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드래곤의 유산-72화 (72/629)

0072 ------------------------------------------------------

본격적인 시작

시황은 평소처럼 해가 뜨기 전에 일어나 스마트폰 배터리를 끼웠다. 그러자 예상대로 수많은 문자가 와있었다. 시황은 하나하나 꼼꼼하게 읽었다. 대부분의 내용이 사과하는 거였는데 은근히 지숙은 은지를, 은지는 지숙을 비난하는 내용이 포함돼 있었다.

은지는 시시콜콜하게 이유를 하나하나 다 설명하면서 죄송하다고 한 반면에 지숙은 잘 못했다고 만나서 대화하자고 문자를 몇 개 보내더니 나중에는 아침에 찾아갈 테니 얘기 좀 하자는 문자를 새벽 3시에 보냈었다.

안절부절 못하면서 새벽까지 잠 못 자고 문자를 보냈을 그녀들을 생각하니까 조금 미안하기도 하다.

시황은 답장을 보낼까 하다가 안하는 게 나을 거 같아 간단히 씻고 학교 운동장으로 갔다. 그리고 항상 하던 대로 음양합일공으로 마기를 모으고 운동을 했다.

1500m 달리기는 이제 우스울 정도였다. 힘이 안 든 건 아니었지만 돌고 나서 숨을 몇 번 들이키자 가슴이 진정되고 기운이 생겨난다.

그 뒤에 철봉으로 가 반동을 주지 않고 턱걸이를 했다. 처음 10개는 별 무리 없이 할 수 있었는데 15개가 넘어가자 팔이 부들부들 떨리면서 힘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았다.

한참 숨을 고르다가 턱걸이를 하기 위해 아랫배에 힘을 주자 하단전에 있던 마기가 솟아올라 혈맥을 타고 흘렀다.

끼긱!

마기가 움직이자 움찔했지만 이미 철봉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고 그 순간, 철봉에서 기괴한 소리가 났다.

“뭐, 뭐야.”

깜짝 놀란 시황이 철봉에서 내려와 확인하자 손으로 쥔 부분만 봉이 찌그러져 있었다. 특별히 의식하지도 않았는데 몸이 한계에 처하자 자동적으로 마기가 뛰쳐나온 것이다.

“조심해야겠어.”

수련실에 있는 목각인형과 대련을 하면서 이제 일반인은 자신의 상대가 아니라는 걸 알았다. 육체적인 힘이 아닌 마기를 사용한다면 단 일격에 건장한 성인 남자를 쓰러트릴 자신도 있었다. 하지만 시황은 이런 힘에 취하지 않도록 조심했다.

슬쩍 주변을 둘러본 시황은 아무도 없자 도망치듯 오피스텔로 돌아와 버렸다. 기물을 파손했으니 돈을 물어주고 싶어도 손아귀의 힘으로 봉을 찌그러트렸다는 걸 말하기도 애매했고 시범을 보여주면 그것도 그거대로 문제였다. 앞으로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더 조심해야 될 거 같다.

오피스텔로 돌아온 시황은 지숙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문 앞에 서 있는 걸 발견했다.

“지숙아.”

“꺅! 오, 오빠?”

시황이 부르자 깜짝 놀라 짧은 비명을 지른 지숙은 시황을 쳐다보고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찾아간다고 문자를 보냈는데도 시황에게서 답장이 전혀 없어 답답한 마음에 나와 본 건데 벨을 눌리기도 전에 시황과 마주칠 줄은 몰랐다.

“죄, 죄송해요. 어제 저희 때문에 화 많이 나셨죠?”

“아니야. 안 그래도 찾아가보려고 하던 참이었어.”

“아……. 다행이다.”

시황이 웃으면서 말하자 지숙의 얼굴에서 안도감이 어렸다. 어제 시황이 화가 나서 가버리고난 뒤로 집 분위기가 한겨울처럼 냉랭해져 버렸다. 은지는 지숙을 보고 한마디도 하지 않고 침대에 앉아 시황에게 문자를 보냈고, 자신도 질세라 은지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시황에게만 문자를 보냈던 것이다. 그리고 말은 하지 않았지만 둘 중에 누구한테 먼저 문자가 올지 새벽까지 미묘한 신경전을 하면서 기다렸었다.

