼭 여기에 있어야 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학교도 자퇴했으니까. 하지만 서울로 가기에는 여자들이 조금 걸렸다. 찬미와 현주는 같이 가더라도 은지나 지숙은 계속 학교에 다녀야 하니까.
“흐음…….”
시황은 어떻게 할지 고민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아직 현실적으로 지금 당장 서울로 가기엔 조금 무리였고 적어도 수능을 치고 대학교 발표가 나야 할 듯 싶었다.
아루가 현주를 도와 일을 하는 중에 전화가 왔다.
걸즈 센스의 기자인가 싶어 전화를 받았는데 의외로 강소진이었다.
[안녕하세요.]
[아, 소진 씨. 안녕하세요.]
은비야 질염을 치료하기 위해서 전화를 걸었다는 이유라도 있지만 갑자기 소진이 전화를 건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요즘 잘 지내시죠? 저한테 문자도 전화도 안 주시고 너무하신 거 아니에요?]
[아하하. 죄송해요. 요즘 조금 바빠서.]
[농담이에요. 그런데 시황 씨는 서바이벌 오디션 프로그램에 안 나가세요?]
[오디션 프로그램이요?]
생각지도 못한 소진의 말에 시황은 당황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프로가 있다는 건 알았지만 나간다는 생각을 해본 적조차 없었다.
[네. 사실 이번에 제가 공중파에서 하는 오디션 프로그램 MC 중 한명을 맡기로 했거든요. 그래서 시황 씨도 출연하면 어떨까 해서 전화한 거에요. 제 생각에는 시황 씨 실력이라면 충분히 우승하실 수 있을 거 같거든요.]
[글쎄요. 약간 부담스러워서.]
시황은 살짝 고민했다. 애초에 자신이 노래를 불러서 유투브에 올린 것도 경험치를 위해서였는데 이렇게 공중파 방송에 나가는 것만으로도 상당한 경험치가 올랐다. 하지만 TV에 출연한다는 자체가 사람들에게 자신의 이미지가 완벽하게 형성될 테고 그러면 득보다 실이 많아질 가능성이 높았다. 앞으로 해야 할 사업이 산더미 같은데 그런데서 이미지 노출하기가 꺼려졌다.
[혹시 생각 있으시면 신청해보세요. 분명 시황 씨면 우승하실 수 있을 거에요!]
[네. 감사합니다. 생각해볼게요.]
[네. 파이팅! 이번 주 토요일 방송도 잘 볼게요.]
[감사합니다.]
전화를 끊은 시황은 소진의 말을 생각하다가 문득 괜찮은 생각 하나가 떠올랐다. 지금 자신이 하고자 하는 사업은 결국 유명 연예인이나 영국 왕실처럼 사회적 영향력이나 고급스러운 이미지에 기댄 것들이다.
“으흠……. 으흠…….”
그런데 지금 자신에게는 그런 유명 연예인에게 다가갈 접점은 전혀 없었고 그 연예인을 생각하는 대로 컨트롤할 자신도 없었다. 그렇다면 자신이 그런 유명 연예인을 만들면 되지 않는가 하는 생각에 이른 것이다.
이 생각들이 옳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나쁘지 않은 느낌이었다. 생각한 사업을 진행하려면 20억이라는 돈으로 많이 부족할 듯 했지만 지금 자신이 무한대로 사용할 수 있는 최하급 장신구도 장신구지만 로즈린이 준 보석함에는 12캐럿이 넘는 다이아몬드가 수북했다. 다만 항상 그렇듯 그 보석의 출처가 불분명한 것이라는 점과 자신의 사회적 위치가 낮다는 게 문제였다.
“음…….”
한참을 이런저런 고민을 하고 있었는데 걸즈 센스의 기자에게서 전화가 왔다.
[여보세요. 시황 님 안녕하세요. 걸즈 센스의 송미란이에요.]
[네. 안녕하세요.]
[지금 다와 가거든요. 카페로 바로 가면 되나요?]
[네. 카페에서 기다리고 있어요.]
[알겠습니다.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전화를 끊고 얼마 지나지 않아 훤칠한 키를 한 여자 한명이 카페에 들어왔다. 어깨에 커다란 카메라를 메고 스키니 청바지를 입은 게 상당히 활달해 보이는 여성이다.