“오늘도 마사지 해줄까?”

“그, 그래도 괜찮아요?”

웃으면서 말하는 시황의 말에 지숙은 마음이 안정되는 걸 느꼈다. 어제 시황이 화가 나서 나가버렸을 때 느꼈던 그 불안감과 암담함을 생각하면 아직까지 몸서리가 쳐진다.

“응. 괜찮아. 그런데 너희 집에서 하면 또 싸울 거 같아 조금 걱정이 되는데.”

“오, 오빠 집은 안 돼요?”

지숙이 볼을 붉히면서 말했다.

“미안. 우리 집엔 동생이 있어서 좀 곤란해.”

“오빠 동생도 있으세요?”

“응. 여동생. 19살이야.”

“그렇구나. 그런데 오빠 운동하고 오시는 거에요?”

“냄새 나지? 미안. 빨리 들어가서 씻을게.”

“아, 아니에요. 냄새 별로 안나요. 조금만 더 얘기해요.”

시황이 이제 들어가려는 듯한 말을 하자 지숙이 당황했다. 조금 더 시황이랑 얘기하고 싶었다. 어제도 은지만 아니었으면 이렇게 시황이랑 좋은 분위기였을 텐데, 지금 생각하니 또 짜증이 난다.

“그래? 그러면 다행이고.”

시황이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자 지숙은 왠지 가슴이 두근거렸다. 저 순수하고 순진무구한 웃음은 이때까지 봐온 그 어떤 남자보다 매력이 넘친다.

“오빠 수업 언제에요? 오늘도 같이 저녁 드실래요?”

“아, 미안. 오늘은 만날 사람이 있어서 안 될 거 같아.”

“그래요?”

지숙이 아쉬운 표정을 짓는다.

“그러면 나 6시쯤이면 시간 되니까 그 이후에 만날래?”

“그래도 돼요?”

시황의 말에 지숙이 단숨에 기쁜 표정을 짓는다. 표정의 변화가 다채롭다.

“응. 근데 어디서 마사지 해줄지 조금 걱정이네.”

“저기, 그러면 모, 모텔이라도 가실래요?”

“아, 아니. 그건 좀 그런데……. 그냥 너희 집에서 하면 안 될까? 하는 김에 은지도 해주면 좋잖아.”

지금 시황이 한 대답을 인터넷에 올린다면 대부분의 사람이 줘도 못 먹는다고 욕을 할 게 분명했다. 여자와 단 둘이 모텔에 있으면서 몸 전신을 어루만지는 스킨십을 한다면 당연히 분위기가 그렇고 그런 쪽으로 흐를 테고 고자가 아닌 이상 섹스를 하는 건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알고 있다. 그걸 알기에 거절 한 것이다. 길을 가다 맛있어 보이는 사과가 있어 따먹었는데 알고 보니 그게 독이 든 사과인 것과 똑같았다. 여기서 수락을 하고 지숙과 섹스를 하게 되면 은지와의 관계는 그걸로 끝이었다. 지금은 이 미묘한 신경전의 밸런스를 망치면 안 된다.

“은지도요? 그건 좀 싫은데.”

시황이 은지도 안마를 해준다고 하자 지숙이 정말 싫다는 표정을 지었다.

“친구잖아. 혼자 하는 거 보다 같이 하는 게 좋지 않을까? 괜찮지 지숙아?”

“네. 알았어요. 오빤 너무 착해서 탈이에요.”

시황의 말에 대답은 했지만 지숙은 여전히 마음에 안 든다는 표정을 지었다. 시황의 마사지를 받고 은지가 기분 좋아하는 표정을 짓는 것도 보기 싫었고, 시황이 은지의 몸을 만지는 것도 싫었다.

“나중에 문자 보낼게.”

“네. 오빠 나중에 봐요.”

시황은 지숙과 헤어지고 집으로 들어왔다.

일단 첫 번째 단추는 잘 잠근 듯하다. 이대로 두 번째 세 번째 단추만 잘 잠근다면 생각 외로 꽤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을 거 같다.

찬미의 과외를 받는 수요일이기 때문에 학교를 마친 시황은 바로 찬미의 집으로 갔다.

찬미와 가까워지고 싶어 과외를 해달라고 했는데 정작 찬미와의 관계는 전혀 진전이 없었고 오히려 부수적으로 생각했던 공부에 맛이 들려버렸다.

“혹시 유미하고 무슨 일 있어요?”

“응? 아니. 왜?”

지금도 수학문제를 푼다고 집중하고 있는데 갑자기 찬미가 말을 걸었다.

“그게 요즘 유미가 조금 이상해서요.”

“이상하다고? 어디가? 어디 아파?”

찬미의 말에 시황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요. 그런 건 아닌데, 요즘 자꾸 멍하니 있다가 한숨을 쉬기도 하고……. 좀 이상해서요.”

“그래? 좋아하는 사람 생긴 거 아니야?”

“좋아하는 사람이요?”

시황의 말에 찬미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런 쪽으로는 한번도 생각해보지 못했다. 자신의 얼굴만 보고 달려드는 남자 때문에 어릴 때부터 싫어한데다, 대학교 1학년 때 제대로 남자에게 당한 이후로 남자를 보기만 해도 온몸에 두드러기가 생길 정도였다. 그나마 성폭행 당할 뻔 할 때 구해준 시황이라 이런 관계를 유지하는 거지, 보통의 남자라면 혐오감에 치가 떨려 이렇게 가까이 오지도 못하게 했을 것이다.

“응. 그런 거 보통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그러잖아.”

“그렇군요…….”

찬미는 시황의 말에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고3이라 공부를 해야 하는데 다른데 정신 팔리는 것도 문제지만 그것과 상관없이 남자라는 존재자체를 믿을 수가 없었다.

“다 풀었다. 이거 봐줘. 이렇게 푸는 거 맞지?”

“네? 아, 한번 볼게요.”

찬미는 시황이 푼 수학 문제를 보고 감탄한 표정을 지었다. 꽤 난이도가 있는 문제인데 잠깐 고민하더니 쉽게 풀었던 것이다.

고등학교 수학 문제를 잘 푸는 사람에게는 2가지 정도의 유형이 있다. 첫 번째는 엄청난 양의 문제지를 보고 나올 수 있는 문제의 패턴을 다 외워버리는 암기형과 개념만 아는데도 문제를 보기만 해도 식이 세워지는 재능형이다.

시황은 이 중에서 후자에 속했다. 개념만 아는데도 어려운 문제도 술술 푸는 능력이 있었던 것이다. 찬미는 시황이 어떻게 지방 사립대를 갔는지 이해가 가질 않았다. 이정도 실력이면 당장 몇 개월만 공부해도 서울에 있는 중위권 정도의 대학에 갈 성적은 충분히 나올 듯 했다.

“대단하시네요. 이거 어려운 문제인데.”

“그래? 요즘 머리가 좀 좋아진 거 같긴 해. 하하.”

시황은 웃으면서 농담처럼 말했지만 이미 머리가 좋아졌다고 확정짓고 있었다. 확실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추측하기로는 백회혈이 뚫린 것과 그때 발현했던 치유능력이 더해진 게 뭔가 관련이 있지 않았나 싶었다.

하여튼 과정이야 어찌됐든 그 뒤로 확실히 지능이 올라간 게 몸으로 느껴졌다. 이치를 파악하는 게 조금 더 빨라졌고 어려운 수학 문제도 쉽게 풀 수 있었다.

“다음은 영어 공부해요.”

“응.”

지방 사립대이긴 하나 영어학과를 다니는 시황인지라 나름 기초가 잘 잡혀 있어 찬미는 바로 고1 모의고사 문제지를 주었다. 그러자 시황이 하품을 하면서 대충대충 답을 체크한다.