“아! 시황 님 안녕하세요.”
미란은 한쪽 테이블에 앉아 있는 시황을 보고 활짝 웃으면서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여기 앉으세요.”
시황이 맞은편을 가리키자 미란이 살짝 웃으면서 앉는다. 웃음이 많은 여인이었다.
“와, 카페 엄청 예쁘고 좋네요. 사진으로 봤을 때도 좋다고 생각했는데 실물이 훨씬 더 예쁜걸요!”
“고맙습니다. 커피 뭐 드시겠어요?”
“전 카라멜 마끼야또 먹을게요.”
미란의 말에 시황은 현주에게 말해 커피 2잔을 주문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눈을 반짝이는 초롱이 와서 직접 커피를 가져다주었다.
“와, 커피 정말 맛있네요. 저도 나름 커피 매니아인데 이렇게 맛있는 커피는 처음이에요.”
성격이 어찌나 활달한지 잠시도 말을 쉬지도 않는다. 시원시원하게 생긴 얼굴과 훤칠한 키가 어울려서 그런지 상당히 매력적인 여성이다.
“음……. 맛있다.”
정말 맛있는지 미란은 눈을 감고 커피를 음미한다.
“서울에서도 통할 거 같은가요?”
“서울이요? 그럼요. 저도 서울에 있는 청담동이나 신사동 가로수길에 있는 카페 많이 가봤는데, 그 중에서도 독보적인 맛인데요?”
“하하. 감사합니다.”
서울에 진출할 때는 가격을 조금 더 올리고 리첼리아 원두를 조금 더 많이 넣을 생각이었다. 그렇게 된다면 한 번 카페 케즈론의 커피맛을 본 사람이라면 그 맛을 절대 잊지 못할 것이다.
“흠흠, 이제 인터뷰로 들어갈게요.”
“네. 그러도록 하죠.”
시황은 편안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옛날이었으면 엄청 떨었을지 모르겠지만 지금은 그런 긴장감은커녕 여유가 넘친다.
인터뷰 질문은 평이했다. 요즘 인터넷 대세가 됐는데 기분이 어떤지 부터, 과거엔 어땠는가, 좋아하는 노래는 뭔가, 미래엔 무엇을 할건가 등의 질문이었다.
“아, 그리고 어제 인터넷에 보니까 고등학생이랑 연애를 한다는 루머가 있던데 어떻게 된 거에요?”
“네?”
뜬금없는 미란의 질문에 시황은 이해할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자신의 주변에 고등학생이래 봐야 유미뿐인데 그게 인터넷에 뜰 이유가 전혀 없었던 것이다.
“그게… 이런 말하기 조금 곤란하지만 약간 안 좋은 글이라…….”
미란이 말을 살짝 흐렸다.
“잠시 만요.”
시황은 노트북을 켜고 인터넷에 검색을 했다. 그러자 미란이 얘기했던 글들이 몇 개 나온다.
그 글에는 며칠 전 학교 앞에서 유미와 자신이 BMW M6에 탄 모습과 차 안에 있는 모습이 그대로 찍혀져 있었다.
[나 저 여자애랑 같은 고등학교에 다니는데 쟤 원래 중학교 때부터 사귀던 남친 있었거든. 근데 노래 본좌가 돈으로 유미를 유혹해서 남친이랑 헤어지게 한 뒤에 맨날 모텔에 데려간다는 거야. 유미가 싫다는데도 안 가면 막 때리기도 하고…….]
“하…….”
시황은 이런 말도 안 되는 글에 뭐라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거기다 이런 가십거리를 사람들이 얼마나 좋아하는지 벌써 이런저런 사이트에 다 퍼져버렸다. 아무런 근거조차도 없는 글이었지만 BMW M6를 타는 시황에게 돈이 많다는 사실을 바탕으로 한 글이라 사람들은 긴가민가하면서도 대부분 믿고 있었다.
아니, 어쩌면 사실이든 아니든 상관없이 그저 흥미거리를 찾고 있었는데 때마침 걸린 것일 수도 있었다. 어찌됐든 진실이 아닌 그 글에 달린 댓글은 시황을 원색적으로 욕하고 비난하고, 완전 난리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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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치킨이라도 시켜먹고 좀 의욕내서 글을 써봐야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