“오빠 공부는 진지하게 하셔야죠.”

“문제가 너무 쉬워서 졸리네.”

건성건성 하는 듯한 모습에 찬미가 살짝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지만 10분이 채 되지 않아 답을 다 체크한 시황이 찬미에게 문제지를 건네주었다.

“쉽다고요?”

얼마 전만해도 비슷한 문제도 꽤나 힘들 게 풀던 시황이었던지라 찬미는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답을 체크했다.

“어? 다 맞추셨네요?”

분명 엄청 설렁설렁 문제를 풀었음에도 다 맞혔다. 고1 영어 모의고사라 그렇게 난이도가 있진 않았지만 이렇게 쉽게 풀지는 몰랐다.

“응. 앞으로는 그냥 고3 영어 모의고사로 공부하자.”

“영어과라 그런지 영어를 잘하시네요.”

찬미는 연신 갸우뚱하면서도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고 이건 정상적인 범주의 일반인이 하는 당연한 사고였다. 시황이 진실을 밝힌답시고 드래곤의 유산에서 받은 언어습득용 알약으로 영어를 익혔다고 말해줘 봤자 이 세상 그 누구도 믿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 유미 거 들고 올게요.”

찬미는 유미가 공부하는 고3 영어 모의고사 문제지를 시황에게 갖다 주자 또 시황이 심드렁한 표정을 지으며 문제를 풀어나갔다. 이번에는 20분이 되지 않아 다 풀었다.

혹시나 하는 생각으로 답을 매겨본 찬미는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이번에도 당연하다는 듯 다 맞춘 것이다.

“어, 어떻게?”

“앞으로는 수학 공부 위주로 하는 게 낫겠다.”

별거 아니라는 듯 말하는 시황을 보며 찬미는 약간 혼란스러움을 느꼈다. 다시 한 번 모의고사 문제지를 훑어봤지만 분명 다 맞췄다. 난이도가 쉽냐 하면 그런 것도 아니었다. 자신도 헷갈리는 문제가 있었으니까.

“혹시 이 문제 독해 어떻게 했는지 보여주실 수 있어요?”

“그러지 뭐.”

찬미는 제일 어려워 보이는 문제를 찍자 시황이 마치 원어민인양 독해를 한다. 전혀 막힘이 없고 단어의 뜻도 완벽하다. 지금 이것만 놓고 보자면 시황의 영어 실력이 자신보다 몇 단계나 위에 있는 듯 했다.

“미리 공부하셨던 문제에요?”

“오늘 처음 봤어. 집에서 공부 좀 했지.”

웃으면서 말하는 시황을 보자 진담인지 농담인지 구분은 안 갔지만 어쨌든 이대로라면 중위권 대학을 넘어 꽤 높은 수준의 대학을 바라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빠, 안녕하세요.”

교복을 입은 유미가 찬미의 방에 들어와서 시황에게 인사했다.

“유미야, 안녕. 바로 공부하게?”

“아니요. 옷은 갈아입어야죠.”

“그래. 빨리 갔다 와.”

“네.”

매력있는 미소를 짓는 시황을 보고 볼을 살짝 붉힌 유미는 자신의 방으로 옷을 갈아입기 위해 후다닥 돌아갔다. 왠지 약간 서두르는 기색이다.

“오빠 잠시 만요. 유미랑 얘기 좀 하고 올게요.”

“응. 알았어.”

잠시 고민하던 찬미는 시황에게 양해를 구하고 유미의 방으로 갔다.

탁!

“까, 깜짝이야. 갑자기 왜?”

이제 막 셔츠와 치마를 벗고 어떤 옷을 입을지 고르고 있는데 갑자기 문 열리는 소리가 들리며 찬미가 들어오자 유미는 깜짝 놀람과 동시에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유미, 너 요즘 좋아하는 사람 생겼어?”

찬미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 작품 후기 ============================

추천, 선작, 코멘트, 그리고 쿠폰 주신 분들 감사합니다.

항상 읽어주셔서 감사해요~


0